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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6:21:01

마쓰자카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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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자카 다이스케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48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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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쇼와 시대 ]
{{{#555555,#aaaaaa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하마무라 타카시
(浜村孝)
오카무라 요시노리
(岡村佳典)
아라타케 야스히로
(荒武康博)
카와하라 아키라
(土屋紘)
히가시오 오사무
(東尾修)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이즈미사와 아키라
(泉沢彰)
타카하시 후미오
(高橋二三男)
요시다 요시노부
(吉田好伸)
나카지마 히로미
(中島弘美)
야마무라 요시노리
(山村善則)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타무라 타다요시
(田村忠義)
코가 마사아키
(古賀正明)
타치바나 요시이에
(立花義家)
에가와 스구루(6)
(江川卓)
모리 시게카즈(1)
(森繁和)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홍순기
(코노 준키)
(鴻野淳基)
이시게 히로미치
(石毛宏典)
이토 츠토무
(伊東勤)
노구치 히로미(1)
(野口裕美)
와타나베 히사노부
(渡辺久信)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오쿠보 히로모토(1)
(大久保博元)
키요하라 카즈히로(1)
(清原和博)
모리야마 료지
(森山良二)
스즈키 켄
(鈴木健)
와타나베 토미오
(渡辺智男)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555555,#aaaaaa
1989년 ~ 201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시오자키 테츠야
(潮崎哲也)
나가마 켄지(1)
(長見賢司)
타케시타 쥰(1)
(竹下潤)
스가야마 켄토(1)
(杉山賢人)
이시이 타카시(2)
(石井貴)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토미오카 히사타카(1)
(富岡久貴)
타카키 타이세이(1)
(高木大成)
타마노 히로마사
(玉野宏昌)
안도 마사노리(2)
(安藤正則)
마쓰자카 다이스케(3)
(松坂大輔)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카야마 히사시(1)
(高山久)
오누마 코지
(大沼幸二)
호소카와 토루(1)
(細川亨)
고토 타케토시
(後藤武敏)
야마자키 사토시
(山崎敏)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와쿠이 히데아키(3)
(涌井秀明)
스미타니 긴지로(3)
(炭谷銀二郎)
키무라 후미카즈(3)
(木村文和)
지명권 박탈(3)(A) 나카자키 유타(3)
(中崎雄太)
마츠나가 히로노리(2)(4)
(松永浩典)
키시 타카유키(2)(4)
(岸孝之)
히라노 마사미츠(1)(4)
(平野将光)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키쿠치 유세이(3)
(菊池雄星)
오이시 타츠야(4)
(大石達也)
토가메 켄(4)
(十亀剣)
마스다 타츠시(1) (4)
(増田達至)
모리 토모야(3)
(森友哉)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타카하시 코나(3)
(高橋光成)
타와타 신사부로(4)
(多和田慎之助)
이마이 타츠야(3)
(今井達也)
사이토 히로마사(1)(4)
(斉藤大将)
마츠모토 와타루 (4)
(松本航)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레이와 시대 ]
{{{#555555,#aaaaaa
2019년 ~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미야가와 테츠(1)(4)
(宮川哲)
와타나베 켄토(1)(4)
(渡部健太)
스미다 치히로(4)
(隅田知一郎)
히루마 타쿠야(4)
(蛭間拓哉)
타케우치 나츠키
(武内夏暉)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3) 고교생 드래프트, (4)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5) 지명 후 미입단
(A) 이 해 세이부는 드래프트 지명 대상 선수들에게 영양관리비와 같은 명목으로 금전을 제공하는 등의 부정 스카우트 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어 고졸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박탈당했다.
(6) 지명 후 미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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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1953 1954 1955
키노시타 이사무 타케스에 요시마사 카와사키 토쿠지 오타 마사오 나가사카 마모루
<rowcolor=#ffffff> 1956 1957 1958 1959 1960~1963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이나오 카즈히사
<rowcolor=#ffffff> 1964~1967 1968 1969 1970 1971~1972
타나카 츠토무 이케나가 마사아키 요다 요시노부 이케나가 마사아키 타카하시 아키라
<rowcolor=#ffffff> 1973 1974 1975~1977 1978 1979~1981
가토 하지메 미우라 키요히로 히가시오 오사무 야마시타 리츠오 히가시오 오사무
<rowcolor=#ffffff> 1982 1983 1984~1987 1988~1989 1990~1991
모리 시게카즈 타카하시 나오키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rowcolor=#ffffff> 1992 1993 1994~1995 1996 1997~1999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궈타이위안 신타니 히로시 니시구치 후미야
<rowcolor=#ffffff> 2000~2005 2006~2007 2008~2012 2013~2014 2015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와쿠이 히데아키 키시 타카유키 마키타 가즈히사
<rowcolor=#ffffff> 2016~2018 2019 2020 2021~2023 2024
기쿠치 유세이 타와타 신사부로 잭 닐 타카하시 코나 이마이 타츠야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bd3039> 파일:보스턴 레드삭스 엠블럼.svg보스턴 레드삭스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01 1902 1903 1904~1908 1909
윈 켈럼 사이 영 조지 윈터 사이 영 프랭크 아렐라네스
<rowcolor=#ffffff> 1910 1911~1913 1914 1915 1916~1918
에디 시콧 스모키 조 우드 레이 콜린스 어니 쇼어 베이브 루스
<rowcolor=#ffffff> 1919 1920 1921 1922 1923~1924
칼 메이스 앨런 러셀 새드 샘 존스 잭 퀸 하워드 엠키
<rowcolor=#ffffff> 1925 1926 1927 1928 1929
알렉스 퍼거슨 하워드 엠키 슬림 해리스 대니 맥페이덴 레드 러핑
<rowcolor=#ffffff> 1930 1931 1932 1933 1934
대니 맥페이덴 윌시 무어 대니 맥페이덴 아이비 앤드류스 고든 로즈
<rowcolor=#ffffff> 1935~1937 1938 1939~1940 1941 1942
웨스 페럴 짐 배그비 레프티 그로브 잭 윌슨 딕 뉴섬
<rowcolor=#ffffff> 1943 1944 1945 1946~1947 1948~1949
텍스 휴슨 양크 테리 렉스 세실 텍스 휴슨 조 돕슨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1954 1955~1956 1957
멜 파넬 빌 라이트 멜 파넬 프랭크 설리반 톰 브루어
<rowcolor=#ffffff> 1958 1959 1960 1961 1962
프랭크 설리반 톰 브루어 톰 스터디반트 빌 몬보퀘트 돈 슈월
<rowcolor=#ffffff> 1963~1965 1966 1967 1968 1969
빌 몬보퀘트 얼 윌슨 짐 론보그 딕 엘스워스 짐 론보그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1975 1976~1977
게리 피터스 레이 컬프 마티 파틴 루이스 티안트 퍼거슨 젠킨스
<rowcolor=#ffffff> 1978 1979~1983 1984 1985 1986
마이크 토레스 데니스 에커슬리 브루스 허스트 오일 캔 보이드 브루스 허스트
<rowcolor=#ffffff> 1987 1988~1994 1995 1996 1997
밥 스탠리 로저 클레멘스 애런 셀레 로저 클레멘스 톰 고든
<rowcolor=#ffffff> 1998~2004 2005 2006~2007 2008 2009~2010
페드로 마르티네스 데이비드 웰스 커트 실링 마쓰자카 다이스케 조시 베켓
<rowcolor=#ffffff> 2011~2014 2015 2016 2017 2018~2019
존 레스터 클레이 벅홀츠 데이비드 프라이스 릭 포셀로 크리스 세일
<rowcolor=#ffffff> 2020~2022 2023 2024
네이선 이볼디 코리 클루버 브라이언 베이오
}}}}}}}}}}}} ||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2004_seibu.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4


파일:BOS_2007_WSChampion.gif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NPB 로고.svg
2001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없음[1]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 반지}}}
2006 2009

파일: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아이콘(2006-2017).svg
2006,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MVP
대회 창설 마쓰자카 다이스케
(일본)
로빈슨 카노
(도미니카 공화국)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
오제키 타츠아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없음[2]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200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제레미 파웰
(오사카 긴테츠 버팔로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3~200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3~2004년 퍼시픽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0, 2001, 2003, 2005년 퍼시픽 리그 탈삼진왕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2001년 퍼시픽 리그 다승왕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곽태원
(1987~1997)
마쓰자카 다이스케
(1999~2006)
와쿠이 히데아키
(2009~2013)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18번
제이슨 존슨
(2006)
마쓰자카 다이스케
(2007~2012)
셰인 빅토리노
(2013~2015)
뉴욕 메츠 등번호 16번
릭 앤키엘
(2013)
마쓰자카 다이스케
(2013~2014)
다니엘 뮤노
(201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18번
아라카키 나기사
(2003~2014)
마쓰자카 다이스케
(2015~2017)
다케다 쇼타
(2018~)
{{{#fff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99번}}}
조던 노베르토
(2016~2017)
마쓰자카 다이스케
(2018)
스즈키 쇼타
(2019~2020)
{{{#fff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18번}}}
스즈키 쇼타
(2014~2018)
마쓰자카 다이스케
(2019)
우메츠 코다이
(202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키쿠치 유세이
(2014~2018)
마쓰자카 다이스케
(2020~2021)
스미다 치히로
(202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타와타 신사부로
(2016~2020)
마쓰자카 다이스케
(2021.1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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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자카 다이스케
松坂大輔 / Daisuke Matsuzaka
출생 1980년 9월 13일 ([age(1980-09-13)]세)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출신 도쿄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요코하마 고교 (가나가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99~2006)
보스턴 레드삭스 (2007~2012)
뉴욕 메츠 (2013~2014)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5~2017)
주니치 드래곤즈 (2018~2019)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20~2021)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커리어4. 연도별 성적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의 前 야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일본 전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인 야구, 그 국민적 대축제라 할 수 있는 고시엔에서의 압도적인 활약을 바탕으로 '헤이세이의 괴물' 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프로 데뷔 이전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은 초특급 투수 유망주였다.[4][5] 고시엔에서의 퍼포먼스로 인해 마쓰자카와 같은 동년배인 1980년 4월 2일부터 1981년 4월 1일[6]사이에 태어난 야구선수라면 '마쓰자카 세대' 라고 표현할 정도였다.[7]

직후 지명 1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데뷔해 8시즌 동안 204시합(190선발) 108승 60패 평균자책점 2.95, WHIP 1.14를 기록했으며. 특히 72완투(18완봉 포함) 완투율 38%라는 대단한 수치를 찍은 완투형 선발투수였다. 이를 바탕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2차례나 15승 이상을 기록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고, 이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를 거쳐 뉴욕 메츠에 몸담았다. 메이저리거 생활을 마무리하고 2015년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하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총액 12억엔을 받고 계약했으나 혹사 여파가 누적된 탓에 사이버 투수가 되며 3시즌 동안 불과 1경기만 등판하는 먹튀 행각을 보였다. 이후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해 간신히 재기에 성공했지만 다시 부상에 발목이 잡혔고, 결국 종착지가 된 친정팀 세이부 라이온즈에선 두 시즌 내내 등판하지 못하다가 2021 시즌 마지막에 간신히 은퇴 경기를 치르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별명은 마쓰퐁(マツポン), 마쓰(マツ), 다이스케(ダイスケ)이며 메이저리그 진출 후에는 미국 미디어에서 'Dice-K', 'D-Mat'라고 자주 축약해서 표기하기도 한다.[8] 한국에선 한자표기를 그대로 읽은 '송판'이나 '마작가' 혹은 '마쓰작가' 등의 별명이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에는 일본 시절에 비해 구위로 압도하기 힘들어지고 컨트롤도 애매해진 관계로 늘어나는 투구수를 주체하지 못해서, 3회 정도만 되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이유로 '육수자카'라는 비칭도 붙었다.

2. 플레이 스타일

파일:마쓰자카156.gif
155km/h 패스트볼
파일:마쓰자카슬라이더.gif
131km/h 커브

전성기 시절 포심의 구속이 평균 147.8km/h, 최고 156km/h[9]에 달한 적이 있는 우완 강속구 투수다.[10] 포심 외에도 투심, 커터, 슬라이더, 커브[11], 체인지업, 포크볼, 자이로성 슬라이더[12]등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는 타입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런 빠른 구속에 비해 제구력에 대해선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다. 2001년에는 아예 117개로 리그 사사구 1등을 기록하기도 했을 정도고 故 노무라 카츠야 감독은 NPB의 스타 플레이어를 평가한 자신의 책인 プロ野球怪物伝에서 마쓰자카의 부족한 패스트볼 제구와 뛰어난 변화구를 이야기하면서 정통파보다는 기교파 느낌에 가까운 투수[13]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2003년부터 2006년 사이에는 제구력이 향상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러한 부족한 패스트볼 제구력은 결국 MLB 진출 이후 그의 발목을 잡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정확히는 2002년에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고 팔스윙을 바꾸면서 패스트볼의 구속과 제구는 향상되고 구위는 떨어졌는데, 이게 NPB 수준에서는 아주 잘 먹혔지만 MLB에서는 약간 좋은 구속과 구위에 좋지 않은 제구력이 되어 버리면서 자신있게 꽂아넣다가 얻어맞는 상황이 벌어졌다.

2007년 당시 마쓰자카의 포심은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는 현재처럼 어퍼 스윙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높은 패스트볼이 쉽게 공략당했다. 그래서 다음 해인 2008년에는 바깥쪽 보더라인을 최대한 공략하며 도망다니는 피칭을 선보였는데, 자책점은 낮아졌지만 사사구가 늘고 이닝 이팅과 탈삼진도 줄어들었다. 당시 육수자카란 별명이 붙었던 이유도 5회만 되면 투구수는 100개에 육박하고 땀을 질질 흘리면서 내려가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 보더라인을 공략하는 로케이션 능력이 있었다면 길게 먹혔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성적은 더 안좋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파일:마쓰자카은퇴식.gif
은퇴식 당시 118km/h 패스트볼

은퇴식 당시 투구 모습. 2020년에 목 내시경 수술을 받은 후 손저림이 생겼는데, 2021년까지 손저림이 낫지 않아 공을 던질 수 없는 몸상태가 되었고 그대로 은퇴하였다.

뛰어난 패스트볼 구위에 가려졌지만 일본에서는 마쓰자카의 수비력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하고 있다. npb 데뷔 첫해부터 mlb 진출 전까지 8년 동안 골든글러브를 7회 수상했다. 다만 메이저리그에 가서 보여준 수비력은 애매한데 MLB 통산 790이닝 동안 기록한 디펜시브 런 세이브(DRS)가 -9다.

타격 실력은 꽤 괜찮았던 편이다. 고교 시절 가나가와현 예선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렸고, 프로에서는 지명타자제를 채택한 퍼시픽 리그나 아메리칸 리그에서 뛰어서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센트럴 리그(요미우리) 홈경기였던 2002년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는 무려 투수인데 7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으며 한신 타이거스와의 교류전(고시엔 구장)에서는 홈런을 치기도 했다. 메이저 리그에서는 통산 45타석 7안타 .189로 타점도 3타점이나 쳤다.

3. 커리어

3.1. 프로 입단 전

파일:마쓰자카고교.jpg

요코하마 고교 시절 고시엔에서 투구하는 모습.

요코하마 고교 시절에는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로 최고 152km/h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구사하는 순수 실력과 더불어 고시엔에서 역대급 활약을 하며 헤이세이의 괴물(平成の怪物)이라는 칭호와 함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14]

특히 1998년 고시엔 야구대회 준준결승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야구 명문인 오사카부PL학원고등학교를 상대로 연장 17회까지 무려 250개의 공을 뿌리면서 완투승을 기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15] 거기다 바로 다음날인 메이토쿠기쥬쿠 고교와의 준결승전에서 구원등판[16], 역전승의 발판이 되어 팀을 결승으로 이끌고 이후 이어지는 결승전에서 선발등판해 59년만에 결승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게 불과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17] 그 결과 고시엔 춘계·하계 대회에서 연패를 달성해 팀의 우승에 공헌했고 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국민체전에서도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한 해 3연패를 달성했다. 1997년 추계 현 대회 예선부터 다음해 제53회 국민 체육 대회 결승까지 공식 경기에서 44연승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그해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닛폰햄 파이터즈가 영입경합을 벌인 끝에 교섭권을 따낸 세이부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고 1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여기에 한가지 비화가 있는데, 마쓰자카 본인은 요코하마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지명한 세이부가 마쓰자카가 염두에 두고 있던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이부 구단은 모기업의 세이부그룹 계열사에 요코하마 고등학교 학생들을 취업시키겠다는 조건을 마쓰자카에게 걸었고, 이를 들은 마쓰자카는 결국 수락했다.

