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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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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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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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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9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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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9년 1월
조간 19년 1월
884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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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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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난 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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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년
12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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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큐 원년 4월
조큐 2년
닌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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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6월 17일
1709년 3월 4일
1709년 10월 9일
1712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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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1월 23일
호에이 6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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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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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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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일본인' 명단이다.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노구치 히데요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고 다카모리 미소라 히바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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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Tokugawa_Ieyasu2.jpg
출생 1543년 2월 10일[2]
미카와국 오카자키
(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사망 1616년 6월 1일 (향년 73세)
스루가국 슨푸
(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묘소 쿠노산 동조궁(久能山東照宮)
닛코 동조궁(日光東照宮)[3]
재임기간 초대 도쿠가와 당주
1549년 4월 3일 ~ 1605년 4월 16일
초대 정이대장군
1603년 3월 24일 ~ 1605년 4월 16일
오고쇼
1605년 4월 16일 ~ 1616년 6월 1일
태정대신
1616년 5월 2일 ~ 1616년 6월 1일
서명
파일:도쿠가와 이에야스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3400><colcolor=#dca600> 본명 1543 ~ 1556
마츠다이라 타케치요(松平竹千代)
1556 ~ 1557
마츠다이라 모토노부(松平元信)
1557 ~ 1563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1563 ~ 1566
마츠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신호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
원호 안코쿠인(安国院)
종교 불교
신체 159cm, 70kg, 허리둘레 100cm 초과(추측)
부모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
어머니 오다이노카타(於大の方)
형제 이복동생 마츠다이라 이에모토(松平家元, 1543 ~ 1603)
이복동생 나이토 노부나리(内藤信成, 1545 ~ 1612)
이복동생 쇼안 에사이(樵臆恵最, ?~?)
이복여동생 이치바히메(市場姫, ? ~ 1593)
이부동생 마츠다이라 야스모토(松平康元, 1552 ~ 1603)
이부동생 마츠다이라 야스토시(松平康俊, 1552 ~ 1586)
이부동생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定勝, 1560 ~ 1624)
부인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
계실 아사히히메(朝日姫)
측실 20명
자녀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
장녀 카메히메(亀姫, 1560 ~ 1625)
차남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차녀 도쿠히메(督姫, 1565 ~ 1615)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1580-1607)
3녀 쇼세이인(正清院, 1580 ~ 1617)
5남 다케다 노부요시[4] (武田信吉, 1583-1603)
6남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
7남 마츠다이라 마츠치요(松平松千代, 1594 ~ 1599)
8남 마츠다이라 센치요(松平仙千代, 1595 ~ 1600)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徳川頼房) 등
}}}}}}}}}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평가
4.1. 일본에서의 평가4.2. 한국에서의 평가4.3. 군 지휘관으로서
5. 기타6. 초상화 및 상(像)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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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江戸幕府)[5]의 초대 쇼군. 도요토미 가문의 지배기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종식하고 조선 침공 등으로 피폐했던 정국을 수습했으며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유지됐던 근세 일본 정치, 경제, 문화의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사실상 센고쿠 시대의 실질적인 승리자이자 마지막 천하인(天下人)이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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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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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4.1. 일본에서의 평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의 일본 내에서는 긍정적인 편이다.

근대 시절은 존왕사상으로 대표될 정도로 황실에 대한 존경도가 매우 높았기에 막부를 세우며 천황의 권력을 축소시킨 행적[11]으로 매우 혹평받았다. 특히나 에도 막부 붕괴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천황가를 홀대했다며 비열하거나 간사함이 두드러진 인물이라고 평가가 점철되었는데, 사실 이에야스와 후대 쇼군들은 황가와 쿠게(귀족)들의 권력은 축소시켰을지언정 대접은 매우 잘했다.[12][13][14]

그러나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전후 들어선 그러한 시절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며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축소되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안착되기 시작하며, 이에야스의 견실한 정치력이 조명되어 호평받기 시작했다. 에도 막부가 전후 수습을 잘하면서 일본의 국력을 키웠기에 이에야스가 평가받는 점도 있지만, 이에야스의 정치방식이 비교적 많은 인물을 포용하려는 온건파적인 면모를 보인 덕도 컸다.

보통 센고쿠 시대는 패배한 다이묘는 반란의 여지를 끊고자 할복으로 조치하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뒤 포로로 잡힌 인물 중 대표 격인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등 세 사람만 참수하고[15] 나머지 서군 다이묘들은 어느정도 생계 유지가 가능한 선에서 몰수하거나, 아니면 아예 몰수하더라도 살려는 주는등 비교적 온건하게 대처했다.

