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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09 15:08:05

마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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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 مسعود غزنوی
Masʽud I of Ghazni
생애 998년 ~ 1040년 1월 17일 (41~42세)
재위 1030년 가을 ~ 1040년 1월

1. 개요2. 생애
2.1. 제위 계승 분쟁2.2. 내부 정비2.3. 연이은 전쟁2.4. vs 셀주크 (단다나칸 전투)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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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즈니 왕조의 3대 술탄. 술탄 마흐무드의 장남으로, 동생 무함마드를 폐위하고 즉위하였다. 내부 반란들을 진압하고 부왕에 이어 이란과 북인도, 트란스옥시아나 등지에서 활발히 원정하여 가즈니 조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마수드는 준수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휘하 장군들의 조언을 경청하지 않았기에 결국 단다나칸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였다. 그 결과 마수드는 군부에 의해 폐위되어 살해되었고, 가즈니 조는 호라산 서부를 상실하고 이슬람권 동부의 패권 역시 셀주크 제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2. 생애

998년 가즈니에서 쌍둥이 동생 무함마드와 함께 술탄 마흐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1015년, 장성한 그는 부왕에게서 후계자 겸 헤라트 총독으로 봉해졌다. 1020년 마수드는 이슬람권 내의 이교도 월경지인 고르를 원정하였고, 1029년 부왕의 지발 (이란 서부) 원정에 동행하여 부와이 왕조의 마즈드 앗-다울라에게서 라이를 정복하였다. 부왕이 회군한 후 마수드는 지발에 상주하며 가즈니 군대를 이끌었는데, 카쿠이 왕조의 군주 알라 앗-다울라 무함마드 빈 루스탐 두쉬만지야르를 격파하고 가즈니 조의 봉신으로 삼았다. 다만 1030년 무함마드는 서약을 져버리고 라이를 기습 점령해버렸다. 마수드와 점차 사이가 멀어지던 마흐무드는 군사적 실책이 겹친 틈에 마수드의 쌍둥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봉한 후 1030년 눈을 감았다.

2.1. 제위 계승 분쟁

얼마후 마흐무드가 사망하며 유언대로 무함마드가 제위에 올랐으나, 군사와 실무 모두 경험이 부족했던 새 술탄에 대해 (노예 병사인 굴람 중심의) 군대는 마수드를 지지하였다. 풍부한 군사 경험 덕에 숙부 유수프와 타지크계 장군 알리 다야의 지지를 받은 마수드는 옛 비서 아부 사흘 자우자니와 합류하였다. 그에 더하여 마수드는 야그무르, 키질, 보가, 괵타쉬 등의 족장들이 이끄는 튀르크멘 군대까지 고용하였다. 이에 술탄 무함마드는 군대를 모아 마수드가 있던 니샤푸르 방면의 나크바타바드에 주둔했는데,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체포한 후 마수드를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5개월의 재위 끝에 술탄 무함마드는 폐위되어 실명된 후 감금되었고, 마수드가 술탄에 등극하였다.

2.2. 내부 정비

즉위 후 마수드는 1024년 이래로 인도 중북부의 칼린자르에 수감되어 있던 옛 재상 아흐마드 메이만디를 석방하여 재차 재상으로 삼았다. 공신 알리 다야는 호라산, 아흐마드 이날테긴은 인도의 군사령관으로 봉해졌다. (1031년) 마수드는 부왕 시기의 장군들 대부분을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였고, 즉위를 도운 숙부 유수프와 대신 알리 이븐 일-아르슬란을 투옥시켰다. 1032년 마수드는 부왕 대부터 호라즘 총독이던 알툰타쉬에게 카라한 칸국의 알리 테긴 부그라 칸과 맞서게 했으나, 그는 사마르칸트 인근 다부시야에서 입은 부상이 도져 사망하였고 이후 아들 하룬이 총독위를 계승하였다. 같은해 12월 재상 메이만디가 사망하자 마수드는 다부시야 전투 당시 카라한 조와 휴전을 성사시킨 아흐마드 쉬라지를 후임 재상으로 선임하였다.

