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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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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1920년 4월 1일 ([age(1920-04-01)]주년)
창간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창업주 김성수
대표자 김재호, 임채청
임원진 대표이사 회장 김재호
발행·편집·인쇄인 · 대표이사 사장 임채청
부사장 이희준
출판편집인 · 상무 김정훈
업종명 신문발행업, 정기간행물출판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임직원 659명 (2020년 4월)
매출액 2,833억 7,734만 9,075원 (2022년 연간)
영업이익 127억 4,189만 6,136원 (2022년 연간)
순이익 41억 5,763만 7,182원 (2022년 연간)
최대주주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지분 24.14%)
모기업 동아미디어그룹
사이트 <colbgcolor=#008186><colcolor=#fff> 파일:동아일보 아이콘.svg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Threads 아이콘.svg 파일:네이버 포스트 아이콘.svg
유튜브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구독자 3.00만명[A]
조회수 20,317,658회[A]
가입일 2016년 1월 31일

1. 개요2. 사시(社是)3. 사가
3.1. 옛 버전3.2. 새 버전
4. 사옥5. 오너 일가6. 지배 구조7. 상징8. 역사9. 성향10. 논란 및 사건사고11. 기획·특집기사12. 자매지 및 정기간행물13. 주관 대회
13.1. 현존13.2. 폐지13.3. 무산
14. 산하기관15. 공익재단16. 제휴 신문사17. 여담18. 관련 인물19. 관련 문서20. 관련 문헌21. 역대 임원
21.1. 상임고문21.2. 명예회장21.3. 회장21.4. 부회장21.5. 사장21.6. 부사장
22. 역대 법정등록인
22.1. 발행인22.2. 편집인22.3. 인쇄인22.4. 출판편집인
23. 역대 주요 간부
23.1. 편집감독23.2. 주간23.3. 주필23.4. 편집/논설상임고문23.5. 논설고문23.6. 논설주간23.7. 논설위원실장23.8. 수석논설위원23.9. 수석해설위원23.10. 편집고문23.11. 편집국장23.12. 출판국장

[clearfix]

1. 개요

당신의 아침이 바뀝니다
동아일보 1990년대 슬로건
세상을 보는 맑은 창, 신뢰받는 신문 東亞日報
동아일보 비전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3]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앙 일간지 중에서는 서울신문[4]조선일보[5]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가 오래된 일간지다. 처음부터 민족지로 창간되었고 조선인들을 잘 대변해 주어서였는지 1928년 총독부 경무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발행 부수는 40,868부로 매일신보(23,946부), 조선일보(18,320부)보다 많았다.

전라도 지역의 부호였던 김성수가 설립하였다.[6] 그래서인지 1980~1990년대에는 "전라도 사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를 본다"라는 말도 있었다. "동아일보"라는 명칭은 창간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유근이 지었다.

사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부와 결탁한 조선일보가 급속한 성장세로 구독 부수 1위를 기록하며 신문 업계의 원톱이 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일보와 더불어[7] 구독 부수나 매체 영향력 면에 있어서 쌍두마차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 신문이었고, 사실상 신문 업계에서 2위 없는 압도적 1위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21세기 들어선 이전보다 위상이 많이 줄어들었다. 일례로 2019년 기준 신문 열독률이 2.6% 수준에 불과하다.[8] 그래도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이른바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우파 성향의 3대 신문사로 꼽힌다.[9]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종이신문 산업 자체가 하락세를 타면서 동아일보도 유료부수나 신문의 열독률이 급격하게 감소해 2019년 기준 발행부수는 92만 부, 유료부수 73만 부이다. 그러나 이 통계도 부수가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 중론이라 실제 유료부수는 더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부풀려진 것은 거의 대부분 신문사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순위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노조는 미가맹이다. 원래는 언노련 소속이었지만 2000년 민주노총 산하로 산별노조화되면서 탈퇴했다.