그러면서도 통일 이후 자신의 지지세력들에게 고루 보상해주면서 자신을 제외한 특정 한가문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대처하기도 했는데, 공식적으로 2800만 석이라고 하는 전토의 고쿠다카 중 400만 석(기존 영지+간토 지역)을 자신의 직할령으로 두고 300만 석은 가신단(하타모토)들에게 배분하여 실질적으로는 일본 전토의 1/4를 직접적으로 지배했다.[16] 이를 통해서 이에야스는 자신을 넘을만한 유력자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며 자신 생전 센고쿠 시대가 다시 발발할 가능성을 최대한 억제했다.

한편으론 대히트작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역사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17]에서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묘사된 것이 대중의 인식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세력 구도를 잘 파악하여 많은 위기인내하다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항목에도 있듯 소인배와 대인배스런 모습을 모두 보여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너구리의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어찌됐든 현실 감각이 있어 매사에 무모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해야 할 처신만 제대로 하면서도 본인의 내실을 탄탄히 쌓는 면모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고 큰 소리치다 본인이 죽고 자신의 정권과 가문마저 완전히 망해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18]

다만 오다 노부나가와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히데요시가 죽은 다음에야 패권을 쥐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떨어지는 편이긴 하다.[19] 특히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했던 시절에는 주로 싸운 것이 다케다 신겐이었기 때문에[20] 큰 활약상이 없다는 점도 문제이다.[21][22]

재미있게도 일본에선 이에야스는 물론 다른 막부 창건자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아시카가 다카우지도 역사의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라이벌에 비하면 인기가 처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리토모는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밀리고, 다카우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같은 라이벌들에게 인기가 밀리는 편. 그나마 이에야스는 세 명의 막부 창건자 중에서는 나름 인기가 있는 편이다.[23]

다만 군사 칸베에를 시발점으로 일본에서도 NHK 대하드라마에서조차 임진왜란을 조금씩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요리토모나 다카우지와는 달리 평가가 상승하는 중이다. 적어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은 무고한 사람들을 일절 학살하지 않은 반면[24], 이에야스와 대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이라는 큰 아킬레스건이 있기 때문이다.[25]

4.2. 한국에서의 평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을 멸망시켜 천하인이 되고 에도 막부를 세운 시기는 조선 중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정반대의 노선을 탔던 만큼 이에야스 본인을 포함해 에도 막부까지는 조선과 매우 우호적이었다.[26]

조선에선 당장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 여력이 없고 당장 히데요시 때문에 왜란을 겪은 만큼 여러 입소문에 근거해[27] 그를 대할 수밖에 없어서 초반에는 이에야스도 부정적으로 보았으니,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보여도 조선과 명나라는 도쿠가와 막부를 여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선조 말엽부터 시작하여 효종 때까지도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광해군일기》를 보면 조선 조정이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받아 본 명나라 유격의 답신이 이랬다.
자문을 받아보고 왜인들의 정세를 알았습니다. 적국에 일이 있는 것이 비록 귀국에 다행이기는 하나 덕천가강은 꾀를 써서 강자를 제어하는 일을 잘하니, 뜻을 얻은 뒤에는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8년(1616) 5월 20일

