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06:45:32

백운택

1932년 12월 24일 ~ 1982년 11월 3일 (향년 49세)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군인(前 육군 중장). 군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의 일원으로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2. 생애

1932년 12월 24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4년제 정규 교육과정 첫 기수인 11기로 입학해 1955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생도 시절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정호용, 최성택, 권익현 등 경상도 출신 11기 생도들과 함께 하나회를 만들었다. 졸업 즈음 육군본부 방침 하에 6.25전쟁에서 고생한 육사 단기 교육과정 선배 기수들에게도 육사 기수가 인정되어 부여되었다. 본래 '육사 1기'여야할 기수가 '육사 11기'로 바뀌게 되자 동기 김성진과 함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항의하다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1]

11기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한 손영길[2],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이나 2차 진급자로 경력을 쌓아가던 노태우, 정호용과 달리 같은 하나회 내에서도 백운택은 잘 나가지 못했다. 박정희의 신임 아래 하나회 동기들이 11기 내 진급 서열을 장악[3]했음에도 백운택은 선두 대열은 커녕 2차 진급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1979년 말 당시만 해도 이미 사단장을 마치고 소장 2차 보직을 수행중인 전두환/김복동/최성택, 그리고 사단장으로 재임중이었던 노태우, 정호용에 비해 백운택은 소장 진급도 못하고 제71방위사단[4]장이라는 한직에 있었고, 이변이 없으면 준장으로 옷 벗을 일만 남아있었다. 이에 백운택은 12.12 군사반란에 기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백운택은 12.12 군사반란 실행 이전 모의 단계부터 반란에 가담했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없었지만 반란군들의 최규하 대통령 면담 때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면담 중 일부러 권총을 떨어뜨려 최 대통령을 겁박했다고 하나, 면담 자리에 최규하 대통령과 같이 배석해 있었던 신현확 총리는 신군부 인사들이 그런 행동은 하지는 않았다고 5.18 때 검찰에 진술했다. 군용 점퍼 안에 권총을 숨겼을 지는 몰라도 겉으론 안 드러났다고 진술했는데, 신현확 총리가 12.12 군사반란을 법질서를 무시한 행위라며 신군부를 비판했던 점을 볼 때 일부러 백운택을 두둔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백운택의 권총 위협설은 일종의 낭설이라는 주장.

어찌되었든 반란에 적극 가담한 덕분에 노태우가 수도경비사령관이 되면서 공석이 된 제9보병사단[5]을 차지하며 소장으로 진급했다.

사단장 이후에는 정보사령관을 역임하고 소장 진급 2년 6개월만인 82년 6월 중장으로 진급한 뒤 야전 군단장 중 제일 요직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군단장 재직 중이던 1982년 11월 3일 향년 49세에 사망했다.

전두환의 직계[6]에 나름 요직들을 역임해서 대장 진급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이미 백운택이 소장 진급부터 선두보다 3년이나 늦어 반란 이후 광속 진급한후에도, 이미 대장으로 진급한 정호용을 제외해도 1년 앞서간 이상훈, 이기백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훗날 반란군을 단죄한 역사바로세우기 당시 공소권이 없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하나회 중심 멤버라면 못해도 중장은 찍고 퇴임 후에도 장관, 국회의원, 공공기관장으로 오른 경우가 많았으니 오래 살았다면 승승장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에 안 죽었다면 아마 다른 쿠데타를 일으킨 일원들과 같이 단죄를 받았다가 사면받고 전두환이나 노태우, 박희도 등 12.12의 주도자들과 같이 살다가 죽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2.12 군사반란 가담자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ff
파일:attachment/hnh.jpg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folding [ 각주 보기 ]
}}}}}}}}}}}}}}} ||

[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wiki style="margin: -7px -10px"
{{{#!wiki style="margin:-6px 0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004ea2>
파일:제1군단 부대마크.svg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tablebordercolor=#004ea2>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81818,#e5e5e5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초대
김홍일
2대
김백일
3대
백선엽
4대
이형근
5대
김종오
6대
전부일
7대
김익렬
8대
장창국
9대
양국진
10대
김용배
11대
최석
12대
박임항
13대
임부택
14대
김익렬
15대
문형태
16대
이상철
17대
김상복
18대
심흥선
19대
전부일
20대
김재명
21대
최우근
22대
박희동
23대
양봉직
24대
이희성
25대
황영시
26대
김윤호
27대
이기백
28대
백운택
29대
박희도
30대
최세창
31대
류승국
32대
문영일
33대
이필섭
34대
이병태
35대
김상준
36대
조성태
37대
김척
38대
박영익
39대
강신육
40대
정중민
41대
오현구
42대
김선홍
43대
임충빈
44대
장광일
45대
황중선
46대
권오성
47대
최종일
48대
모종화
49대
엄기학
50대
김용우
51대
서욱
52대
안영호
53대
황대일
54대
안병석
55대
이두희
56대
강호필
57대
주성운
관련 직위 둘러보기 }}}}}}}}}}}}}}}

