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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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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개신교계는 조직신학(교의학)에 민감하기에 대체로 이단으로 받아들인다.
같이 보기: 기독교의 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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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물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형성 연도 1730년
세계감리교협의회[1]
대표인
박종천 감독 WMC회장 (2021~)
이반 M. 에이브러험 감독 WMC사무총장 (2021~)
교세 대략 8,500만 명[2]
계통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종교 기독교
종파 개신교
교파 감리회
언어별
명칭
한국어 감리회
영어 Methodist Church
한자 監理會
에스페란토 Metodista preĝejo
1. 개요2. 명칭3. 특징
3.1. 조직 특성3.2. 신학적 특성
4. 감리교회의 역사
4.1. 신성회(Holy Club)4.2. 학문4.3. 아메리카 식민지 선교4.4.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4.5. 야외 설교의 시작4.6. 메도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조직4.7. 아메리카 메소디스트 교회의 설립4.8. 영국 감리교회의 분립
5. 한국의 감리회6. 일본 감리회7.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7.1. 목회자, 신학자
7.1.1. 국외7.1.2. 국내
7.2. 평신도
7.2.1. 국외7.2.2. 국내
7.2.2.1. 독립 운동가7.2.2.2. 친일 인사7.2.2.3. 현대 인물
8. 외부 링크

1. 개요

감리회()[3]는 18세기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John Wesley)[4]가 이끈 복음주의적 성공회 쇄신 운동이었던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을 따르던 사람들이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진[5] 개신교의 한 교단이다. 현재 전 세계에 교인 7,500만 명 이상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장로회 다음으로 신도수가 많은 개신교 교파다.

메소디즘은 당시 경직되었던 성공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일으킨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신학적으로는 성공회 특유의 '중도의 길'(Via Media)을 이어받되, 칼뱅이중예정론을 배격하고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한 자유의지와 만인속죄론을 주장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타락해버려서, 하나님은총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이 하나님을 믿게끔 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택하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감리회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물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자유의지가 선을 극구 기피할 정도로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사랑을 추구하는 본능이 깃들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고 가르친다. 이같은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극단적인 칼뱅주의자들은 "감리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하고는 한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내에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단은 사실상 장로교, 수많은 장로교단 그 중에도 자기가 속한 장로교단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회 체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감독제를 택한다. '감리회'라는 낱말 자체가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를 뜻한다. 사실 감리회의 감독은 영어로 bishop이라고 하는데,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와 북유럽 루터교회의 주교도 영어로 bishop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에 영국 성공회와 영국 감리교가 통합하기로 하고 세부사항을 논의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 감리교 신자 수가 많이 줄어서라고 한다.

2. 명칭

감리교회의 영어 명칭인 Methodist Church의 'methodist'란, 존 웨슬리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결성한 신성회(Holy Club)의 신앙 생활이 매우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6]에서 유래했다. 사실은 조롱조에 가까운 별명이었으나 이후 공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는 루터교회(The Lutheran Church) 역시 '루터를 추종하는 자들'이란 조롱에서 교단명이 유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동양권에서 메소디스트 교회가 '감리교회'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 메소디스트 감독 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에는 2가지 명칭이 혼용되었다. 첫째는 미이미(美以美) 교회로, 이는 Methodist의 me를 美로, Episcopal의 e를 以로, 美는 아메리카가차(假借)였다. 이는 미국 북감리회에서 옮긴 말이었다. 둘째는 감리교(監理敎)로, 미국 남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Bishop을 監으로, Methodist를 理로, 뜻을 번역한 말이었다. 북감리회, 남감리회가 들어와 선교하던 한국에서는 두 명칭이 혼용되다가, 1930년 두 교회가 합쳐질 때, 명칭을 '감리회'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감리회'란 메소디스트 감독 교회의 뜻을 번역한 말이며 넓게는 감독이 치리하는 감리회의 교회 구조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3. 특징

