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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6 23:00:24

르완다 내전

르완다 학살에서 넘어옴
1. 개요2. 분쟁의 시작3. 증오의 순환4. 르완다 학살
4.1. 기간4.2. 주모세력4.3. 무기4.4. 원인4.5. 피해세력4.6. 만행들
5. 르완다 애국전선(RPF): 본대와 합류 후, 수도 함락6. 유엔군의 행적
6.1. 벨기에: 병력 파견6.2. 프랑스: 학살 조장
7. 처벌
7.1. 배후자7.2. 가해자
8. 이후 상황
8.1. 벨기에: 병력 철수8.2. 유엔: 병력 감축
8.2.1. 평화유지군의 활약
9. 르완다 학살 이후10. 대중매체

1. 개요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부룬디에서 벌어진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의 인종 간 갈등. 르완다 사태라고도 불린다.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질병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고 1994년 여름부터 불과 몇 개월 동안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100일만에 800,000에서 1,000,000명이나 죽어 나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정치상 목적으로 특정한 인종에 대한 말살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르완다 집단학살(Rwanda Genocide)이라고도 부른다.

2. 분쟁의 시작

원래 르완다부룬디는 후투족과 투치족 둘로 나뉘지 않고 여러 부족들이 각자 살아가던 원시사회였다. 물론 당시에도 투치족이나 후투족이나 트와족 간의 구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처럼 영향력이 약한 신분제에 가까웠거나, 농사를 짓는지 가축을 기르는지의 여부로 나뉘었거나, 혹은 옆에 있는 부족 마을 정도의 취급이었고 기본으로 언어와 문화와 풍습도 어느 정도는 공유했기에 쌩판 다른 부족들끼리 묶이던, 아프리카의 여타 국가와 다르게 르완다와 부룬디는 잘만 했으면 하나의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식민지로 접수한 벨기에가 식민지 내의 부족들이 한데 뭉쳐 저항하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부족들을 분류하고, 또한 이를 기준으로 차등 대우하면서 재앙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분할해서 통치하라'는 것은 고대부터 강대국들이 피지배민들을 이이제이시키는 고전 수법이다. 즉, 특정한 그룹에 특혜를 몰아주고 여타 그룹은 소외시키거나 학대하여 이들이 서로 싸우게끔 조장해 설령 저항하더라도 각개격파가 용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당장 일본 제국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을 상대로 문화통치를 하면서 조선의 우익 지식인층과 좌익 노동자들의 분열을 유도한 바 있으며, 현재 아프리카와 동남아의 수많은 내전과 분열은 대부분 19세기 이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시절 이러한 저의로 이간질한 것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 기준은 바로 콧대 길이 혹은 재산으로, 제국주의자들의 부족 구분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알려 주는 좋은 사례로 뽑힌다. 사실 이 방식은 잉글랜드 국적의 탐험가 스피크가 했었던 것이다. 스피크는 당시 만연했던 인종주의 편견을 겹쳐보면서 일지에 대다수가 상위층이었던 투치족을 키도 크고 정치상으로 민첩하다고 적어 놨고 이후 귀국과 동시에 르완다와 부룬디의 생활상이 유럽에 전해지게 된다. 그 뒤 점차 투치족은 우월한 부족, 후투족이나 트와족은 열등한 부족이란 식으로 여론이 형성됐고, 이는 후의 식민통치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다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 내의 갈등을 틈타 독일 제국식민지로 삼고 통치하게 되었는데 독일 제국은 르완다와 부룬디가 풍요로운 땅이라 삥뜯을 게 있다고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내륙 깊숙히 박혀 있었기에 착취는커녕, 독일 제국 본토에서 이민자를 내보내기에 수월치 않아서[1] 선입견이 있었긴 해도 투치족과 후투족이 분리된 부족이라는 인식을 퍼트리고 현지 족장이나 왕에게 지원을 보내서 상징을 표현한 건축물을 세우게 하고 그 대가로 자원을 얻어먹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독일 제국은 벨기에 수준으로 한쪽을 차별하지는 않았다.[2]