1033년 마수드는 사르수트 성채를 함락한 후 케르만을 침공, 부와이 왕조의 군주 아부 칼리자르를 축출하고 일대를 장악하였다. 다만 페르시아계 군주를 선호하던 현지인들이 아부 칼리자르 측에 규합하며 그는 케르만을 수복할 수 있었다. 한편 케르만 원정을 틈타 북인도의 아흐마드 이날테긴이 반란을 일으켰다. 1차 토벌군이 격퇴되자 마수드는 인도 출신의 관료 틸라크 하의 2차 토벌군을 보내었고, 이번에는 패배한 이날테긴은 도주 중 익사하였다. 같은해 마수드는 지여르 왕조 군주 아누쉬르반 샤라프 알-마알리의 친척이자 실세인 아부 칼리자르의 딸과 결혼하였고, (신뢰하기 어려운) 봉신인 카쿠이 왕조의 무함마드를 견제하기 위해 아부 사흘 함두위를 지발 총독에 봉하였다.

2.3. 연이은 전쟁

1034년 호라즘 총독 하룬이 카라한 칸국의 알리 테긴과 동맹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마수드는 호라즘 궁정의 하인을 포섭하여 하룬을 암살하고 후자의 동생 이스마일 카단을 총독에 봉하였다. 같은해 알리 테긴 역시 사망하며 시름을 덜은 마수드는 토그릴 1세 휘하 셀주크 튀르크 부족이 망명을 신청하자 유목민 집단의 영내 진입이 위험하다 여겨 거부하고 신임 호라산 군사령관 베그토그디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가 패배하자 심상치 않은 세력이라 마수드는 복속을 대가로 나사, 파라바, 디히스탄을 영지로 내어주었다. 1034년 조공을 미룬 아물 (튀르크메나바트)을 점령, 4일간 약탈하고 불태운 마수드는 이듬해에는 재차 이란으로 나아가 아부 칼리자르를 격파하였다.

그후 마수드는 카쿠이 조의 무함마드를 재차 패배시켰고, 후자는 부이 왕조령 후제스탄으로 도주하였다. 마수드는 기세를 타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진격, 튀르크멘 인들을 군대에 편입시켰다. 1037년부터 마수드는 북인도 원정에 나섰는데, 그틈에 무함마드는 재차 라이를 장악하였다. 또한 카라한 군주 뵈리테긴이 가즈니 조의 변경을 침공해 쿠탈과 바크쉬를 약탈한 후 차가니얀 (사마르칸트 남쪽) 지역을 점령, 마수드의 사위이자 현지 무흐타즈 왕조의 군주인 아불 카심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무하타즈 조는 한세기 만에 멸망하였고, 마수드는 일대를 수복하려 군대를 파견했지만 격퇴되었다. 다만 뵈리테긴 역시 한동안 알리테긴의 아들들과의 내전에 치중하게 되며, 가즈니 조와 카라한 조의 경계는 아무다리야가 되었다.

2.4. vs 셀주크 (단다나칸 전투)

1038년 니샤푸르와 헤라트를 점령한 셀주크 부족의 토그릴 1세는 스스로 호라산의 술탄이라 칭하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마수드는 두 도시를 회복한 후 셀주크 세력을 일망타진 하기 위해 5만 대군과 12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대동하고 메르브로 진군하였다. 이어진 단다나칸 전투에서 마수드의 대군은 토그릴과 차그리 형제 및 카쿠이 왕공 파라무르즈가 이끄는 소수의 적군에 대패하였다. 이로써 가즈니 조는 서부 호라산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마수드는 이제 국경과 멀지 않게 된 가즈니 대신 북인도로 천도하려 하였다. 패배의 책임을 알리 다야를 포함한 장군들에게 돌린 마수드는 그들을 인도에 감금하였다. 그러자 마수드의 핵심 지지층이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유폐되었던 무함마드를 복위시켰다. (1040년 1월)

3. 사후

무함마드는 마수드를 페샤와르 인근 기리 (샤바즈 가리)에 투옥시켰다가 후일 처형하였다. 다만 발흐에 있던 마수드의 아들 마우두드는 재상 아흐마드 쉬라지와 함께 거병, 무함마드를 격파하고 사로잡아 처형하며 부친의 복수를 이룬 후 술탄에 즉위한다. 마수드의 다른 아들들이 이브라힘, 알리, 파루크자드도 후일 술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