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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6:09:07

거등왕

김거등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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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거등왕(居登王)
시호(?) 도왕(道王)(?)[1]
별호 거등공(居登公)
성씨 김(金)
거등(居登)
왕후 모정(慕貞)
왕태자 김마품(金麻品)
부왕 수로왕(首露王)
모후 허왕후(許王后)
생몰연도 ? ~ 253년 9월 17일
재위기간 199년 3월 13일 ~ 253년 9월 17일 (54년)
즉위 199년 3월 13일

1. 개요2. 정치3. 외교4. 전설5. 기타6. 기록
6.1.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6.2. 《삼국유사》 <왕력>
7. 미디어 믹스

1. 개요

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중략)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 199년.)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후략) …
ㅡ《삼국유사》 《가락국기》(권1 제2 <기이> 상)

금관국의 제2대 군주. 《김해 김씨 족보》에는 도왕(道王)으로 기록되어 있고, 재위 기간은 199년~253년까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54년이나 재위했지만 별다른 기록은 없다.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2] 천부경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慕貞)을 왕비로 삼았다. 모정과의 사이에서 아들 마품왕을 낳았다.

녹차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시기 중 거등왕 시기도 언급된다.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허황옥 유래설", 199년 가야 거등왕의 재위식에 사용했다는 "거등왕 제례설", 292년 《삼국사기》의 "대렴 유래설" 등이 있다.

2. 정치

재위한 그해 세상을 떠난 수로왕을 위해 편방(便房)을 설치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가야 건국 초기에는 왕가를 배출하는 김수로 일파와 왕비를 배출하는 허황옥 일파가 있었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거등왕과 마품왕의 왕비들이다. 모두 허황후가 데려왔다는 인물들의 딸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해 무척산에 있는 모은암(母恩庵)은 거등왕이 어머니인 허황후를 기려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정자이다. 모은암 뒤편에는 남근석이 존재해서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며 세운 건물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3]

3. 외교

재위 직후인 200년 신라에 화친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아마 이 시기에 신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9년 7월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다. 8개의 연해 국가들이 금관국을 침공한 사건으로, 힘에 부쳤는지 신라에 도움을 청하자 신라의 제10대 왕인 내해 이사금이 대자 우로, 이벌찬 이음, 물계자에게 6부의 군사들을 모아주어 8국의 장군을 죽이고 잡혀갔던 6,000명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년 후인 212년 3월에 왕자 1명을 볼모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대를 신뢰할 경우에는 이러하나 나주의 보라국 / 발라국 등 이 시기에 존재했다는 소국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보이지 않아 시대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에 대해서는 3세기 초반(그대로 신뢰), 4세기 초반,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 6세기 초반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대개 낙랑군대방군이 고구려의 제15대 미천왕에게 멸망하여 교역권이 흔들리게 된 4세기 초반을 유력한 시기로 본다. 만약 이러한 가설이 맞다면 이 부분은 거등왕의 연대기에서 소거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고고학계에서는 금관국보다는 안라국이 포상팔국의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이 경우 포상팔국의 난 당시 금관국의 왕이 거등왕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사서에 따르면 수로왕이 금관국을 건국하고 제10대 구형왕의 치세인 532년에 금관국이 멸망했는데, 고고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김해에 있는 여러 세력들 중 대성동 고분군 세력이 주위의 세력들에 비해 명확한 우위를 점하고 금관국이 '국가'로서 출몰하게 된 시기는 3세기 중후반에 가서이며, 금관국의 건국자인 수로왕은 신라의 파사 이사금 재위기에 '나이가 많다'는 평을 들었는데, 고고학적 연구와 일본서기 교차검증에 따르면 파사 이사금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초중반 무렵의 일이다. 따라서 거등왕의 아버지인 수로왕은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에 재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포상팔국의 난은 4세기 초반에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인데, 그 원인으로 313년에 낙랑군, 314년에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멸망한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여겨지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320년에 사망한 우로가 포상팔국의 난에 참전하였다.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이 종종 120년이 아니라 몇 년의 오차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서에 나오는 우로의 진한 정복은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에 일어난 일이기에 우로가 4세기 초반 인물임은 확실하다. 따라서 포상팔국의 난은 310년대~320년대에 일어났다고 추측이 가능한데, 문제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우로가 사망한 해와 동년에 파사 이사금이 재위했고 파사가 4세기 초중반에 재위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 23년에 고령의 수로왕에게 국제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한기부 보제가 수로왕에게 무례를 저질러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해당 사건이 파사 23년이 아니라 파사 3년에 일어난 일이라도 4세기 초반까지 수로왕이 즉위한 걸로 여겨지는 이상 거등왕이 아니라 수로왕 재위기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는 것도 가능하다. 거등왕 재위기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난 것이 맞다면, 수로왕에서 거등왕으로 금관국 왕이 바뀐 지 몇 년 안 가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높다.

4. 전설

역사적 사료로는 근거가 되지 못하지만 《김해 김씨 족보》 등 몇몇 문헌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인 참시선인을 초선대(招仙臺)[4]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참시선인은 배를 타고 왔다고 전해진다.
首露王墓【在州西】招賢臺【在州東. 世傳, 駕洛國居登王 登此臺 招七點山旵始仙人 旵始乘舟而來, 因名焉】
수로왕묘(首露王墓)【주(州)의 서쪽에 있다】, 초현대(招賢臺)【주의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가락국의 거등왕이 이 대(臺)에 올라 칠점산(七點山)의 참시(旵始) 선인(仙人)을 부르자 참시가 배를 타고 왔다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가 있다.
고려사》<지> -金州-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옛 말에 이르기를, 가락국의 거등왕께서 칠점산의 담시선인을 초대했다. 담시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와서 이곳에 바둑을 두며 즐겼으니 이때문에 이곳을 초선대라 하였다. 그때 왕과 선인이 앉아있던 연화대석과 바둑판 돌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칠점산은 양산군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으며, 산이 칠봉인데, 칠점과 같으므로 칠점산이라고 이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참시선인은 거등왕에게 치국의 도를 가르치고, 국가 운영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참시선인은 칠점산에서 왔다하여 "칠점선인"이라 불리기도 했고, 거문고를 가지고 다닌다 하여 "금선"(琴仙)이라고 했다고 전해지는데 모습이 차가운 옥과 같고, 말소리는 경을 읽는 소리 같았다고 한다.

