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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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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재 기준

  1. 일제강점기의 매국노는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中 '매국, 수관' 등을 차용할 것
  2. 일제강점기 이후의 매국노는 주권, 이권의 해석을 최대한 좁게 보아 외환죄(외환유치죄, 여적죄, 간첩죄, 간첩방조죄, 군사상기밀누설죄 등)에 연루된 사건을 사안에 따라 개별적으로 토론할 것을 권함
  3. 국가 기준은 현 국가의 지리를 기준으로 하면서 사라진 국가가 조국이면 별도로 표기를 함
  4. 정상참작이 가능한 경우, 애매한 경우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경우에는 ☆표시||

2.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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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외

이하의 여러 사례에서 민족 국가 개념 형성 이전 시대 인물들은 매국노라는 단어로 재단하기가 모호한 부분이 많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봉건적 지배권, 왕가의 혈통, 종교 같은 개념이 국가보다 앞섰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국가에 충성(혹은 하지 않으면 반역)'이라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3.1. 그리스

3.2. 네덜란드

3.3. 노르웨이

3.4. 독일

3.5. 동티모르

3.6. 러시아

3.7. 루마니아

3.8. 말레이시아

3.9. 멕시코

3.10. 미국

3.11. 몰도바

3.12. 베네수엘라

3.13. 베트남

3.14. 벨라루스

3.15. 스페인

3.16. 아프가니스탄

3.17. 알제리

3.18. 영국

3.19. 이탈리아

3.20. 인도

3.21. 스위스

3.22. 오스트리아

3.23. 우크라이나

3.24. 리투아니아

3.25. 유고슬라비아

3.26. 일본

3.27.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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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대만

3.29. 체코슬로바키아

3.30. 캄보디아

3.31. 폴란드

3.32. 프랑스

3.33. 홍콩

4. 창작물 속의 매국노들

배신한 국가나 민족을 괄호 표시한다. 다만 봉건제에 가까운 전근대인 경우 애매한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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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다만 군도바트는 자신의 출신 민족인 부르군트족의 지지는 여전히 확보하고 있었기에 갈리아 남부에서 부르군트 왕국의 왕이 되었다.[2] 그의 조부 요나스 리, 그리고 조부의 사촌이자 배우자인 토마신 헨리에트 리의 생질 요나스 리와는 다른 인물이다.[3]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에는 소련인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전 이후 망명한 백군들도 있었다.[4] 소련이 비록 러시아 중심으로 돌아가고 공용어도 러시아어를 쓸 정도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헌법 단계에서 민족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모습(러시아 민족주의도 포함.)을 보인 까닭에 독일이 침공해오자 이를 반기는 러시아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참고로 이들을 나치의 적으로 돌아서게 만든 건 나치 독일 자신들이었다. 게르만 우월주의에 심취해서 슬라브계인 러시아인들을 다 죽이고 이곳을 독일인의 땅으로 만들겠다고 떠들고 다녀서 독일군이 도저히 대화가 안 되는 미친 놈들이었음을 깨달은 러시아인들이 죄다 소련군에 협력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5] 사실 잃은 영토를 언젠가는 수복하고 독일까지 집어삼킬 계획이었지만 러시아 내전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레닌의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등을 상실했다. 다만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소 폴란드 점령을 하고 베사라비아, 발트 3국을 되찾긴 했다.[6] 쉽게 말해 일본 제국에 끌려간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멸망을 위해 미군과 손을 잡은 것과 비슷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7] Robert Philip Hanssen, 1944~2023[8] 다만 CIA 근무 자체는 1962년부터 시작했다.[9] 연봉이 6만 달러였는데 5만 달러의 재규어 자동차는 물론이고 4만 5천 달러의 저택을 현금으로 구입했고 주택 리모델링과 장식 비용에 99,000달러를 썼다.[10] 당시에는 같은 기독교인 영주들끼리 전쟁이 벌어지면, 내부의 귀족들이나 도시들이 자신들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적대 세력에게로의 이적 행위를 벌이는 일이 잦았는데 그러면 이들의 도움으로 해당 세력을 쉽게 장악한 적대국에서 자발적으로 투항한 세력들에게 고도의 자치권을 주고 자신들의 봉신으로 인정해서 보답을 해 주었다. 어차피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민족주의보다 종교가 더 중요히 여겨졌으니 백성들도 웬만해선 이런 짓을 매국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근데 서고트 왕국의 귀족들이 투항한 세력은 기독교인이 아닌 이교도였고 이들에게는 이런 암묵의 룰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투항해 온 귀족들이 뒤늦게나마 반기를 들고 결사투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소수의 서고트인 귀족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고트인 귀족들은 북부의 아스투리아스 지방으로 도망쳐서 항쟁을 계속했다.[11] 당시의 이슬람 제국 군대가 서고트 왕국 시절의 문화재들을 우상 숭배라면서 대대적으로 박살내서 서고트 왕국 시대의 문화재는 현존하는 게 별로 없어 고트족서고트 왕국에 대한 연구도 극심한 애로사항을 겪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알안달루스 문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모로코계 스페인인들이 이슬람 제국의 지배 덕분에 스페인이 관광대국이 되었다고 주장하면 토착 스페인인들은 이슬람 제국의 지배가 없었다면 대신 서고트 왕국의 문화재를 통해 관광대국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반박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12]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13] 후술된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동생 조지 6세에게 양위했다.[14] '중국공산당'에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는 당시 황안이 보여준 추태로 인해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에서 반중 감정에 불만 제대로 붙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나마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이던) 중국국민당제1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서 쪽박을 차고 노골적인 반중 성향인 민주진보당이 집권하고 말았으니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긁어 부스럼만 만들었다는 여론이 터져나왔다. 현재 대륙에서 황안을 보는 시선은 떨떠름 그 자체다.[15] 그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파퐁 입장에서는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전혀 몰랐고 단순히 추방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 추방으로 표시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파퐁은 홀로코스트의 동조자였던 셈이다.[16] 다만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자체는 이 학살 3개월 전에 수여받았기 때문에 이 학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17] 백년전쟁보다 훨씬 이후의 시기를 다룬 소설 삼총사에서도 주인공 달타냥이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고향인 가스코뉴를 앞세워 가스코뉴인이라고 하거나 리슐리외 추기경을 포함한 나머지들도 달타냥을 가스코뉴 청년이라고 부를 정도로 '하나의 프랑스인'으로서의 의식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18] 다만 페탱 원수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지도층의 무능 속에서 1차 대전의 영웅에게 의지해보고자 하던 의도 하에 스페인에서 돌아와 수장직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였으나 이는 프랑스의 일부라도 지켜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는 프랑스를 착복하였고 비시 정권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초토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정적을 제거하기도 했고 나치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크 도리오나 피에르 라발 같은 악질 매국노는 아니다. 히틀러의 프랑스 포로 살해 협박에 자신을 먼저 죽이라고 말해 무마시킨 일화도 있다.[19] 정확히는 와노쿠니의 사람들이 자기 일족에게 한 악행에 대한 복수라고 봐야 한다.[20] 그 때문에 블랙 리벨리온때 나나리가 V.V.에 납치되자 바로 부하들을 버리고 전선을 이탈한다. 이로 인해 지휘체계에 혼란을 가져오고 전쟁에 패배했다. 게다가 훗날 부하들에게 그에 대한 사과 또한 하지 않았다.[21] 황제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죽일 생각은 없었고 기아스를 걸어서 나나리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했다는 뒷설정이 있다.[22] 애초에 식민지였던 일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봉기한게 아니며 작중 일본과 그 부하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