3.1. 조직 특성

장로 중심의 체제에 개교회 자치 성향[7]이 강한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북유럽 루터교회와 비슷한 감독제(Bishopry)를 채택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 일정 수 이상의 교회가 모여 지방회를 형성하고, 지방회가 모여 연회를, 연회가 모여 총회를 형성한다. 지방회의 장은 감리사(監理師, The Superintendent), 연회의 장은 감독, 총회의 장은 감독회장이다. 감리사와 감독, 감독회장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8]된다. 감리사와 감독의 임기는 2년이며 감리사와 달리 감독은 연임할 수 없다. 감독회장의 임기는 4년이며 감독처럼 연임이 불가능하다.[9]

이전에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감독은 연회의 의장이 되는 권한과 목사를 안수하여 세우는 권한과 더불어 목회자를 파송하는 어마어마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막강한 권한을 지닌 감독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거가 과열되어 급기야 교단까지 분열되는 등 각종 병폐가 나타나자 교회 쇄신 차원에서 목회자 파송 권한은 제외시켰다.[10] 그럼에도 원칙상 감독의 파송으로 목회자가 부임하는 것이므로, 개교회가 개별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해도 형식상 감독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11] 그러나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의 감독에게는 여전히 목회자 파송권이 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은 일정 시간을 두고 임지를 자주 옮긴다.
그러나 영국 감리교회에는 감독이 없다. 왜냐하면 본래 존 웨슬리가 감독제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12][13] 존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회가 성공회와 분리되면서,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영국 감리교회에는 지방회에 해당하는 구역회(The Circuit)가 있는데 구역회의 장은 감리사(A Circuit Superintendent)이다. 구역회가 모여서 지방회(The District)를 형성하고, 지방회의 장은 지방회장(The District Chair)이다. 지방회가 모여 연회(The Conference)를 이루고 이 연회가 미국, 한국 감리교회의 총회와 위상이 같다. 연회의 장은 연회장(The President)이다. 연회에는 연회장과 부연회장(The Vice President)가 있는데, 연회장은 목사가, 부연회장은 평신도가 맡으며, 각각의 임기는 1년이다.

감리교회 조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교회 안에서도 여러 조직이 있다는 점이다. 개교회의 최하위 조직은 속회(屬會, The Class Meeting)이다. 속회야말로 감리교회가 교회사에 남긴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는데, 속회가 소그룹 교육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속회는 보통 1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지만, 개교회 재량껏 속회를 조정한다. 속회의 장은 속장(The Class Leader)이며, 속회의 구성원은 속원이라고 부른다. 속장은 주로 권사가 맡지만 개교회 상황에 따라 집사가 맡는 경우도 많다.[14] 속회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속원들의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속회의 기원이 각 가정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가귀도(가족 전부가 교회에 다니는)가 된 집안이 아닐 경우 부득이 교회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다.

속회는 속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신앙 상담과 고민들을 나눈다. 속장은 속원들의 가정 상황을 살피고, 이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담임 목사에게 보고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경우 속회의 상위 조직으로 '당회(堂會)'가 있다. 당회는 사실 장로회의 제도가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회는 개교회의 1년 정산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회는 보통 연말인 12월 중에 개최되며, 당회의 장인 당회장은 담임 목사가 맡는 것이 관례이다. 당회에서는 예산의 결산, 인사(人事) 문제 등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 당회원은 입교인[15]이다. 당회와 달리 의결권은 없지만 필요할 때마다 교회의 여러 일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는 기획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담임 목사와 장로, 소수의 권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당회의 상위 조직은 구역회(Circuit)다. 사실 이 구역회는 영국 감리회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소수의 메도디스트 사제들이 여러 신도회를 순회하며(circuit) 신앙을 지도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 감리교회에는 구역회 본래의 기능이 잘 남아 있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 구역회는 사실상 당회와 다르지 않다. 원래 구역회에는 1개 이상의 교회가 있는 것이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구역이 곧 개교회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회와 다른 점은 당회의 의장은 담임 목사가 맡지만 구역회의 의장은 감리사가 맡는다는 점이다. 구역회에서는 교회의 1년 예산안을 감리사의 관리에 의해 처리하며, 목회자의 임면 문제도 맡는다.