2. 사시(社是)

파일:동아일보_창간호.jpg
▲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동아일보의 사시
1. 본보는 [ruby(民族, ruby=민 족)]의 [ruby(表現 機關, ruby=표 현 기 관)]으로 자임함
2. 본보는 [ruby(民主主義, ruby=민 주 주 의)]를 지지함
3. 본보는 [ruby(文化主義, ruby=문 화 주 의)]를 제창함
동아일보 사시
주지를 밝히노라
[ruby(主旨, ruby=주 지)]를 [ruby(宣明, ruby=선 명)]하노라

(1)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을 자임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한전체로서의 2000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하니, 그 의사와 이상과 의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고자 한다.

(2)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는 [ruby(國體, ruby=국 체)]니 [ruby(政體, ruby=정 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다.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국내 정치에 적용하면 자유주의며, 국제정치에 적용하면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평등주의요, 경제조직에 적용하면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가운데 친목과 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체에 있어서는 정의와 [ruby(人道, ruby=인 도)]를 승인한 가운데 평화와 [ruby(聯結, ruby=연 결)]을 의미한다. (중략)

(3)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함과 오묘함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하게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높이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며 생존의 가치라고 사유한 까닭이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사 중 일부[10]

3. 사가

3.1. 옛 버전

작사는 춘원 이광수, 작곡은 김영환이 맡았으며, 1926년부터 제정되어 1985년까지 사용했다.
1절
삼천만 가슴속에 졸던 자유혼
깨어라 소리치어 자유의 소리
나날이 새힘자라 새는 날마다
영원히 외치도다 자유의 소리

2절
이 붓대 보았는가 정의의 붓대
의 아닌 것 보고는 못 참는 붓대
차라리 의에 싸워 꺾일지언정
곧고 곧은 그 절개 꺾지 못하네

3절
횃불은 들렸도다 진리의 횃불
삼천만 우리 강산 두루 비치러
옛 역사 새 정신 타는 광명은
천만대 내리 전할 진리의 횃불

4절
원컨대 복이 되어 사랑의 꾸리[11]
끝없는 실을 끌고 동포의 가슴
낱낱이 들어나어 삼천만 혼을
짜리라 새 조선의 빛난 깃발로

후렴
동아일보 동아의 종소리 자유종 소리
삼천만 자유혼의 외치는 소리
만국에 울려라 만세에 울려라

3.2. 새 버전

1985년 창간 65주년을 맞이해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강인섭, 작곡은 김성태, 편곡은 장일남이 맡았다.
1절
동녘의 빛이어라 민족의 길 밝힌 등불
삼일정신 받들어 새벽을 헤쳐오다
밝히리라 온누리에 자유의 횃불
누구도 영원한 그 앞을 막지 못하리

2절
나라가 없을 때도 깨어있던 종소리
진리와 함께 가는 보람찬 길이로다
외치리라 온누리에 민주의 소리
누구도 의로운 그 붓은 꺾지 못하리

3절
아― 세계로 뻗어가는 겨레의 기상
시대에 앞장서서 문화의 발을 간다
알리리라 진실이 무엇인가를
천 년 뒤 만나도 살아있는 글자기를

후렴
동아일보 겨레의 얼 나날이 새로와라
나라 위한 바른 말 역사에 전하리라

4. 사옥

파일:external/www.museum.seoul.kr/img_07_97.gif
파일:일민미술관.jpg
파일:청계천 동아일보.jpg
광화문 동아일보 구사옥[12]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세종로)
세종로 동아일보 동아미디어센터[13]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파일:충정로동아일보사옥.png 파일:DDMC.jpg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14]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충정로3가)
상암동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
(DDMC)
[15]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75 (상암동)
건축적으로는 동아일보 미디어센터 빌딩 옆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언론사 건물인 구사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데,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설계는 일본인이 담당했고 1926년에 지어졌다. 구사옥은 없고 신사옥만 번듯한 조선일보, 일찍 폐간되어 농협으로 사용되는 구사옥만 남아있는 조선중앙일보[16]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파일:동아일보100주년.jpg
2019년 3월 20일부터 2020년 12월 31일까지 프랑스현대 미술가 다니엘 뷔렌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사옥의 외벽을 미술 작품으로 바꿨다. 한국의 색, 동아일보 X 다니엘 뷔렌