3.2.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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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687><colcolor=#191919> 헤이세이의 괴물 (平成の怪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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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연속 WBC 대회 MVP를 차지한, 역시 영광의 시절을 보낸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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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세이부 입단식에서.지금과 비교해보면 너무 괴리감이 심하다 왼쪽은 당시 세이부 감독 히가시오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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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말랐던 데뷔 초기 시절.지금과 비교해보면 너무 괴리감이 심하다 2
1999년 4월 7일, 도쿄 돔에서의 닛폰햄 파이터즈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한 데뷔 무대에서 1회말 투구하는 모습.
평균 구속은 150.1km/h, 최고 구속은 155km/h가 찍혔다. 참고로 이 영상의 제목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충격의 프로 데뷔전이다.[18]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프로 데뷔 첫해인 1999년도에 180이닝 16승 5패 평균자책점 2.60이라는 신인으로서는 믿기 힘든 스탯을 찍으며 데뷔 첫해에 다승왕,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고[19] 고졸 투수로는 33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해 일본 야구계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치로와의 첫 대결에서 3연타석 삼진을 뽑아냈고, "자신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멘트를 남겼다.

그리고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2002년을 제외하곤 가공할만한 완투율을 자랑하면서 매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특급 에이스로 군림했다. 특히 3년차인 2001년엔 33경기에 등판해 240.1이닝 15승 15패 방어율 3.60을 기록하면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사와무라상은 수상 과정에 논란이 있었는데, 196.2이닝 동안 187탈삼진 방어율 2.46[20] WHIP 1.007, WAR 9.2를 기록한 노구치 시게키나 192이닝 동안 171탈삼진 방어율 2.67 WHIP 1.37의 이가와 게이를 제치고 마쓰자카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노구치(12승 9패)나 이가와(9승 13패)는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인 15승을 기록하지 못한 게 컸고, 이닝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 마쓰자카는 당시 양대리그를 통틀어 유일한 15승 투수였던데다가 저 둘보다 44이닝이나 더 먹은 240.1이닝에 214탈삼진이라는 말도 안되는 볼륨을 기록하며 저 둘에 비해 누적스탯을 더 쌓았기 때문. 지금 관점으로는 저 둘, 특히 노구치에게 비율 스텟(방어율 2.67>3.60), 세부 스탯(BB/K 등. 이닝당 삼진도 그렇고, 볼넷 개수부터가 24개 vs 117개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세이버 스탯(WAR 9.2>6.5)[21]이 모조리 밀리는 다승왕 마쓰자카가 15승 15패로 승률마저도 별로였지만 볼륨빨로 사와무라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것은 오히려 WAR 9.2[22][23]의 노구치 시게키였지만, 자격 미달로 받지 못하는 웃픈 일이 발생한 것. 실제, 마쓰자카도 당해 승률 50%로 사와무라 상 수상 자격 기준인 승률 60% 이상을 기록하지 못한 데다가 평자책도 3점 중후반대로 수상 자격 기준인 2.50 이하의 평자책을 만족하지 못해 전항목을 달성하지 못하여 수상하지 못할 뻔 했다.[24] 전년도인 2000년도에도 수상자가 없었고 원칙대로 수상자를 고르면 2년 연속으로 수상자 후보가 없자 선정위원회에서 비록 마쓰자카가 자격 미달이긴 하나 격려 차원에서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사와무라 상 수상이 정말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문과 함께 수상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사례로 2001년이 언급된다.

실제 노구치 시게키는 12승 9패로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에 단 3승 차이로 부족했고 노구치 시게키의 승운만 따라줬다면 마쓰자카는 수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노구치 시게키는 당해년도 다른 수상기준인 25경기 이상 등판, 10경기 이상 완투, 2.50 이하 평균자책점, 150개 이상 탈삼진 등의 항목은 달성하였다. 하지만, 부진한 팀 상황때문에 승수와 승률 면에서 손해를 보게되며 전항목을 달성하는데 실패했다.[25] 또한,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이 제정된 원년인 1982년 이후로 전항목을 달성한 투수는 11명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보통 한 두개 정도 미달되어도 기록이 뛰어나면 수상을 하는 정도였다. 고로, 저 정도 성적이면 어지간하면 상을 받는 성적인데 당해년도에 마쓰자카에 밀리며 아깝게 수상 기회를 놓쳤다.

당시 노구치 시게키의 소속팀은 주니치 드래곤즈였는데 2001시즌 당시 승률 0.456으로 센트럴 리그 5위를 하며 리그 꼴찌에 가깝던 시절이다. 참고로 당시 주니치는 62승을 기록했는데 그 중 노구치가 12승을 기록했으니 혼자서 팀 전체 20%의 승리를 책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 주니치의 타자들의 시즌 평균 WRC+는 83으로 퍼시픽리그에서 훌륭한 타격을 보여주던 마쓰자카의 소속팀 세이부의 WRC+103과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이뿐 아니라, 거의 모든 타격 지표에서 센트럴, 퍼시픽을 통틀어 주니치는 밑에서 2등 수준을 기록했다. 그리고 노구치가 등판하는 날마다 유독 팀 타자들이 찬스에서 말아먹는 경우도 많았으며 승운과 팀 타격 지원 모두 노구치는 부족했다.

여러모로, 2001년 수상은 마쓰자카에게 운이 따라줬다고 봐야 할 듯 하다. 게다가, 2001 시즌에 볼넷 허용률 / 볼삼비 / ERA + / FIP + / WAR / WHIP / 피안타율 모두 노구치 시게키의 우위이며 서로 간의 WAR은 대략 1.5배의 차이가 난다. 선발 투수의 승리에 선발 투수 스스로가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 된 현재, 세이버메트릭스의 총체를 대변하는 격인 WAR도 꽤 차이나니 여러모로 노구치 시게키가 마쓰자카보다 2001년에 훌륭한 투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발 투수의 승수를 중시하던 당시의 시대상과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하지 않았던 덕에 마쓰자카는 운이 따라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사와무라 수상에 승률, 투수 승수를 중시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세부 스탯 세이버 스탯을 중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1999년 87볼넷, 2000년 95볼넷 2001년 117볼넷으로 제구력이 썩 좋은 투수는 아니었는데 2002년에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고 딜리버리를 수정했지만 부상으로 폭망한 이후 2003년부터는 볼넷 허용률도 눈에 띄게 줄이면서 완전체 투수로 성장했다. 참고로, 2001년 마쓰자카의 기록은 볼 넷 허용률 / 볼삼비 / WAR / WHIP / 피홈런 / ERA+ / FIP+ / 피안타율 측면에서 그의 최전성기 시점인 2003년부터 2006년 시점 기록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나마 팔을 갈아 소화한 이닝과 탈삼진 갯수만 많은 것이 2001년 기록상 유이한 우위.

즉, 그의 NPB 시절 최전성기의 시작인 2003년부터 MLB로 건너가기 전 마지막 해인 2006년까지의 기록은 비율 스텟, 세부 스텟, 세이버 스텟 모두 그 이전 시점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탈삼진 갯수 혹은 이닝 소화 등 스텟의 볼륨적인 면을 빼고는 2003년 이전 기록을 2003년 이후의 기록에 비교하는 것 조차 실례라는 소리. 하지만, 상술하였듯이 최전성기 시점이 아닌 2001년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26]는 것이 마쓰자카의 커리어에서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2004년 일본시리즈에 출전해 팀을 일본제일로 이끌었다. 무서운 건 6차전에 선발등판하여 승리를 거두고 7차전 7대2로 앞선 8회말에 구원등판하여 홀드를 기록했다는 점이다.[27] 참고로 헹가래 투수는 9회말에 등판한 도요다 기요시이다.

2006년 사이토 카즈미와 투수 부문에서 치열하게 경쟁했고 마쓰자카는 17승 200탈삼진 방어율 2.13 등 무시무시한 스탯을 찍었지만, 사이토는 18승 205탈삼진 방어율 1.75 승률 0.783 투수 부문 4관왕을 차지했다. 그 해 사와무라상은 사이토가, 골든글러브는 마쓰자카가 가져갔다. 이 둘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 맞대결했는데 마쓰자카가 완투승을 거뒀다. 그러나 팀은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까지 NPB 통산 8년 동안 평균자책점 2.95, WHIP 1.14, 204시합(190선발) 108승 60패 72완투 18완봉 완투율 38%(!)[28] 1402.2이닝 1355삼진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찍고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게 된다.[29]
이 글들은 당시 마쓰자카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현지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을 확인했지만 마쓰자카를 능가할만한 투수는 보이지 않았다. 마쓰자카는 지구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기량을 갖췄다. 최고구속 156km/h의 강속구에 수준급의 다양한 변화구를 정교하게 던진다.
  • 매덕스는 마쓰자카만큼 빠른 공을 던지지 못했다. 오히려 변화구의 예리함은 마쓰자카가 더 나아 보인다. 한마디로 마쓰자카는 95마일(153km/h)을 던지는 매덕스다. 당장 내년부터 로이 오스왈트(2006년 15승 8패 평균자책점 2.98 기록)와 비슷한 수준의 피칭을 선보일 것이다.
    - 바비 발렌타인
  • 메이저리그 어느 누구도 마쓰자카와 비교될 수 없다. 요한 산타나도 그보다 아래이다.
    - ESPN 현지 해설가
  • 홈런을 쳤지만 운이 따라준 것이다. 마쓰자카의 공은 누구도 칠 수 없다.
    - 데이비드 데헤수스

3.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3.3.1. 2006년~2012년: 보스턴 레드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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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 입단식에서. 보스턴 팬 여러분, 최고의 선발 투수를 영입했습니다!

2006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텍사스 레인저스, 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등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이 입찰경쟁을 벌인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5111만 1111달러를 지불하고 독점 교섭권을 따냈고 6년간 총액 5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특급대우를 받으며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포스팅비까지 합치면 무려 1억 달러 넘게 투자한 셈. 투자한 금액인 6년간 1억 달러면 S급선수를 FA로 영입할수 있는 금액이다. 사이 영 상을 2회 수상한 "제2의 외계인" 요한 산타나의 계약규모가 6년간 1억 3750만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훗날 보스턴팬들의 분노를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에이전트가 그 분인 마쓰자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구단주인 존 헨리는 협상기간 동안 테오 엡스타인 단장과 테리 프랑코나 감독 등 사절단(...)과 함께 마쓰자카와 저녁식샤를 주선했는가 하면 자신의 개인 전용 제트기로 래리 루치노 사장과 테오 엡스타인을 보라스 코퍼레이션 사무실이 있는 LA까지 파견해서 보라스와 협상하게 하기도 했다.(...) 결국 지리한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극적으로 계약을 타결했다고 한다.

이런 기대감에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그를 유망주 순위 1위에 올렸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보스턴 입단 첫해인 2007 시즌, 데뷔전에서 잭 그레인키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32경기 15승 12패 ERA 4.40 ERA+ 108 204.2이닝 201K 80볼넷 bWAR 4.1을 기록했다. 당시에는 투승타타가 주류였고 마쓰자카는 방어율이 높다는 점을 물어뜯기며 고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소화 이닝으로 보나 탈삼진수로 보나 WAR로 보나 2~3선발급 기록을 내며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했으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며 팀의 2007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포스트시즌 성적은 총 4경기 선발 등판해 2승을 거두었으나 퀄리티스타트는 한 차례도 기록하지 못하였고 ALDS, ALCS의 평균자책점도 5점대로 좋지 않았다. 다만 월드시리즈 본선에서 5.1이닝 2실점 승투로 전보다는 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포스트시즌에서는 그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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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고있는 오카지마 히데키와 마쓰자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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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시즌 등판일지

이듬해인 2008년에는 18승 3패 ERA 2.90 ERA+ 160 154K whip 1.32 bwar 5.4를 기록했다. 클래식으로는 매우 좋은 성적이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세부스탯은 그닥 좋지는 않았다. 29게임 167⅔이닝 94볼넷. 부상으로 한 달가량 출장하지 못하긴 하였으나 평균 소화이닝이 5.78이닝, 6이닝을 넘긴 경기는 11경기에 불과하며, 퀄리티스타트 성공률이 48%로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볼넷은 리그 최하위의 기록이고, BB/9 또한 5.05로 최하위권. 다만, 피안타율이 .211로 AL 1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 타구는 투수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DIPS 이론이 세이버매트릭스계의 지지를 받던 때라 운빨이라고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투수의 투구 스타일도 BABIP에 영향을 끼친다는 해석이 중론이 된 이후로는 08마쓰자카의 경우 BABIP을 낮추는 스타일의 피칭을 한 것이라고 평가가 바뀌었다. 실제로 08년엔 극단적으로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스타일의 투구를 했는데, 보더라인에 걸치는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 안쪽에 비해 명백하게 BABIP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계속해서 존 안에 걸치도록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런 식으로 던지면 볼넷을 내줄 위험성이 커지고 낭비되는 투구수가 많아 이닝소화력이 약해진다는 단점 때문에 타자가 강하거나 실점 위기일 때 어렵게 간다는 작전 수준이 아니라 투구 전체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마쓰자카는 투구수가 늘어나든 볼넷이 늘어나든 초지일관 바깥쪽만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투구를 했던 것. 그 결과물이 저 극단적으로 낮은 피안타율과 많은 볼넷,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운 이닝소화력이었다.

물론 운 또한 따라주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08마쓰자카는 유독 분식을 안 당했고 6이닝도 힘들게 꾸역꾸역 채우고 내려갔음에도 좋은 보스턴 타선에 힘입어 18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3경기 등판해 딱 1경기만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해 승리를 챙겼을 뿐 나머지 2경기 모두 5이닝만에 강판당하였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에 이르는 등 작년과 똑같이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이 해 뛰어난 활약으로 사이영 상 투표에서 4위를 기록한다. 여기까지가 마쓰자카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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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WBC ALL-WORLD TEAM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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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의 2연패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MVP를 수상하기도 하며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2009시즌 부상으로 인해 59⅓이닝 던지는 데 그쳤으며, 2010시즌에도 9승 6패 ERA 4.69 153⅔이닝 74볼넷 133탈삼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마쓰자카 본인은 2009년의 부진에 대해 일본과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닝 시스템 차이라고 밝혔다. 마쓰자카는 선발 등판을 앞두고 롱토스와 불펜 피칭을 같은 날에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어깨가 소모되고 부상 우려가 있다며 레드삭스 구단이 금지시켰고, 일본식 훈련을 고집하려는 마쓰자카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식으로 계속 훈련하면 나는 일본 시절처럼 던질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인터뷰 기사 내용이 미국에도 알려져서 이슈가 되자 마쓰자카는 "자신은 공개적으로 팀 훈련 방식을 비판한 적이 없고, 인터뷰 기사 내용대로 말한 적도 없다"며 영문으로 사과 성명을 냈다.#

2011년 성적은 8경기 3승 3패 ERA 5.30 37⅓이닝 23볼넷 26탈삼진.

2012년에는 복귀 후 첫 등판부터 5이닝 4실점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최종 성적은 11경기 45⅔이닝 동안 1승 7패 ERA 8.28.

2012년 시즌으로 보스턴과의 6년 계약이 끝났다. 메이저리그 정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6년 동안 117경기 50승 37패, ERA 4.52, 1완투, 조정 ERA 101, WAR 10.5, WHIP 1.418로 그냥 평범한 메이저리그 성적을 냈다. 참고로 동급이라던 요한 산타나로이 오스왈트는 같은 기간 142경기 61승 47패 평균자책점 3.21, 조정 ERA 128, WAR 16.6(산타나), 168경기 65승 49패 평균자책점 3.56, 조정ERA 117, WAR 19(오스왈트)이다.

첫 2년은 상당한 성적을 냈지만 09년의 부상 이후 나락으로 떨어져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먹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2년 잘하고 4년간 망했음에도 결과적으로 평범한 정도의 성적—물론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완벽한 먹튀지만—이라도 된 것을 보면 전성기에는 정말 MLB에서 통할 만한 선수가 맞았다.

3.3.2. 2013년: 마이너리그

마쓰자카 자신은 보스턴에 남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확률은 제로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보스턴도 "어떤 결정도 안했고 어떤 대화도 안했지만 언제 대화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마쓰자카를 잡을 의지가 약함을 입증했다. 일본에서는 마쓰자카 쟁탈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고향팀인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스캇 보라스와 접촉을 시작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이토 쓰토무 감독이 직접 나서서 마쓰자카가 일본에 오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다 친정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마쓰자카를 뺏기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마쓰자카 본인은 메이저리그 잔류에 무게를 두고 있었고 결국 2013년 2월 11일, 메이저리그 구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시범경기에서는 호투를 펼쳤지만 5선발 경쟁에선 실패했고 일단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투구를 하다가 4월 29일 옆구리 통증으로 강판. 그 뒤 DL로 내려갔는데 왼쪽 옆구리 좌상으로 복귀에는 3주나 걸린다고 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뒤 6월 11일에 트리플A에서 2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6월 16일 선발 등판을 했으나 3⅔이닝 4안타 4실점으로 강판당했다. 결국 8월 20일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한 채 방출되었다. 마쓰자카의 트위터에 의하면 자신이 스스로 방출 요청을 하여 방출된 것이라고 한다. 성적은 5승 8패 평균자책점 3.92

3.3.3. 2013년~2014년: 뉴욕 메츠

그리고 FA 신분을 얻게 되었다. LA 다저스와 LA 에인절스 등의 서부 지구 팀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세이부 라이온즈의 경우에는 마쓰자카의 영입을 시즌이 끝난 이후 고려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마쓰자카가 일본 복귀를 희망할 경우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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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츠 시절.

