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기 영국군의 장성급 장교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원수 Field Marshal/Admiral of the Fleet | |
육군 원수 | 허버트 키치너 | 존 프렌치 | 더글러스 헤이그 | |
해군 원수 | 존 피셔 | |
대장 General/Admiral | ||
육군 대장 | 허버트 플러머 | 에드먼드 앨런비 | 줄리언 빙 | |
해군 대장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 존 젤리코 | 데이비드 비티 | |
중장 Lieutenant-General/Vice-Admiral | ||
육군 중장 | - | |
해군 중장 | - | |
소장 Major-General/Rear-Admiral | ||
육군 소장 | - | |
해군 소장 | - | |
준장 Brigadier/Commodore | ||
육군 준장 | - | |
해군 준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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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z Ludwig von Battenberg | ||
GCB, GCVO, KCMG, ADC, PC | ||
이름 | 독일어 | 루트비히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 (Ludwig Alexander von Battenberg) |
영어 | 루이 알렉산더 마운트배튼 (Louis Alexander Mountbatten) | |
출생 | 1854년 5월 24일 | |
오스트리아 제국 그라츠 | ||
사망 | 1921년 9월 11일 (향년 67세) | |
영국 런던 피카딜리 | ||
국적 | 영국 | |
배우자 |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1884년 결혼) | |
자녀 | 앨리스, 루이즈, 조지, 루이 | |
아버지 |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 |
어머니 | 율리아 하우케 | |
형제 | 마리, 알렉산더, 하인리히, 프란츠 요제프 | |
복무 기간 | 1868년 ~ 1914년 | |
최종 계급 | 해군 원수 (Admiral of the Fleet) | |
지휘 | 해군 정보국 (Naval Intelligence Department) 제2순양함전대 (2nd Cruiser Squadron) 대서양 함대 (Atlantic Fleet) 제1해군경 (First Sea L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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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귀족, 군인, 초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독일 헤센 가문 출신이지만 영국 해군에서 복무하여 제1해군경까지 오른 인물로,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와 율리아 하우케의 장남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사위이다. 또한 스웨덴의 루이즈 마운트배튼 왕비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의 아버지이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의 외할아버지이다.
2. 작위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백작 전하 His Illustrious Highness Count Ludwig of Battenberg (1854년 5월 24일 ~ 1858년 12월 26일)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전하 His Serene Highness Prince Ludwig of Battenberg (1858년 12월 26일 ~ 1917년 7월 14일)
- 어너러블 루이 마운트배튼 경 The Right Honourable Sir Louis Mountbatten (1917년 7월 14일 ~ 1917년 11월 7일)
- 어너러블 밀포드 헤이븐 후작 The Most Honourable The Marquess of Milford Haven ( 1917년 11월 7일 ~ 1921년 9월 11일)
3. 생애
누나 마리와 루트비히 |
1865년의 루트비히 |
아버지 소유의 하일리겐베르크 성에서 루트비히는 헤센과 러시아의 친척들 그리고 사촌인 루트비히 4세[1]와 결혼한 영국의 앨리스 공주, 공주의 동생인 알프레트(작센코부르크고타)에든버러 공작과 만날 수 있었고, 에든버러 공작의 영향을 받은 루트비히는 14세의 나이에 영국으로 귀화해 영국 해군에 입대한다. 입대 당시 루트비히의 건강 상태는 입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여왕의 눈치를 본 해군의 높으신 분들에 의해 입대가 허가되었다.
입대 직후에 해군에 적응하지 못했던 루트비히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 부부의 지중해 및 흑해 순방에 동행하면서 해군에 적응할 수 있었고, 웨일스 공은 루트비히에게 자신의 거처인 말버러 하우스의 방을 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해군에서의 경력을 위해 루트비히는 에든버러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상 근무를 지속하게 된다.
루트비히 |
해군에서 계속 복무하던 중, 루트비히는 오촌 조카인 9살 연하의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신부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4세가 이 결혼에 반대했고,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어머니 앨리스 공주를 대신해서 자주 빅토리아에게 조언을 해주던 빅토리아 여왕은 손녀가 헤센 궁정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인으로 아버지를 보좌하고 어린 동생들[2]을 돌봐야 하는데, 루트비히와 결혼하면 헤센이 아닌 영국에서 지내야하기에 반대했다. 그러나 둘은 긴 설득 끝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차녀 루이즈, 장녀 앨리스, 부인 빅토리아 장남 조지, 루트비히 |
차남 루이, 루트비히, 장남 조지 |
1912년 루트비히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1해군경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루트비히는 그의 출신을 문제삼는 여러 반대파들의 격렬한 반발에 시달렸고, 결국 반강제적으로 제1해군경 직을 사임하게 된다.
1917년 조지 5세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를 윈저 왕조로 개명하면서 독일계 친척들에게도 독일의 칭호를 포기하고 영국 귀족의 작위를 받으라고 요구하자, 루트비히는 바텐베르크의 공자 칭호를 포기하고 성을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했으며, 밀포드 헤이븐 후작, 메디나 백작과 앨더니 자작 위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와이트 섬의 켄트 하우스에서 지내던 루트비히는 종전 후에 집을 팔아야만 했다. 러시아에 있던 루트비히의 재산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모두 몰수되었고, 독일에 있던 재산은 독일이 패전하면서 휴지 조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루트비히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하일리겐베르크 성 역시 팔 수 밖에 없었다.[3]
해군에서도 루트비히를 다시 찾지 않았고 오히려 젊은 장교들의 승진을 위해 은퇴할 것을 요청받아, 루트비히는 1919년 정식으로 해군에서 은퇴했다. 1921년 루트비히는 예비역 원수로 진급했지만, 그 해 9월 11일에 런던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루트비히의 장례식은 와이트 섬 휘핑햄의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에서 치러졌다.
