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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87년 2월 1일 | ||
위치 | 7000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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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a754><colcolor=#ffffff> 나탈리 우드 Natalie Wood | |
출생시 이름 |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자하렌코 Natalia Nikolaevna Zakharenko Наталья Николаевна Захаренко |
출생 | 1938년 7월 20일 |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
사망 | 1981년 11월 29일 (향년 43세) |
캘리포니아주 샌터 캐털리너 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로버트 웨그너(1957년~1962년 이혼, 1972년 결혼) 리처드 그레그슨(1969년~1972년 이혼) |
자녀 | 장녀 너타셔 그레그슨[1](1970년생) 차녀 코트니 웨그너(1974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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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배우.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한 배우이다.
2. 위상
1938년생으로 잭 니컬슨, 모건 프리먼 등과 동년배이지만 이들이 아직 뜨기 전인 1950-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반대로 이들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70-80년대에 우드는 쇠퇴기였다. 국내에서는 워런 베이티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초원의 빛>(1961)의 청춘 스타로 유명하다. 아카데미상과 BAFTA의 후보에 오른 적이 있으나 전부 수상에는 실패했고 골든 글로브에서 신인상, 인기상, 연기상을 한 번씩 탔다.3. 생애 및 활동
이름의 실제 발음은 내털리 우드.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부모 밑에서 불륜으로[2] 태어나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인터뷰에서 자신이 러시아 혈통임을 감추지 않았고, 영어 억양이 있긴 했지만 러시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려서 아버지가 거딘(Gurdin)으로 개성하면서 온 가족이 이를 따랐다. 정식 본명은 너타셔 거딘(Natasha Gurdin)이다.
어머니는 배우나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영향으로 1943년부터 아역배우 활동을 시작한다. 스튜디오에서는 좀 더 미국스럽게 들리는 성이 필요하다며 "우드"로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우드가 데뷔한 해인 1943년의 출연작 2편을 모두 연출한 어빙 피쉘[3]의 친구인 감독 샘 우드[4]에게서 따온 것이다. 나탈리 우드 본인은 그걸 딱히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집에서 라나(Лана)라고 불리던 여동생 스베틀라너 리서 거딘(Svetlana Lisa Gurdin) 역시 <수색자>(1956)로 처음 크레딧에 올라가는 비중 있는 역을 맡으면서 언니를 따라 업계에서는 우드를 성으로 쓰기로 해 라너 우드(Lana Wood)로 활동해왔다.
1947년 성탄절 영화인 <34번가의 기적>에서 산타클로스 알바생을 진짜 산타클로스라고 믿는 소녀 역을 맡아 잠시 주목을 받았지만, 이미지가 고착되는 바람에 TV 중심으로 착하고 귀여운 딸 역할의 비중 작은 조연만 내리 20편 가량 해야 했다. 이 시기에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하루에 3시간 이상의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촬영장에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총명해서 성적이 매우 좋았다는 증언들이 있다.
그러나 1955년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과의 열연으로 큰 호평을 받으면서 성인 연기자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1956년엔 존 웨인과 <수색자>를, 1958년엔 진 켈리와 로맨스 영화 <마저리 모닝스타>를, 1961년엔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다음 해에는 <집시>에 출연하였다. <초원의 집>(1961)과 <이방인과의 사랑>(1963)으로 각각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64년에 개봉한 코미디 <사랑 그리고 독신녀>는 토니 커티스가 상대역으로 출연하고, 헨리 폰다, 로런 버콜까지 나온 별들의 잔치였고, 로버트 레드퍼드와 <인사이드 데이지 클로버>(1965)를 찍기도 했다.
한편, 워런 베이티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보니 역을 제안했을 때 담당 정신의와 멀리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배우 로버트 웨그너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1969년 제작자 리처드 그레그슨과 재혼했다. 1970년 임신과 함께 4년 동안 작업을 중단했다.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오려 했을 땐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상 임신 직전 찍은 <파트너 체인지>(1969)가 전성기 마지막 흥행작이었던 셈. 시드니 폴락은 이를 두고 "시대 변환기의 희생양"이었다고 표현했다. 어느덧 우드와 같은 "아이콘"의 시대가 저물고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리처드 그레그슨과 3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로버트 웨그너와 재결합했다.
이후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 출연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드라마판에서 캐런 홈즈(Karen Holmes) 역[5]으로 TV 드라마 부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젠 아나스타샤 역으로 무대에 서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3.1. 의문사
43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 샌터 캐털리너 섬 근처에서 익사했다. 덕분에 유작 <브레인스톰>[6]은 제작이 차질을 빚어 개봉이 2년이나 미뤄졌다.이 사망은 아직도 의문사로 남아 있는데, 정황상 익사라고만 판단하기엔 석연찮은 점이 많았기 때문. 검시 결과 익사 이전에 멍이 든 흔적이 온몸에 있었고 약물을 주입한 흔적도 있었다. 섬에 있었던 사람은 남편인 로버트 웨그너와 친구인 크리스토퍼 워컨 둘뿐이어서 이 둘도 의심을 받았다. 특히 웨그너는 우드와의 결혼생활 중에 갈등이 많았기 때문에 아직도 진범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2011년 LAPD에서 우드의 죽음을 재조사하기 시작했다. 워컨은 자신은 관계가 없다며 만일에 대비해 변호사를 고용한 상태이고, 웨그너도 무죄를 주장하는 성명을 내야 했다. 2018년 2월 LA경찰이 웨그너를 용의선상에 올렸다고 보도되었다.# 당시 배를 운전했던 선장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시 웨그너는 워컨과 우드가 바람피우고 있다고 의심하며 싸웠다고 한다.