양국이 이런 태도를 고수하더라도 이에야스도 친화 노선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아작내기 위한 여러 공작[28] 중에서도 하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공격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이에야스가 조선과 친교를 맺으려한 것은 국제적인 인정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고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얻는 경제적인 목적도 있었기에[29] 순수한 목적으로 친교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이에야스는 조선 정벌에 소극적이었고, 저런 명분을 내건 것 때문에라도 양국 관계 회복에 애썼음은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도 <기유약조> 때부터 쓰시마 도주가 문서 자체를 조작하긴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뜻까지 감히 거스르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서 조작을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쓰시마 도주의 행동이 발각되었을 때 일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를 더 염려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측의 대변인이자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요구를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조정해서 조선에 전달하고, 조선의 요구 또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조정해서 일본에 전달하는 식이었다.[30]
상(효종)이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임의백(任義伯)을 소견(召見)하여 묻기를,
"너는 동래(부산)에 오래 있었으니 일본(日本)의 사정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아뢰도록 하라."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신이 동래에 있을 때에 들으니, 일본은 백성이 매우 번성하고 살길은 매우 어려우므로 저희끼리 도륙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를 삼킨다 합니다. 원가강(源哥康)이 심처왜[深處倭]를 진복[鎭服]하려고 강호[江戶]로 거처를 옮겼는데, 강호와 왜경[倭京] 사이는 길이 머나 인가가 촘촘히 잇달아서 여염[閭閻]이 번성한 것이 우리 나라의 종가(鍾街)와 같고 군사가 많기도 예전에 없던 것이라 합니다. 남조[南朝]의 신사(信使)가 서로 통하고부터 상선(商船)이 잇달아 와서 왜경에 정박한다 합니다. 접(接)때 남조에서 왜국에게 군사를 청하니, 왜인이 ‘조선은 교린[交隣]의 정분이 두터우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구제할 수 있으나 남조는 일찍이 서로 통한 의리가 없으므로 구제할 수 없다.’ 하므로 남조의 사신이 통곡하며 가지 않고 그대로 왜국에서 죽었는데, 근래 그 의논이 조금 변하여 혹 구제하려는 의논이 있다 합니다. 또 왜인이 늘 남조는 형세가 강성하고 청국은 쇠잔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남조가 과장한 말인 듯합니다. 또, 왜경은 인심이 매우 나쁘지는 않으나, 마도[馬島] 사람은 그 나쁜 것이 유난히 심한데 도주(島主)가 어리석으므로 장차 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것이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원가(源家)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칠 때에 맨 먼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묻고 다음에 조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었으니, 그 자손이 어찌 그 조훈(祖訓)을 어기겠습니까. 원가가 그 나라에 오래 살아있는 것이 실로 조선의 이익입니다."
하였다. (중략)
- 《조선왕조실록》 효종 6년(1655) 1월 25일 2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 포로 교환이나 전후 처리 등을 논할 무렵에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본명인 '덕천가강'이나 '원가강'(세이와 겐지, 즉 청화 원씨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이다.)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면 평가는 전반적으로 '국적, 원흉 취급이었던[39] 히데요시와는 달리 나름 개념 있는 왜인' 정도다. 일본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던 임란 당시에는 틀린 정보도 많았지만, 후대 통신사의 기록에서는 정보가 상당히 제대로 나왔음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효종조선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남용익이라는 사람은 일본의 역대 지배자들을 소개하는 파트에서 이에야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원뢰조의 지파(支派)로서 대대로 겸창(鎌倉: 가마쿠라)에 살면서 8주(州)를 합치고 받아들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으며 상모(狀貌: 얼굴의 생김새)가 풍만하고 준수하며 날래고 사나워 잘 싸우므로 온 나라가 감히 그와 싸울 사람이 없었다. 평수길이 친히 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뒤에 원한을 풀고 수길에게 귀순하였으며, 수길이 죽을 적에 아들 수뢰를 그에게 부탁하였다.
경장 8년(1603년) 계묘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고 10년(1605년) 을사년에 위를 아들 수충에게 전하여 주고 대상국(大相國, 태정대신)이라 일컬으며 부자가 국가의 정사를 전집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대판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씨(도요토미)를 멸망시켰으며 다음해 병진년(1615년)에 죽으니 호는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며, 정권을 잡은 게 3년간이었다.
- 《부상록》 중 <문견별록>(聞見別錄)의 -관백 차서-에서

한편, 임진왜란 직후 쓰인 강항의 《간양록》을 보면 이에야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괴팍스러운 성품에다가 싸움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국을 통틀어 감히 그와 자웅을 견줄 자가 없었다."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고 얼굴이나 몸집도 두툼하게 생겨 덕스러운 편이다."
"수길(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는 많은 인심을 얻었지만 수길의 뒤를 갈음하게 되자 도리어 일반의 신망이 떨어져 갔다."
"하는 짓이 명랑하지 못하고 컴컴하다. 한 번 비위에 거슬리면 그 사람을 죽을 고비에 몰아넣고 만다. 그렇기에 부하들도 코앞에서만 슬슬 기지 한 놈도 믿고 따르는 놈이 없다고 한다."
- 《간양록》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보면 알 수 있듯 후대보다 악평이 제법 많은데, 사실 《간양록》의 기록은 강항이 포로 시절 직접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라서, 도쿠가와 가문을 좋게 보기 힘들었던 기나이오사카 근방, 즉 서일본 출신의 인물들에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도쿠가와 욕이 저렇게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간양록》에서나 《부상록》에서나 상당히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인물이면서 말수가 적고 침착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다.