이와 같은 감리교회의 조직적 특성을 '연관주의(Connexionism)'라고 한다. 개교회주의가 심하지 않고, 서로 끈끈하게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각종 어려움이나 좋은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감리교회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3.2. 신학적 특성

장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주된 교리로 내세우는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선행 은총(The Prevenient Grace)에 의한 선택권의 회복'을 강조한다. 흔히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의 발휘"를 주장한다고 호도하는데, 감리회 신학에서 말하는 선택권의 발휘는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는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이야기했고, 루터교회장로회도 모두 원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이야기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인 노예 의지론을 내세운다. 이를 가지고 루터에라스뮈스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가장 첫 머리에 오는 것이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이다. 감리회도 당연히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알려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자기를 알려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며, 계시는 곧 말씀(logos)이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자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귀결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교회는 2천년 동안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 구원을 말하는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만약 세간의 인식대로 감리회가 은혜가 배제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면 감리회는 이단이다.

하지만 감리회는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한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은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타락하여서 자의지로는 자범죄를 피할 능력이 없으나 죄의 폐해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양심과 죄를 피하기 간절히 원하는 사랑의 마음을 남기셨으니 이것이 선행 은총이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은총이며, 악인이라도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는 은총이며,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통해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은총이다. 비록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행적인 은총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전적 타락으로 인해 자범죄를 면할 능력은 없어도 선행 은총에 의해 양심에 찔리고 사랑에 어긋나는 자범죄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받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이미 선행 은총으로 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회개하고 죄의 고통에서 해방될 희망을 품을지 복음을 거부할지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할 수 있다. 즉 선행 은총은 구원을 주는 은총이 아닌 구원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뿐이다.

선행 은총으로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칭해진다. 이것이 바로 칭의이며 여기서의 칭의는 루터, 칼뱅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의롭다고 칭해진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중생이다.

다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과정이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이며, 이것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은 상태적인 개념이라기 보다 동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정복하고 죄의 유혹도 받지 않는 그런 초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죄와 싸우려 하며 경건에 힘 쓰는 모습이 바로 완전이 말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곧 선행 은총, 칭의, 중생, 성화, 완전 이 5단계를 '구원에 이르는 5가지 문'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며, 감리회 교리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감리회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며, 신앙의 실천도 개인적인 영역만이 아닌 사회적인 영역까지도 확장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감리회는 빈민 구제, 죄수 교화 활동 등을 활발히 하였고, 이를 더욱 강조하여 분리된 교파가 바로 구세군이다.[16]

이러한 특성에 따라, 개혁교회(장로회)에 비해 조직신학 및 기독교 사상, 성경학 등에서 진보적인 입장도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다.[17]

아울러 감리교회는 교리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순복음과 똑같거나 상당히 유사하다. 오순절교회 신학은 방언과 통성기도를 매우 강조하며,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방언기도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신문에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 역시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하여 주여 삼창 기도와 방언 기도를 두 교단에서 가장 뜨겁게 하는 이유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세계감리교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나온 적도 있었기에 순복음교회와 감리교는 한 가족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관순 역시 감리교도였고 방언기도를 통해 많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감리교의 세례 방식은 장로교회와 동일한 약식 세례로 순복음교회침례교처럼 물에 잠겨서 침례를 받지 않는다.

존 웨슬리는 약식 세례와 침례를 모두 정당한 세례로 인정했다. 그래서 최근의 감리교회에서는 침례를 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다시 세례를 받는 것은 거부한다.

또한 감리교회는 예배 방식이 순복음교회에 비해 전례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더 강한 편이다. 교회일치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편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력과 예전을 많이 도입하고 있으며, 강단에 강단보와 예전이 있는 교회도 많은 편이다.

현재 보수, 중도, 진보 신학의 빅텐트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중도 보수에 가까운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회원 교단이다. 매우 보수적인 단체인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도 감리회 교회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한다.