8월 22일, 뉴욕 메츠와 메이저리그 계약에 성공했다. 기존 우완 선발투수인 제레미 헤프너와 헨리 메히아의 시즌아웃으로 땜빵 선발로서 계약한 것. 계약하고 바로 다음 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홈경기 선발로 등판했다. 하지만 등판하자마자 1회 1실점, 2회 4실점(...)하고 6회 시작 전 교체되었다. 5이닝 5실점(5자책) 1볼넷 4삼진 6피안타 2피홈런.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을 때의 성적은 4⅓ 이닝 4실점 5삼진 4볼넷(…). 애틀란타와의 경기에서는 3이닝 6실점을 하며 강판되었다. 이 3경기동안 성적은 3경기 12⅓이닝 동안 ERA 10.95 무승 3패 피안타율 0.365 WHIP 2.11이라는 최악이라는 말밖에 안나오는 막장피칭을 보였다. 차라리 왕첸밍은 3경기는 잘던졌다

그래도 9월 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는 콜업 안 해준 원한이 서린 투구를 하며 5⅔이닝 1실점 6삼진 3볼넷으로 그럭저럭 희망이 보이는 피칭을 했다.

9월 14일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드디어 오랜만에 메이저리그 선발승을 거뒀다. 7이닝 동안 탈삼진 3개에 2피안타 1볼넷, 1실점 호투를 통해 스스로 메이저리그 잔류 희망의 불씨를 남기는데 성공. 9월 2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6이닝 동안 탈삼진 6개에 4피안타 3볼넷 4실점 2자책점으로 다소 부진했으나 팀 타선이 터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9월 25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는 선발로 나와 7⅔이닝 무실점에 4피안타, 탈삼진 6개를 잡아내며 활약, 본인의 시즌 3승과 함께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콜업된 후 초기에는 퇴물급 피칭을 선보였으나, 이후 실전 감각이 돌아와서인지 급격히 경기 내용이 좋아졌다. 2014년 계약은 꿈도 못 꿀 것 같던 8월 달 분위기와 달리 2014년 1년 남짓한 짧은 계약으로 메츠에 잔류할 가능성, 내지는 4~5 선발을 찾는 팀들이 긁어볼만한 복권으로 등극하는데에 성공했다.

2014시즌을 앞두고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자격으로 메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4월 16일(미국시각)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다. 19일 경기에서는 1이닝 2피안타 1볼넷 1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20일 경기에서는 연장전 3이닝동안 1볼넷 5K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거기다 이 경기를 통해 미국, 일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리고 4월 24일(미국 시각) 팀이 4:1로 이기고 있는 9회에 올라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첫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불펜으로 전환한 뒤에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

한편 메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경기가 우천때문에 취소되어 5월 25일 더블헤더로 진행되게 되었는데, 여기서 한 경기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간만에 선발로 출전한 5월 25일 경기에서는 6이닝 3피안타 1볼넷 6탈삼진 2실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답내친으로 1점을 얻은 것은 덤. 이 경기 이후에는 선발로도 출장하고 있다. 여전히 볼넷이 많지만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평균자책점도 3점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4 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83⅓이닝 3승 3패 1세이브 3홀드 78탈삼진 평균자책점 3.89로 마무리하였다.

이후 일본 복귀를 결정하며 이 시즌이 메이저리그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8시즌 158경기 132선발 790.1이닝 56승 43패 1세이브 ERA 4.45 Bwar 9.4 Fwar 8.4.

3.4. 일본프로야구 복귀

3.4.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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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즌 종료 후 일본프로야구 복귀설이 돌더니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3년 12억 엔 계약을 맺고 돌아오게 되었다.

계약이 보도됐을 당시부터 구단관계자를 비롯해 팬들까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했고 앞으로 잘할 가능성이 희박한 투수한테 16억엔은 너무 과한거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가 최소 10승은 해줄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이 와중에도 장훈은 “마쓰자카는 현재 딴 사람이다. 팔꿈치가 너무 내려와 있다. 8:2의 비율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발언을 남겼는데, 워낙 메이저리거에서 돌아온 선수들한테 혹평을 하기로 유명한 장훈의 발언이라 댱시까진 '저 영감님 또 그러시네' 정도로 무시당했다.

시즌을 앞둔 2015년 3월 초, 팀 연습에 혼자만 참가 안 해서 어깨를 부상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직후에 치뤄진 시범경기에서도 3이닝 3사구 2실점의 영 좋지못한 피칭을 보여주며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후 시즌이 개막한 2015년 3월 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어깨부상으로 인한 2군 스타트가 확정됐다. 호크스팬들뿐만 아니라, 타구단 팬들까지도 그래도 후반기부터는 던지겠구만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2015년 4월, 언론의 취재로 마쓰자카의 부상은 마음의 병으로 몸은 아픈 곳이 없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특단의 조치로 무기한 '노 쓰로 조정'[30]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고, 5월에 실시한 원투(멀리 던지기)테스트에서는 '투수의 최소 합격선'인 50m도 힘겨워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일본 야구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결국 2015년 7월, 마쓰자카는 내년을 향한 조정에 돌입했다는 게 공식 발표되면서 2015년의 등판은 없는게 확실시됐다.

입스에 빠진 선수를 바보취급했던 선수가 본인이 입스[31]에 걸려 제대로 투구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팬들에게까지 조롱받으며 헤이세이의 괴물의 일본 복귀 첫해는 본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즌이 되어버렸다.

이 당시의 사진

2015년 8월 어깨수술을 받으면서[32] 확실하게 시즌 종료. 이로서 2015년 시즌은 먹튀 확정.

정작 소속팀인 소프트뱅크는 마쓰자카 없이도 2015년에 승률 5할 + 40승으로 퍼시픽리그를 초고속으로 우승하고 2015년 일본시리즈마저 연패한 탓에 마쓰자카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2015년 시즌 동안 남아도는 투수들을 주체를 못해서 통상 5자리가 주어지는 1군 선발투수 자리만 해도 6명(스탠드리지, 밴덴헐크, 나카타, 셋쓰, 데라하라, 다케다)이 변칙적으로 로테이션을 돌고 있으며[33] 이 틈에 못 끼어서 2군에 쳐박혀 있는 2군의 로테이션 투수들만으로도 하위권 팀으로 보내면 1군의 로테이션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타구단 팬들로부터 1군에서 안 쓰려면 임대라도 해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 투수 사정이 이 정도이니 팀에서는 마쓰자카가 드러눕거나 말거나(...). "당장 급하지는 않으니 천천히 너님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맘대로 재활하셈"이라는 식으로 거의 방목을 하다시피 했다. 심지어는 마쓰자카 본인의 요청에 따라 수술 후 아직 가족들이 남아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활을 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

마쓰자카의 먹튀행각에 대한 소프트뱅크 구단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많은데, 이는 사전에 부상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라이벌 팀에 가서 만에 하나 부활해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34] 저 말도 안되는 계약으로 붙잡아 놓고 일부러 2군에 박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다. 이미 호크스의 관계자가 "구단주도 기대는 안 했다. '타 구단에서 활약할 바에 우리가 붙잡자'라고 생각해서 계약했다"라고 했다(...).# 일본 최강의 재력을 가진 구단이니 가능한 퍼포먼스.

일단 구단에서는 수술 후 복귀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발표했지만, 수술 완치와 재활에 걸리는 시간만 따져도 2016년 시즌 개막까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못 맞추고 시즌 중간에나 복귀할 수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게다가 2016년 시즌에 복귀를 한다고 해도 호크스 1군의 선발진이 여전히 건재해서 이후의 전망마저 그리 밝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수로서 가장 치명적인 어깨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나 있을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는데 어쨌든 배째라하고 1년 접고 구단의 방목 덕분에 맘편하게 재활을 할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됐는지 몸 상태는 나아졌다고 한다. 2016년 3월 3일 두산 베어스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해서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최고 구속은 141km/h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2016시즌에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 듯 하다. 등판하는 모습은.

그러나 2군 경기에서도 1⅔이닝 동안 2피홈런 9실점이라는 재앙같은 피칭을 하는 것을 보면 1군에서 공을 던지는 것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었다.

2016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라쿠텐 전에서 0대2으로 뒤진 8회말에 등판해서 드디어 일본 복귀후 첫 1군 마운드에 올랐다. 2006년 이후 일본프로야구 1군 무대에는 거의 10년만에 올라온 셈. 결과는 1이닝, 3피안타 4사사구 5실점 2자책점으로 ERA 18.00(...). 혹사 여파가 세게 온 듯 하며, 최고 구속은 시속 144km에 머무는데다 제구력도 구린 탓에 다음 시즌에도 큰 기대는 안하는 게 좋을 듯.

2년동안 말아먹은게 못내 아쉬웠는지 17년 스프링캠프에서 의욕적으로 공을 던지며 재기를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한시간동안 공을 수백개나 뿌리는 무시무시한 연습량으로 인해 그 분이 있는 한화로 오라는 드립이 흥하고 있다. 일본에 재미있는 투수가 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 같이 17시즌 역시 한경기도 등판하지 못하였다. 이걸로 120억원째 먹튀

그런데 소뱅에서 재계약을 원한다고 한다! 향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쓰자카에게 준 그리고 먹튀한 돈은 상품판매로 다 충당했다고. 그러나 선수 본인이 FA를 선언하면서 소뱅과 결별하게 되었다. 3년간 단 1번 등판하면서 소뱅팬들에게는 일본시리즈의 극적인 우승 뒤에 혈압을 올리는 소식이 되며 소뱅뿐아니라 일본 프로야구계의 전설적인 먹튀가 되었다. 이정도 먹튀면 소뱅 팬들이 이를 갈듯도 한데 의외로 차분한 편이다. 뭐 구단주부터 3년동안 먹튀한 12억엔을 가지고 그 정도는 (상승의 강팀을 만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오차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데다, 마쓰자카가 연봉 4억을 먹고 있다고 다른 선수들 연봉을 주지 못해서 좋은 선수들이 팀을 떠나거나 팀이 약체화된 것도 아니라서 다른 팀 팬들의 어그로에도 배아파하기는 커녕 "어, 그래" 하면서 개의치 않는 수준.

소프트뱅크 퇴단 이후에는 뛸 팀을 찾아다녔고 요코하마에서 관심이 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최저연봉(2000만엔)만 받겠다고 선언을 했다. 비록 현재 실력만 보자면 그 돈도 아깝지만 마쓰자카가 가진 상품성을 감안하면 굿즈 토템으로 데려올 가치는 충분하다는 게 현재 인식. 우선 한신과 주니치거 거론됐지만 한신은 리빌딩을 이유로 거절했고. 이제는 아예 대만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다고. 퉁이 라이온즈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다만 마쓰자카 본인이 "거짓뉴스가 나를 망친다."고 강력히 반발, 부인하기에 대만 진출은 단순 찌라시로 머물듯 싶다.

그러던 와중에 닛칸 스포츠를 시작으로 일본의 스포츠 신문들이 일제히 주니치 드래곤즈의 마쓰자카 영입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라이 분고 주니치 구단주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혹평을 했고 이러한 기사를 접한 한국의 기레기들은 얼씨구나 하고 마치 마쓰자카가 주니치에게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도를 했다. 그러나 구단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의 주니치 팬들 사이에서는 시라이 구단주의 혹평에도 "저 영감 의뭉스럽게 딴청부린게 하루이틀이냐, 어차피 얘기 다 해놓고 연막피우는 게 뻔하다"라면서 마쓰자카의 영입을 거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팬들의 추측대로 결국 주니치에서 입단 테스트 기회를 제공, 마쓰자카에게 희망을 선사하였다. 전적으로 감독, 코치진 등 현장의 의견을 고려하여 결정한다고 하는데 감독과 사장은 긍정적인 뉘앙스의 인터뷰를 남겨 2018시즌 마쓰자카의 소속팀이 점차 정해지는 분위기다.[35]

3.4.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2018년 1월 23일, 언론을 통해 비공개 입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니치 공식 입단을 확정지었다. 주니치의 모리 시게카즈 감독에 의하면, 스프링캠프 명단에도 넣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봉은 4억엔에서 무려 96%가 삭감된 1500만엔에 계약하였다. 이 수치는 육성선수를 제외하면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삭감률이라고 한다. 등번호는 테스트 직전 만약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99번을 달 것이라고 예고했었다.[36]

2018년 3월 4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반테린 돔 나고야에서 열린 라쿠텐 이글스와 시범경기에 선발 등판해 피홈런 포함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시범경기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었다. 4월 5일 요미우리전에서 선발로 나섰다. NPB 경기에서 선발로 나선 것은 12년만.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5이닝 96구를 던지면서 8피안타 3사사구 3실점(2자책)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올시즌 받는 연봉액수와 지난 3년간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결과이지만 어디까지나 당장 우승이 무리인 주니치니까 그럭저럭이지 우승을 목표로 하는 소뱅이나 히로시마 같은 상위권 팀에서는 로테이션 진입은 고사하고 1군 로스터에 등록되는 것조차 언감생심인 수준이다. 다만 결과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소뱅시절 입에 달고 살던 레파토리였던 팔이나 어깨부위의 '위화감' 얘기도 안 하는 것으로 봐서 다음번 등판기회도 보장받을 듯 하다.

4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7이닝 동안 123구를 던지며 4피안타 2탈삼진 2볼넷 1몸에 맞는 공 2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챙겼지만 1-2로 패배하며 패전 투수가 됐다.

4월 30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1실점 3피안타 8피사사구 6탈삼진을 기록했고 팀이 3: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5월 20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투수로서는 6이닝 3피안타 7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고 타자로서는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는등 투타 양면에서 활약했고 팀이 6: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6월 8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교류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1실점을 기록했고 팀이 5:4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소뱅 팬 ㅂㄷㅂㄷ

전반기 기록은 7선발등판 3승4패 방어율 2.41 37.1이닝 35탈삼진 22볼넷 WHIP 1.29. 잔부상이 많아 등판수가 적은 것을 빼면 빼어난 비율스탯을 보여주며 쏠쏠하게 활약중. 나이와 스팟스타터라는 보직상 많이 못 나와서 그렇지 실력 자체는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듯. 원 소속팀 소프트뱅크 선발 로테이션이 붕괴된지라 아까운 자원으로 재평가되는 지경.

그리고 마운드에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덕분인지 올스타전 세리그 선발투수 팬투표 1위로 선발되었다.

8월 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2실점 6탈삼진 5피안타 6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8: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8월 16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3실점 6탈삼진 5피안타 3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11: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9월 2일 거인전에서는 2이닝 61투구 9피안타(2피홈런) 1탈삼진 7실점(모두 자책)으로 거하게 불을 질렀고 9월 13일 한신전에서는 5이닝 95투구 5피안타 4탈삼진 1실점(1자책)으로 선발승을 거두었다. 시즌 6승(4패) 기록.

시즌 성적은 11경기 55.1이닝 등판 6승 4패 51탈삼진 방어율 3.74로 많이 나오지는 못했지만 괜찮은 비율스탯을 기록했다. 거의 이닝당 1탈삼진을 기록할 정도로 올라온 구위가 볼만하다. 140km/h도 잘 안나오는 직구로 저 정도 탈삼진율은 기적이다

시즌 후에는 테레비아사히에서 중계한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게스트 해설을 맡았다. 2018년 11월 12일 NPB에서 선정한 올해의 컴백상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주니치도 마쓰자카 영입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연봉도 1500만엔에서 8000만엔으로 상승하였다.

그런데 2019년 2월 9일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팬에게 싸인을 해주다가 극성팬이 팔을 잡아당겼는데 이때 팔에 위화감을 호소했고, 검진 결과 어깨 염증이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 탓에 장기간 이탈이 불가피 해졌다.

