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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6:07:01

토문강

도문강에서 넘어옴
본 문서에서 "토문강"(기표, 표현)은 "송화강 지류 오도백하"(기의, 개념)를 지칭하는 말과 "두만강"(기의, 개념)을 지칭하는 말이 섞여 있습니다.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명대 송화강의 한 지류2. 청대 두만강을 가리키는 단어
2.1. 당시 조선의 인식2.2. 백두산정계비 논쟁2.3.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1. 명대 송화강의 한 지류

명대의 사서 요동지는 토문강을 두만강과 별개로 인식했다. 요동지는 토문하(土門河)로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土門河 城東北五百里源出長白山北松山東流入松花江

"토문하는 성의 동북 5백 리에 있는데, 장백산(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송산이 있고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遼東志》卷一

문제는 토문하가 과연 우리가 말하는 토문강인가 하는 것이다. 송화강 문서에 나왔듯, 송화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지린성을 가로지른 후 아무르강과 합류한다. 따라서 백두산에서 발원한 토문하가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과 합류하기 위해서는 송화강보다 서쪽에 위치해야 한다. 토문하가 송화강보다 동쪽에 있다면 동쪽으로 흘러서 송화강과 만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 지린성 판스시에는 송산진(松山鎭)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다. 물론 명나라 시절 지명이 그대로 이어졌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요동지에서 언급하는 송산이 현재의 송산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요동지에서 언급하는 토문하는 우리가 하는 토문강과는 전혀 다른 물줄기이다.

한편 조선용비어천가도 두만강의 북쪽을 토문강이라 설명한다는 잘못된 주장이 있다. 권7 53장의 주(註) 부분에 토문(土門)이 등장하지만 지명이며 두만강 북쪽에 있다는 내용이 있다. 즉, 토문은 그 일대의 지명이라는 것이다.

2. 청대 두만강을 가리키는 단어

파일:tumenula1.jpg 파일:tumenula2.jpg

2.1. 당시 조선의 인식

청나라 이후부터 토문강은 두만강의 근원 혹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도 토문(土門)이란 낱말은 초기부터 등장하지만, 토문강(土門江)은 숙종대부터 나온다. '토문'은 맥락을 통해 살펴보면 지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숙종 이후부터 등장하는 토문강과는 연결하기 어렵고, 지린성 투먼시라고 보아야 더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 조정 역시 청나라가 두만강을 토문강이라 부름을 알았던 듯하다.
曹參議李光佐曰, 牌文出來後, 直請寢止, 則或有生梗之患, 而一邊送伴使管待, 躬其泝流而上, 一邊移咨, 只陳其道路絶險之狀, 則似無生梗之端矣, 彼咨中所謂土門江, 卽華音豆滿江也…

"패문(牌文)이 나온 뒤에 곧바로 중지를 요청하면 어색한 걱정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접반사를 보내 정중히 접대하며 몸소 상류(上流)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자문을 보내 그 길이 매우 험난한 상황임을 설명하면 어설픈 일이 생기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저들의 자문에 이른바 토문강(土門江)이라 한 것은 곧 ____중국 음(音)의 두만강(豆滿江)____입니다. …"
備邊司謄錄》숙종 38(1712)년 2월 30일 64책
○乙巳/接伴使朴權馳啓曰: "摠管登白山顚審見, 則鴨綠江源, 果出於山腰南邊, 故旣定爲境界, 而土門江源, 則白山東邊最下處, 有一派東流。 摠管指此爲豆江之源曰: ‘此水一東一西, 分爲兩江, 名爲分水嶺可也。’ 嶺上欲立碑曰: ‘定界立石, 乃是皇旨。 道臣、儐臣, 亦宜刻名碑端。’ 臣等以旣不得同往看審, 而刻名碑端, 事不誠實, 爲答矣。"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____두만강(豆滿江)의 근원____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____두 강(江)이 되었으니____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肅宗實錄》숙종 38(1712)년 5월 23일 51권 을사 1번째기사

숙종 38(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한 시기를 전후로 조선은 청나라가 두만강을 토문강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후 어느 시점부터 두만강과 토문강을 별개의 강이라고 인식이 달라진 듯하다.

2.2. 백두산정계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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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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