5. 오너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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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배 구조

주주명 보유주식수 지분율
인촌기념회 724,319 24.14%
김재호 666,491 22.22%
자기주식 457,759 15.26%
기타주주 1,151,431 38.38%
총계 3,000,000 100.00%
동아일보 주요 주주 목록
(출처: 2023년 감사보고서)
1920년 창간이래 동아일보의 주주는 수차례 급변되었다. 1945년 광복과 분단, 1950년 6.25 전쟁 등으로 주식 소유자들이 크게 변경되었고, 주식 가치도 급변하였다.

7. 상징

파일:동아일보 로고.svg
▲ 동아일보의 로고

왼쪽의 청록색 원형 로고는 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고 타원 속에 한자 '(동녘 동)'이 가로세로로 반복된 형태이며 45도로 기울여 보면 亞(버금 아)자 형태도 드러나는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꽤 복합적이고 모던한 형태의 로고다.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로고이다. 전혀 관계없는 동해상사고속의 상표도 이거랑 유사하지만, 색상이 다르다.

창간 당시 서화협회에 위촉해 협회 회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東'자를 도형으로 도형화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이것을 본사가 채택함으로써 결정됐다. 처음에는 배달부의 배달용 덧저고리[17]에 마크로 새겨 사용했다. 동아일보 지면에 로고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2년 10월 15일 자 3면으로,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렸던 제3회 전선(全鮮) 야구 대회에 동아일보에서 제정한 우승기 사진이 실렸다.#

8.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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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향

21세기 기준 동아일보는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신문 중 하나이다. 같은 보수 언론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가 주로 북한 같은 안보 이슈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중앙일보가 경제 이슈를 좀 더 다루는 데 비해 동아일보는 문화 분야를 더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 창간 당시 사시(社是)도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였다.

보수주의 신문으로 분류되면서도, 모두까기 또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 정치계도 비판하는 칼럼이나 사설을 게재하는 경우도 잦다.[18] 이때는 홈페이지 기사 댓글에서 강성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기고자에 대한 비난이나 ‘똥아일보’, ‘사설을 쓴 기자는 누구냐’ 같은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민주당계 정당이나 진보정당에 호의적이지는 않다.[19]

그러나 사실 2001년 세무조사 사건 이전까지는 민주당계 지지 성향을 가지고 있던 때도 있었다.[20]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이 깊었는데, 애초에 동아일보가 호남과 연관이 있는 기업이다보니 김대중과 연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이낙연이 기자 생활을 동아일보에서 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고,[21] 서중석이 10여 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는 송건호도 원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6개월 정도 했었다. 유시민이 정치 기고를, 진중권이 2000넌대 중반 문화면에 기고한 적도 있다.

동아일보는 언론탄압이 일상이던 시절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찍혀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을 겪기도 했으며,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5월 19일부터 5일간 전두환 정권의 검열에 저항하는 의미로 사설을 싣지 않았고, 언론통제 국면 속에서도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지면을 할애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바 있었다. 실제 6월 항쟁 당시에도 시위대들은 동아일보를 읽었고 당시 친군부 성향이던 경향신문은 발견 즉시 불 태우는 수준이었다.[22]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지역기반이 같은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 줬으며,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도 동아일보의 창업주였던 김성수를 적극적으로 감싸줬는데, 실제로 김대중은 1980년대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동아일보의 창업주이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발전시킨 김성수친일파라며 규탄했을 때 김성수를 옹호해 주면서 그 고대생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촌[23]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 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김대중,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동아일보 특별기고

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는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라고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를 칭찬했다.