<colbgcolor=#1d2088><colcolor=#fff> {{{#!wiki style="margin: -7px -10px"
{{{#!wiki style="margin:-6px 0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1d2088>
파일:제9보병사단 부대마크.svg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tablebordercolor=#1d2088>
대한민국 육군
제9보병사단장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81818,#e5e5e5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제1대
장도영
제2대
김종오
제3대
오덕준
제4대
김종갑
제5대
이성가
제6대
최석
제7대
박병권
제8대
김종오
제9대
김점곤
제10대
이한림
제11대
백인엽
제12대
강태민
제13대
심흥선
제14대
이희권
제15대
박영준
제16대
한웅진
제17대
신원식
제18대
이소동
제19대
박현식
제20대
류창훈
제21대
정규환
제22대
조천성
제23대
김영선
제24대
신정수
제25대
이광노
제26대
노태우
제27대
백운택
제28대
정진태
제29대
고명승
제30대
이필섭
제31대
김재창
제32대
안병호
제33대
이규환
제34대
전관
제35대
변호인
제36대
임종천
제37대
이상태
제38대
신현배
제39대
이영계
제40대
정인구
제41대
이종철
제42대
김춘수
제43대
한동주
제44대
정태희
제45대
김용우
제46대
강천수
제47대
황대일
제48대
안병석
제49대
김동호
제50대
김진철
제51대
정광웅
제52대
-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


[1] 사실 어처구니 없는 일인게, 육사 단기 교육과정 선배들은 11기가 후방에서 편하게 교육받을 때 6.25 전쟁에서 피땀흘려가며 싸우고 죽어갔다. 거기다 원래는 육사 10기를 본래 정규과정 첫 기수로 모집했으나 여러 사정상 1년제로 바뀌었고, 그 다음 기수를 진짜 4년제 첫 기수로 뽑았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장으로 총알받이 신세로 끌려갔다. 다음 기수로 뽑힌 11기는 선배들이 죽어나갈 때 전쟁 중에 교육이나 받는 꿀빠는 신세였다. 싹수가 얼마나 노란지 알 수 있는 일. 그럼에도 육사 11기 이하는 선배들을 무시하고, 본인들에 대한 프라이드가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이는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정규과정 첫 기수가 확실했으나 전쟁 발발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끌려나간 이른바 '생도 2기'는 육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육사 기수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는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졸업 기수로 인정하고 있다.[2] 전두환보다도 박정희 전속 부관 출신인 손영길이 본래 11기 최고 실세로 차기 육군참모총장 1순위였다. 그러나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날아가버린다. 손영길 낙마 배후에는 전두환이 기여했다는 것이 정설.[3]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1/2차 진급자 8명 중에 6명이 하나회란 소리.[4] 2016년 말 해체된 제71보병사단의 모체.[5] 9사단장은 전통적으로 요직이다. 군사 정권에서도 전방 메이커 사단이면서도 유사시 서울로 동원이 가능~노태우가 반란 때 전방 병력 빼돌리면서 본보기를 보여줌~하기 때문에 요직으로 분류되어 하나회가 거의 독점했다.[6] 집권 이전에는 전두환과 대등한 친구 관계였던 다른 11기 하나회들과는 달리 백운택은 생도 시절부터 전두환을 '형님'이라 불렀다.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다른 하나회 동기들(대표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김복동)은 전두환이 집권하자 의도적으로 참모총장으로 키운 정호용을 제외하고 실권을 누리는 일 없이 옷을 벗어야했다.[7] 여담으로 사진에 같이 찍혀있는 박준병 20사단장도 합성으로 들어간거다. ~사진을 잘 보면 앞에 있는 이상규 2기갑여단장이 앉아있는 의자 뒷편에 박준병의 다리가 없다.~ 1996년 12.12 재판 당시 검찰 측은 기념 사진을 증거로 들어 박준병의 반란 가담을 주장했으나 이후 합성으로 밝혀졌고, 그 외에 하나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병력 동원 요청을 거부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