거등왕이 참시선인을 초대해 쇠고기로 만든 요리를 들였으나 모두 사절하고 단풍나무 진과 도라지를 요구해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등왕에게
"임금이 자연스럽게 다스리면 백성이 자연스럽게 살게 된다."
라고 일러주었고 이를 받아들여 거등왕이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적혀있다.
왕의 초선대는 도성에서 7리 정도 되는 넓은 들 가운데. 있는데 거등왕이 칠점선인의 이름을 부르면 선인들이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서로 기뻐하였다.
《김해 김씨 족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칠성산에 군주가 앉았던 돌인 연화석이 있고, 돌에는 바둑판 모양이 새겨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옆 바위에는 석불이 새겨져 있는데 거등왕 초상이라는 전설도 존재한다.[5]

초선대와 관련된 내용

김해 유하리 고분이 거등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발굴 결과 7세기의 굴식 돌방무덤일 뿐만 아니라 발굴된 유해는 여성 5명, 아이 4명의 것이어서 틀린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5. 기타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대성동 고분군 세력이 김해의 타 세력들에게 우세를 점해 금관국을 건국하게 된 시기는 3세기 중후반에 가서이다. 따라서 수로왕 157년-거등왕 54년-마품왕 32년-거질미왕 55년-이시품왕 61년-좌지왕 14년-취희왕 29년-질지왕 40년-겸지왕 29년-구형왕 11년 재위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초에 고대 사회에서 157년, 54년, 55년, 61년 재위는 어떻게 봐도 매우 과장한 티가 나는 재위기간이다. 거기다 수로왕은 사서에서 오래 재위했다고 명확하게 명시된 이상, 반대로 아버지가 오래 재위해서 나이가 많을 때 재위했을 아들인 거등왕과 손자인 마품왕 중 1명은 재위기간이 짧아야 정상이다. 따라서 금관국 10명의 왕들 중 재위기간을 믿을 수 있는 건 마지막 왕인 구형왕밖에 없다 봐도 무방하다.

일단 금관국은 3세기 중후반(260년대~280년대)~532년 존속했기 때문에 250~270년 정도 존재했다 가정할 수 있고, 금관국이 멸망했을 당시 구형왕의 장남 세종이 성인이었으므로 건국부터 멸망까지 11대가 흘렀다고 가정할 수 있다.[6] 그래도 250~270년 동안 10명만 재위했다면 고구려처럼 고대 기준으로 왕들의 평균 재위기간이 제법 긴 편이었던 듯하다. 수로왕, 세종, 김유신이 모두 장수한 걸로 추정되기 때문에 장수 유전자로 오래 재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게 아니면 누락된 왕들이 더 있을 수도 있다. 현존하는 금관국에 대한 기록은 구형왕의 후손이 멸망 이후에 남긴 것으로, 수로왕부터 구형왕까지 10명 10대가 정확히 지났다도 기록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건국부터 멸망까지 10명 10대로 1대당 1명만 즉위하는 건 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금관국처럼 막 군장 사회에서 고대 국가로 변모한 경우, 건국 초기에는 형제 상속이나 조카 상속같은 방계 즉위가 여러 차례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구형왕의 후손이 금관국 멸망 이후 계보를 기록할 때, 자신의 직계가 아닌 금관국 왕들을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거등왕의 실제 재위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54년은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54년은 아니고 14/24/34년 중 하나였을 듯하다.

6. 기록

6.1.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건안 4년 기묘 3월 13일에 즉위해 39년 동안 다스리다가 가평 5년 계유 9월 17일에 붕하였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고 태자 마품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은 김씨인데 대개 이 나라 시조[世祖]가 금알에서 났으므로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라고 했다.

6.2.삼국유사》 <왕력>

제2대 거증왕
수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이다. 기묘년[7]에 즉위하여 55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김씨이다.
第二 居登王
首露子 母許皇后 己卯立 理五十五年 姓金氏

7. 미디어 믹스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는 녹색 옷을 입은 살짝 각진 인상의 인물로 등장한다.

비류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240년대 기준 가락국의 왕으로 철기 무역을 통해 변한 내에서의 세력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1] 《김해 김씨 족보》에 기록된 시호.[2] 《삼국유사》에 의하면 곰을 얻는 태몽을 꾼 뒤 거등공을 낳았다고 한다.[3] 이 절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남근석인 "닝기"도 존재한다.[4]고려사》에는 초현대(招賢臺)라고도 기록되어 있다.[5] 하지만 석불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띄고 있어서 거등왕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6] 고대에는 1세대가 20년 정도로 간주되기 때문에 단순히 생각하면 12~13세대 정도 흘렀어야 정상인데, 전설에 따르면 허황옥은 수로왕이 건국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 혼인했고, 멸망 당시 11대인 세종이 20세 전후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수로왕과 거등왕이 당시 기준 조손뻘이라 1대가 더 벌어진 것일 수는 있다.[7] 1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