4.3.지휘관으로서

전장지휘관으로서 능력은 당대에서부터 이미 높게 평가받아 왔다. 전략/정략 측면에서 이에야스의 능력은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이에야스의 역량은 그 휘하의 미카와 가신단이 아네가와 전투에서 병력이 우세함에도 졸전을 벌인 오다군과 달리 병력이 열세함에도 아사쿠라군을 격파했고[40],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미카와 가신단 필두인 사카이 타다츠구의 활약 등으로 용명을 떨친 데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2개 회전이 오다군의 보조적 역할이라면, 압도적 병력 열세에서 야전 축성과 기습으로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를 전사시킨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는 이에야스의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노련함과 신속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 전국시대의 회전 사례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은 가운데,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외에는 이에야스가 참패한 전투 자체가 드물고 전술적 능력보다는 정치질이 부각된 말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를 제외해도 이에야스의 전적은 최상위권에 넉넉히 든다.[41]

다만 쟁쟁한 다이묘들에 비해 이에야스가 한수 처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에야스가 이긴 전투가 화려한 전략전술이나 극적인 반전 등 오락적인 요소가 부족하기도 했고,[42][43] 반대로 그의 생애에 있어 몇 안되는 패배인 미카타가하라 전투나 그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상대가 다케다 신겐이나 사나다 노부시게 등 에도 시대로부터 전통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인물들이었기 때문. 게다가 이에야스라는 인간의 주력 전공은 지휘가 아니라 권모술수였다는 점도 한몫 하는데,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군대를 지휘해서 승리를 한 게 아니라 적장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배신을 유도해내서 이겼다는 점이 그렇다.[44]

서양의 학자 조지 베일리 샌섬(George Bailey Sansom, 1883 ~ 1965)은 오다 노부나가를 평하면서 그의 군재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 같은 유능한 장군의 도움을 받은 편이었다고 평해 이에야스가 헛물은 아니었다는 평을 내렸고, 노부나가가 확장하면서 이에야스에게 뒤를 맡긴 것만 봐도 군사적으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노부나가에 비해 개척하는 역량은 부족했을 뿐이었다.

물론 패배도 있긴 했는데, 영혼까지 털리다 못해 똥까지 쌌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야 병력이나 포진부터 이미 열세였던 데다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다케다 신겐이라 당해버린 것이라 쳐도, 오사카 전투에서는 그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으로 우위를 점하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려버렸다.[45] 이에야스가 생전에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는데, 그 두 번이 모두 다케다 관계자가 지휘하는 빨간 갑옷의 군대였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는지 다케다 멸망 뒤 이에야스는 다케다 유신들을 재정비하여 자신이 아끼던 젊은 무장 이이 나오마사 휘하에 편제, 이이 아카조나에를 운용하게 되는데 말년에는 전투가 없어서 군기 빠진 신참들이 붉은 무구를 갖추고 있다고 한탄[46]했다는 걸 보면 이러나 저러나 다케다의 붉은 군대에게 큰 인상을 받았음은 확실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에야스는 당대에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군 지휘자가 맞다. 전략의 시야가 노부나가에게, 전술의 화려함이 신겐, 무략의 용맹함이 겐신, 모략의 깊이가 모리 모토나리, 정략의 견실함이 호조 우지야스, 임기응변의 순발력이 히데요시에게 밀린다고 해도, 끈질기게 버티고 불리한 세력을 회복하는 맷집만큼은 전국시대 발군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노부나가는 아네가와 전투를 끝내고 이에야스를 한고조, 혼다 타다카츠장비에 비견했는데, 수십 번의 패전을 견뎌내고 결국 한왕조를 세운 한고조처럼 이에야스는 실패나 굴종을 극복하면서 각 방면의 1인자들에게 버금가는 역량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쟁쟁하던 군웅들을 제치고 천하를 거머쥔 것이다.

5. 기타

(새가) 울지 않으면(鳴かぬなら)
오다 노부나가 - 죽여버려라(殺してしまえ)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게 만들어 보이겠다(鳴かせてみせよう)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 때까지 기다리자(鳴くまで待とう)
두견새(時鳥)

6. 초상화 및 상(像)