5월 16일 팀의 연습일에 골프를 치러 가서 구단 자체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이 구단 대표를 통해 발표되었다. 팬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

7월 16일 한신전에서 시즌 첫 등판했다. 5이닝 2실점을 기록했는데 1, 3, 5회 대량실점 위기가 있었으나 위기관리능력을 보이며 탈출했다. 2:2로 팽팽한 가운데 교체되어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7월 27일에는 DeNA와의 경기서 0.1이닝 8실점이라는 최악투를 보이며 다시 1군에서 말소됐다.

이후 2군에서 컨디션 조절과 경기 출전으로 1군 복귀를 노렸으나 정규 시즌이 끝나면서 그대로 2019년을 마무리. 시즌 후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연봉을 최저까지 내리면서 주니치에 계속 남을지를 협의 중이었으나 주니치 입단 테스트를 도와준 모리 시게카즈 디렉터, 토모리 유이 해외 스카우트가 사임을 하면서 마쓰자카 본인도 방출을 요청했다. 일단 현역 생활은 계속 할 생각이라는 방침. #

그리고 이후 백수가 된 김에 같은 백수 처지인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일본시리즈 해설을 맡았다. 나름 소프트뱅크 출신이라고(...) 교진 출신인 다카하시와 함께 부른 듯. 작년에도 일본시리즈 게스트해설을 맡았는데, 나름 평가가 나쁘지 않아 올해도 해설을 맡게 되었다. 은퇴 후 진로는 해설 쪽으로 점쳐지는 듯.

3.4.3.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그리고 퇴단 이후 친정인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마쓰자카 획득에 나섰다. 2020년은 세이부에서 뛰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분위기. 그리고 2019년 12월 3일 NHK 등 일본 언론에서 오피셜이 뜨면서 돌고 돌아 결국 세이부에 돌아오며 친정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시즌 시작 전 연습경기에서 두산 베어스정수빈에게 3루타를 맞고 오재일에게 투런홈런을 맞았다(...).

이후에 닛폰햄 전 연습경기에 등판하여 4이닝 4실점을 기록했다. 직구가 힘이 없어서 변화구 위주 피칭을 하다보니 투구수가 많아지는게 여전히 문제. 그 와중에 커터가 135km/h가 나오는데 직구가 140km/h가 안나오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가 또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추(목) 부위에 내시경 수술을 받았다고 하며 재활에만 2~3개월이 소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세이부 팬들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국 2020시즌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구단은 재계약 예정이라고. 연봉이 3천만 엔으로 저렴한데다 90년대 말~2000년대 초 세이부를 대표하는 구단 역사에 남을 에이스이자 왕년의 전국구 스타라 일단 다시 세이부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는 날엔 구장은 매진될 것이고 상품도 불티나게 팔려서 적자는 메꿀 수 있는데다, 세이부 입장에서도 이제 와서 활약을 기대하기보다는 은퇴식을 치러 주고 지도자로서 기대하며 데리고 온 것인데 한두경기는 멋있게 던져줘야 친정팀에서 재기-영광의 은퇴식이라는 스토리를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1일 1천만엔 깎인 연봉 2,000만엔에 다음 시즌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의 신인 선수급 연봉.

어쨌든 그렇게 2021년을 맞이했지만 21년도 시즌 절반쯤 지난 시점에서 2군에서도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인은 2020년에 받은 목 내시경 수술. 수술을 받은 후 손저림이 생겼는데 2021년까지 손저림이 낫지 않아 공을 던질 수 없는 몸상태가 되었다고.

결국 세이부에서는 2021년 치른 은퇴 경기가 1군 등판의 전부가 되었다.

3.5. 국가대표 경력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경력은 매우 화려하며 그 실적과 성적도 매우 훌륭하다. MLB에 건너가기 전 NPB에 머무를 적인 2006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이 선발된 모든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였으며[37], MLB에 건너가서도 2009 WBC에 출전하여 팀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국가대표 단골이었다.

특히, 쿠바[38]와 대만전[39]에 극강의 모습을 보였으며 두 나라의 경기에 선발로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팀이 이겼다.[40]

모든 경기를 통틀어 봐도, 마쓰자카는 프로 선수로 나선 국제대회에서 통산 13경기 9승 2패 86.2이닝 61피안타 93탈삼진 22볼넷 2사구 21실점(17자책) ERA 1.77 [41]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2006 WBC, 2009 WBC 우승 및 MVP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등 실적도 화려한 편이다. 단순히 클래식 스텟만 훌륭한게 아니라 세부 스텟을 봐도 WHIP는 0.96, BB/9가 2.08, k/9가 9.66, 볼삼비는 무려 4.23이다. 즉, 팀 타자들의 지원을 많이 받아 운빨로 승리를 많이 기록한게 아니라 마쓰자카 본인도 선발 투수로서 팀 승리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실제, 마쓰자카는 국제대회에서는 2008 보스턴에서 보여줬던 도망 가는 피칭을 국제대회에서는 거의 하지 않고 오히려 파워 피쳐 마냥 공을 거침없이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는 모습을 보여줬다.[42] 그렇기에 어이없게 볼 넷을 내주는 경우가 적었던 것이며 볼 넷 맞을 바에 오히려 맞겠다는 각오로 공격적인 투구를 했었는데 전성기 시절 구위도 좋았기에 타자들과의 정면 승부에서 결과도 좋았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정면승부를 즐겨하여 타자에게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았기에 홈런을 종종 맞기도 했으며 특히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정면 승부 결과가 안좋을 때 홈런을 비롯해서 이승엽의 2루타 등 장타와 함께 종종 결정적인 실점을 내주기는 했었다.

그의 국대 커리어에서 다른 선수와 비교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재밌는 점은, 13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했다는 것이다. 많은 국제대회를 나와 선발로만 활약한 케이스는 일본내에서도 흔치 않다.[43] 마쓰자카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단골이던 우에하라 고지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부터는 구원 투수로 나왔고, 리그내에서는 좌완 최고 선발 투수인 스기우치 도시야 조차도 거의 모든 경기에서 불펜 투수로 보직을 전향해야했을 정도로 일본 투수들 라인업에서 좋은 투수들이 즐비했다. 이와쿠마 히사시2009 WBC에서 구원으로 등판한 적이 한 번 있고, 다르빗슈 유2009 WBC에서 대회 후반부에서는 불펜 투수로 나왔다. 2000년대 국대 단골이던 와다 츠요시2006 WBC에서 멕시코전에 구원 등판한 적이 있다. 심지어 대투수 구로다 히로키마저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정상 불펜으로 돌릴 정도의 일본 팀이었는데, 이런데도 마쓰자카는 모든 경기를 선발로 나왔다는 점에서 그가 선발 투수 에이스로서 얼마나 중용받았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여담으로, 한국 대표팀과의 통산 기록은 3경기 1승 1패 21이닝 10실점(7자책) ERA 3.00으로 그가 국제대회 통산 실점한 21실점 중 절반 가량인 무려 10실점을 한국 대표팀에게 내줬다. 유독, 한국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였던 셈. 실제, 마쓰자카가 국제 대회 내내 허용한 홈런 수는 4개[44]인데 그 중 절반인 2개도 한국에게 내준 것[45]이다.

또한, 마쓰자카가 13경기 중 1회에 실점한 경기가 총 4경기[46]인데 그 중 2경기도 모두 한국전이다. 재밌는 점은 나머지 2경기에서는 솔로 홈런으로 각 1점씩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나,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을 포함 4실점,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으로 2실점 하며 한국전에만 1회에 6실점 했다. 즉, 정리해보면 그의 국제대회 통산 13경기 중 1회에 실점한 경우는 고작 4경기 뿐인데, 그 4경기의 1회 총 실점 8실점 중 6실점을 한국에게 내준 셈이다. 마쓰자카 공이 눈에 안익어 초반에 공략하기 어려워했던 여타 다른 나라 타자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타자들은 마쓰자카에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커리어 9승 2패 중 1패도 한국이 안겨준 패배였다. [47] 여러 기록상으로 볼 때, 한국에게 유독 약했고 한국 타자들과 질긴 인연이 있다고 봐야할 듯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다른 국가 타자들에 비해 한국 타자들이 전성기 마쓰자카를 유독 공략을 잘했던 것이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게만 유독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임팩트 큰 장면[48]들을 내주며 한국 팬들에게 우에하라 고지오타니 쇼헤이급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실제 한국과의 통산 성적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와의 경기에서 통산 성적은 10경기 8승 1패 75.2이닝 11실점(10자책) ERA 1.19(...)의 엄청난 성적이 된다. 즉, 다른 국가에는 재앙과도 같던 투수였다. 대표적으로, 대만에게는 3경기 3승 0패 20이닝 2실점 ERA 0.90, 쿠바에게는 3경기 3승 0패 18.1이닝 4실점(3자책) ERA 1.47로 선발로 본인이 나서기만 하면 팀이 이기는 극강의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다르빗슈 유[49]와 마쓰자카가 힘으로 밀어 붙이다[50]가 한국 타자들에게 두들겨 맞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국 타자들이 파워 피처의 유형의 투수들에게 강하고 일본산 피네스 피처 유형의 좋은 로케이션과 커맨드 및 뛰어난 변화구로 타자들을 상대해 온 투수들에게 전통적으로 약해왔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는 선택적 기억의 오류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 와다 츠요시[51][52]이와쿠마 히사시[53], 와타나베 슌스케[54][55]처럼 제구가 좋거나 변화구 무브먼트가 훌륭한 이른바 기교파 투수 혹은 제구파 투수들에게 한국 타자들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에하라 고지[56][57]오타니 쇼헤이[58] 등 파워피처 유형의 투수들에게도 한국 타자들이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 고려할 때, 마쓰자카가 파워 피처스럽게 피칭하여 한국에게 안통했다기보다는 한국 타자들과 상성이 안 좋았던 것으로 이해하는게 일견 타당해 보인다.[59]

그래도 일본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통틀어 볼 때, 대표로 나갈 때마다 성적도 훌륭하고 국가대표 단골이였기에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일본 내에서도 매우 좋게 평가된다. 마쓰자카보다 개인으로는 높게 평가받는 다르빗슈 유도 국대 성적과 실적에서는 마쓰자카에게 몇수는 접고 들어갈 정도. 특히, 13경기를 모조리 선발로 뛰며 9승 2패를 기록해 승률도 상당하여 괴물 투수라는 별명에 걸맞는 활약을 국제전에서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한국전에서 내준 결정적인 장면들이 있어 한국 야구팬들에게는 기대만 못했다는 평이 주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쓰자카의 국제대회에서의 전반적 활약은 대단한 수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3.5.1.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마쓰자카는 아마추어 시절에 고3이던 1998년 9월에 일본 고시엔 구장에서 펼쳐졌던 아시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 등에 출전하였을 정도로 국가대표 단골이었다. 프로 투수가 되고나서는 데뷔 첫 해 9월에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전까지 23경기 14승 5패 166이닝 동안 139탈삼진 ERA 2.60을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다승 1위를 달려 성공적인 프로 무대 데뷔를 알린 마쓰자카. 그런 마쓰자카가 프로선수로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처음 참가한 대회는 1999년에 열린 제 20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이다. 이 대회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로 이 대회의 우승은 이승엽박재홍, 구대성 등이 활약한 한국의 몫이었고, 준우승은 일본이 차지했다. 비교적 넉넉하게 2등까지 시드니 올림픽 진출권이 주어졌기에 한일 양국가는 1등에게만 올림픽 직행권이 주어지던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달리, 대회 마지막 날 예정 된 한일전에 총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전의 중국과 대만전을 모두 잡아 2연승을 하면 사실상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되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이 둘 다음으로 전력이 강한 대만전에 양 국가 모두 총력을 쏟았는데 에이스 마쓰자카는 따라서 한국전이 아닌 대만전에 등판하게 된다. 여담으로, 마쓰자카의 방한 덕에 당시부터 전국구 스타였던 이승엽과의 맞대결을 기대하는 한국 팬들이 많았는데 마쓰자카는 대만전에만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한일전은 대회 마지막 날에서야 성사되었는데 사실상 말이 결승전이지 두팀 다 올림픽 직행을 확정지어 1,2위 결정전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대회는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인 9월에 열린 대회로, 대회가 끝난 뒤 소속팀에 바로 합류하여 잔여 시즌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기[60]였으므로 굳이 무리해서 한일전 이전 2일전에 있던 대만전에 선발 등판해서 9이닝이나 던진 마쓰자카를 하루만 휴식을 주고 한일전에 기용할 이유가 없었다.[61] 마쓰자카는 결국 대회 첫 번째 경기이자 올림픽 직행의 가장 큰 걸림돌인 대만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장한다.[62]

마쓰자카는 일본 원정팬 3000명을 동원시켰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중이었으며, 그 인기에 걸맞게 프로 자격으로 출전한 국제대회 첫 경기부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쓰자카는 대만과의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돼 기쁘다. 한국전에도 감독이 등판을 지시하면 던지겠다"[70]라고 마지막 날 예고된 한일전에 나가고 싶은 소망을 인터뷰에서 밝혔으나 그 소망과 달리, 투수 보호 차원에서 한국과의 매치업은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한국 안방에서 마쓰자카와 이승엽의 대결을 기대한 한국팬들에게는 아쉬운 소식.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15일 대만전 9이닝이나 던진 이후 하루만 휴식을 취하고 17일 한국전에서 나온다는 것은 엄청난 혹사이다. 그리고 그런 혹사를 각오할 정도의 대회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올림픽 예선이었으니. 그리고 일본이 이전 2경기에서 올림픽 직행을 결정짓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한일 양국 다 대만과 중국을 무난하게 눌러 최소 2위를 확보해 시드니 올림픽 본선행을 확정지은 직후의 경기였기에 일본 입장에서 에이스 투수를 무리하게 등판 시킬 이유가 없었다. 여하튼, 대만전의 좋은 투구로 리그내에서 그의 좋은 활약이 플루크가 아니었던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이 경기를 시작으로 국제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3.5.2. 2000 시드니 올림픽

마쓰자카는 1999 데뷔 시즌 신인답지 않은 엄청난 기록[71]을 남겼는데, 2년차에는 그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회 전까지 25경기 12승 7패[72] 148과 3분의 2이닝 동안 129탈삼진 ERA 4.36을 기록하며 전년도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쓰자카는 8월 한여름부터 퍼지는 모습을 보이며 부진했다. 특히 대회 직전인 8월 16일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부터 5경기 동안 승을 챙기지 못했으며 이 5경기 동안 25이닝동안 24자책점[73]을 기록하며 이 5경기 동안 ERA는 무려 8.64였다. 게다가, 올림픽을 2주 앞둔 9월 3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에서 1루 커버를 들어가다 타자 주자와 얽혀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올림픽 직전 마지막 경기인 9월 10일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도 6과 3분의 2이닝 동안 6실점(5자책)을 기록하며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여름에 퍼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닝 소화력도 떨어지고 탈삼진 능력도 전년보다 못하자 슬럼프 설도 흘러나오고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를 골고루 선발[74]해 참가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마쓰자카는 그래도 에이스 선발 투수로 활약한다. 특히,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한국과의 2번의 경기에 모두 선발로 나왔는데, 기대와는 달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75]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기록은 3경기 27이닝 21피안타 25탈삼진 8볼넷 10실점(7자책) ERA 2.33이었다. 딱히, 부진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국전만 따져보면, 2경기 17이닝 8실점(5자책) ERA 2.65로 기대만 못한 피칭을 보여줬다. 물론, 대회 시작 전 리그에서 부진한 모습[97]을 보였던 마쓰자카였기에 국제전에서 오히려 이러한 기록은 그에 비하면 좋은 피칭을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구대성과의 선발 싸움에서 지며 완투패 했기에 한국 내에서 마쓰자카는 한국 킬러를 꼽을 때 잘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만 못해 실망했다는 평이 주를 이룰 정도.[98] 여하튼, 저 성적이 딱히 못 던졌다고 볼 만한 성적은 아니지만, 헤이세이의 괴물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일본 전국구 스타였던데다가 한국에도 그 명성이 익히 알려졌던 탓에 그 기대에 비하면 또 잘 던진 기록이라 볼 수도 없었기에 다소 별로였다는 평이 일본 내에서도 대두되었다. 신인 때, 기성 프로 선수들을 압도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였지만,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며 슬럼프를 겪다 대회에서도 신인 때의 모습이 안나왔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일본내에서도 마쓰자카가 한국에 두 차례나 두들겨맞은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살의 프로 초년병이기는 했지만 최고 인기를 누려온 괴물 투수가 상대 라이벌 국가의 최고 타자들에게 여러번 통타 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부진한 와중 올림픽을 출전하기 전인 9월 13일 당시 교제 중이던 니폰 TV 아나운서 시바타 토모요의 자택 아파트 앞에서 주차 위반 혐의를 받는다. 단순 주차 위반이라면 범칙금 정도만 내고 끝났겠지만, 당해 마쓰자카는 8월에 이미 속도 위반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 되어 있던 상황. 즉, 무면허 운전을 한 것. 심지어 주차 위반을 은폐하려든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생겨 논란이 더 심화되었다. 당시 세이부 구단의 구로이와 아키라 홍보 과장이 그 대신 법정에 출두해 마쓰자카가 시바타 집에 갈 때 무면허 상태로 차를 몰고 갔다고 시인했다. 결국, 도쿄 지검에 서류 송검되어 약식 기소에 의해 벌금 19만 5000엔의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로인해, 당시 구단 사장인 오노 켄지 및 홍보 과장 구로이와는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당시 사이타마현 교통 안전 캠페인 홍보대사기도 했다. 이 건이 알려진건 올림픽이 끝난지 한달 후인 2000년 10월 17일이었고, 9월 13일은 시드니 올림픽 출전 직전으로 리그에서마저 부진하던 중이였기에 무면허 운전을 할 정도로 밀회에 빠져 올림픽에서까지 제 기량이 안나온 것이냐고 일부 언론에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스포츠 호치의 한 기자는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으니 올림픽 전 리그에서도 부진했던 것이고 결국 올림픽에서마저 제 기량이 안나오고 상태가 별로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평범한 기록으로 대회를 마감한데다가 팀도 노메달 굴욕을 맛봤지만, 대회 전 리그에서 워낙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마쓰자카였기에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던진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마쓰자카가 부진했다는 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99] 마쓰자카 헤이터에 가까운 사람들이 마쓰자카 사생활을 들먹이며 올림픽에서 왜 부진했는지 알겠다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한국전에서 통타 당한 것에 충격 받았다는 평 정도만 찾아볼 수 있을 뿐, 이 대회에서 그가 부진한 성적을 보인 것은 아니기에 20살의 프로 초년병을 위로하고 감싸는 기사들이 주를 이뤘다.