김대중이 1987년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로 여러 차례 위기에 빠졌음에도 제1야당을 전두지휘하는 인물이자 차기 대권주자로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호남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유력 언론이던 동아일보가 김대중을 비호했기 때문도 있었다. 90년대 당시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대형언론사나 국영방송사인 MBC, KBS의 논조를 보면 김대중에게 비판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동아일보와 한겨레만이 야권과 친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야권이 버틸 수 있었고, 그 덕에 정권 교체도 이루었다는 것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사이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동아일보는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도 잘못됐다 싶은건 비판을 이어나갔는데,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2001년 김대중 정권은 언론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나선다.[24] 그리고 이 세무조사 때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부인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껴 투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동아일보의 관계가 확 틀어지게 된다.

21세기 들어 동아일보는 친기업 성향도 드러내는데, 그 배경에는 삼성그룹이 있었다. 뭔 소린고 하면,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동아일보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삼성생명으로부터 500억 긴급대출을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대출의 배경에는 삼성 오너 이건희와 동아일보 오너 김병관의 사돈 관계가 있었던 것.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김재열이 1999년 이건희의 2녀인 이서현과 결혼한 것이다. 김재열은 이후 제일모직 사장, 삼성엔지니어링 경영기획총괄 사장을 거쳐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 된다. 이 때문에 중앙일보만큼이나 삼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으로 꼽힌다.[25] 그리고 외환위기로 인해서 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개인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26]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기업들 중에서도 삼성 광고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의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오해를 받는 일이 되었다.[27][28]

이후에는 2000년대 뉴라이트 등장 때 특집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주기도 했으며[29], 특히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이명박 정부 시기 보수 노선이 상당히 강조되면서 이시기에는 조선일보를 안 좋은 의미로 뛰어넘는다는 일각의 평까지 듣기도 했다. 이는 상대성은 있지만 어쨌든 박근혜 정권 때도 계속되었고, 19대 대선에서도 자유한국당홍준표 후보를 거드는듯한 기사가 제법 나왔다.

그러다 2017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초기에는 비판의 수위도 상당히 낮아져서[30] 과거 친민주당 성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었으나[31], 문재인 정권의 지지율이 이전보다 떨어진 2018년 말 정도부터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민주당 정권에 비판적인 보수 신문으로 돌아왔다.# 다만,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전두환에 매우 비판적이다.[32]

윤석열 대통령 집권 이후에는 조중동 중에서 제일 윤석열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디어오늘에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2022년 5월 9일부터 7월 8일까지 35건의 윤석열 대통령 비판 논조의 사설을 게시하였는데, 이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각각 10건의 비판 사설을 게시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수치이다.# 이후에도 윤석열 정부를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자주 언급되는 것들을 몇 개 꼽자면 친윤-검찰 출신의 대거 등용, 여야 합치 의지 부족, 대통령실의 지속적인 여당 간섭, 대국민 정책 홍보 부족, 정책 일관성 부족, 거친 발언, 도어스테핑 중단이나 전기요금 인상 유보 등이 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좌우 안 가리고 모두까기 중이다. 외교 분야에서는 한미동맹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한편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한 섬세한 실리 추구를 강조하고 있다. 대일 외교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의 결단에 발맞춰 일본은 김대중-오부치 선언 발언 재언급(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등 마땅한 움직임을 보이라’는 논조의 글이 꾸준히 게재되었다. 한편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사설을 통해 일본 정부의 낮은 신뢰도도 문제였지만 우리 정부가 "그간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만 할 뿐 다른 의견에 대해선 괴담이나 선동이라고 일축하기에 바빴다"며 양비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2017년 이후로 보수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많이 잃고 보다 중립적인 위치로 논조가 옮겨가다 보니, 좌파로부터는 여전히 조중동의 하나라고 비판을 받고 우파로부터는 한경오와 다를 바 없는 좌파 신문이라고 비판을 받는 웃픈 상황이다.