파일:Tokugawa_Ieyasu.jpg
원본 초상화
파일:external/img02.hamazo.tv/%E3%81%99%E3%82%93%E3%81%B7%E5%A4%A2%E3%81%B2%E3%82%8D%E3%81%B0s004.jpg
시즈오카시 슨푸유메히로바(すんぷ夢ひろば)의 박물관에 있는 상. 이에야스의 모든 상들 가운데 오고쇼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파일:attachment/도쿠가와 이에야스/u.jpg
위 동상을 제작할 때 참고한 초상화.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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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とくがわ いえやす, 신자체는 徳川 家康[2] 당시 통용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543년 1월 31일이지만 현행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1543년 2월 10일이다[3] 묘소의 이름을 빌려서 사후 그를 동조궁 또는 동조신군(東照神君)이라 통칭하기도 했다.[4] 다케다 카츠요리 입장에서는 양증손자. 노부요시가 죽자 사실상 카이 다케다 가문은 사라져버린다.[5] 혹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6]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력과 의모(養母)인 켄쇼인(아나야마 바이세츠의 부인이자 다케다 신겐의 딸)을 후견인으로 하여 노부나가에 의해 단절됐던 카이 다케다 가문을 이었다가(본래 아나야마 바이세츠와 켄쇼인의 아들인 아나야마 카쓰치요-다케다 노부하루가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후계자 없이 사망해서 노부요시가 카쓰치요의 양자가 되는 형태로 계승) 후에 다시 마쓰다이라로 복성한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서군으로 참전했던 사타케씨의 영지를 몰수해 노부요시에게 히타치 미토 25만 석을 주지만, 후계자 없이 사망한다. 향년 21세.[7] 이에야스의 5남 마쓰다이라 노부요시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에 형의 영지인 미토 번을 받았다가 스루가 번 50만 석으로 전봉되고, 오사카 전투 참전 후엔 다시 전봉과 가증을 거쳐 최종적으로 고쿠다카 555,000석(실제 고쿠다가 약 61,5000석)의 기슈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8] 3살 때 히타치 시모츠마 번 10만 석을 받았다가, 이에야스의 10남이자 동복형인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스루가 번으로 전봉되어 형의 미토 번을 이어 받아 고쿠다카 35만 석(실제 고쿠다카 약 313,000석)의 미토 번주가 되었다.[9] 이이 나오마사의 사위다. 여러 이름을 쓰다가 방계 마츠다이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로 개명했다. 21살 때 세키가하라 전투에 처음으로 참가하고 서군의 시마즈 가문과 싸우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전투 후 오와리국과 미노국에 걸쳐 키요스성과 52만 석짜리 영지를 받았다. 후에 병을 얻어 후계자 없이 사망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입은 부상 때문에 병을 얻은 듯하다. 향년 28세. 히데타다는 동복 형제였기에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10] 세키가하라 전투 후 어린 나이에 카이 25만 석을 받아 코후번의 번주가 되었으나, 이에야스의 4남이자 형인 마쓰다이라 타다요시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에 부친 이에야스에 명령으로 코후번을 반환하고 대신 타다요시의 키요스 번과 함께 일부 가증을 받아 고쿠다카 619,500석(실제 고쿠다카 약 913,000석)의 오와리 번 초대 번주가 된다.[11]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 천황과 공경의 역할 및 한계를 규정하여 현실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도쿠가와 직계 여손인 도쿠가와 마사코(徳川和子, 1607~78)를 고미즈노오 덴노에게 시집보냈다. 에도 시대 중기쯤 가면 도쿠가와 가문은 무사의 대표이자 천황가의 일원이었으며 이는 에도 막부 후기~쇼와 시대까지 이어졌다. 다만 널리 알려졌듯 천황가는 원래 한참 옛날부터 현실 권력을 조금도 가지지 못했고 정말 어려울때는 천황이 직접 밥벌이를 했을 정도로 심각했었는데 오히려 에도 막부 시절에 생황고는 해결되었다.[12] 자기 딸 마사코를 고미즈노오 덴노에게 시집 보낸 입장이라 딸이나 자신의 입장을 위해서라도 지원해야 하긴 했다.[13] 사실 오다건 도요토미건 도쿠가와건 간에 권력은 줄였을지 몰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명분덩어리인 황실에 대한 대접 자체는 잘 해줬다. 오히려 이전까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는 전국시대가 되면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황실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 해서 대우도 형편없었고, 그래서 당시 덴노가 직접 글을 쓰는 부업을 했고 궁녀들은 몸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14] 미토 코몬에 등장하는 이치조 산미가 도쿠가와 가문과는 상관없는 공경인 이치조 가문임에도 나름 세력을 가지고 악행을 저질러왔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황실 휘하인 공경들도 나름 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15] 다만 고니시는 기리시탄이라는 점과 앞의 둘과 달리 세키가하라 전투의 주역일 뿐 기획한 장본인들은 아니란 점이 참작되어 본인이 할복을 거부한걸 받아들여 처형으로 대체했다.