성공회에서 갈라진 교단이기에 목사의 가운이 장로교의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을 입는 경우가 많다.[18]

4. 감리교회의 역사

4.1. 신성회(Holy Club)

존 웨슬리는 1729년 11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가 몇몇 친구와 결성한 신성회의 리더가 되었다. 신성회는 규칙적으로 모여 고전을 공부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모임이었다. 존 웨슬리는 아버지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의 엡워스 교구 목회를 돕다가 옥스포드로 돌아와 이 모임의 리더가 되었고, 신성회는 더욱 활력을 얻었다. 리더가 된 존 웨슬리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제정했다. 일례로 자아성찰을 위한 규칙은 매일 밤 기도, 월, 수, 금은 친구들과 기도, 기도 후에 기도 시의 마음 가짐을 성찰, 정기적으로 중보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성회원들은 매주일 성만찬을 받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했으며[19] 회원은 각각 공개적으로 다른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1730년부터는 개인적인 경건 훈련을 넘어서 사회적 경건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감옥 선교로부터 시작된 신성회의 사회적 경건 훈련은 훗날 감리교회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신성회는 1735년 즈음까지 꾸준히 모여 활동하다가, 회원들 대부분이 성직의 길에 들어서서 자기 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일부는 성직의 길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4.2. 학문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시절에 신학, 논리학, 음악, 등의 문학에 능통했고, 지식인인 어머니 수산나가 직접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에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존 웨슬리가 감리교회 운동이라는, 영국의 교회와 사회를 바꾼 일을 한 것은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

4.3. 아메리카 식민지 선교

1735년 존 웨슬리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오글도프(J. E. Oglethorpe) 장군의 제안을 받아 동생 찰스와 함께 식민지 사제로 떠났다. 웨슬리 형제는 인디언들이 문명의 때를 타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라 기대하며 쉽게 회심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교도들을 회심시키며 그 과정 중 자신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존 웨슬리대서양 항해 중 만난 큰 풍랑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반면 큰 풍랑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모라비아 교도(독일 경건주의의 일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큰 기대와 달리 웨슬리 형제는 철저히 실패한다. 우선 순수한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디언들을 실제로 만나보니 유럽인들 못지않게 잔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순순히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융통성 없는 목회 방식으로 기존 신자인 식민지인들의 큰 불만을 샀다. 더욱이 소피아 홉키(Sophia Hopkey)라는 소녀와의 얼룩진 사랑은 결정적으로 존 웨슬리의 식민지 선교를 파탄 내었다.

찰스 웨슬리도 다를 바가 없었다. 찰스 웨슬리도 형 존 웨슬리 못지않게 융통성 없는 목회 방식을 식민지인들에게 강요하여 큰 불만을 샀고, 특히 부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으며, 식민지의 장인 오글도프와도 갈등했다. 결국 찰스 웨슬리가 먼저 아메리카를 떠났고, 소피아 홉키와의 장렬한 사랑이 실패한 후 존 웨슬리도 이어서 아메리카를 떠났다. 존 웨슬리는 1738년 초 런던으로 되돌아 왔다.

4.4.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

선교에 실패한 존 웨슬리는 실패 이유를 성찰하면서 모라비아교 목사 피터 뵐러(Peter Boeler)와 교류했다. 수개월 간 피터 뵐러와 교류하면서 존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오직 믿음으로'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은 형식만 있고 참 믿음이 없다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리던 모라비아교 신도회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저녁 8시 45분 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마음 가운데 역사하여 생기는 변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존 웨슬리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4.5. 야외 설교의 시작

회심을 경험한 존 웨슬리는 각 교회를 돌며 자신의 경험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설교했다. 그러자 각 교회는 존 웨슬리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갈 곳 없어진 존 웨슬리 앞에 조지 휫필드가 나타났다.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와 함께 신성회 활동을 하다가 아메리카 식민지로 건너가 큰 활약을 하고 돌아온 뒤였다. 조지 휫필드는 존 웨슬리를 야외 설교로 이끌었다. 웨슬리는 야외 설교에 처음 거부감을 가졌지만 이내 적응하였고, 조지 휫필드 못지 않게 큰 부흥을 일으켰다.

4.6. 메도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조직

존 웨슬리는 영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야외 설교를 했고, 부흥이 일어난 후 부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도회를 조직했다. 신도회 안에는 속회(Class)와 반회(Band) 등 더 작은 모임을 구성하여 효율적인 신앙훈련이 되게끔 했다.

