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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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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23대 천황
다이쇼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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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大正天皇.jpg
출생 1879년 8월 31일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어소
(現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어용지)
즉위식 1915년 11월 10일
교토부 교토시 교토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어원)
사망 1926년 12월 25일 (향년 47세)
가나가와현 미우라군 하야마정
하야마 어용저(葉山御用邸)
능묘 타마릉(多摩陵)[1]
재위기간 제123대 천황
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
서명
파일:다이쇼 덴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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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황 메이지 천황
모친 야나기하라 나루코
형제자매 5남 10녀 중 3남
배우자 데이메이 황후
자녀
4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히로히토(裕仁, 1901 ~ 1989)
차남 - 야스히토(雍仁, 1902 ~ 1953)
3남 - 노부히토(宣仁, 1905 ~ 1987)
4남 - 다카히토(崇仁, 1915 ~ 2016)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중퇴)
종교 신토
신체 162cm[2]
어칭호 하루노미야([ruby(明宮, ruby=명궁)])
시호 다이쇼 천황([ruby(大正天皇, ruby=대정천황)])
연호 다이쇼([ruby(大正, ruby=대정)], 1912년 ~ 1926년) }}}}}}}}}
파일:external/www.shiryodo.jp/aa0606-75.jpg
즉위식 당시 천황의 전통 관복 '고로젠노고호'(黄櫨染御袍)를 입은 다이쇼 천황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결혼 생활2.3. 재위 기간
2.3.1. 다이쇼 데모크라시2.3.2. 건강 악화2.3.3. 사망
3. 개인사4. 가족관계
4.1. 황실 가계도
5. 창작물6.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123대 천황.

유년 시절 사용한 어칭호는 '하루노미야'였으며 휘는 요시히토(嘉仁)였다.

재위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다이쇼(大正, 대정)였다. 연호 '다이쇼'는 《주역》(周易) <단전>(彖傳) '임괘'(臨卦)에 나오는
대형이정 천지도야(亨以 天之道也, "바른 것으로 크게 형통하니 하늘의 도라.")
라는 구절과 '다이쇼'는 《주역》(周易) <단전>(彖傳) '대축괘(大畜卦)에 나오는
강상이상현(剛上而尙賢) 능지건(能止健) 대정야(大正也). "굳셈이 위에 있어 현명한 이를 숭상하여 능히 강건함을 그치게 함이 크게 바르다.")
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아들 쇼와 천황이 87세로 장수한 것과 달리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천황이다.

또한 새 수도가 된 도쿄에서 태어나고, 그곳에 묻힌 첫 번째 천황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파일:다이쇼 천황 유년기.jpg
1892년의 다이쇼 천황
메이지 천황의 측실인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소생이었다.[3] 당시 오섭가 출신의 정실이었던 쇼켄 황후(하루코)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다른 측실 소생의 아들 네 명은 줄줄이 사망하여[4], 사실상 요시히토가 메이지 천황의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습진을 앓은 데다가 뇌막염까지 걸릴 정도로 병약했으나 기적적으로 죽지는 않았다.[5] 그러나 이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물론 죽을 때까지 건강이 좋지 않았다.

1880년 11월 1일(1세)부터 황실의 전통에 따라 부모와 떨어져서 메이지 천황의 외조부인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동안 친부인 메이지 천황은 요시히토의 양육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기에 만나지 못했다.

1885년 3월, 다시 황거로 돌아왔으나, 역시 메이지 천황은 자식들을 거의 보지 않은 데다가, 생모인 야나기하라 나루코도 만나질 못했으며, 형제들도 대부분 어릴 때 죽고 없어서 요시히토는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6]

1887년, 메이지 천황의 정실 부인인 하루코 황후의 법적인 정식 양자가 되었고, 황실 예법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어릴 때 생모를 만나지 못해서 하루코 황후가 생모인 줄 알고 자란터라, 몇몇 사람들이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말해도 좀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1887년 9월, 가쿠슈인에 입학했으나,[7] 가쿠슈인의 엄격한 규칙에 적응하지 못했고, 건강도 안 좋았기 때문에 백일해에 걸려 휴학하고, 1889년부턴 아타미나 하코네에서 요양하며 건강 회복에 힘썼다. 동년 11월엔 《황실전범》의 제정과 동시에 황태자가 되었으나 가쿠슈인에서의 성적이 나빴고[8] 1894년에 결국 중퇴했다.