[16] 참고로 도쿠가와 계통이 아닌 다이묘 가문 중에 석고가 많았다고 하는 가문은 보통 시마즈(사쓰마), 모리(죠슈), 그리고 에도 시대 초기에는 마에다, 다테 가문이 꼽힌다. 이들은 실제로 농토 개발에 열을 올리거나 원래 그만한 영토를 보유했거나 아니면 광산 등 다른 수입을 통해 대충 100만 석 이상의 석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17] 한국에선 대망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소설이다.[18] 특히 조카 히데츠구를 숙청할 때 뒷처리를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 사후 힘의 균형이 이에야스로 기울어져버렸고, 첩과 아들이 자결하고 손자가 처형당할 때 동정은커녕 인과응보라는 평가를 받는다.[19] 다만 인기조사에서 히데요시보단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도 많다.[20] 특히 신겐과 싸울 적의 이에야스는 아직 성장하기 전이라, 우에스기 겐신처럼 용호상박으로 신겐과 치고박기는커녕 붙는 족족 박살났었던 시절이다.[21] 물론 노부나가 포위망을 상대하던 동맹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숙적인 신겐을 막아준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지만. 그래서 노부나가는 제 코가 석 자였으면서도 이에야스를 제 때 돕지 못한 것을 매우 미안하게 여겼다.[22] 다만 이는 도쿠가와가 나이가 어린 것도 한 몫을 한다. 오다가 죽을 때 기준으로 오다 49세 도요토미 45세 도쿠가와 39세로 삼영걸 중 가장 막내다. 미카타가하라 전투때도 도쿠가와는 29세밖에 안 되어서 다른 둘에 비하면 경험 적은 햇병아리였다. 상대인 다케다는 당시 52세의 노련한 지휘관이라 도쿠가와가 별 활약 못하고 털렸음도 이해는 간다.[23] 소설의 영향도 있지만 사실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하기도 하고 또, 전국 3영걸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오다 노부나가와도 끝까지 동맹 관계였기도 했다. 상술한 대로 요리토모가 동생 요시츠네를 핍박하다가 마침내 죽이고 다카우지도 쿠스노키, 닛타 등 인기 인물들과 대립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24] 다만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귀공자 타입의 인물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매우 거친 무사여서 실제로는 농민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난폭한 짓을 많이 했다고 한다.[25] 다른 막부 창건자들 역시도 뒷마무리가 조금 찝찝했다. 요리토모는 히데요시처럼 후계자 문제를 만들어놔 사후 얼마 못가 가문이 몰락했고 다카우지는 요리토모와는 달리 가문이 이어지긴 했지만, 본인 역량이 부족해서 고다이고 덴노의 남조를 자기 대에 끝장내지 못해 손자 때 가서야 제압했다. 그 뿐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는 3대 뒤에 쇼군이 피살당하고 다시 2대 뒤에는 오닌의 난으로 식물인간 신세가 되었기에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26] 도쿠가와도 임진왜란 당시 어쩔 수 없이 파병을 하긴 하였지만 일본 내에서만 머무른 예비대 수준의 매우 적은 규모였고, 본인도 나중에 후술되어있듯 도요토미 가문 멸망시키면서 명분 중 하나로 조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거론할 만큼 임진왜란을 좋게 보진 않는 입장이었다.[27] 임진왜란 직후에는 부산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일본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포로들의 말이 그나마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조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부 문제가 정리되면 조선을 재침할 것이라는 말, 도요토미 가에서 반격을 시작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쫓겨날 것이라는 말이 같이 돌아다니는등 중구난방이었다. 물론 히데요시 사후에도 세키가하라 전투 전까지 잔존 세력들이 막강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이에야스도 통일 후에는 히데요시와 비슷한 봉토 문제를 겪을 것이 분명했기에 아예 근거가 없는 소문들이 아니기는 했을 것이다. 그나마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쓰시마 도주의 말도 <기유약조>를 보면 알 수 있듯 상당부분은 대마도 입장에서 유리한 조작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는 승전했고 봉토는 핵심 가신들 위주로 히데요시 시절에 비해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분배하는 식으로 해결했다.[28] 히데요시의 무덤 폭파,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처형 등.[29] 서일본은 지리적인 특성상 조선, 중국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얻은 경제력을 발판삼아 중앙에 반발하는 경우가 잦았기에 중앙의 대외무역 독점은 일본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30] 대마도의 이런 행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도 있었는데, 흔히 임진왜란의 명분으로 알려진 정명가도라는 말도 본래 히데요시의 요구는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라는 의미였다. 