웨슬리가 영국 성공회의 교구에 상관 없이 종횡무진 활약하자 위기감을 느낀 주교와 사제들은 웨슬리에게 설교 기회를 주지 않으며 더욱 더 경계했다. 특히 브리스톨의 주교 버틀러(Butler)가 자신의 교구를 떠나라고 하자 웨슬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온 세계를 내 교회로 생각합니다(I look upon the whole world as my parish)." 웨슬리는 각지에서 폭도들의 폭력에도 시달렸다. 반역자라는 조롱과 핍박도 받았다. 웨슬리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각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신도회가 사용할 건물도 매입하여 든든하게 활동을 다져나갔다. 처음 하층 계층에 큰 호응을 얻던 메도디즘 운동은 상류층에게도 퍼져 나갔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도디스트 최초의 연회(The Annual Conference)를 소집했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각지로 흩어져 사역하던 메도디스트 사제들과 설교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것이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과 교회 조직이 되었다.

4.7. 아메리카 메소디스트 교회의 설립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급속도로 부흥했고, 성공회와의 마찰도 커져 갔다. 이에 많은 이들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것을 종용했지만 존 웨슬리는 성공회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이며, 떠나지 않을 것을 거듭 분명히 했다. 하지만 독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776년부터 미국독립 전쟁을 벌인다. 미국과 영국사이의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존 웨슬리는 성례전을 받지 못하는 미국 내 메도디스트 신자들을 생각했다. 존 웨슬리는 독립해 나간 미 식민지는 영국과 경우가 다르며, 오랜 기간 동안 고찰한 바에 따라 초대 교회에서 감독과 장로의 직능에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1784년, 웨슬리는 같은 국교회 사제였던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리사(Superintendent)'로 안수하고, 평신도 설교자였던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리사로 세울 것을 명령했다. 독자 안수는 곧 분립이었기에 미국에서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국교회와 분리된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토마스 콕은 미국으로 건너가 1784년 11월 3일 뉴욕에 도착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볼티모어에 모여 이른바 '크리스마스 연회'를 열었다. 콕은 애즈베리에게 3일에 걸쳐 안수를 주어 감리사로 세웠다(첫날은 집사 목사, 곧 부제로, 둘째날은 장로 목사, 곧 사제로, 셋째날은 감리사, 곧 감독으로). 이때 애즈베리는 연회원들의 합의가 없으면 존 웨슬리의 임명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만장일치로 감리사로 추천 되었다. 연회원들의 합의에 의한 감리사(감독) 임명은 이후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이듬해 1월 2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이때 연회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콕과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감리사 대신 '감독(Bishop)'이란 명칭을 썼고, 공식적으로 자신들 교회의 이름을 미 감리교회(The Ame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명명했다. 존 웨슬리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미국 감리회 교인들은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영국 내에서만 유효하다고 보았으며, 이때 존 웨슬리는 '온 몸이 무너져 가는 늙은이'로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4.8. 영국 감리교회의 분립

웨슬리는 끝내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성공회 사제로 생을 마감했다.[20] 그러나 1791년 존 웨슬리가 사망한 이후, 영국에서도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성공회와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1795년 평신도 설교자들의 지위 문제와 성례전의 집례 문제는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평화 조약(Plan of Pacification)을 통해 성공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하여 독립 교회가 되면서 해결되었다.

5. 한국의 감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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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 감리회

2차대전 이후 하나의 다른 교파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일본기독교단 산하의 감리회[21]와 완전히 독립된 교단을 표방한 일본자유감리교단(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教団)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1~2%밖에 안되는 일본답게 교회보다는 대학교로 유명한 편이며, 간토에는 시부야에 위치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이 있고 간사이에는 니시노미야에 위치한 간세이가쿠인대학이 있다. 이중에서 칸세이가쿠인대학은 현재도 자체적인 신학과를 갖고 있지만, 아오가쿠는 1971년에 신학과를 폐지하고 도쿄신학대학으로 이관시켰다.

과거에는 한국 감리교단과 긴밀한 연관이 있던 편이었고, 현재도 이런 식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편이다.