3.5.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마쓰자카는 2003년 29경기 16승 7패 194이닝 동안 215 탈삼진 ERA 2.83을 기록하며 신인 시절 만큼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고 본인의 본격적인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다.[100] 이 성적으로 탈삼진왕과 방어율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03년 말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당당히 선발 되었다. 이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을 겸한 대회였으며 우리에게는 삿포로 참사로 더 유명한 대회기도하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도 마쓰자카에게 팀의 2번째 경기인 대만전 선발을 맡겼다. 아무래도, 직전 대회인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전에 의외로 부진하였고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대만을 상대로 엄청난 피칭을 보여주었기에 마지막 날의 한국전이 아닌 팀의 두 번째 경기인 대만전에 선발 등판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101]

이 날 기록은 7이닝 3피안타 1볼넷 무실점 12탈삼진으로 대만전을 잡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였는데 한국은 대만에게 패배하며 3위에 머무는 바람[103]에 결국 올림픽 진출이 좌절되었다. 반면, 일본은 3연승으로 무난하게 예선 1위로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이었던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마찬가지로 대만전을 꺾는 것이 한일 양국이 올림픽 진출을 결정하는 주요 경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대만전에서 두 번 연속의 올림픽 예선에서 대만전을 꺾는데 앞장선 마쓰자카의 활약으로 2번 연속 올림픽 직행을 쉽게 확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올림픽 예선뿐 아니라 마쓰자카는 2006 WBC에서도 대만을 상대로 또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대만 킬러로 불려도 될 정도로 대만전[104]에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였다.

3.5.4.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쓰자카는 직전년도 리그에서 좋은 모습[105]을 보였다. 거기다가 연말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대표팀에 참가해 대만전에서 좋은 피칭을 보이며 일본 대표팀의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에도 공을 세웠다. 여기에 시즌 중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 직전까지 마쓰자카는 18경기 8승 6패 126과 3분의 2이닝 동안 98탈삼진 ERA 3.20을 기록했다. 게다가 9완투 4완봉으로 리그 최고의 이닝이터다운 면모까지 보여주고 있었으니 아테네 올림픽에도 승선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올림픽에서는 쿠바와의 경기, 호주와의 동메달 결정전에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결론적으로 팀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에 그쳤다.[106]
대회에서 쿠바를 꺾을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이던 당시 일본 팀이었지만 호주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았다. 심지어 이 대회는 미국과 한국 모두 출전을 안한 올림픽이었고 사실상 쿠바를 빼면 일본은 금메달 1순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쿠바까지도 조별 예선에서 꺾는 모습을 보였으니 금메달을 기대할 법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대놓고 전력이 일본에 비해 약체인 호주에게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116] 다만, 호주의 경우 해당 대회에서 준결승전 이전 예선 풀리그 경기에서도 일본을 9:4로 꺾는 파란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 일본은 아테네 올림픽 예선 라운드 성적이 6승 1패로 이 유일한 1패를 안긴 팀이 당시 호주였던 것. 이후 준결승전과 동메달 결정전까지 모두 합하면 일본은 7승 2패를 기록했는데, 이 2패를 모두 호주에게 당한 셈.[117] 당일 경기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당일 선발 시미즈 나오유키가 4회 3실점하며 3:0으로 밀리다 4회와 5회 타자들이 각각 3점, 1점을 득점해주어 3:4로 일본이 재역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7회와 8회 미우라 다이스케와 안도 유야가 각각 3실점 하며 팀은 9:4의 스코어로 패배. 특히, 일본 타자들은 1득점한 5회 이후로 6회부터 별 힘도 못써보고 무기력하게 졌다. 여담으로, 일본 타자들은 해당 경기 6회부터 무득점에다 다음 준결승전 팀 완봉패까지 더해져 15이닝 연속 무득점으로 호주 투수들에게 막혀 참패를 당했다. 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다름 아닌 제프 윌리엄스[118]. 윌리엄스는 조별예선에서도 7회부터 9회까지 3이닝 무실점 호투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준결승전까지 2.1이닝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막아냈다. 즉, 제프 윌리엄스는 일본을 꺾는데 두 차례나 혁혁한 공을 세운 셈. 여러모로, 일본 타자들이 호주 투수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제프 윌리엄스를 공략하지 못해 성패가 갈렸던 대회[119]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제프 윌리엄스는 준결승전 7회 한점차의 팽팽한 승부 속 2사 1,3루의 절체 절명 위기 순간에 나와 불을 끄며 일본 타자들 방망이를 무력화 시킨 것은 압권. 이 정도면 그냥 제프 윌리엄스 혼자 일본 떨궜다고 봐도 된다. 여기다가, 선발 옥스프링까지 소위 말하는 '공 긁히는 날'이었기에 제프 윌리엄스의 위력에 선발 투수 호투까지 발휘되어 수준 높은 투수 두명이 나오니 준결승전에는 그냥 팀 셧아웃을 당해버렸던 것.[120] 이렇게 약팀일지라도, 좋은 투수가 연달아 나와 총력을 다하면 아무리 강팀이라도 고전할 수 밖에 없다는 '단기전의 어려움'[121][122][123]에 경기 내용도 상대가 잘해서 진 한 점차의 승부였기에 이런 점들이 참작되어 일본 투타 선수들의 삽질 때문에 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와 더불어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허용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의 일본 야구팀의 성적이 2000 시드니 노메달 - 2004 아테네 동메달 - 2008 베이징 노메달로 수난이 이어져 일본은 올림픽에서 입은 상처가 지속된다. 2000년 시드니 대회는 한국에 패하고 4위를 기록했으며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3위로 동메달, 그리고 2008 베이징 대회에서는 또 다시 한국에 패퇴하고 4위에 머물렀다. 즉,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 2004년 대회를 제외한 다른 대회에서는 아예 메달을 받지 못한 셈. 더욱이 2004 아테네 올림픽 때는 미국도 참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은메달을 확보하고 나서는 대회나 다름없었음에도 동메달에 머물렀다는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 오히려 이런 판국에 동메달을 딴 것은 사실상 실패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아테네 올림픽 자체가 시즌 중에 열렸다 보니 팀 전력 안배 차원에서 각 팀 당 2명만을 차출하기를 권고했고, 팀 당 2명이 출전한 대회였기에 최정예 대표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투수 면에서는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코지, 와다 츠요시, 쿠로다 히로키, 이와쿠마 히사시[124] 그리고 타격에서는 죠지마 켄지, 후쿠도메 코스케, 타카하시 요시노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나카무라 노리히로, 타니 요시토모, 와다 카즈히로 등 리그 내 최고의 투수와 타자들이 선발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최정예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직전년도 11월에 삿포로돔에서 펼쳐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엔트리와 비교해 봐도,[125] 실질적인 전력손실은 (2004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마츠이 카즈오 정도이다.[126][127][128] 무엇보다 투수진에서는 미스터 완투라고 불리는 쿠로다 히로키가 대회 내내 불펜역할을 맡았는데,[129][130] 쿠로다 같은 대투수조차 팀사정상 불펜으로 돌리는 팀을 최정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다.

하지만, 타선은 누가봐도 최정예에 가깝다고 볼 수는 있었지만 투수진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과연 최정예가 맞나?'하는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쿠로다 히로키는 걱정과 달리 아테네에서 좋은 피칭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당시 리그에서는 그닥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구로다의 경우 아테네 출전 직전 16경기 5승 7패 ERA 4.98로 그답지 못한 성적을 내던 중이었다. 이뿐 아니라, 당시 아테네에 승선한 선수 중 안도 유야[131], 구로다[132], 미우라 다이스케[133]는 성적 상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좋은 투수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사이토 카즈미라던가, 이가와 케이, 카와카미 켄신, 아라카키 나기사 등은 저 셋보다도 나은 성적을 기록중이었다. 더욱 최정예의 팀을 만들기 위해 기준을 빡빡하게 잡아보자면, 당시 승선한 코바하시 마사히데[134]도 저 넷보다도 못한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승선한 선수들 중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코지, 이시이 히로토시, 이와세 히토키, 와다 츠요시, 이와쿠마 히사시 정도를 제외하고는 최정예 대표팀을 꾸릴 때 발탁될만한 성적 자체가 아니었다..

그나마 쿠로다는 올림픽에 출전해 매우 좋은 피칭[135]을 선보이며 본인 몫을 다하기라도 했지, 정작 안도 유야[136]미우라 다이스케[137]는 올림픽에 가서도 그닥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전년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투수진 스쿼드에서 큰 차이가 없는데,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 감독 역량 부족의 사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안도 유야와 코바하시 마사히데는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004년 아테네 올림픽 모두 출전하였는데, 이 두 선수는 2003년에는 발탁될 만 했지만, 2004년에는 뽑혀서는 안되는 성적이었다. 그 둘보다 나은 투수들이 있었기 때문. 반대로 키사누키 히로시는 2003년에 발탁했다가 2004년에는 부진하자 승선시키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대표팀 구성 시 경험적 측면과 보직을 고려할 수 밖에 없지만 보직을 고려해도 중간 계투와 마무리에서 저 둘보다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선수들은 이가라시 료타[138], 오카모토 신야[139] 등도 있었다.

그리고 경험을 강조한 발탁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것이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제대회를 경험해 본 안도 유야와 코바야시 마사히데를 아테네 올림픽에서 활용을 잘했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작 그렇게 데려간 안도 유야는 1경기 2이닝 투구, 코바야시 마사히데도 3이닝 투구에 그쳤다. 당시 일본 대표팀 전체 투수진이 총 80이닝을 소화했는데 이 둘은 5이닝 밖에 책임지지 못한 셈. 즉, 경험적 측면을 고려해 저 두 명의 투수들을 승선시켰으나, 그 경험을 모조리 발휘하지도 못한 것. 이 때문에 다른 구원 투수들은 과부하 되었다. 이와세 히토키는 무려 5게임을 나와 5.2이닝을 던졌고, 쿠로다 히로키도 3경기 나와 무려 9이닝을 굴렀다. 이시이 히로토시 같은 경우에도 무려 4경기 5이닝 투구를 했다. 셋 모두 안도 유야와 고바하시 마사히데의 소화 이닝 수를 합친 5이닝 이상을 각각 혼자서 소화했다... 사실상, 아테네에서 저 셋이 대부분 계투진을 책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모로, 팀 당 제약을 둔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 선수 선발 및 운용 자체가 문제였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척 봐도 이래저래 아테네 투수 구성 및 운용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결과이다. 여담으로, 와다 츠요시나 마쓰자카, 우에하라 코지도 많은 이닝을 소화했으나 이들은 아테네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했고 본래 국제대회에서는 대회 내내 선발 투수들이 구원 투수들에 비해 많은 이닝을 던지는 편이다.

여러모로 팀 당 2명의 제약이 아예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선수 선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팀 당 2명 선수 선발이라는 제약 자체가 핵심 문제였는지 그 제약 속에서도 최선의 투수진을 구성하지 못하고 운용까지 못한 감독 역량이 핵심 문제인 것인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적어도 투수 측면에서 최정예 팀은 아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선수 선발에서 문제를 인지했기에, 일본도 2008년 베이징에서 칼을 갈고 야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래 최초로 프로 선수 선발에 있어 제약을 두지 않았다.[140] 하지만, 정작 최정예로 선수들을 발탁해 데려갔음에도 베이징에선 노메달 4위로 대회를 마친 것은 함정... 오히려 아테네때보다도 못했다.

근본적으로 일본대표팀이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실상 실패한 이유는, 팀 구성이 최정예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카하타 키요시 감독의 대회기간 중 보여준, 휴식일에 상대팀 전력분석 대신 타종목 응원을 위한 경기장 방문에 쇼핑물 투어를 벌이는 등의 기행과 깽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41][142] 바꾸어 말하면, 당시 호주 감독이었던 존 디블[143]의 감독역량이 일본 감독[144]의 역량보다 앞섰다고도 할 수 있다.[145]

어쨌든, 예상과 달리 은메달도 확보하지 못했으니.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동메달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사실상 실패한 올림픽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미국도 없는 상황에서 조차도 고작 동메달이었기 때문.[146] 결국 시간이 흘러 2021년 5전 전승 금메달로 그 수모를 만회하긴 했다.

팀은 어쨌든 동메달 결정전에서 캐나다를 11:2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마쓰자카는 시드니 노메달의 수모를 다는 아니지만 일정정도 되갚게 된 셈.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최종 기록은 2경기 1승 1패 16이닝 12피안타 20탈삼진 4볼넷 4실점(3자책) ERA 1.69이었다.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1패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두 경기 모두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다. 특히, 쿠바에게 대회 유일한 패배를 안기는데 앞장섰고 호주전에서도 1실점 외에는 좋은 피칭 내용으로 상대 타선을 잠재웠다.

3.5.5. 2006 WBC

마쓰자카는 전년도(2005년) 최전성기의 성적을 기록[147]하며 2006 WBC 일본 야구 국가 대표팀에도 승선한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왕정치감독은 마쓰자카를 중요한 경기의 선발로 내보낸다. 그리고 마쓰자카는 그에 부응하며 등판 때마다 좋은 피칭을 보여주어 초대 WBC 대회 MVP까지 차지하였다.

이어, 첫 경기 미국전 패배와 2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한일전에도 패해 1승 2패로 일찍 귀국할 뻔 하였으나... 이게 웬걸 미국이 뜬금없이 멕시코에 패하는 덕에 어부지리로 일본은 준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준결승전에서는 우에하라 고지의 7이닝 무사사구 무실점 완벽투 덕에 6:0으로 한국을 꺾고 결승전에 올랐다. 곧 이어 마쓰자카는 상대편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꺾고 올라온 쿠바를 상대로 선발로 나서게 된다.

마쓰자카는 이 대회에서 3경기 3승 0패 13이닝 8피안타 10탈삼진 3볼넷 2사구 2실점 ERA 1.38의 기록으로 마무리한다. 유일한 이 대회의 3승 투수였으며 훌륭한 성적과 함께 초대 WBC MVP를 차지한다. ALL-WBC Team에 이름을 올린 것은 덤. 이때, 일본 대표팀의 대회 기간을 통틀어 팀 평균자책점이 2.54였는데, 마쓰자카의 평균 자책점은 1.38로 그를 훨씬 하회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준결승전 스플리터 낚시와 직구 쾌투로 악몽을 선사한 것으로도 유명한, 우에하라 고지는 마쓰자카와 초대 대회 WBC 선발진을 이뤄 마운드를 단단하게 막아주기도 했으며 이 때 우에하라의 이 대회 평균 자책점은 ERA 1.59 였다. 기록으로보나, 중요한 경기에서 피칭 내용[152]으로 보나 마쓰자카와 우에하라가 선발진을 이뤄 여러모로 투수진에서는 이 둘이 캐리했던 대회.