그러나 1918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 독일 제국 대신 벨기에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위임통치하게 되었는데 벨기에는 함족 이론을 내세워 폭력적인 방식으로써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후투 족장을 강제로 폐위하고 후투 왕국을 해체했으며, 토지 개혁 명목으로 후투족의 땅을 몰수하고, 소수 상류층인 투치족과 다수의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으로써 후투족과 투치족을 분열하게 해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유효하게 지배했다. 게다가 식민지 지배가 고착화하면 여기 부역하는 놈들도 나오게 마련이어서, 강제노동 정책들과 무거운 세금이 투치족의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반발하는 투치족이 딱히 없었다. 당시의 많은 젊은 후투족은 높은 세금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우간다로 이주하기도 하였지만, 우간다도 헬게이트인 건 마찬가지. 1935년에는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 귀화한 외국인으로 식별하는 식별 카드를 도입해 계급 간 이동을 막았으며 이렇게 쌓여진 서로에 대한 편견과 증오는 외양으로 구분된 부족 사이의 선을 고착화했고, 이러한 감정은 독립 후에도 이어졌다.

3. 증오의 순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완다는 독립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후투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였고, 기존에 투치족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후투족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

1959년 르완다 왕국이 세워졌지만 후투족의 반투치 감정이 촉발되면서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도 후투족과 투치족의 소규모 학살이 있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스운 점은 그동안 투치족을 우대하던 벨기에는 이제 와서 후투족을 지원하여 투치족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결국 투치족이 후투족에게 밀려나면서 국왕 키겔리 5세는 폐위되어 망명을 하고 1961년 1월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1962년 7월 벨기에가 독립을 승인하면서 완전한 독립을 달성한다.

독립 후에 많은 투치족이 외국으로 쫓겨났고 1963년 이웃나라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여 이에 대한 후투족들의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쫓겨난 이들 중 군주제를 지지하던 투치족들은 끈질기고 아무리 죽여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바퀴벌레라고 부르며 게릴라 활동을 했고, 이후 바퀴벌레는 투치족에 대한 멸칭으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1966년에 부룬디에서도 왕정이 뒤엎어졌으나 그쪽은 대체로 투치족들이 득세하는 양상이었다. 르완다에서는 1973년 후투족의 쥐베날 하뱌리마나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투치족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이때 살아남은 투치족들은 이웃 나라 우간다로 도망쳐 1987년 르완다 애국전선(RPF; Rwandan Patriotic Front)을 결성했다.

1990년, 대다수가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RPF가 우간다의 지원을 받으며 북부 르완다로 침입했다. 프랑스프랑코포니 아프리카의 지원을 받는 후투족 정권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는 RPF 간에 벌어진 르완다 내전으로 인해 르완다 국내의 인종간 긴장이 높아지고 후투 파워(Hutu Power)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후투 파워는 투치족이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르완다는 경제성장으로 동시기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서 사정이 아주는 아니라도 꽤 좋은 나라였지만, 이 경제성장이 커피 등 일부 작물의 수출에 의존한 것이다보니 198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커피값이 폭락하자 외화수입이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민둥산의 증가로 농업 상황이 나빠지면서 르완다의 경제적인 쇠퇴에 쐐기를 박았다. 이로 인해 빈민층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후투 기득권층은 빈민층으로 전락한 후투족들의 불만을 투치족들에게 돌리려는 목적으로 이런 프로파간다를 널리 보급했다.[3] 이 당시 후투족 촌락에는 투치족을 죽여야 한다는 프로파간다가 하루종일 방송되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민족 갈등과 반군에 의해 상당수의 후투족이 북부에서 밀려나고 투치족이 남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쥐베날 하뱌리마나 정부에 대한 압력의 결과 199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아루샤 조약(Arusha Accords, 조약이 체결된 탄자니아의 아루샤 시의 이름을 땀)이 소급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후투족 기득권층의 반발을 더욱 불러일으켰는데 이 조약을 준수하자면 후투족이 독차지하고 있던 르완다 정부와 군의 고위직을 후투족과 투치족이 나눠가져야 하는데다가 후투족 몫에서 또 여당인 MRND가 야당들과 나눠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부의 부룬디에서는 반대로 투치족 독재정권 시대가 마무리되면서 민주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 후투족 출신의 멜키오 은다다예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멜키오 은다다예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막장은 아니라서 신중하게 정책을 펴면서, 투치족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이로 인해 의회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한편으로는 투치족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군대 재편과 토지개혁 정책을 폈고, 후투족 난민을 귀환시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기득권을 잃을까봐 두려워한 투치족들과의 긴장관계는 더더욱 고조되면서, 투치족 장교들이 멜키오 은다다예를 살해하는 쿠데타 미수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나서 1994년에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총리를 투치족으로 임명하는 화합정책을 계속 유지하지만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갈등은 위험수위로 올라가게 된다.

