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문헌공도(文憲公徒)는 최충이 세운 고려 최초의 사학이다.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9재학당(九齋學堂)이라고도 한다.2. 연혁
- 1050년대(문종 초)
- 시중 최충이 은퇴하고 사재를 들여 자하동(紫霞洞)에서 후진을 불러모아 가르쳤다. 청금(靑衿, 유생)·백포(白布, 백성)가 모두 최충의 집을 메웠고 학당을 9재로 분리했다.
- 1317년(충숙왕 4)
- 9재의 삭시(朔試)가 기존에 폐지됐던 국자감시를 대체했다.
- 박효수(朴孝修)가 삭시를 감독하고 김현구(金玄具) 등을 합격시켰다.
- 1391년(공양왕 2)
- 1411년(태종 11)
- 7월 27일: 9재에 속했다가 사가(私家)에 돌아간 노비를 오부학당으로 돌렸다.
3. 구성
문헌공도는 다음 9개 재(齋)로 구성돼 있었다.- 낙성재(樂聖齋)
- 대중재(大中齋)
- 성명재(誠明齋)
- 경업재(敬業齋)
- 조도재(造道齋)
- 솔성재(率性齋)
- 진덕재(進德齋)
- 대화재(大和齋)
- 대빙재(待聘齋)
4. 교육 환경
과거 시험에 응시하려는 의관자제들이 몰려든 만큼 과거 중심 교육이 이뤄졌다. 『고려사』 「선거지」와 「최충 열전」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문헌공도는 여름마다 승방(僧房)을 빌려서 하과(夏科)를 치렀다. 문헌공도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임용을 기다리는 선배들은 교도(敎導)가 돼서 후학을 9경(經)·3사(史) 위주로 교육했는데, 하과는 이 선배들이 촛불에 금을 긋고 제한 시간 안에 시를 짓게 한 다음에 그 결과물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 짓기를 마치면 후배들을 위한 술자리를 벌이는데 어린아이든 관례를 마친 성인이든 술잔과 시를 주고받으며 장유유서를 지켰다.조선의 유학자 권근은 경술(經術)을 위주로 학습한 조선 학자들은 경서에 통달해도 문장과 시도(詩道)에는 재주가 없다면서, 하과의 예를 본받아 봄가을로 예문관에 모여 시를 짓게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