10. 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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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획·특집기사

12. 자매지 및 정기간행물

13. 주관 대회

13.1. 현존

13.2. 폐지

13.3. 무산

14. 산하기관

15. 공익재단

16. 제휴 신문사

17. 여담

‘구문공신(口文功臣)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구문[36]을 받고 공신이 된 이완용이 지옥에 들어갔으니 장래에 지옥마저도 팔아먹을지 걱정된다.)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1면 횡설수설 기사 중.#
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1926년 2월 13일[37] 동아일보 1면 사설 기사 중.[38]

18. 관련 인물

가나다순

19. 관련 문서

20. 관련 문헌

21. 역대 임원

21.1. 상임고문

21.2. 명예회장

21.3. 회장

21.4. 부회장

21.5.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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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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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영효
제2대

김성수
제3대

송진우
직무대리

허헌
제4대

이승훈
제5대

김성수
제6대

송진우
직무대리

양원모
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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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송진우
제9대

김성수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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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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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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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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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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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김학준
제22대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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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부사장

22. 역대 법정등록인

22.1. 발행인

22.2. 편집인

22.3. 인쇄인

22.4. 출판편집인

23. 역대 주요 간부

23.1. 편집감독

23.2. 주간

23.3. 주필

23.4. 편집/논설상임고문

23.5. 논설고문

23.6. 논설주간

23.7. 논설위원실장

23.8. 수석논설위원

23.9. 수석해설위원

23.10. 편집고문

23.11. 편집국장

23.12. 출판국장



[A] 2023년 9월 26일 기준[A] [3] 창간호.[4] 1904년 창간.[5] 1920년 3월 5일 창간.[6] 사실 김성수의 양부인 김기중 때부터 교육, 계몽 사업 같은 인재 양성 기조는 있었다. 참고로 김성수의 친부는 김경중, 양부는 김기중인데, 김기중이 김성수의 큰아버지다. 아들이 없어 동생 넷째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킨 것이다.[7]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일보의 위상은 상당해서 1990년대 초반에도 구독 부수가 상당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망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은 후발주자인 한겨레 신문보다도 못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일보 문서 참조.[8]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언론 수용자 조사.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종이신문 전체의 상황이라서 열독률 1위 조선일보도 3.3%에 불과하고 한겨레는 0.7%에 불과하다. 물론 이는 종이신문의 얘기이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의 독자층도 미미하다는 뜻은 아니다.