한편, 르완다에서는 아루샤 조약이 범과도정부를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성립되지 않았고 르완다 후투족 내에서의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건으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 사건으로 인해 르완다와 부룬디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진범은 오랫동안 오리무중 상태였다가 2012년 프랑스 조사단의 조사 결과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4. 르완다 학살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처음에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더라도 잔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요. 돈을 주고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대개 총으로 죽여 달라고 말할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오히려 예삿일이다 보니 절로 체념이 되더군요.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키갈리 이웃 도시인 카시루에서만 투치족 4,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한데 모여 앉으라고 말하더군요. 수류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살해할 생각이었던 게지요. 사람들은 모여 앉았습니다."
- 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4.1. 기간

르완다 학살은 1994년에 불과 100일만에 약 800,000명이 인종 학살당한 사건으로 그 규모나 잔혹성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인종 학살로 꼽힌다. 1994년 4월 6일 대통령 하뱌리마나의 암살 사건부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Human Rights Watch의 추산에 의하면 최소 800,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사망자 수는 500,000명에서 1,000,000명까지도 잡는다. 일반적으로 인용하는 수치는 800,000명, 혹은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

4.2. 주모세력

대통령 암살로 촉발된 이 인종 학살은 후투족 정치 단체에게 지원받는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하므웨,[4] 임푸자무감비[5]가 실행하였고 아카주(Akazu)라는 후투족 권력 집단이 지도했다.

4.3. 무기

신청서를 작성하면 AK-47 같은 총기가 지급되었으며 수류탄은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없이 그냥 뿌렸다. 수도 키갈리에서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군과 민병대가 학살에 동원되었다. 그때는 그나마 그냥 죽이는 식이었다. 그러나 학살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가담자가 많아짐에 따라 원시적인 살인 무기들이 동원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보태서 평소 쌓였던 개인감정과 분노를 학살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칼과 창, 벌채용 칼(마체테), 망치 등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으며,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한쪽 손에는 무기를, 다른 한쪽 손에는 라디오를 들고 있는 때도 잦았다. 당시 송출되던 라디오 방송은 라디오 텔레비지옹 리브르 데 밀 콜린(RTLM)으로 교묘한 언변을 통해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내전 내내 투치족의 몰살을 촉구하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냈다.

4.4. 원인

이게 가능했던 건 당대 르완다의 청년 실업률과 양극화가 쩔어 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르완다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구가 많아졌지만 르완다의 경제가 커피값이 폭락하면서 망조를 띄기 시작했다. 커피를 대신할 대체작물이나 제조업의 육성이 필요했으나, 대체작물의 재배나 제조업 육성책은 미비하기 그지없었고 자연히 후투족 청년들의 대다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은둔형 외톨이로 살거나 청년 실업자로 마을 여기저기 쏘다니면서도 무시당하기 일쑤던 그자들은 대학살 지시를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 겸 죽창을 들 기회로 생각했고,[6] 때마침 종족 지도부에서 죽창 들라고 소리치니까 어차피 이번 생은 망한 거 한번 날뛰어보자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가 평소 당한 억울함과 분노를 투치족 학살로 풀면서 학살의 양상이 더욱 잔혹해지게 되었다.