3.5.6. 2009 WBC

대회 전년도인 2008년에 보스턴에서 18승 3패 ERA 2점대로 훌륭한 피칭을 보여준 마쓰자카는 2009 WBC 일본 대표팀 감독 하라 타츠노리에 의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대회 전부터, 일찍이 하라 감독은 이와쿠마 히사시, 다르빗슈 유와 더불어 마쓰자카를 선발 3인방으로 낙점했다고 공표했다. 대회 첫 경기였던 중국전다르빗슈 유가 선발로 나섰고, 승자조 경기였던 한국전에 마쓰자카는 선발로 나서게 된다.

팀은 한국과의 한국과의 2라운드 승자조경기에서 한국에 4:1로 패배하며 엘리미네이션 게임으로 밀려난다. 이 엘리미네이션 게임 상대는 쿠바. 일본의 4강 진출과 대회 탈락의 당락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였기에 쿠바 킬러였던 마쓰자카의 재등판도 기대 했으나 불과 3일전에 6이닝 던졌던 선발 투수를 이틀 휴식만 준 채 재등판 시키는건 무리라고 판단했던 하라 감독. 하라 감독은 이와쿠마 히사시를 선발로 내보냈고 이와쿠마와 그를 이어 등판한 스기우치 도시야[156]는 이와쿠마와 더불어 쿠바 타선을 무실점으로 봉쇄하여 팀은 5:0 2경기 연속 영봉승으로 일본은 4강 진출을 확정짓는다. 이어, 2라운드 순위 결정전도 휴식을 취한 마쓰자카는 준결승전인 미국전에 선발 등판하게 된다. 아무래도 전년도 MLB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마쓰자카를 하라 감독이 믿고 중용한듯 하다.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는 3경기 3승 0패 14.2이닝 14피안타 13탈삼진 5볼넷 4실점 ERA 2.45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으로 팀의 우승에 공헌한다. 1회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유일한 3승을 기록한 투수가 되면서 2009 제 2회 WBC MVP로 선정되며 2연속 대회 MVP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ALL-WBC Team에도 선발 되었으며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마쓰자카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

3.6. 은퇴

결국 2021년 7월 7일, 은퇴를 선언했다. 2021년 10월 19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현재 공석인 등번호 18번을 달고 마운드에 올라 현역 시절을 마감하는 피칭을 선보일 예정이다. 같은 날 은퇴 기자회견도 계획되어 있다.

19일 당일 예정대로 마운드에 올라와 1타자만을 상대했다. 콘도 켄스케에게 5구 승부 끝에 볼넷을 주고 현역 마지막 등판을 마무리했는데 5개의 공 모두 포심이었음에도 120km/h를 넘기지 못했고[160] 제구도 뜻대로 잘 되지 않았는데, 오른팔의 손저림이 심한 모양이다.은퇴 경기 투구 영상

2021년 12월 4일,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으로 최종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식 도중 스즈키 이치로가 깜짝 등장해 꽃다발을 전달했다.영상

이렇게 일본 야구에 충격을 안긴 헤이세이의 괴물은 젊은 시절 누적된 혹사의 여파로 MLB 시절부터 점차 하락세를 겪더니, 일본 복귀 후 끝없는 부상에 시달리다 아쉬움 속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3.7. 은퇴 후

은퇴 후 개인 유튜브 채널을 올리기 시작했다.

TV 아사히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2023 WBC 해설 또한 맡을 예정이다. 그래서 SBS와 단독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9 세이부 25 180 16 5 0 0 2.60 124 95 151 1.17
2000 27 167⅔ 14 7 0 1 3.97 132 99 144 1.35
2001 33 240⅓ 15 15 0 0 3.60 184 118 214 1.25
2002 14 73⅓ 6 2 0 0 3.68 60 22 78 1.02
2003 29 194 16 7 0 0 2.83 166 72 215 1.17
2004 23 146 10 6 0 0 2.90 127 48 127 1.16
2005 28 215 14 13 0 0 2.30 172 59 226 1.03
2006 25 186⅓ 17 5 0 0 2.13 138 37 200 0.92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7 BOS 32 204⅔ 15 12 0 0 4.40 191 81 201 1.32
2008 29 167⅔ 18 3 0 0 2.90 128 101 154 1.32
2009 12 59⅓ 4 6 0 0 5.76 81 32 54 1.87
2010 25 153⅔ 9 6 0 0 4.69 137 82 133 1.37
2011 8 37⅓ 3 3 0 0 5.30 32 24 26 1.47
2012 11 45⅔ 1 7 0 0 8.28 58 23 41 1.71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3 NYM 7 38⅔ 3 3 0 0 4.42 32 16 33 1.24
2014 34 83⅓ 3 3 1 3 3.89 62 56 78 1.34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5 소프트뱅크 1군 기록 없음
2016 1 1 0 0 0 0 18.00 3 4 2 5.00
2017 1군 기록 없음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8 주니치 11 55⅓ 6 4 0 0 3.74 50 37 51 1.48
2019 2 5⅓ 0 1 0 0 16.88 12 5 2 2.63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20 세이부 1군 기록 없음
2021 1 0 0 0 0 0 0.00 0 1 0