[9] 조중동으로 묶인다지만 보수 3대 신문사라기엔 이질적인 부분도 있는데, 동아일보는 후술 되어있듯 20세기엔 오히려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민주당계 정당도 이념 정당이 아닌, 지역 정당의 성향을 가진 데다가 지금에 비해 중도 우파적인 성향을 띠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10] 국역본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을 참조했음. 원문은 이곳 참조[11] 둥그런 실타래를 뜻하는 순우리말.[12] 현재는 일민미술관신문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3] 채널A와 사옥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광화문 구사옥의 바로 오른쪽에 있다.[14] 신동아를 비롯한 동아일보의 각종 자매지들이 여기서 출판된다.[15]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동아미디어그룹이 건설한 사옥이다. 청계천의 동아미디어센터와 달리 채널A가 중심이다.[16] 현재 조중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홍진기 교수의 중앙일보는 중앙일보빌딩(흑갈색건물로 개국 초기 JTBC의 사옥으로도 쓰였던 그 건물) 옆에 구 사옥이 존치 중이지만 재개발로 곧 철거될 예정이며, JTBC빌딩(DMCC 타워)가 세워지기 전까지 구 사옥에 임시로 중앙일보가 세들어 사는 케이스는 있긴 있었다.[17] 당시엔 일본어로 '핫피'라 했음.[18] 예시 1 예시 2 예시 3 예시 4[19] 한편 정치극단주의가 공고해지고 있는 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논조 때문에 되려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성향이 한쪽으로 분명한 충성 독자들은 보다 논조의 색깔이 더욱 분명한 조선일보, 한겨레 등지로 옮겨간다는 것. 중앙일보 같은 경우에도 방송과 신문이 다른 서로 다른 성향의 목소리를 내더니, 양쪽에서 모두 이도저도 아닌 포지션이 되었다.[20] 사실 동아일보는 대북정책문제, 노동문제 등에선 과거에도 진보보단 보수에 가까운 신문이었기에 정도의 차이일 뿐 진보 신문은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런 인식은 사실 일부 독자들에겐 현재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경향신문 등도 종종 듣는 소리인데다 민주당계 정당부터가 북미식 리버럴에 가깝지(애초에 민주당도 처음은 보수정당으로 시작했고 김성수가 그 민주당계의 주요 멤버 중 하나였다) 유럽식 사민주의 진보정당은 아닌지라, 어찌됐든 당시 한국식 진영 정치에선 진보(정확하겐 친민주) 신문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었다. 김성수가 이승만이랑 사이가 틀어져 반독재 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력도 있다보니 확실히 독재 정권이랑은 거리감이 있는 신문사긴 했다.[21] 이후 이낙연은 자신을 아끼던 김대중을 따라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다만 오늘날 동아일보는 보수 성향이다 보니, 이런 과거를 모르는 안티들은 이낙연의 과거 전력을 가지고 진보의 적이라고 호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22] 2017년 말 개봉한 영화 1987에서도 동아일보가 등장하며 엔딩크레딧에도 로고가 나온다. 사측에서도 이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23] 김성수의 호.[24] 애초에 언론사 세무조사는 군부독재정권 때부터 이미 5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고 최초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 시절에만 중단되었었기 때문에 기업이라면 원래 받아야 할 세무조사를 시행한 것 뿐이었다. 다만 당시 김대중이 추진하던 대북사업 관련 기업에는 전례가 없던 사업이니만큼 일단은 세무조사를 자제하라고 국세청장이 지시했다거나 기자 성한용의 2001년 저서 "DJ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를 보면 당시 집권층 일각에서 특정 신문사들 이름을 거론하며 "당장 작살내겠다", "두세 달 내에 그냥 안 둔다. 국세청 상속세로 뒤집어버리겠다."처럼 정권의 호응도에 따라 세무조사의 강도를 조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발언들도 있긴 했다. 물론 이 대상에 동아일보가 포함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이런 류의 카더라 기사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떠도는 소리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무조사가 양쪽의 사이를 벌려놓은 매개체가 되었다.[25] 물론 엄밀히 따지면 중앙일보는 이미 홍석현 일가 체제로 독립한 상태긴 하다. 2010년대 중앙일보 계열 JTBC가 박근혜 정권을 거세게 비판하자 박근혜가 삼성 이재용을 불러 삼성이 정치에 개입하려하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데, 이재용은 자신을 이렇게 질책한건 아버지 빼곤 박근혜가 처음이라며 이때 이미 중앙일보는 삼성에서 독립한 계열사인데 왜 나한테 그걸 따지냐고 의아해했다고 한다.