4.5. 피해세력

르완다 학살은 불과 100일 동안 800,000명(최대 1,000,000명까지도 잡는다)의 투치족이 학살당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학살당한 사람들 중 약 10%는 학살에 동조하지 않은 온건파 후투족들이었다. 민족 간 분쟁이라 서양인이나 동양인들은 통행이 자유로웠기에 지금도 영상을 검색하면 도로에 경계석 같이 형태를 유지하는 시체들의 줄이라든지 밀 콜린스 호텔로 짐작되는 높은 곳에서 촬영한 집단 린치 및 학살 장면도 볼 수 있다. 학살 중에는 서양이나 유엔의 외부 조력은 전혀 없었기에 정부 수반들도 대통령 경호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총리 포스탱 트와기라뭉구(Faustin Twagiramungu)[7]는 르완다에 주둔 중이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보호받아서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호받지 못한 투치족이나 온건파 후투족은 당연히 후투족 청년 실업자들의 칼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4.6. 만행들

5. 르완다 애국전선(RPF): 본대와 합류 후, 수도 함락

한편 아루샤 조약에 따라 키갈리에 주둔하던 RPF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곧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북부의 본대와 합류했다.

1994년 7월 4일, RPF는 반격을 개시하여 수도 키갈리를 함락하고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했다. 이에 수도 키갈리에 갇힌 후투족 민간인 60,000명이 투치족이 주축이 된 RPF의 보복이 두려워 탈출하기 시작했고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인 부타레와 후투족 최후 거점인 기세니까지 진격하자 남아있던 후투족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동안 르완다 및 세계의 구호 기구들은 미국 정부 및 유엔의 개입을 요청했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Mouvement Démocratique Républicain de Parmehutu라는 단체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후투족 남성이 유엔과 미국에 학살에 관련된 문서를 팩스로 송부했다. 이 문서에는 학살에 관련된 구체적인 설명이 들어있었지만 무시당했다. 미국은 모가디슈 전투 이후 여론의 반발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고 유엔도 서양 국가들의 눈치를 보느라 돕지 못했다.

6. 유엔군의 행적

이때 르완다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속 국가들이 반대한 탓에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유엔의 캡스톤 원칙(Capstone Doctrine)에 따라 유엔 평화유지군은 폭력 사태를 저지하는 데는 재량권이 있지만 강제력을 행사할지를 결정하는 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6.1. 벨기에: 병력 파견

벨기에만이 강력히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계의 반응은 "르완다와 주변국을 이렇게까지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무슨 생각하셨기에 평화유지군을 보내자는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뿐이었고, 벨기에는 세계의 냉담한 반응 속에 독단으로 병력을 보내야 했다.

6.2. 프랑스: 학살 조장

르완다 대학살은 20세기 후반 인류사 최악의 비극이었다.
1994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100일 동안 후투족 정규군과 민병대 "인테라함웨" 에 의해
당시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던 100만 명의 투치족들이 학살당했다.
그 100일 동안, 르완다의 카게라 강과 나바롱고 강에는 밤낮으로
마체테에 잘린 희생자들의 머리와 손발이 수없이 둥둥 떠다니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 학살에 쓰인 마체테 50만 자루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중국이 수출한 것이었고, 그 대금은 프랑스 정부가 빌려준 돈으로 지불된 것이었다.

우간다로 피난했던 투치족들로 결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7월에 반격해와 전세가 역전됐지만

프랑스는 그때까지도 잔존해 있던 후투족 살인마들에게 계속 무기를 공급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후 르완다 신정부는 살인정권의 각종 무기 구입에 든 10억 불이 넘는 외채를 고스란히 넘겨받아야 했다. 어머니의 목을 베고, 동생의 손발을 토막치는 데 사용된 마체테의 구입 자금을 유족들더러 갚으라는 소리였다. 신정부가 부채를 탕감해달라고 호소했지만,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주도한 채권단은 이 요구를 묵살하면서 여차하면 르완다를 재정적으로 고립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르완다의 살아남은 농민들은 이제 동포, 이웃, 가족을 죽이는 데 든 비용을 프랑스 은행에 갚기 위해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9 - 르완다 대량학살 사건 이후 #
프랑스도 르완대에 파병하긴 했는데 얘네들은 학살을 말리는 게 아니라 되려 학살을 조장하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후투 파워의 무기 공급을 도와준 게 프랑스였고, 심지어 민병대 훈련도 시켜 주었고, 한술 더 떠서 학살당한 투치족이 세운 르완다 신정부에게 후투족이 동족들을 죽일 때 쓴 마체테 값을 대신 지불하라고 협박하는, 그야말로 사이코패스나 생각할 수 있는 정신나간 짓거리까지 했다. 이게 훗날 폴 카가메 치하의 르완다가 반프랑스 노선을 걷는 원인이 된다. 르완다 정부에서 이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고 미국 로펌에 의뢰한 게 17년에 나온 뮤즈 보고서.