5. 여담

6. 둘러보기



[1] 신인왕과 마찬가지로 투수 중에서도 뚜렷한 성적을 낸 투수가 없어서 사와무라상도 '해당자 없음'으로 처리하였다.[2] 이 해에 사상 유례가 없는 신인 흉작으로 인해 퍼시픽리그 측에서 결국 신인왕은 '해당자 없음'으로 발표하였다.[3] 은퇴경기때 단 하루만 전성기 시절 등번호로 바꿨다.[4] 마쓰자카가 후술할 혹사 여파로 인한 충격적인 먹튀 행각으로 인해서 비판받기는 하지만, 그건 프로 오고 나서의 이야기고 고시엔 시절 마쓰자카는 미국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과 비교할 수준의 역대급 유망주였다. 물론 2000년대의 미국과 1990년대의 일본 야구의 수준차를 고려하면 스트라스버그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5] 괴물의 칭호는 에가와 스구루가 원조격이며 마쓰자카를 거쳐 사사키 로키가 등장하며 레이와의 괴물로 이어 받게 된다. 다만 사사키는 순수 기량이 그야말로 괴물일 뿐 고시엔 활약상은 감독의 보호로 인해 마쓰자카에 비해선 미미했다.[6] 일본은 3학기제로 인해 학기의 시작을 4월 1일에 한다.[7] 하술할 인원들 외에도 무라타 슈이치, 스기우치 토시야, 후지카와 큐지, 나가카와 카츠히로 등의 명선수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표현에 대해 와다 츠요시처럼 좋아한 선수들도 있었지만 불만을 가진 선수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아라카키 나기사JFK로 활약했던 쿠보타 토모유키. 물론 저 둘도 은퇴후 말년의 마쓰자카를 보면서 그의 부활을 바라긴했다.[8] 본인은 사인할 때 D-Mat을 선호한다고 한다.[9]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 한국전, 2003년 정규 시즌 지바롯데전(마린 스타디움), 2004년 일본시리즈 주니치전(반테린 돔 나고야) 등등 몇차례 최고 156km를 찍었다.[10]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초반 몇년은 95~96 마일 이상을 여러 번 기록했다.[11] 특히 일본시절 터피 로즈가 마쓰자카의 커브를 극찬한 적이 있다.[12] 사실 구종 자체는 140km/h를 상회하는 빠지는 고속 슬라이더이지만 회전축은 실제로 진행 방향과 평행한 자이로 볼 성 회전에 가깝다.[13] 정확한 뉘앙스는 노무라 감독이 생각하는 정통파 투수란 패스트볼의 제구 능력이 뛰어나 상대 타자가 패스트볼을 기다려도 과감하게 패스트볼을 던져 승부 할 수 있는 투수인데, 마쓰자카는 제구가 그렇게 되지 않고 반대로 다양하고 뛰어난 변화구를 이용해 타자를 요리하기에 기교파다라는 뜻으로 이야기했다.[14] 이후, 레이와의 괴물이라는 칭호는 사사키 로키가 갖게 되는데, 사사키 역시 초고교급 유망주로 주목받은 바 있다.[15] 여담으로 이 명승부에서 마쓰자카와 맞대결해 패한 PL학원의 투수 카미시게 사토시는 팔꿈치 부상으로 프로 진출을 포기한 후 2003년 닛폰 테레비에 입사해 현재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중이다. 미일프로야구 교류전 중계에서 카미시게가 캐스터에 객원해설이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카미스게 캐스터가 코시엔에서는 서로 라이벌이었지만, 오늘은 서로 잘해봅시다 라는 멘트를 했다.[16]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덕아웃에서 쉬고 있었던 게 아니라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서 풀 이닝 소화중이었다![17] 참고로 고시엔 대회는 전부 낮 경기로 치러진다. 1년 중 가장 더운 8월 초중순에 뙤약볕 밑에서 경기를 한다는 얘기다. 특히 8강전은 하루에 4경기를 다 치러버리기 때문에 아침 8시부터 경기를 시작하는데, 요코하마 고교와 PL학원의 경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더운 세번째 경기인 낮1시 경기였다![18] 1번타자 이데 타츠야 - 2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3번타자 카타오카 아츠시와 대전하며, 결과는 마쓰자카가 이데와 카타오카는 삼진, 오가사와라는 투수 땅볼로 삼자범퇴시켰다. 이날 경기는 5 - 2로 세이부가 이김과 동시에 마쓰자카가 8이닝 9탈삼진 2실점으로 데뷔 무대에서 첫 승리투수가 되었고, 닛폰햄의 이날 득점은 오가사와라가 8회에 마쓰자카의 생애 첫 피홈런인 2점 홈런을 날린 것이 유일했다. 출처[19] 사와무라상은 옆 동네에서 같은 해에 데뷔한 대졸 신인 우에하라 고지가 차지했다. 우에하라는 이 해 20승+센트럴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20] 센트럴리그 방어율왕(ERA 1위). 일본은 지금도 종종 평균 자책점이라는 용어보다는 방어율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21] 물론 당시는 세이버스탯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WAR이 뭔지도 몰랐던 시대이기에 WAR을 근거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일본에서 지배적인 관점인 방어율이나 승률을 근거로 '방어율이 딸리고 패가 승만큼 많은데 쟤가 왜 최고 투수야?'하는 의견이 많았던 것.[22] 여담으로, 이 WAR 수치는 1980년 시즌부터 2019년까지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를 양대리그 통틀어 살펴봐도 무려 3위에 해당하는 놀라운 기록이다.(순위는 Delta 및 NPB stats 사이트 기준. 참고로 9.2의 WAR 수치는 delta 기준.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는 WAR 7.8기록.) 마쓰자카의 커리어 하이 시즌인 2005년 보다도 수치가 높다... 참고로, 1위와 2위는 각각 WAR 11.5와 9.8을 기록한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다나카 마사히로(이 WAR 수치는 delta 기준. 참고로,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는 각각 9.6과 8.1의 WAR기록.). 이 문서의 주인인 마쓰자카의 단일시즌 최고기록은 2005년에 WAR 8.9의 기록(delta 기준.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는 2005년 WAR 7.3 기록.)이다. 참고로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NPB는 역사적인 타고투저 해의 연속이었다. 지금이야 투고타저 리그라는 인식이 팽배한 NPB지만 2001년 당시에는 기록적인 타고투저의 원년이었고 때문에 노구치의 기록이 더 빛났던 것.(특히, 2003년과 2004년의 퍼시픽리그의 타고투저가 그 절정이었다!) 그리고 2011년은 반대로 기록적인 투고타저의 해(투신타병에 가까운...)였고 이 때문에 서로 간의 리그 환경이 워낙 극과극이라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다나카 마사히로와 2001년의 노구치 시게키의 기록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23] 다만 일본의 세이버 스텟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 사이트인 delta와 npb stats 사이트에서는 80년대 이후 전체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지만, 또 다른 유명 사이트인 ranzan을 기준으로한 WAR에서는 노구치의 기록이 전체 3위가 아니니 출처에 따라 WAR에 관한 기록은 달라질 수 있다.[24] 다만, 사와무라상의 경우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임팩트가 뛰어나다면 한 두개 미달 정도는 눈감아주고 수상시켜주기도 한다.[25] 마쓰자카도 평균 자책점과 승률 면에서 전항목 달성에 실패하였다.[26] 마쓰자카는 최전성기가 아닌 2001년에 사와무라 상을 딱 한번 타봤다. 정작, 본인이 NPB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혹은 이가와 케이같은 선수들에게 밀리며 수상을 하지 못했다.[27] 비슷한 장면이 9년 뒤 연출된다.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라쿠텐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6차전에서 160투구를 하고도 패했는데 7차전 마지막 이닝에 등판하였다. 2004년 7차전은 반테린 돔 나고야에서 했지만 2013년 7차전은 비가 내리는 미야기 구장에서 펼쳐졌고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 구종은 무려 슬라이더였다.[28] 훗날 왜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완투를 안하죠?라는 드립을 치게 될줄 누가 알았을까.(...)[29] 가끔 비교가 된 우에하라 고지의 성적은 같은 기간 평균자책점 3.02, WHIP 1.03, 195시합(193선발) 102승 54패, 56완투 9완봉, 1391⅓이닝, 1236삼진이다.[30] 볼을 아예 던지지 않는 조정. 즉 캐치볼이나 투구연습을 하지않고, 달리기스트레칭 등의 기초적인 훈련만 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조정법.[31] yips. 스포츠 선수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경련 등을 일으키며, 스포츠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데 지장을 겪는 정신질환인데 사실 입스는 정확히 골프용어이며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 맞는 용어이다.[32] 류현진이 받았던 수술과 비슷한 수술이다.[33] 특히 외국인인 스탠드리지와 밴덴헐크를 10일 간격으로 번갈아서 등록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스탠드릿지는 10승 + 3점대 ERA의 준수한 성적에도 자리가 없어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34] 실제로 미국 진출 전까지 마쓰자카는 호크스의 천적이었다.[35] 일단 뜬금없이 주니치행이 떠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팬들은 현 주니치의 수뇌진이 세이부 시절 마쓰자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인 점을 들고 있다. 모리 시게카즈 현 감독은 마쓰자카의 신인시절 세이부의 코치였고 데니 도모리 해외 스카우트 담당은 마쓰자카의 선배로서 세이부의 필승조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주니치 행 얘기가 나온 것은 주니치 구단 수뇌부와 마쓰자카의 개인적인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아무것도 보여준 것 없는 퇴물을 정실로 데려올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구단이 얼마나 맛이 갔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 하겠다[36]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37] 보스턴에 합류한 2007년부터 2년간은 국가대표로 출전하지 않았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 정예가 발탁되어 참가한 국제대회는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008 베이징 올림픽 단 두개였다. 먼저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메이저리그 선수들 차출이 거부된 대회이다.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는 시즌 종료 이후 열려 메이저리거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박찬호는 당시 메이저리거였지만 시즌 종료 이후 이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대만전에서 호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쓰자카는 당시 일본의 빅리거였던 이치로, 마쓰이 등과 함께 이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진출만 아니었다면 마쓰자카의 국제대회에서 태도나 그의 성격상 모든 대회에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 전성기 때 NPB 정예 1군이 발탁되는 모든 대회에 선발될 수도 있었던 셈.[38] 2004 아테네 올림픽 승리투수,(8.1이닝 3실점(8회까지는 무실점)) 2006 WBC 결승전 승리투수(4이닝 1실점) 2009 WBC 2라운드 첫 경기승리투수.(6이닝 무실점) 통산 3전 3승 0패[39]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승리투수(9이닝 1실점)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승리투수(7이닝 무실점) 2006 WBC 아시아 라운드 승리투수(4이닝 1실점) 통산 3전 3승 0패[40] 두 나라 경기를 모두 통틀어 통산 6전 6승 0패.[41] 2009 WBC 직전 호주 대표팀과의 평가전 기록 1.2이닝 2실점을 포함하면 88.1이닝 23실점(19자책) ERA 1.94 기록.[42] 물론, 100% 모든 경기에서 그런것은 아니고 2004 아테네 호주전이나 2006 WBC 대만전은 기교파 투수 위주의 피칭을 종종 보여주기도 했었다.[43]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흔치 않은 기록. 류김윤 트로이카로 불리었으며 2000년대 중후반 2010년대 초중반 국대 투수진을 책임지다 시피했던 류현진 - 김광현 - 윤석민 모두 국가대표 경기에서 불펜 출전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 전설적인 일본 킬러로 회자되는 대성 불패 구대성도 불펜 등판 경험이 있을 정도다. 물론, 국제대회 자체가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끌어내기 위해 컨디션이 좋고 대회 기간동안 잘던지는 투수를 선발 - 중간 - 마무리 구분없이 보직을 계속 옮겨서 내보내기는 한다. 대표적으로 2006 WBC 에서의 박찬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구대성, 2009 WBC에서 다르빗슈 유가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쓰자카처럼 출전한 모든 대회 모든 경기에서 선발로만 중용받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그것도 최고 투수만 모인다는 국가대표팀에서 선발 중책만 맡았다는 것은 마쓰자카가 현장에서 감독 코치들에게 얼마나 신망이 두터웠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44] 2006 WBC 결승전에서 쿠바 에두아르도 파렛의 솔로 홈런, 2009 WBC 준결승전 미국의 브라이언 로버츠의 솔로 홈런과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45]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46] 2006 WBC 결승전, 2009 WBC 준결승전과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 마지막으로 2009 WBC 승자조 경기[47] 나머지 1패는 2004 아테네 4강전에서 호주에게 1:0 스코어로 패한 것이다. 마쓰자카는 선발 투수로서 7.2이닝 13탈삼진 1실점으로 분투했으나, 팀 타자들이 호주 투수들에게 틀어막히는 바람에 호투하고도 패전의 멍에를 써야했다.[48] 이승엽과 김태균의 홈런이나, 시드니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승엽의 결정적 2타점 적시 2루타 등.[49] 한국전 통산 8이닝 4실점(3자책점) ERA 3.38 기록[50] 실제, 이진영은 스톡킹에 나와 다르빗슈 유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라 오히려 할만했고, 제구가 좋고 변화구가 다양한 이와쿠마 히사시가 오히려 더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한국은 스피드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지만 변화구가 좋고 제구가 좋은 선수들에게 애먹는다는 말도 덧붙였다.[51] 한국전 통산 12이닝 2실점 ERA 1.5 기록[52] 실제, 와다 츠요시는 "나의 생명선은 스트레이트다"라고 말할 정도로 리그 내에서는 거침없이 직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정면 승부하는 파워 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특유의 제구력과 변화구로 한국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땅볼을 많이 유도하는 피네스 피처스러운 면모가 주를 이뤘다. 즉, 우리나라와의 경기에서는 단기전이기에 특히 큰 것 한방을 경계해서 제구에 유독 더 신경쓰며 제구파 투수같은 면모를 보였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해서 리그 경기에서도 제구를 신경 안쓰는 타입은 아니나 NPB 리그 경기에서는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직구를 꽂아 넣는 경향을 보인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구 신경 쓰다가 힘이 빠져버리는 바람에 이대호에게 실투를 던져버렸고 여지없이 투런 홈런을 맞은 것은 함정.[53] 한국전 통산 13이닝 3실점 ERA 2.08 기록[54] 한국전 통산 12.2이닝 1실점 ERA 0.71 기록[55] 와타나베의 경우 제구가 좋은 투수는 아니었으나, 워낙에 변칙적인 투구를 많이하던 투수라 한국 타자들이 공략을 잘 하지 못했다. 굳이 나눈다면 제구파보다는 기교파로 분류되는게 맞다.[56] 구속은 느리지만, 공격적인 투구 패턴으로 직구를 거침없이 스트라이크에 꽂아 놓아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놓는 파워피처 유형에 가깝다. 유리한 카운트가 되면 스플리터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땅볼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파워피처 유형에 가깝다. 실제, 2006 WBC 준결승전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한복판 직구로 이승엽을 두 차례나 삼진으로 잡는 등 파워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었다.[57] 한국전 통산 2경기 1승 1세이브 8이닝 3피안타 9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ERA 0.00[58] 한국전 통산 2경기 1승 13이닝 21탈삼진 무실점 ERA 0.00[59] 마쓰자카와 비슷한 케이스가 후지카와 큐지. 후지카와의 경우 국제대회 통산 13경기 11.2이닝 2실점(1자책) ERA 0.77으로 훌륭한 피칭을 보여주었지만 한국전에 유독 약했다. 후지카와는 엄청난 직구의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누르는 피칭 스타일을 지녔으나, 한국 타자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고 임팩트 큰 실점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2006 WBC에서 이종범에게 내준 2타점 적시 2루타 분식회계 라던가,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이진영에 내준 동점타 등. 다만, 이진영에게 일격 당한 것은 직구가 아니라 포크볼이었다.[60] 실제, 마쓰자카는 이 대회가 끝난 직후 리그에 복귀해 2경기 2승 무패 14이닝 12탈삼진 4실점으로 좋은 피칭을 보여주며 시즌을 기분좋게 마무리했다. 이로 인해 최종 성적은 25경기 16승 5패 ERA 2.60.[61] 오히려 한일전이 성사되었다면, 당시 세이부의 반발이 심해 혹사 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고시엔도 아니고... 게다가, 만약 마쓰자카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 정상 컨디션이 아닌데 털렸다면 컨디션 난조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고 오히려 예상 외로 한국 타자들이 털렸다면 2일 전에 9이닝이나 던진 투수도 공략 못한다고 비판 당했을 것이 뻔하다.[62] 당시 대만타선은 4번타자를 맡은 천진펑이 가장 핵심선수였다. 또한 (훗날 대만 야구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하는) 홍이중도 포함되어 있었다.[63] 이 선수는 훗날 부산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해 2002년에 다시 방한하였다. 실제, 한국과의 결승전 경기 선발 투수로 나왔다. 당시 결승전 경기에서는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만큼의 호투를 보여주지는 못했고, 4회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조기 강판됐다.[64] 이외에도, 2001년 야구 월드컵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등판했던 적도 있고 여러모로 한국과 인연이 있다.[65] 마운드에 있던 투수 차이충난도 타구가 뜨자마자 3루를 가리키며 마운드에서 내려와 덕아웃으로 향했다. 당연히 정상적으로 이닝이 끝날줄 알았던 모양.[66] 한국의 김상현도 프로 경기에서 비슷한 실수를 했는데, 김상현이 놓친 공은 높게 뜨기라도 했지 이 때 3루수 플라이 볼은 매우 평범하고 낮게 떴으며 낮게 뜬 것에 비해 체공 시간도 길어 프로 수준의 선수가 못 잡을래야 못 잡을 수가 없는 타구였다. 물론, 두 명의 두 타구 모두 프로 수준이면 잡아야 되는 수준의 플라이 볼인 것은 매한가지지만...[67] 마쓰자카의 요코하마 고교 직속선배이기도 하다.[68] 그 이전에, 폭투로 인해 주자들이 하나씩 진루해 2사 2,3루 상황이 되었다.[69] 당시 마쓰자카의 피칭 내용을 기록한 기사[70] 당시 인터뷰가 실린 기사.[71] 25경기 16승 5패 180이닝 동안 151 탈삼진 ERA 2.60 기록.[72] 마쓰자카는 한여름부터 퍼지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전 봄과 초여름에 그나마 승수를 많이 쌓아 승률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73] 실점은 총 28점으로 25이닝 동안 28점이었으니 이닝당 꼬박 1점씩은 실점을 허용한 셈이다...[74]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요미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센트럴 리그 팀들이 선수차출을 거부했다. 주니치 드래곤스의 백업포수 스즈키 정도만이 센트럴 리그 소속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기간 내내 주전으로 출전한 케이스.[75] 물론 준결승전에 8회 이전까지는 괴물 투수 다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8회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2타점 적시 2루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되어 그 임팩트 때문에 생각보다 엄청나지 않았다는 평이 우세해졌다. 이는 반대편 선발투수 구대성9이닝 1실점 완투승이라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것에 대비되어 마쓰자카가 한국전에 보여준 모습이 괴물 투수의 그 명성치고 별로였다는 것이지, 마쓰자카의 기록만 놓고 보면 평범 이상의 기록을 한국전에 남겼다.[76] 이후, 메이저에 진출하여 커리어동안 4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특히 2004년은 그의 최전성기였다.[77] 2001년에 템파베이에서 메이저 데뷔전을 치뤘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5년을 마지막으로 MLB에서 자취를 감췄다.[78] 훗날,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통산 타율 0.247 홈런 122개를 때려냈다. 하지만, 2008년 허리 부상이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2010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시즌에 32개의 홈런을 쳐낸 적도 있을 정도로 일발장타 능력이 있던 선수.[79] 당일 경기 스기우치 도시야로 부터 끝내기 홈런을 쳐낸 선수. 커리어 내내 마이너에서 뛰었으며, 메이저 경력은 199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뛴 6게임이 그의 커리어에서 전부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80] 메이저 통산 88경기에 출전했고 27 개의 홈런 0.225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 시드니 올림픽 이후에는 2002년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용병 신분으로 NPB 무대를 밟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3년 메이저에 다시 복귀하지만 2004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81] 금메달 리스트 존 코튼과의 Q&A[82] 2002년과 2003년 다저스에서 시즌을 보내기도 한다.[83] MLB 통산 1087게임 출장 0.271의 타율 홈런 66개 장타율 4할 5리로 장타 능력은 별로였지만, 눈야구가 좋아 볼 넷을 잘 얻어내던 선수. 여기에 뛰어난 수비력을 보유하여 2001 AL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8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 시즌 당시 후보 1루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주전 1루수는 케빈 밀러. 민케이비치는 밤비노의 저주를 끝낸 마지막 아웃 카운트 풋아웃을 기록한 선수기도 하다. 이 해에 보스턴은 팀 전체가 Sportsman of the year에 선정되었다. 이 덕에 민트케이비치 본인도 Sportsman of the year가 된 것도 커리어에서 특이점이라면 특이점. 여러모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한 미국 타자 가운데서는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 투수까지 포함하면 로이 오스왈트벤 시츠가 있어 이름값에서 밀리긴 하지만..[84] 이외에도, 한국과는 결승 홈런을 두 번이나 친 것으로 인연이 있는 선수. 예선전에서는 진필중을 상대로 결승 만루 홈런을 쳐내 팀의 4:0 승리에 일조하였고, 준결승에서 다시만난 한국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쳐냈다. 참고로 이 때 끝내기를 내준 투수는 박석진. 즉, 결승타로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을 두번이나 울린 선수기도 하다.[85] 시드니 직전까지 메이저 저니맨으로 팀을 옮겨다녔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당시는 마이너 팀 소속이었다.[86]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전전하다 2012년 1월에 은퇴했다. 그래도 MLB 통산 0.242의 타율에 40홈런을 기록하며 최소한의 족적 정도는 남긴 선수.[87] 준족을 자랑하는 선수였으며, 훗날 용병 신분으로 2004년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88] MLB 통산 타율 0.163의 처참한 타격을 보여준 선수. 준족을 자랑해, 메이저리그 경기에서는 대부분 대주자로 경기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보냈다.[89] 마쓰자카가 낙구 이전에 공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의낙구까지는 아니다. 또 원래 번트에는 고의낙구가 적용되지 않는다. 자세한 고의낙구의 개념은 본 항목 참조.[90] 벤 시츠는 결승 쿠바전에 다시 나와 9이닝 3피안타 무실점 완벽투를 선보이며 팀의 금메달 획득에 앞장섰다.[91] 선동열도 마쓰자카에게는 "많이 뽑아봐야 2점"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마쓰자카 팔 각도 좁혀야..[92] 참고로, 앞선 미국과의 경기에서 138개의 공을 던졌으므로 두 경기에서 무려 299개의 공을 던진 셈.