가쿠슈인을 중퇴한 이후, 아카사카 별궁에서 개인 교습을 받아 프랑스어, 한문, 국학(유교학)을 배웠다. 이즈음 모토오리 도요카이로부터 국서와 한시를 배웠는데, 문학에는 상당히 흥미를 보였으며, 와카(화가)와 한시를 취미로 즐겨 많은 한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 교습에서도 요시히토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메이지 천황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시히토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할 인물로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9]를 임명했다. 이후 요시히토는 다케히토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성적은 중하-하상 정도로 좋지 못했다고 한다.

1889년, 고작 10세의 나이에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명되었다. 15세 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히로시마 대본영에 참여했고, 16세에 대위로 진급했다. 18세에는 귀족원의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러한 것들은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10]

이렇듯 다이쇼 천황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데다가 형제도 없었고, 또래와의 교류도 거의 없이 자랐으며, 9세부터 육군 중장 소가 스케노리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엄격한 규칙 아래 생활해야 했다. 이래서야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당연히 어리고 병약한 데다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11] 다이쇼 천황이 이러한 생활을 버틸 리가 없었고, 결국 교육 계획 대부분이 폐기되었다.

2.2. 결혼 생활

파일:다이쇼 천황 부부.jpg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
할머니인 에이쇼 황태후(아사코)가 1897년 사망하여 성인식은 1898년에 치러졌다. 이때 다이쇼의 건강이 워낙 좋지 못해서 빨리 결혼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1900년 5월 10일, 황태자비로 간택된 고셋케(오섭가)의 쿠죠 사다코와 결혼했다.

일본 황실은 황태자를 최대한 빨리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답답한 궁중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결혼 생활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메이지 천황과는 달리 을 두지 않았는데, 건강한 사다코 황태자비(데이메이 황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낳아서 첩을 둘 필요도 없었다. 다만 막내 다카히토는 늦둥이라서 즉위 당시 사다코 황후임신 상태라 즉위 이후에 태어났다.

이 무렵 그는 좀 병약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대단히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유년 시절이나 천황으로서 요시히토가 '모자란 인물'로 취급된 것과 대조되게 하라 다카시는 이 시절의 다이쇼 천황에 대해 인간미 넘치는 인물상으로 묘사했다. 독일 제국 출신의 의사였던 에르빈 폰 벨츠 또한 이 당시 요시히토에 대해 "유럽풍의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며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을 회복한 그는 메이지 천황을 대신해 12년간 9차례에 걸쳐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홋카이도를 포함한 전국을 순행했으며, 그의 교육을 담당했던 다케히토와 함께 순행길에 오르면서 한시 짓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1907년, 그는 대한제국을 방문해 순종과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을 만났는데, 이때 이은을 마음에 들어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12] 이후 요시히토는 구미권을 방문하길 희망했으나 아버지 메이지 천황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2.3. 재위 기간

파일:다이쇼 천황 즉위식.jpg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연호를 '다이쇼'로 바꾸고 즉위하여 1915년 교토어소에서 대례를 거행했다.

14년에 불과한 짧은 치세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참가 - 시베리아 출병 - 쌀 소동 - 워싱턴 회의 - 관동 대지진 등 국내외 굵직한 사건사고가 있었다. 한국사에서는 일제강점기 무단통치 - 3.1 운동 -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를 겪었던 기간이다.

2.3.1. 다이쇼 데모크라시

파일:하라 다카시.jpg
의회 민주주의를 주도한 하라 다카시 수상
메이지 시대의 번벌[藩閥] 정치에서 벗어나 정당 세력이 활성화되고,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노동쟁의가 격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를 가리켜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르나, 이 시기의 민주주의대공황이 불러온 사회불안과 그로 인한 군부의 폭주로 무너지고,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군부 독재 정권이 대신 들어섰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이온지 내각이 실각했다. 사이온지 긴모치가쓰라 다로를 다이쇼 천황에게 후임으로 추천했고, 그대로 가쓰라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가쓰라는 비입헌적인 입장을 취하고 긴모치와 하라 다카시 중심의 입헌 정우회와 제휴를 거부하며 대립했다. 이에 입헌정우회는 국민당과 함께 반가쓰라 족벌 타파', '헌정 옹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쓰라 내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가쓰라 다로는 이에 '절대적인 천황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다. 이에 다이쇼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정쟁을 중지하라.'는 칙허를 내렸다.