[26] 대부분의 가정이 돈이 쪼들리면 제일 먼저 신문을 끊는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 직후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당시 한화그룹은 가지고 있던 경향신문 지분을 모두 포기하고 그냥 독립시켜 버린다.[27] 시사인 창간으로 이어진 2005년 시사저널 파업 사태도 삼성 비판 기사를 경영진이 (연락도 안 왔는데) 알아서 잘라내면서 촉발된 것이다. 당시 시사저널 사장이 삼성(중앙일보) 출신인 금창태였는데, 삼성에 저자세로 기었다는 후문.[28] 하지만 삼성그룹이 아무리 광고주라고는 해도, 진실을 보도하는 일이 일인 특성상 언론은 통제할 수 없다. 범삼성가 대한 비판 기사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진실은 어느 권력보다도 위에 있다는 게 현실이란 사례 증명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29] 물론 뉴라이트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상 자체의 모순과 한계로, 2020년대 와선 버린 자식 취급 중이다.[30] 비판을 넘어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 식의 일종의 아부성 사설도 실릴 정도였다.[31]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동아일보 지령 3만호 기념 축사를 보내기도 했다.[32] 지만원이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광고를 동아일보에 실기도 했지만,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결국 광고가 내려졌다.[33] 장기기증에 대한 이야기[34] 산화한 제복 공무원들에 대한 이야기[35] 응급 병상이나 필수의료 의사 등이 없어 병원을 찾아 떠돌다 응급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36]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37] 희대의 매국노 이완용이 죽고 난 후 이틀 뒤의 기사다.[38] 현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이 기사를 볼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위 사설을 포함해 당시 동아일보의 ‘이완용 비난 부고 기사’들을 모조리 압수하고 이를 삭제했기 때문이다.[39] 위키백과는 실명제가 아니기에 주민번호는 커녕 휴대전화 인증도 필요 없다.[40] 배포처 :건국대학교 - 경영관 2층 경영학과 사무실 앞. 고려대학교 - LG-POSCO 경영관 3층 수당학술정보관. 서울대학교 SK경영관 (58동) 1층. 성균관대학교 - 경영관 4층 경영경제대 행정실. 연세대학교 - 신경영관 4층 경영대학 행정실 앞. 서울시립대학교 - 미래관 5층 경영대학 행정실 내. 간혹 미래관 3층 경영경제전문도서관 대출데스크에 비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최신호를 잘 가져다 놓지 않는 듯하다. 포항공과대학교 - 무은재 기념관 101호 앞, 충남대학교 - 경영학부 사무실(경상관 233호) 앞. 한국외국어대학교 - 경영학부장실 앞.[41] 나무위키를 떠오르게 한다는 이 있으나, 적어도 이 나무위키를 포함한 위키는 기자가 직접 대답하는 응접실 코너와는 달리 여러 명의 사람들이 수정하기 때문에 집단지성에 의한 자정작용으로 인해 잘못된 내용을 비교적 빠르게 고칠 수 있고, 출처도 링크가 있으면 주는 것도 있다. 1920~30년대 당시 기자는 엘리트이기 때문에 맞는 대답이 있기는 하나 틀린 대답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술이 뭐냐는 질문에 한 기자가 독일 브레멘시 시청 지하의 와인셀러에 있는 '루-데쓰하이메르'라는 백포도주라고 대답했는데, 브레멘시 시청 와인셀러가 1653년부터 포도주를 모은 건 맞지만 그 백포도주는 1653년이 아닌, 1727년 주조된 Rüdesheimer Apostelwein(뤼데스하이머 아포스텔바인)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당시는 인터넷이 없는데다가 독일은 한반도에서 멀어서 이 정보를 알기 힘들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답변에 오류가 조금 있는 건 넘어가더라도 말투와 300년 동안 원가에 복리계산을 했는가 보다는 대답이 웃기다는 이 있다.[42] 인도와 필리핀의 독립 시기를 물어보면서 간접적으로 조선의 독립 시기를 돌려서 말했고, 현대에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브나로드 운동, 손기정, 빌헬름 2세, 아돌프 히틀러 언급, 에스페란토 등이 나온다.[43] 동아일보 가문 참조[44] 두 작품 모두 심훈이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후 나온 작품인데, "탈춤"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상록수"는 동아일보 공모전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이다.[45]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당시 해직기자들이 주도하여 창립하였다.[46] 초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임명 후 퇴사.[47] 퇴사 이후 1993년에 강원일보 사장 역임. 1996년 작고.[48] 퇴사 이후 문화일보 사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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