너무나 불손한 문구라 대마도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가 살짝 손을 봐서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에 들어가니 조선은 그 길을 빌려달라'는 뜻으로 바꾸어 보냈다. 물론 그 말이 그 말인지라 조선 조정도 진의를 바로 눈치챘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대마도가 어떤 역할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深處倭] 일본 본토. 혼슈, 시코쿠, 규슈를 묶어서 의미한다. 참고로 홋카이도는 당시 일본인이 살지 않는 미개척지였다.[鎭服] 복종시키다[江戶] 에도를 의미[倭京] 교토를 의미[閭閻] 집이 모여있는 곳.[南朝] 남명. 1655년 당시 영력제정권이 강남 지역에 잔존해 있었으나 청나라에 밀려 1662년 멸망한다.[交隣] 이웃나라와 사귐[馬島] 대마도. 쓰시마 섬을 의미[39]간양록》에서는 히데요시를 대놓고 '적괴'라 불렀다.[40] 노부나가는 아네가와 전투를 끝내고 이에야스를 한고조, 혼다 타다카츠장비에 비견했다.[41] 저 2개 회전도 그림이 훌륭하진 않았으나 결국 승리했다.[42] 당시 마츠다이라(도쿠가와 이전 성)의 무사단의 용맹함은 유명해서, 이마가와도 이에야스와 미카와 무사들을 선봉으로 내세우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다. 즉, 전략전술이 아니라 사실 미카와 무사단 개개인의 용맹함과 우수함으로 유명했던 것.[43] 하필 또 신겐과 맞붙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양쪽 다 진법이라는 전략전술을 사용했는데 하필 또 어린진을 사용한 신겐에게 학익진을 사용한 이에야스가 처절하게 깨졌다.[44] 물론 이건 애시당초 서군 구성이 워낙 엉망이라 손자병법대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었던 상황이기도 해서 그렇다. 편히 이길 방법이 있는데 굳이 치열한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다.[45] 다만 이 경우는 사나다 노부시게가 한계가 있는 병력으로 잘 하긴 했지만 결국 그 한계 때문에 공세종말점에 몰려서 이에야스를 치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즉, 오사카 전투에서도 항상 이런 식으로 밀린 건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는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로버트 리 장군과 비슷한 상황으로 오사카 전투에서 몇 안 되는 도요토미 군에게 승산이 있던 순간이었으나 힘이 못 미쳐 성공에 이르지 못했던 것..[46]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이 나오마사 사후 그 아들이 지휘하게 된 이이 아카조나에가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패배한 뒤 한 이야기인 듯도 하다.[47] 다만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잇코잇키의 중들이 이에야스의 영지에서 선동을 한 적도 있고(이마가와나 타케다가 조종했다는 말도 있다.) 여기에 넘어간 가신들도 꽤 있어서 애를 먹었지만 사전에 차단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 여기서 반란을 일으킨 가신들 대부분이 용서받았는데 이들은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 솔선수범하여 전투시 앞장섰다고도 한다.[48] 아버지 요시모토의 원수인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의 배반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우지자네는 천수를 끝까지 누렸다.[49] 동군에 가담한 가토 기요마사부터가 합류 조건으로 고니시를 처형할 것을 내세웠기도 했다.[50] 처음에는 할복으로 하려고 했으나, 자살을 금기시하는 기독교 교리를 이유로 고니시가 이를 거절하여 참수했다.[51] 물론 소 요시토시의 영지인 대마도가 지금도 촌동네 취급받는 곳임을 감안하면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대마도의 석고는 에도 시대에도 1만 석도 안 되어 원칙적으로는 다이묘라고 불릴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조선과의 외교, 무역 루트였기에 다이묘로 인정해준 것이기도 했다. 또한 소 요시토시가 서군에 가담한 것도 사실 장인어른인 고니시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입지 때문임을 감안하면 용서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52] 사실 지금이야 요시츠네가 인기가 좋지만 당대에는 오히려 요리토모 쪽이 더 인기가 좋았다. 요시츠네가 형 요리토모에게 반란하고자 사람을 모으려고 했지만 요시츠네는 인기가 없어서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고 하는게 그 증거. 귀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요시츠네는 굉장히 거칠고 잔인했다고 한다.[53] 정작 나중에 장남의 빈자리가 느껴지던지 삼남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늦게 오자 "니 형이 살아있었다면 니 같은 얼간이 짓은 안 했을 거다." 하고 면박줬다고 한다.[54] 이를 보다못한 히데야스는 친부 이에야스보다 양부였던 히데요시에게 더 애정을 느꼈다. 그래도 이에야스도 나중엔 지 아들이라고 50만 석이라는 봉지를 주었다.[55] 하지만 나중에 셋째가 물려받았다. 사실 히데타다도 좀 못났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저 녀석이 수성은 잘 하겠지' 라며 자리를 물려주었다.