7.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7.1. 목회자, 신학자

7.1.1. 국외

7.1.2. 국내

7.2. 평신도

7.2.1. 국외

7.2.2. 국내

7.2.2.1. 독립 운동가
7.2.2.2. 친일 인사
7.2.2.3. 현대 인물

8. 외부 링크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예수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1] WMC•World Methodist Council[2] 이 중 미국인만 약 1,600만 명에 이른다.[3] 감독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감독교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특히 미국 성공회 신부가 집필한 외국 서적을 번역할 때,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를 미국 감독교회로 칭하는 수가 있어서, 감리회와 미국 성공회를 혼동할 우려가 있다.[4] John이 성경인물 요한영어로 쓴 이름인 관계로 '요한 웨슬레'라고 부르기도 한다.[5] 존 웨슬리 본인은 메소디스트 신도회가 성공회에서 분리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죽을 때까지 성공회 사제로 남았다. 이 당시 성공회에서 나가지 않고 잔류한 복음주의 일파를 개신교 전통을 존중하는 성공회 신학전통인 '저교회(Low Church)파'라고 한다. 여기서 '저교회'라는 말은 전례와 성사, 교회의 권위를 중시하는 고교회파와 대비되는 단어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권위는 성서 이하로 간주하는 부류이다.[6] 굳이 번역하자면 '규칙쟁이' 정도[7]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장로회에도 노회, 총회와 같은 교회 연합 기구가 있으므로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는 아니다.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를 택하는 것은 침례회, 회중교회/독립교회이다.[8] 그런데 한국 감리회에서는 감독의 임기가 끝난 전임 감독도 '감독'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잘못이라는 지적도 상당수 있다.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 북유럽 루터교회에서는 주교가 되려면 사제 서품을 받고도 주교 서품을 또 따로 받아야 하지만, 감리회 목사는 감독이 된다고 하더라도 안수를 또다시 받지 않는다.[9]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임을 유념할 것. 웨슬리안 계열의 교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10] 예를 들어, 재정상황이 열악한 개척교회에 능력있고 연줄 없는 목회자를 파송한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교회 재정을 탄탄하게 갖춰 교회가 부흥할 때쯤, 갑자기 감독의 연줄을 타고 다른 목회자가 파송되고 열심히 사역하던 기존 목회자는 다시 다른 개척교회로 파송되는 병폐가 생긴다.[11] 성공회도 마찬가지다. 각 성당의 신도들이 관할 신부를 청빙할 수는 있지만, 청빙한 신부가 그 성당의 관할 신부로 부임하려면 주교의 인사 명령이 있어야만 한다.[12] 이는 존 웨슬리가 부흥 운동을 하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주교들에게 많이 시달린 탓이다. 웨슬리는 감독제의 폐해를 알고 미국 감리교회를 형성하면서 절대 감독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웨슬리는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안수를 주면서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임명했고, 미국에 가서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안수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콕과 애즈베리는 자신들의 호칭을 슬그머니 '감독'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웨슬리가 격분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웨슬리는 너무 쇠약해졌기에, 웨슬리의 의도와 상관 없이 미국 감리교회는 감독제 교회로 자신들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다.[13] 그런데 감리교(監理敎)라는 명칭에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라는 뜻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영국 메도디스트 교회를 감리교회라 부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다.[14] 본래 소그룹 조직이 없던 장로회는 한국에 들어온 후 속회를 본떠 '구역회'를 만들었다. 한국 한정으로 장로회의 교세가 감리회보다 크기 때문에 장로회 교인 대부분은 감리회가 구역회를 모방하여 속회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하지만 대부분 헌금 봉투에는 '구역(속)'으로 되어 있는 현실.[15] 영유아 세례를 받은 이는 만 18세 이후 입교를 한 후, 성인 세례자는 세례 후 입교를 한 사람[16] 여담으로 감리회와 구세군 국제본부는 모두 런던에 있다.[17] 대표적으로 사회 내 소수자(대표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포용은 타 교단 측에서 봤을 때 상당히 충공깽한 수준. 그러나 한국의 감리회는 장로회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감리회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라 최근에는 목회자가 동성결혼, 동성애를 옹호할 경우 교단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방침을 세웠다.[18] 다만, 한국의 장로교는 목사가 흰색 가운을 입는 경우가 더 많다.[19] 초대교회의 관례를 따른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했고, 로마교회는 토요일도 추가로 금식일로 간주했다.[20] 단지 성공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면서, 경직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21] 정식 명칭은 '일본기독교단 갱신전도회'이다.[22]감리교신학대학교[23] 남편인 김대중 대통령은 천주교인(세례명 토마스 모어)이었다.[24] 원래는 기쁜소식선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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