3.2. 커크 더글러스의 성폭행 사건
아역배우로 활동 중이던 16살 때 커크 더글러스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다. 여동생 라너 우드의 증언에 따르면 몸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집에 돌아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니 나탈리 우드는 어머니와 얘기한 끝에 연예계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 이걸 일단 묻고 가자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당시 나탈리 우드는 <이유없는 반항> 출연 전이라 아직 배우로 자리가 잡힌 상황이 아니었고, 당시 더글러스는 우드 가족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물이었다.[7]업계 내에서는 꽤 알려진 사건이었는지 비공식적으로 범인이 폭로된 적이 있고[8], 나탈리 우드의 유족 측에선 범인이 타계하면 밝히겠다는 식으로 뉘앙스를 흘리기도 했다. 결국 커크 더글러스 사망 후 나탈리 우드의 여동생 라너 우드가 정식으로 폭로했다.
4. 주요 출연 작품
-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1947
- 뮤어부인과 유령(The Ghost and Mrs. Muir), 1947
- Father Was a Fullback, 1949
- Dear Brat, 1951
- 푸른 면사포(The Blue Veil), 1951
-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
- A Cry in the Night, 1956
- 수색자(The Searchers), 1956
- 잊을 수 없는 모정(Kings Go Forth), 1958
- 마저리 모닝스타(Marjorie Morningstar), 1958
- 행복에 젖은 아가씨(Cash McCall), 1960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1961
- 집시(Gypsy), 1962
-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1961
- 이방인과의 사랑(Love with the Proper Stranger), 1963
- 사랑 그리고 독신녀(Sex and the Single Girl), 1964
- 인사이드 데이지 클로버(Inside Daisy Clover), 1965
- 그레이트 레이스(The Great Race), 1965
- 우수(雨愁)(This Property Is Condemned), 1966[9]
- 파트너 체인지(Bob & Carol & Ted & Alice), 1969
- 브레인스톰(Brainstorm), 1983 - 유작
5. 여담
- 2004년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애 전체를 조명한 TV 미니 시리즈 <The Mystery of Natalie Wood>가 방영되었다. 어머니와의 갈등, 반항기, 각종 스캔들, 성폭행, 의문사 등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차분하게 접근했고, 연기자로서의 재능과 주변을 챙기던 다정한 성격 역시 잘 드러냈다. 고인에 대한 존중이 느껴져서 평가가 좋은 편이다.
- 여동생 라너 우드는 ABC에서 1964-9년에 5시즌 방영된 황금시간대 드라마 "페이튼 플레이스(Peyton Place)"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같은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다른 스타로는 미어 패로우, 라이언 오닐 등이 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의 본드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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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m Their Eyes "시나트라 쇼" 출연 장면인데 1분 33초를 보면 동양인 비하 제스처를 한다. 이 행위가 인종차별인 이유는, 이때 팻 스즈키라는 일본인이 같이 게스트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 데니스 하퍼, 스티브 맥퀸, 워런 베이티, 프랭크 시나트러와 관계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심각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첫 번째 남편 니키 힐튼과 이혼한 뒤 힐튼과 교제하기도 했다. 니키 힐튼은 알코올 의존증과 도박 및 마약 중독도 심각했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니키 힐튼의 진상을 거의 폭로하지 않고 이혼해 이런 점에 대해 모른 채로 만나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 자녀로 너타셔 그레그슨과 코트니 웨그너가 있다.
- 게이 배우 태브 헌터(Tab Hunter)의 성정체성을 가리려는 회사의 지시로 데이트 상대 행세를 한 적이 있다. 헌터와는 1956년 웨스턴 복수극 <버닝 힐스(The Burning Hills)>, 1958년 로맨틱 코미디 <더 걸 히 레프트 비하인드(The Girl He Left Behind)> 등을 같이 찍은 바 있다.
- 배우 겸 각본가 루스 고든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고든을 자신의 큰딸 너타셔 그레그슨의 대모로 삼았다.
[1] <로스트 하이웨이>(1997)의 쉴러 역으로 알려져 있다.[2] 어머니가 아직 첫 번째 남편과 결혼한 상태였을 때 2번째 남편인 우드의 아버지를 만나 임신했다.[3] Irving Pichel. 1891 - 1954.[4] Sam Wood. 1883 - 1949.[5] 영화판에선 데버러 카가 연기.[6] 촬영 중 늘 취해있었다.[7] 더글러스는 이 사건 말고도 안 좋은 루머들이 있다.[8] 2000년대 중반 업계 관계자를 자청하는 블로그에서 폭로가 나와 논란이 된 적도 있다.[9]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