그러나 정당 세력들도 대중들도 이러한 천황의 명령을 무시했다. 심지어 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14]가 의회 질의 도중 가쓰라와 그의 관료 동지들을 가리켜 "천황을 방어벽 삼아 숨어있다."라고 비난했다. 이 연설에 대중이 크게 동조하여,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가쓰라 내각은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퇴진했고(다이쇼 정변), 절대적이어야만 했던 천황의 명령이 무시당하게 되었다. 이 일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런 일은 메이지 시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자마자 천황의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다이쇼 천황은 메이지 천황과 달리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재위 기간에 생긴 별명은 존재감이 없는 천황(影の薄い天皇)으로 정치인들은 천황을 무시했다고 한다.

2.3.2. 건강 악화

파일:다이쇼 천황 제국의회.jpg
1917년 제국의회 개회식에 참석하러 가는 다이쇼 천황
천황이 된 이후 다이쇼 천황은 공무 때문에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15] 워낙 빡빡한 스케줄로 조금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답답한 궁중 생활과 엄청난 공무량으로 극도로 바쁜 생활을 강요당했다.[16]

1913년, 그는 재위 1년 만에 폐렴에 걸려 현재의 닛코 다모자와 고요테 기념공원에서 요양하게 되었고, 완치까지 1개월이 걸렸다. 이후 별장에서 요트, 승마, 한시 짓기를 즐기며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국제 정세가 급변했고, 이로 인해 공무량이 급격히 늘어나, 1915년부턴 말을 제대로 못하거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

1916년, 다이쇼 천황의 측근 오쿠마 시게노부가토 다카아키 입헌동지회 총재를 후임으로 추천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추천하고, 원로들이 야마가타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또다시 천황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도쿄제국대학의 잇키 기토쿠로 교수의 천황기관설이라는 주장[17]이 나오는 등, 갈수록 천황의 권위가 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와 공무로 받은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다이쇼는 1917년부터는 거의 공무를 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강이 악화되었고, 1918년부턴 보행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1919년부터는 뇌질환으로 식사도 못하고, 칙어를 읽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1921년부터 야마가타를 중심으로 섭정 논의가 활발해졌고, 동년 10월에 궁내성에서는 천황이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음을 인정했다.

다이쇼 천황은 섭정 논의에 불만을 표했다고 하지만[18] 더 이상 집무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강이 악화되자, 20세가 된 장남 히로히토가 섭정을 맡아 천황 직무를 대행해야 했다.

이러한 사건 때문에 일본 대중에게 '병약한 천황'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2.3.3. 사망

파일:다이쇼 천황 대상례.png
다이쇼 천황의 대상례(大喪礼)
이후에도 다이쇼는 건강이 회복되지 못했고, 사망할 때까지 정무에 복귀하지 못했다. 특히 이전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요양 생활을 했지만, 1925년 12월에는 아내 데이메이 황후도 경악할 정도로 심하게 경직, 발작 증상을 보여 4개월 동안 누워만 있었다.

1926년 5월, 건강을 다소 회복하여 보행이 가능해졌지만, 3일 만에 다시 발작하여 병상에 드러누워 하야마에서 요양했다. 이후 병세가 안정되었으나 9월에 재발작한 이후 갈수록 악화되어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데이메이 황후가 배려한 덕에 다이쇼 천황이 요양 중이던 하야마의 별장으로 생모 야나기하라 나루코가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25일 다이쇼 천황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곁에 있던 생모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손을 잡은 채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 다이쇼 천황의 시신은 도쿄 서쪽 근교의 하치오지시에 있는 타마 어릉에 안치되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매년 12월 25일 기일이면 능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3. 개인사

4. 가족관계

파일:다이쇼 천황 황자.jpg
왼쪽부터 히로히토 친왕, 노부히토 친왕, 야스히토 친왕.[21]
측실(후궁)은 없으며,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와의 사이에서 아들 네 명을 낳았다.[22]

4.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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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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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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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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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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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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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작물

1990년작 KBS 3.1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서 등장하나, 배우는 미상이다.