[56] 사실 장남을 제외하면 다른 아들들은 전부 서자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원래 이런 걸 잘 따지지 않는 편이다. (사실 오다 노부나가도 아들들은 전부 다 서자였다. 노히메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기 때문.) 적장자 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정실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처형당했다. 당시 일본은 하도 외삼촌의 양자로 입적하는 일이 많아서, 서자여도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으면 인정받았다.[57] 결국 어머니가 재가한 집안과도 싸우지 않고 화해했다.[58] 쇼군을 직접 섬긴 시녀였다는 것과 나이가 좀 들자 측실로 들이려고 한 것으로 보아 에도 시대 정이대장군의 후궁 역할을 하던 오오쿠의 오추로(御中臈)가 아니었나 싶다.[59] 메이지 시대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가 그의 먼 후손이다.[60] 이때 이에야스의 참모 혼다 마사노부도 가담했었는데 마사노부는 그대로 도쿠가와가를 이탈했다가 혼노지의 변 무렵에 도쿠가와가로 돌아온다.[61] 그러다 보니 3대 쇼군 이에미츠가 매사냥에 빠져서 노숙까지 해 호위에 문제가 생기자 다테 마사무네가 나서서 한 마디를 해줬더니 다시는 매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 한 마디는 매사냥은 위험하다면서 자신도 매사냥을 하던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다는 말...[62] 다만 궁수라는 표현은 본래 일본 무사들이 기마궁시전으로 싸우던 것에서 유래한 무사, 다이묘를 부르는 관용적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동해도 제일의 무사, 다이묘라는 뜻.[63] 주로 거론되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장남 노부야스를 자진시킨 사건이다. 물론 노부야스가 책 잡힐 짓을 했고, 숙청을 주도한건 사실 이에야스였다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이 일로 노부나가에게 불편한 감정이 생겼을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64] 혹은 노부나가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천하의 지배자가 된 자기가 누군가의 밑에 있었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의 거성이었던 기후성과 키요스성을 폐성한 일 역시 전임자 지우기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있다.[65] 다이묘가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 적통이 없다면 가문이 끊기기 때문에 재빠르게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하는 것.[66] 즉, 이 정책들은 모두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들이다. 원래 이런 정책들은 권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평은 좋지 않겠지만 대신 후대에는 나라의 기틀을 닦는 행위로 보기 때문에 대체로 좋은 평을 받는 편이다. 더구나 중앙집권이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 한참 미흡한 일본의 상황에서 보면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고 이를 할 만한 인물이 이제 막 천하를 통일한 이에야스 정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밀어붙였을 테지만 대신 당대에 악평은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67] 하지만 이에야스는 사공육사(세금이 수확량의 40%) 정책을 시행했는데 사실 이건 굉장히 높은 세율이긴 하지만 이전까지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70%까지 세금을 거둔 곳도 있었으므로 경제 사정은 오히려 좋아졌을 것이다.[68] 이 같은 인색함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가모 우지사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천하를 잡을 인물로 이에야스 대신 마에다 토시이에를 꼽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너무 쪼잔해서 부하들에게 은전을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런데 정작 우지사토는 부하들에게 은전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베풀었다고 토시이에에게 비판받은 인물이다. 에초에 토시이에도 가신들에게 봉록을 꽤나 쪼잔하게 주던 인물이었다.[69] '인생오십년'으로 시작하는 타이라노 아츠모리의 노래 아츠모리를 즐겨부르던 노부나가는 50세를 채우지 못하였고, 이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보다 12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12년 더 장수한 특이한 연관성을 가진다.[70] 실제로도 신겐과의 싸움은 자신 가문 가신들과 오다 가문의 가신들이 말렸는데 괜히 객기 때문에 싸웠다 깨진거다.[71] 이에야스가 화를 내면서 시동의 깃대를 칼로 베어버리는 장면은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이에야스 역 배우의 연기가 백미.[72] 일본 및 한국 대하드라마에서도 등장했지만 손톱을 물어뜯는 장면이 등장하는 시간이 하필 식사 시간이라 방송사에 격한 항의가 들어와서 편집되거나 생략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