[93] 그 사이 박종호는 2루 도루를 성공시켰다.[94]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마쓰자카는 "풀카운트에서 어떤 공을 던질까 혼란스러웠다. 포수의 사인대로 직구를 던졌는데 이게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며 자신의 의도대로 던진 공이 아니었음을 밝혔다.[95] 1982년 LA 올림픽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채택 된 이후, 일본은 처음으로 노메달 굴욕을 맛봤다. 즉, 이전까지는 최소 동메달은 확보했다는 얘기. 거기다가 처음으로 프로 차출이 허용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맛본 노메달 굴욕이었고 그것이 라이벌 국인 한국에 패한 결과였으니 충격이 클만도 했다.[96] 1루가 비어있어 무모한 정면승부로 보였지만 당시 성적을 보면 김동주 대신 이승엽을 선택해 정면 승부하는 것이 정석적인 선택이다. 대회 기간 내내 안좋은 모습을 보였을 뿐 아니라, 당일 경기에서도 세 타석 삼진을 당한 이승엽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또 김거김 작전이 성립되려면 거르는 타자보다 다음에 타석에 들어올 타자가 더 상대하기 수월해야 했지만, 김동주는 대회 기간 동안 4번 타자 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당일 경기에서도 6회에 임팩트 좋은 타구를 날리기도 하여 세타석을 모조리 삼진 당한 이승엽과는 비교 불가 수준이었다.[97] 마쓰자카는 올림픽 직전 5경기에서 25이닝 28실점(24자책) ERA 8.64라는 처참한 기록을 보여주었다.[98] 아무래도 이건, 예선전이승엽에게 투런 홈런을 맞았던 탓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승엽에게 결승 2타점 2루타를 맞은 임팩트 탓도 있기는 하다. 게다가 일본 킬러 구대성 때문에 더 묻힌 감도 없지 않아 있다.[99] 물론, 일본 내에서 정예 1군이 모조리 출전한 대회가 아니기에 시드니 올림픽 자체가 거의 회자되지를 않는다...[100] 이 해를 기점으로 마쓰자카는 2006년까지 4시즌 동안 NPB에서 최전성기를 보낸다.[101] 실제로도, 마쓰자카는 그가 출전한 국가대표 경기를 모두 통틀어 한국보다는 대만에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102] 추후에 2006년 초대 WBC 한일전 도쿄돔 경기에서 이승엽에게 8회의 결정적 홈런을 맞게되는 투수.[103] 참고로 당 대회는 예선 2위까지만 올림픽 출전 티켓이 부여되었다.[104] 1999년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 승리투수(9이닝 1실점) 2003년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승리투수(7이닝 무실점) 2006년 WBC 아시아 라운드승리투수(4이닝 1실점) 통산 3전 3승 0패[105] 2003년은 마쓰자카가 NPB에서 보낸 시즌 중에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시작한 년도로도 유명하다. 이 해 기록은 16승 7패 194이닝 동안 215 탈삼진 ERA 2.83[106] 이 올림픽은 한국과 미국이 참가하지 않은 올림픽이고 전력상 '아마 최강'으로 불리던 쿠바와 일본이 금메달을 걸고 싸우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는 그 둘이 없는 가운데 호주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아 동메달에 그쳤으니. 당초 목표보다 메달 순위가 낮았기에 오히려 아테네 올림픽은 실패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107] 여담으로 당일 경기 포수였던 조지마 겐지는 몸에 맞은 후 괜찮다며 계속 던지겠다던 마쓰자카에게 "만약 너가 상태가 안좋다면, 내가 바로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거야"라고 말했다고 경기후에 밝혔다. 마쓰자카는 구리엘 타구에 직격당한 이후 다음 타자 오스마니 우르티아에게 141km/h의 직구를 던지며 10km/h나 구속이 떨어지자 조지마는 상태가 안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한다. 우르티아에게 안타를 맞아 1사 1,2루 상황이 되자 조지마는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쓰자카가 곧장 괜찮다고 조지마에게 사인을 보냈고 마쓰자카가 바로 다음타자부터 150km/h의 직구를 던지자 안심했다고. 이후, 마쓰자카는 두 타자를 범타처리하며 실점 없이 4회를 마쳤다.[108] NPB 리그에서는 2004년 아테네 출전 전까지 9완투 4완봉을 기록할 정도로 철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쓰자카였다. 실제 올림픽 직전 세경기 동안 7월 19일 니혼햄전 144구, 7월 26일 다이에 호크스전 136구, 8월 2일 오릭스전 152구 총 432구를 던졌다. 지금 기준으로는 살인적인 혹사에 가깝지만 당시 일본 야구는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가 단련된다"는 논리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투수진 중 마쓰자카는 출전 직전까지 126.2이닝을 던져 시미즈 나오유키(138.2이닝)와 이와쿠마 히사시(138.2이닝) 다음 가는 이닝 소화력이었다. 하지만, 아테네 대회가 커리어 처음의 국제대회였던 이 둘과 다르게 마쓰자카는 프로가 되고나서 여러 국제대회를 나섰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쓰자카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일찌감치 많은 마일리지를 쌓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국가대표에서 영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천명하는 마쓰자카 본인이다. 그러나, 그 영광이 한 선수의 커리어를 잠식한 희생의 대가라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선수 개인으로 보면 프로 초년병 시절 리그에서도 많은 공을 던지고 완투를 밥먹듯이 할정도로 관리가 세심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시즌 기간이나 시즌 도중에도 국제 대회에 숱하게 불려다녔기에 마쓰자카 전성기가 2010년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다가 마쓰자카는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가 단련된다"는 일본식 피칭 이론의 신봉자이기도 했기에 본인 자체도 어린 프로 초년병 시절 관리에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어깨가 비교적 씽씽하던 2008년까지는 그럭저럭 좋은 활약을 보였고 2009년 3월 WBC까지도 좋은 모습을 보였던 마쓰자카였지만 상술한 이유들로 인해 2009년 4월 시즌에 접어들면서부터 그의 영광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기다가 마쓰자카는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서도 살인적인 혹사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본인이야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의 전성기가 이어지지 못했기에 그 선수 개인을 바라보는 야구 팬들 입장에서는 옛날식 피칭 이론에 심취해 선수 개인의 전성기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109] 당시 대표팀 감독 대행이던 나카하타 키요시는 2020년 마쓰자카를 만나 당시 상황을 회고하였다. 이 회고에 따르면 마쓰자카가 나카하타의 교체 요구를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나카하타)가 마운드에서 (트레이너 대신) 그만 던지라 말했더니 공을 버리고서 "왜 바꿔요!"하는 거 같은 거야. 내 입장은 안중에 없었지?"라며 웃으면서 물었다. 이를 듣고 마쓰자카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어렸어요."라고 나카하타에게 웃으며 사과했다. 당시 상황은 심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웃으며 당시를 회고할 만큼 감정이 무뎌진 모양. 여담으로, 나카하타는 훗날 TBS 방송에서 해설자로서 마쓰자카의 은퇴 특집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의 열정과 투수로서의 책임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다시금 언급하기도 했다. 부상 위험에도 불구하고 속투하려던 마쓰자카에게 꽤나 감명받은 모양.[110] 당시 게임 영상[111] 우리나라에는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선수로 잘 알려진 호주 야구 선수. 올림픽 직전까지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트리플 A팀인 포틀랜드 비버스 소속 불펜투수였다.[112] 1루수 브렌단 킹맨은 올림픽 출전 이전에 플로리다 말린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뛴 적이 있다.[113] 당일 경기, 6.2이닝 5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기록.[114]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적인 불펜인 JFK에서 J를 맡았던 선수.[115] 당일 경기에서는, 2.1이닝 3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잠재웠다.[116] 호주는 예선라운드에서 대만에게도 지는 등(대만의 왕첸밍 - 차오진후이 계투에 막혀 0대3으로 패배했다), 4승 3패로 간신히 준결승에 진출한 상태였다. 만약 대만이 예선라운드 이탈리아전에서 9회 대역전패당하지 않았으면, 호주는 예선탈락할 수도 있었다(대신 승자승원칙에 의해 대만이 준결승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애시당초 일본과는 전력상 비교가 안 되는 팀이 호주였다는 이야기.[117] 호주가 아무리 전력상 일본에 비해 열세라 할지라도 당대회에서 두 팀중 우열을 가리면 야만없이므로 두 차례나 승리를 기록한 호주가 일본 대표팀에 비해 우위였다고 봐야한다. 물론, 상술되어있듯 전력상 우위는 당연히 일본이기에 리그전이었다면 표본이 늘어나 일본이 우위였겠으나, 단기전은 이래저래 변수가 많다.[118]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적인 불펜인 JFK에서 J를 맡았던 선수.[119] 실제, 단기전에서는 소위 말하는 '공 긁히는 투수'가 나오면 제 아무리 리그 내 최고 타자라 해도 단박에 공략하기는 어렵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도 있듯이, 선발 투수나 수준 높은 불펜 투수의 피칭에 힘입어 꼴찌가 일등을 이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것도 야구. 이런 사례에 적합한 케이스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호주와 일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120] 이 활약을 바탕으로 두 선수는 이후, NPB 무대를 밟게 된다.[121] 실제, 2006 WBC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끈 김인식 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다. 당시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파란을 일으키며 6전 전승으로 준결승전에 진출한 상태였고, 일본전을 앞두고 있었다. 준결승 전 3일전인 일본과의 2라운드 마지막 경기 당일 허구연과의 아침식사 중 대화에서 '정말 부담스럽다. 단기전에서는 어찌될 지 모르는게 야구인데'라며 걱정을 드러냈다. 이 걱정이 현실이 되어 준결승전에는 우에하라 고지의 호투 때문에 6:0 팀 완봉패를 당하며 최고 승률을 기록하고도 준결승에서 탈락하는 웃픈일을 겪었다.[122] 멀리갈 것도 없이 당장 2018 아시안 게임에서 자카르타 쇼크가 투수 능력으로 인한 단기전 이변의 예. 해당 경기에서도 한 수 아니 몇수는 아래인 대만의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높은 연봉을 받고 뛰는 한국의 프로 선수들이 투수전 끝에 2:1로 석패를 당했다. 조금 더 경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대 선발 우성펑의 호투에 막혀 1득점밖에 하지 못하다가 마무리 왕정하오에 틀어막히며 높은 연봉을 받고 뛰시는 우리나라 프로 선수 분들이 대만 아마추어 선수들(심지어 KBO보다 수준이 낮다는 대만 프로리그 CPBL 2군 리그에서도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방출된 선수들이 태반이었다.)에게 막히면서 졌다. 특히, 우성펑은 실업팀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3회 1사에서 안치홍에게 안타를 맞기 전까지는 퍼펙트로 막아냈다. 물론, 우리나라 타자들이 못한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도 상대 투수가 잘 던져서 발생한 결과이기에 투수가 좋은 공을 던지면 단기전에서는 강팀일지라도 꽤나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이렇듯, 당일 투수가 공이 좋으면 아마추어가 프로 정예 1군 국가대표 스쿼드를 때려 잡을 정도의 이변이 발생하기도 한다.[123] 하지만, 2004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대표팀이 호주에 패한 것과 자카르타 쇼크는 서로 다소 구별될 필요가 있다. 둘다 강팀이 약팀의 투수를 공략하지 못해 졌다는 것은 같지만, 일본 타자들은 적어도 수준 높은 투수들에게 당한 것이다. 일본 타자들을 꽁꽁 묶었던 크리스 옥스프링제프 윌리엄스는 둘 다 대회 이후 NPB에도 진출하였고 각각 KBO 리그NPB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등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다. 반면 자카르타 쇼크의 경우, 한국 타자들은 프로 선수가 아마추어에게 진 것이며 야수들은 수비에서도 뇌수비를 보여주며 프로가 맞나 싶을 수준의 플레이를 선보여 한국 야구팬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심지어, 우리를 패배시킨 그 대만의 아마추어 선수들도 KBO 리그보다 하위리그인 CPBL의 2군 리그에서 조차 뚜렷한 활약이 없어 실업리그를 전전하는 선수들이었다. 한국이 공략을 실패한 투수들이 일본 타자들이 공략에 실패한 크리스 옥스프링이나 제프 윌리엄스에 버금가는 투수들도 아니고, 같은 이변의 패배라도 이처럼 질적 차이가 크다.[124] 이와쿠마는 당시 아테네 올림픽 출전 직전까지 리그내에서 13승 1패 138.2이닝 동안 111탈삼진 ERA 2.34로 발탁된 선발 투수 중 가장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출전한 올림픽에서는 약체인 네덜란드 전에서 1.2이닝 3실점 조기강판 되었고 이때문인지 이후 대회에서 어떠한 출전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다.[125]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시 일본은, NPB 팀당 차출제한 없이 선수를 선발했다.[126] 정작 그 마츠이 카즈오도 직전해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한국전에서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127]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시 일본타선은 마쓰이-미야모토-타카하시-죠지마-후쿠도메-타니-이바타-오가사와라-니오카 순으로 이렇게 구성되었다. 당시 야수구성도 내야진에 전문 유격수만 무려 4명(마쓰이, 미야모토, 이바타, 니오카)이나 포함되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이들 중 7번타자로 기용된 이바타 히로카즈는 (2003년 기준) 공격력만 봤을 때는 당시 대표팀에 승선해서는 안 되는 수준이었으나, 그럼에도 대표팀에 승선했고 심지어 지명타자로 선발출장하기까지 했다. 수비형 유격수를 공격하랍시고 지명타자로 기용하는 희한한 상황이다 즉, 아테네 올림픽 본선 당시 일본 대표팀이 각 팀당 2명이라는 제한이 있었다고 해도, 직전 해의 삿포로대회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후에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격력이 빈약한) 아라키 마사히로가 대표팀에 승선하고 대회기간 동안 주전 2루수에 무려 2번타자로 중용된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이징 당시 일본대표팀이 최정예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128] 당시 일본야구 투타에 걸쳐 최고의 선수들이었던 이가와 케이마츠나카 노부히코, 아베 신노스케가 2004년 대표팀에서 제외되어서 아쉬운 감은 있었지만, 그건 직전해 삿포로 대회 때도 비슷한 조건이었다. 이가와와 마츠나카는 예선, 본선 둘 다 제외되었을 정도.[129] 구로다는 직전해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한국전 때도 와다 츠요시에 이어 2번째투수로 등판해 0.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팀승리에 숨은 공로자가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6회 와다가 남겨놓은 주자 1사 1-2루 위기상황에서, 등판하자마자 한국의 박재홍정성훈을 힘으로 압도하면서 위기를 탈출한다.[130] 이후 200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삿포로-아테네 당시의) 구로다 롤을 맡았던 투수가 바로 카와카미 켄신이다. 근데 동메달 결정전에서 돌이킬 수 없는 투구를 펼친다.[131] 올림픽 출전 직전 5승 7패 45이닝 ERA 4.40[132] 16경기 5승 7패 ERA 4.98[133] 18경기 5승 6패 118이닝 ERA 4.19[134] 아테네 출전 직전 16경기 5승 7패 17세이브 ERA 4.07 기록.[135] 3경기 무실점 ERA 0.00[136] 1경기 2이닝 3실점 ERA 13.5[137] 3경기 3이닝 3실점 ERA 9.00[138] 당해년도 37세이브로 센트럴리그 세이브 1위 및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수상, ERA 2.66 기록.[139] 당해년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 타이틀 수상, 75.1이닝 ERA 2.05 기록.[140]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요미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센트럴리그 팀들이 선수차출을 거부했고, 결국 센트럴리그 소속 선수 중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중간계투 카와노 마사토와 주니치 드래곤즈의 백업포수 스즈키 후미히로만이 본선에 출장했다. 또한 2004 아테네 올림픽도 상술했듯이 팀 당 2명만 차출 가능하다는 제한을 두었다.[141] 오죽하면 당시 주장이었던 죠지마 켄지가 나카하타를 대신해 실질적인 감독대행 역할을 하면서 선수들을 다독여야 했다.[142] 사실, 이는 동메달에 그친 선수들이나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다고 봐야한다. 전년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3승 0패로 팀을 잘 이끌었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당해 3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 때는 의식 불명 상태까지 빠질 정도로 건강상 위험이 생겼기에(다행히 이후 무사히 회복했다.) 아테네 본선에 감독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당시 대표팀 수석 및 타격코치였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감독대행으로 아테네에 팀을 이끌고 나서게 된 것.(단, 올림픽 규정에 따라 나가시마의 감독 등록이 불가능하여 실제 올림픽 본선에선 나카하타가 정식 감독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기 전까진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로 뛴 것 외엔 해설자로만 활동했기에 감독 경력이 전무했고, 뒷날인 2012년에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감독직을 수락하며 처음으로 프로팀 감독을 역임했다. 즉, 2004년 아테네 당시에는 감독 경험 자체가 없었다는 소리. 그런데다가, 프로 중의 프로가 모인 국가대표팀을 처음으로 지도해본 것이니.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만한 대목.[143] 훗날, 2006 WBC2009 WBC, 2013 WBC, 2017 WBC 호주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한다.[144] 나카하타 키요시는 현역 은퇴 후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에 복귀한 1993년에 요미우리 타격 코치로 취임하며 지도자로 데뷔했으나, 그 해 팀 타선이 리그 최하위의 타율, 득점에 그치는 등 심각한 빈타를 보여주면서 코치로서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주전 1루수 코마다 노리히로와 불화를 빚어 타격 부진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물론, 시즌 종료 후 코마다가 원클럽맨을 내던지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FA 이적하는 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후 1루 베이스 코치로 전임한 1994년엔 별다른 구설수 없이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나 그 해를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퇴단하여 해설자가 되었다. 즉, 2004년 아테네에서의 나카하타 키요시는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해본 지 10년이나 지난 것에 더해 당시로써는 코치 능력에 있어서도 의문점이 들었던 인사였던 것.[145] 그나마 요미우리 타격코치 시절과 아테네에서의 실패가 나름 교훈이 된 것인지, 나카하타는 이후 DeNA 감독을 역임할 땐 비록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으나 만년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팀의 암울한 분위기와 해이해진 기강을 말끔히 씻어내고 츠츠고 요시토모 등의 신예들을 계속해서 육성해내며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146] 그도 그럴것이, 한국과 미국을 빼면 쿠바를 제외하고는 당시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력상 일본에게 다들 한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과 미국도 없는 상황에서 조차도 고작 동메달이라는 사실에 상처를 입을만 했다.[147] 2005년 한 해 215이닝 동안 226 탈삼진 ERA 2.30 기록. 사와무라 상스기우치 도시야에게 내줬지만 이 해 탈삼진왕을 차지한다.[148] WBC는 올스타전처럼 5회를 다 소화하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 WBC는 선발 투수의 투구수 제한이 있기 때문.[149] 여담으로, 마쓰자카는 본인이 국제대회에서 출전한 모든 대만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야말로 대만전 승리의 보증수표인 셈.[150] 1회 이승엽의 결승 투런 홈런이 터졌다.[151] 프레드릭 세페다, 오스마니 우르티아, 야리엘 페스타노 삼진 처리.[152]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고지는 각각 결승전준결승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153] 여담으로, 일본 킬러라 불리던 김광현이 속절없이 무너진 이 경기 이후로 이 대회가 끝날 때 까지 김광현은 단 한 차례도 선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국도 프로간의 대결에서 일본에게 콜드 패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2022년 현재까지도 이 경기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한국 야구 팬들과 대표팀 관계자들이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154] WBC는 올스타전처럼 5이닝을 다 채우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155] 2022년 현재까지도 한일 양국 간 프로 1군이 선발된 대결에서 유일한 콜드 게임이다. 2023 WBC에서 또 나올뻔 했으나 13:4로 가까스로 콜드게임은 나오지 않았다.[156] 당일 경기에서 구원으로 올라와 3이닝 퍼펙트 완벽투를 선보였다.[157] 사실 이 타구는 중견수였던 후쿠도메 고스케와 유격수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콜 플레이가 원활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애매한 위치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체공시간이 길었던 타구였고 두 수비수가 우물 쭈물하며 타구 처리를 서로 미루는 사이 공이 떨어져버렸기 때문.[158] 원래 이 별명의 원조는 사이토 가즈미이다. 하지만, 이 투수는 일찍이 사이버 투수화 되는 바람에.. 잘 던지는 투수에게 유행처럼 이 말이 번졌다. 마쓰자카도 본래 커리어 초반 혹은 고교 시절에는 '헤이세이의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언급되었으나, 지지않는 에이스 혹은 마쓰작가(...)라는 별명도 붙여졌다.[159] 7.2이닝 4피안타 6탈삼진 2볼넷 2실점[160] 초구 시속 118km/h의 높은 볼을 시작으로, 2구째 시속 118km/h 공은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3구째 시속 117km/h의 공과 4구째 116km/h짜리 공은 모두 볼이 됐다. 5구째가 마쓰자카의 마지막 공이었으며 시속 116km/h로 날아간 공은 몸쪽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났다.[161] 이 경기에서 한국팀의 투수운용은 백차승-권오준-마일영-송승준 순으로 이루어졌다.[162] 2021년 스톡킹에 출연한 송승준이 당시 숙소에서 마쓰자카의 인기를 체감한 일화를 언급한 적도 있다.[163] 이후 2024년이 되어서야 다시 방한하게 된다. 하단 참조.[164] 3피안타 1실점.[165] 9월 16일 한국이 대만을 꺾음으로써 한국일본의 동반 올림픽티켓이 확정된다.[166] 1999년 7월 6일 고베 그린스타디움.[167]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60홈런을 치면서 갱신한다.[168] 2점홈런.[169] 9회 2사 1루 상황에서 홈런을 허용했다. 최종스코어는 7대6으로 긴테쓰 버팔로즈 승리.[170] 정확히는 이와쿠마는 3회에만 3실점하고, 3-0 스코어에서 이와쿠마가 내려가고 난 뒤, 팀 타자들이 마쓰자카를 공략하는데 성공해 4-4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6-4로 뒤지게 되나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결국 6-7 스코어로 킨테츠의 승리.[171] 2004년 3월 27일 베루나 돔.[172] 포스트시즌, 올스타전 포함.[173] 1회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174] 2005년 12월에 장녀, 2008년에 장남, 2010년 3월에 차녀를 얻었다.[175] 3번째 홈런은 끝내기 홈런이었다.[176] 후루타는 (야쿠르트 팀동료였던) 다카쓰 신고가 KBO팀 히어로즈에서 뛰던 2008년, 다카쓰의 응원을 위해 방한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