프랑스 미테랑 정권은 학살에 참여한 르완다군과 경찰을 훈련하는 한편, 투치족 살해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고위 프랑스 관리들은 투치족에 대한 비방에 참여 등으로 집단학살 논리를 가다듬는 데 가담하였다고 한다. 뮤즈 보고서에서는 프랑스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로 르완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배제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한 당시 르완다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으로 지적했다.

결국 총리 아가테 우윌링기아마나(Agathe Uwilingiyimana)를 보호하던 평화유지군 소속 벨기에 병사 10명이 수상 부부와 함께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사망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이것을 거부하고 유엔 평화유지군 보호하에 국영 방송국으로 가서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 평화조약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을 방송해서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다. 당연히 학살 주동자들에게는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인물.

이들이 벨기에 공수부대 소속 병사들로 수상을 보호하던 중 포로로 잡혀 산 채로 사지가 잘리고 거세당한 후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아무리 후투족 민병대가 미쳐 돌아갔다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서방을 자극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후일 작성된 벨기에 상원 진상조사 위원회의 보고서 및 이것을 인용한 프랑스어 위키백과 내용을 보면, 이들은 풀어주겠다는 말을 믿고 르완다군 부대로 끌려갔으나 우선 네 명이 칼(마테체)로 즉시 살해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난도질하면서 죽인 건 아니고 그냥 죽였다고 한다. 이에 나머지는 중위 Lottin의 지휘하에 주변 건물로 들어가 저항했으나 이 병사들을 압도하는 후투족 민병대의 공세에 전원 전사. 이와 달리 거세 운운하는 이야기의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에 인용된 미국 국적의 작가 Scott Peterson의 책 《Me Against My Brother》(2001)인데 Peterson은 여기에서 실제로는 중위(Lt.)와 상병(Cpl.)이었던 희생자들을 모두 이등병(all of them privates)이라고 적었고 그 출처도 전혀 명시하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미국 국적의 또다른 작가 Keith B. Richburg도 자신의 책 《Out of America》(2009) 서문에서 Peterson의 책을 인용한 바 있으나 이것은 이러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와서 참상을 보니 다 사실인 듯하다는 취지에 불과하다.

7. 처벌

7.1. 배후자

배후자인 대령 투야하가는 후에 체포되어 벨기에에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7.2. 가해자

실제로 르완다 학살은 가해자들의 처벌이 상당히 제한됐다.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 중 대다수가 평범한 후투족들이었고,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전체 르완다 인구의 거의 1/3 정도로 잡는데 수치가 이 정도 되면 처벌하고 싶어도 처벌하기 힘든 수준이다. 그나마 잡힌 이들도 내전의 여파로 인해 경찰도 법원도 박살난데다, 기존의 인원 중 상당수가 학살당하거나 난민이 되거나 아예 그들 자신이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기 때문에 재판을 할 여지가 되지 않아 그냥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실질적인 처벌은 후투족 지도자 일부로 끝났고 나머지는 가볍거나 형식적인 형벌을 받는 수준에 그쳤다.

8. 이후 상황

8.1. 벨기에: 병력 철수

이 일 때문에 국내 여론이 나빠진 벨기에는 병력을 철수시켰다.

8.2. 유엔: 병력 감축

거기에 더해서 평화유지군의 병력은 270명으로 감축되었다. 이렇게 되자 평화유지군 총지휘관인 중장 로메오 달레르(Roméo Dallaire)는 그나마 남아 있던 네덜란드, 가나, 캐나다인 평화유지군을 모아서 '안전지대'를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의 경험을 회고한 저서 《악마와의 악수(Shake Hands with the Devil)》가 있다. 그리고 중장 달레르는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PTSD를 앓고 있다.