4. 커리어
- HMS 빅토리 근무[사관후보생]
- HMS 아리아드네 근무[5]
- HMS 로열 알프레드 근무
- HMS 엑설런트 수료[중위][7]
- HMS 세라피스 근무[대위][9]
- HMS 술탄 근무[10]
- HMS 애진코트 근무
- HMY 오스본 근무
- HMS 인컨스탠트 근무
- HMY 빅토리아 & 앨버트 근무[중령]
- HMS 엑설런트 근무
- HMS 버넌 근무[12]
- HMS 드레드노트 근무
- HMS 스카웃 함장
- 요새 감찰관의 해군 고문[대령]
- 해군 및 군사 방위위원회 합동 비서관
- HMS 캠브리안 함장
- HMS 마제스틱 함장
- 해군정보국 부국장
- HMS 임플래커블 함장
- 해군정보국장[소장]
- 제2순양함전대장
- 지중해함대 부사령관[중장]
- 대서양함대사령관
- 본토함대 제3/4분함대사령관[16]
- 제2해군경[17]
- 제1해군경[대장]
5. 가족관계
5.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앨리스 (Alice, Princess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 1885년 2월 25일 | 1969년 12월 5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19] 슬하 1남 4녀[20] |
2녀 |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Louise, Queen of Sweden) | 1889년 7월 13일 | 1965년 3월 7일 |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
1남 | 제2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 (George Mountbatten, 2nd Marquess of Milford Haven) | 1892년 12월 6일 | 1938년 4월 8일 | 나데이다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 여백작[21] 슬하 1남 1녀 |
2남 |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 (Louis Mountbatten,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 1900년 6월 25일 | 1979년 8월 27일 | 에드위나 애슐리 슬하 2녀[22] |
6. 여담
- 루트비히는 젊은 시절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던 릴리 랭트리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고, 랭트리가 아이를 임신하자 자신의 아이라 생각해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를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랭트리의 남편이 이혼을 거부했고 루트비히의 부모 역시 결혼을 반대해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루트비히는 이 스캔들로 인해 한동안 해외를 돌아야 했는데 1881년 릴리 랭트리의 딸인 잰 마리 랭트리가 태어나자 학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결혼 전에는 잘생긴 외모로 인해 바람둥이로 소문났었다고 하며, 훗날 자녀들을 위한 회고록에 자신의 미혼 시절 연애사 역시 기록했는데 이 부분에 "Not for My Daughters"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 사이의 일화가 남아있는데, 아내와 함께 사랑하는 남편이 생전 받지 못한 해군 원수 계급을 못마땅한 아들에게 줄 수 없다는 여왕을 설득해서 에드워드 7세가 해군 원수 계급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 1880년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함께 건강이 안 좋았던 고모 마리야 황후를 보러 러시아로 갔는데, 폭설 때문에 기차가 연착해서 마중 나온 러시아 황실 가족과 겨울궁전에 도착하자 겨울궁전의 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만일 기차가 연착하지 않았다면 황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을 시간에 폭탄이 터졌을 것이다.[23]
- 루트비히는 두 척의 선박 사이의 상대 속도를 측정하는 기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아들도 군함이 다른 선박에 대해 고정된 위치를 유지하게 하는 시스템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으니 부전자전이라고 할 수 있다.
- 아들이 1955년 제1해군경에 임명되면서 부자가 나란히 제1해군경을 역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아들은 제1해군경을 거쳐 국방참모총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 가슴부터 다리까지 큰 용 모양의 타투가 있었다. 손주들이 타투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 영국의 유명한 디저트인 바텐버그 케이크는 그의 결혼식에서 첫 선을 보였다. 이름 또한 루트비히의 가문명에서 따왔다.
[1] 훗날 루트비히 4세의 딸 빅토리아와 결혼하면서 장인어른이 된다.[2] 당시 빅토리아가 결혼을 결심했던 시기에 남동생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만 15세밖에 안됐고, 특히 막내 여동생인 알릭스는 만 12살로 동생들 모두 어머니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던 나이대였다. 게다가 비슷한 해에 빅토리아 바로 아래 동생인 엘리자베트도 러시아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3] 알렉산더 궁전도 있었지만 어머니 율리아 하우케가 사망한 후 팔았다.[사관후보생] [5] 웨일스 공 에드워드 부부의 지중해 및 흑해 순방에 동행했다.[중위] [7] HMS 엑설런트는 함선이 아니라 육상에 설치된 해군의 포술 학교다.[대위] [9] 웨일스 공 에드워드 부부의 인도 순방에 동행했다.[10] 에든버러 공작의 시종무관으로 활동했다.[중령] [12] HMS 버넌은 함선이 아니라 육상에 설치된 해군의 어뢰 학교다.[대령] [소장] [중장] [16] 노어, 포츠머스, 데번포트 군항에 주둔하는 본토함대의 예비 부대를 통제하는 직책이다.[17] 영국 해군의 인사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오늘날의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장.[대장] [19]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20] 호엔로헤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바덴 대공비 테오도라, 헤센 대공국 공세자비 체칠리아,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비 소피아,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21]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바덴의 체칠리에의 아들이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귀천상혼 가문 출신인 (룩셈부르크의 아돌프 대공의 동생인 나사우의 니콜라스와 나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푸시키나의 딸이다.) 메린베르크의 조피 여백작의 차녀다. 어머니를 통해서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증손녀이기도 하다.[22] 제2대 버마 여백작 패트리샤 등.[23] 마리야 황후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알렉산드르 2세는 이듬해 3월 결국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