6. 기타


[1] 도쿄도 하치오지시 소재[2] 출처, 아버지와 키가 비슷했다.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 키(161cm)보다 살짝 컸다.[3] 메이지 천황에게는 5남 10녀 중 5번째 자녀이자 3남이었고, 야나기하라 나루코에겐 2남 1녀 중 3번째 자녀이자 2남이었다.[4] 메이지 천황은 원래 5남 10녀를 두었는데, 그 중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다.[5] 이때 보수적이었던 메이지 천황은 서양의학 대신 전통의학으로 치료할 것을 고집했다.[6] 4명의 여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전부 부황의 다른 측실인 소노 사치코의 자식들이었고, 떨어져 지내서 사이가 가깝지는 않았다.[7] 이때 요시히토는 군용가방을 매고 등교했는데, 이게 현재의 란도셀(ランードセル)의 유래라는 얘기가 있다.[8] 독서와 승마에는 능했으나 이해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모두 떨어졌기에 특히 이수계 교과를 힘들어 했다고 한다.[9]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당주로 다이쇼 천황의 셋째 며느리였던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의 외할아버지였다.[10]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패전 이전까지 남자 황족은 자동으로 귀족원 의원이 될 수 있었고, 네임드 황족들은 일본군 장성을 겸했다.[11] 다이쇼는 집중력이 떨어진 데다가 침착함도 없었다고 한다. 또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바로 말하는 버릇도 있어서 항상 아버지에게 혼이 난터라 모자라단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12] 당시 대한제국은 형식적으로는 국가가 남아 있었으나 실제로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심지어 고종마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해 반불구 국가였다. 결국 오래가지 못해 일제에 완전히 병합되었다.[藩閥]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죠슈 등의 출신자들이 형성한 파벌[14] 오자키의 딸 소마 유키카(相馬雪香)는 덕혜옹주여자 가쿠슈인 동창이기도 하다.[15] 다이쇼의 건강이 나빠지자 1921년에 20세가 된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수행했다. 히로히토가 덴노가 된 뒤 말한 바에 따르면 요시히토는 황태자 시절만 해도 매우 쾌활하고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었지만, 즉위한 후 온갖 제약에 속박되는 생활을 하게 되자 괴로워했다고 한다.[16] 다이쇼가 애연가라서 담배를 자주 피운 것도 있었다.[17] 국가의 주권은 국가라는 법인 그 자체에 있고, 천황은 국가의 여러 하위기관들 중 정점에 있는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들과 협치하여 다스린다는 주장. 이전까지의 주류 헌법 해석은 천황주권설로, 천황이 곧 국가로서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적인 주권을 갖는다는 해석이다.[18] 다이쇼 천황이 아직 괜찮다고 말한 이야기가 일본 인터넷에 상당히 있는데, 사실이라면 병세를 회복하고 계속 집무를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즉위한 지 겨우 6년 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맏아들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 하고, 그 전에도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서 공무를 별로 못했음을 생각한다면 불만을 표할 만하다.[19] 데이메이 황후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를 싫어했다고 한다.[20] 하지만 성격이 이랬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고, 갑갑한 궁중 생활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21] 다카히토는 이때 태어나기도 전이었다.[22] 일본 민법에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것은 메이지 31년(1898년)이고, 일본 황실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황실전범》에 측실(후궁) 제도에 대한 특별 규정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법을 준용하여 일본 황실의 측실 제도도 이때 폐지된 것으로 본다. 다이쇼 천황은 황태자 시절인 메이지 33년(1900년) 쿠죠 사다코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 전부로, 이후 일본 황실에서는 더 이상 측실을 두지 않았다. 다만 히로히토는 아내인 나가코 황후가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주위에서는 후궁을 들이라고 많이 권했지만 애처가라 모두 거절했고, 이후에 아키히토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정서적으로도 완전히 없어진다.[23]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 데이메이 황후가 가장 귀여워한 며느리이기도 하다.[24] 패전 후 화족 신분과 재산을 잃은 후, 1948년에 자살로 생을 마쳤다.[25]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히로히토 천황의 시종장을 지낸 바 있다. 한편 스게마사는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아들이기도 하다.[26] 친손녀 5명에 외손자까지 따지면 손자, 손녀, 증손자까지 많다. 미카사노미야 궁가를 이을 친손자가 없어서 그렇다.[27] 다른 한명은 바로 자기 위의 친누나인 센 마사코이다[28] 일본 천황의 해외 방문은 쇼와 천황이 처음이다(1971년). 순서대로 미국, 영국, 대만(사실 중국에 방문하려 했지만 중국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서 무산되고 대만을 방문함.), 네덜란드 총 4개 나라였다. 이후 1992년에 아키히토 천황이 중국을 방문했다.[29] 이러한 천황 신격화, 우상화는 메이지 천황 때부터 패전을 맞이할 때까지 꾸준하게 유지된 정책 중 하나였다.[30] 김정일이 역사와 한자에 대해 매우 무식해서 생긴 촌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