8.2.1. 평화유지군의 활약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화유지군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9. 르완다 학살 이후

피난을 떠난 후투족들은 키갈리에서 서남으로 30km 떨어진 임시정부의 잠정 수도 기타라마로 가거나 서북부의 국경을 넘어 콩고 민주 공화국 등지로 피난했다. 피란 중 후투족 난민이 3,000,000명 발생했고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많은 피난민이 죽었다. 또한 이 피난민들 사이에 르완다 학살 사건 때 주도하는 역할을 했던 후투족 민병대원들이 섞여서 난민촌을 병영화시켰다. 이것은 내전이 종결된 후 르완다와 콩고 민주 공화국(옛 이름은 자이르) 간의 국경 분쟁 원인이 되었으며 1998년에 일어난 아프리카의 세계 대전이라는 별명이 붙은 2차 콩고 전쟁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근본 원인은 르완다가 내부 혼란 상황에서 콩고 민주 공화국의 불안정화를 의도하여 외부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지만.

한편 RPF는 7월 말에 전투 중지를 선언했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고자 후투족을 향한 사사로운 보복을 금지시켰다. 후투족 난민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에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수도 키갈리에 있는 호텔 밀 콜린스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Paul Rusesabagina)는 난민 1,200여 명을 100일간의 학살 속에서 보호하는 업적을 이루어냈으며 이후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로 각색되었다.

피그미라 불리는 트와(Twa)족은 이 전쟁통에 애꿎게 30% 가량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트와족이 학살되었다는 것 때문에, 후투와 투치의 민족 문제보다 경제 문제가 더 큰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다. 위에서는 후투족 희생자를 온건파 후투족이라고 칭하지만, 지방에서의 학살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 간, 심지어 친족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왜냐하면 학살 뒤에는 죽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산(농사 지을 땅, 가축 등)의 분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르완다 학살을 맬서스 트랩의 극단적인 형태로 보는 입장도 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최고 인구 밀집 농업국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르완다만 다루지만, 부룬디에서도 대학살이 벌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르완다에서는 후투가 투치를 일방적으로 학살했다면, 브룬디에서는 후투 극단주의자들의 학살을 시작으로, 투치족 군대가 보복하는 피의 보복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부룬디는 이미 70년대에 투치족 군부에 의해 후투족 200,000명이 학살된 상황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250,000명 이상이 다시 서로 학살로 죽어 나갔다. 그 때문에 르완다와 부룬디의 학살을 합하면 적게 잡아도 1주일 내에 1,000,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이것은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학살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파키스탄인들의 학살에 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있었던 학살 중 제 3위에 해당한다.

르완다 정부는 학살에 연루된 프랑스 관리들에 대한 공식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

2017년 3월 20일, 바티칸을 방문한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와 만난 교황 프란치스코는 르완다 내전 당시 학살에 가담한 로마가톨릭교의 일부 성직자의 잘못을 사과했다. #

10. 대중매체



[1] 반대로 상대적으로 이민자를 내보내고 착취도 하기도 수월했던 나미비아에는 열심히 이민자를 내보내는 과정에서 학살도 저지르고 그랬다. 이것만 봐도 독일 제국이 특별히 자비로워서 르완다와 부룬디 통치를 온건히 한 건 아니긴 하다.[2] 그 덕택에 지금도 독일과 르완다, 부룬디 관계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탄자니아와 나미비아에서 반독 감정이 있는 것과 대조된다.[3] 의도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어서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도 고전적인 수법이다.[4] Interahamwe; 함께 일하는 자들이라는 뜻의 르완다어.[5] Impuzamugambi;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이라는 의미의 르완다어.[6] 요즘 한국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죽창드립을 생각하면 된다. 차이점은 이 자들은 그걸 실천했다는 것이다.[7] 초반에 대통령 경호대에 살해된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의 후임자.[8] 200,000명 정도의 후투족 난민이 전쟁 전 실종됐는데 콩고 정부가 르완다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이들을 르완다로 인도하려 하자 저항했고 결국 답이 없자 전부 죽였다는 설이 유력하다.[9] 학생이 악의적으로 협박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이러고도 진심으로 반성을 하긴 하는 거냐'라며 화를 냈다. 이 수위는 학생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말할 때 두 여성의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면서 '내 가족들인데 모두 죽고 나만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위가 르완다에서 살해한 여성들의 사진이었다.[10] 서유기의 손오공 일행이 서울 및 대한민국에 눌러앉으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