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2·10·12대 이라크 왕국 총리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رشيد عالي الكيلاني | |
출생 | 1892년 |
오스만 제국 바그다드 빌라예트 바그다드 (現 이라크 바그다드) | |
사망 | 1965년 8월 28일 (향년 72~73세) |
레바논 베이루트 | |
정당 | 민족 형제당 |
재임기간 | 제2대 총리 |
1933년 3월 20일 ~ 11월 9일 | |
제10대 총리 | |
1940년 3월 31일 ~ 1941년 2월 3일 | |
제12대 총리 | |
1941년 4월 13일 ~ 5월 30일 |
[clearfix]
1. 개요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는 당시 가장 인기 있고 지지 받던 이라크 왕국의 정치인이자 총리였다.2. 생애
2.1. 어린 시절
1892년 가일라니는 매우 보수적이고 유서 깊은 수니파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몇년이 지나 바그다드 법학교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후 당시 거의 대부분의 법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변호사로 일했다.2.2. 젊은 시절
1924년 민족주의자 야신 알 알하셰미 총리에 의해 이라크 왕국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 내무부 장관까지 역임하였다.가일라니와 야신 알 알하셰미 총리는 두 가지 이념을 공유했는데 이는 민족주의와 반영국주의였다. 그들은 누리 알 사이드 총리가 서명한 영국-이라크 통행권 조약(1930년)을 파기했고. 이에 힘입어, 야신 알 알하셰미과 함께 민족 형제당[1]을 창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3년 가일라니는 총리가 되지만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라크 왕국의 내부적인 문제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겨우 8개월밖에 총리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1940년 3월 31일 그는 다시 총리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은 이미 시작된 뒤였다. 또한 이라크 왕국은 국왕 가지 1세의 죽음을 겪었다.[2]
압둘-일라 섭정은 영국을 지지했지만, 가일라니의 이미 커질대로 커진 권력은 막을수 없었는데, 섭정은 연합국 병력이 이라크를 통과할수 있도록 군사통행권을 허가했지만, 민족주의자 총리 가일라니는 이것을 거부했고, 심지어는 추축국인 이탈리아 왕국과 갑자기 단교까지 하는 이해할수 없는 외교 정책등등으로 이 정책을 시작으로 가일라니의 폭정이 시작됐다.
그후, 전 이라크 왕국 총리이자 당시 법무부 장관인 나지 샤우캇을 터키로 보내 당시 주 터키 독일 대사로 있던 프란츠 폰 파펜과 만나, 독일의 지지를 얻었고, 지지를 받는 대가로, 이라크는 아프베어의 중동 기지가 되었다.
2.3. 1941년 쿠데타
1941년 쿠데타 성공을 발표중인 가일라니와 아민 알후세이니[3] |
이렇게 막나가던 가일라니의 이라크는 곧 영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얻어맞았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이 지고있다는 소식은 가일라니의 지지율을 떨어트렸다. 1941년 1월 31일 결국 가일라니는 압둘-일라 섭정의 압력으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영국 정부와 지지자들이 가진 그에 대한 불신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번에는 황금 광장의 구성원들과 함께 가일라니는 섭정을 암살하고 또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3월 31일 압둘-일라 섭정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고 이라크를 탈출했다. 1941년 4월 1일, 가일라니는 그의 지지자들과 황금 광장의 구성원들과 쿠데타를 시작했다. 이틀후, 가일라니는 국가 방위 정부를 설립하고, 그리고 섭정 주도로 돌아가던 나라를, 총리 체제로 바꿨다.
이후 권력을 다시 잡은 가일라니는 이라크 포병 부대를 영국군이 사용하는 하바니야 공군 기지로 보내 포격하기 시작했고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가만히 볼리가 없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아치볼드 웨이벌 원수를 파견해 하바니야 공군 기지 방어를 명령했다.
2.4. 영국-이라크 전쟁
한편 하바니야에서는 이라크군이 영국 공군에게 모든 훈련 및 작전을 중단하라고 통보했다. 5월 2일, 하바니야 공군 기지 사령관 해리 조지 스마트는 이라크군의 통보를 가볍게 씹고, 오히려 반격을 개시했다. 거기에다 웨이벌 원수의 지원군까지 온다는 소식을 둘운 이라크군은 팔루자로 도망가버렸다.[4] 5월 29일, 가일라니의 집무실에서 보일 정도로 영국군이 가까이 오자, 가일라니는 빨리 망명할 준비를 하였고, 다음날 이란 제국으로 망명해버렸다.이틀 뒤인 5월 31일, 이라크와 영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뒤이어 압둘 알-일라 섭정도 6월 1일에 이라크로 귀국했다.
2.5. 망명 생활
가일라니는 이란으로 망명했지만 오래 머무를 수 없었는데 1941년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하자 가일라니는 총리 시절 단교한 이탈리아로 갔다.그후 이탈리아 왕국을 통해 나치 독일 베를린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그리고 베를린에 아민 알후세이니와 이라크 망명 정부를 설립했다.
히틀러를 만나는 가일라니 |
2.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8년 이번에는 압둘 카림 카짐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시도하다 발각되었고, 이라크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카짐은 그를 죽이진 않고 레바논으로 추방시키는 것으로 형을 대체했고 가일라니는 죽을 때까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살았다.3.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에서 이라크로 파시스트가 집권하면 지도자로 나오며, 국가명은 알무탄나 이라크. 소속 정당은 황금 사인조으로 나온다.
4. 여담
1958년,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만났다. |
- 사시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