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19-07-23 11:40:45

버락 오바마

버락 후세인 오바마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일본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오바마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6px; margin-bottom:-5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평화상 수상자
{{{#!folding 20세기
{{{#!wiki style="margin: -1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16px"
1901년1902년1903년1904년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1907년1908년1909년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1912년1913년1914년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1917년1918년1919년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1922년1923년1924년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1927년1928년1929년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1932년1933년1934년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1937년1938년1939년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1942년1943년1944년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1947년1948년1949년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1951년1952년1953년1954년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1957년1958년1959년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1962년1963년1964년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유엔아동기금
1966년1967년1968년1969년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1972년1973년1974년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1977년1978년1979년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1982년1983년1984년1985년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1987년1988년1989년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1997년1998년1999년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 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 김대중 }}}}}}
{{{#!folding 21세기
{{{#!wiki style="margin: -6px -11px"
2001년2002년2003년2004년2005년
유엔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2007년2008년2009년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2011년2012년2013년2014년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연합 화학무기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2017년2018년2019년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2000년대)
Time Time Person of the Year 2000's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파일:attachment/time_2000.jpg파일:attachment/Time2001.jpg파일:attachment/time_2002.jpg파일:attachment/time_2003.jpg파일:attachment/time_2004.jpg
2000
조지 W. 부시
2001
루돌프 줄리아니
2002
내부고발자
2003
미군
2004
조지 W. 부시
파일:attachment/time2005.jpg파일:attachment/time_2006.jpg파일:attachment/time_2007.jpg파일:attachment/time_2008.jpg파일:attachment/time_2009.jpg
2005
착한 사마리아인
(빌 게이츠, 보노, 멀린다 게이츠)
2006
당신
2007
블라디미르 푸틴
2008
버락 오바마
2009
벤 버냉키
1920년대1930년대1940년대1950년대1960년대
1970년대1980년대1990년대2010년대2020년대
}}}}}} ||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2010년대)
Time Time Person of the Year 2010's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101227_400.jpg파일:external/www.left.it/image.jpg파일:external/timepoy.files.wordpress.com/970_cover_1231.jpg파일:attachment/프란치스코.jpg파일:external/s3.amazonaws.com/Time.jpg
2010
마크 주커버그
2011
시위
2012
버락 오바마
2013
프란치스코
2014
에볼라 전사들
파일:external/img.khan.co.kr/l_2015120901001413200117761.jpg파일:external/pbs.twimg.com/CzEuR4IXUAArY_r.jpg파일:person-of-year-2017-time-magazine-cover1.jpg파일:5B33A996-6F87-4CD6-8AD1-8CD66870B715.png
2015
앙겔라 메르켈
2016
도널드 트럼프
2017
침묵을 깬 사람들
2018
수호자들과 진실에 대한 전쟁
1920년대1930년대1940년대1950년대1960년대
1970년대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2020년대
}}}}}} ||
파일:버락 오바마.png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이름버락 오바마 (Barack Obama)[1][2]
본명버락 후세인 오바마 2세 (Barack Hussein Obama Jr.)
국적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출생1961년 8월 4일 ([age(1961-08-04)]세)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신체187cm, AB형(Rh-)
학력푸나아우 스쿨 (졸업) (-1979년)
옥시덴탈 대학교 (편입) (1979-1981년)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 / B.A.) (1981-1983년)
하버드 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J.D.) (1988-1991년)
가족아내 미셸 오바마(1964년생),
딸 말리아 오바마(1998년생), 사샤 오바마(2001년생)
정당민주당
임기2009년 1월 20일 - 2017년 1월 20일
종교개신교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2px-Barack_Obama_signature.svg.png
SNS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정계 입문2.3. 2008년 대통령 선거2.4. 선거 운동의 혁명2.5. 미국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 당선2.6. 퇴임 후
3. 대통령 집권기4. 평가5. 어록6. 가족7. 기타
7.1. 인종7.2. 스포츠광 오바마의 오바마 징크스7.3.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잡음
8. 등장 매체

1. 개요

파일:barrack_obama_official_portrait_1.png
"Yes, We can! (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2008년, 첫 대선 도전 당시 슬로건이자, 두번째 임기를 마치기 바로 전에 한 고별연설 끝부분에서 언급한 말.[3] 오바마를 상징하는 구호이자 그의 대통령 인생의 처음이자 끝을 장식한 말이다.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

풀네임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 주니어. 이 이름 자체가 다양한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버락은 스와힐리어로 "신의 축복을 받은 자" 라는 의미이며 후세인은 무슬림인 그의 조부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오바마라는 이름은 케냐 루오족의 남자 이름이다. # 사족으로 조부는 케냐에서 독립운동혐의로 영국에서 체포되어 고문받아 불구가 되었고 아버지도 미국으로 유학왔을 때 외국에 유학간 케냐 인재라고 따로 명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즉 오바마는 케냐 무슬림 집안 출신이고 케냐 경제학자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으나[4] 미국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 본인은 무슬림이 아닌, 꽤나 복잡한 성장 환경의 소유자인 셈.

미들네임인 후세인 때문에 사담 후세인과 겹쳐서 무슬림으로 오해받고 이를 노린 악성 동영상이 돌아다녔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 선거공화당 측에서도 이를 이용한 유세를 펼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그는 물론 기독교인입니다. 하지만 무슬림이면 어떻습니까?" 발언으로 전화위복.[5] 이후로 공화당은 저 유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민의 12% 정도는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믿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6]

참고로 미국은 헌법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의 이주에서 시작한 것도 있고 대체로 청교도가 많아 가끔 착각하는 듯 하지만 헌법상으로는 국교가 없다.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기독교를 매우 숭상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헌법 자체가 개신교에 바탕하여 쓰여졌다고 국민들이 생각하고[7] 그로 인해 전통적으로 선서나 맹세 등 중요한 건 웬만하면 다 성경[8]에 대고 하기 때문이다.[9] 또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도 가톨릭 교도인 존 F. 케네디를 제외하고는 전부 개신교 신자였다.

재임 시절 시크릿 서비스가 경호 시 사용한 코드 네임은 이단자(Renegade)로 흑인 문화에서 시스템에 역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10] 아내 미셸은 르네상스(Renaissance)로 딸 말리아와 사샤는 각각 광휘(Radiance), 장미봉오리(Rosebud)이다.

2. 생애

2.1. 성장기

1961년 하와이로 유학 온 케냐 출신 유학생 버락 오바마 시니어와 백인 앤 던햄 사이에서 태어났다.[11] 부모는 오바마가 2살 때 이혼했고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외조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한때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했던 경험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4번이나 결혼해서 이복 형제들이 여럿이며 어머니 쪽으로도 이부 여동생이 있으며[12] 조부모 쪽으로도 재혼 관계가 있는 모양이라 윗대로 가면 약간 가족 관계가 복잡하다. 심지어 이복 형제 중 한 명은 중국에서 꼬치집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13]
파일:external/westernjournalismcom.c.presscdn.com/Young-Barack-Obama.jpg 파일:external/blackhistory-101.com/Young-Barack-Obama-09.jpg
1980년의 버락[14]

부모의 이혼과 자신의 인종 정체성에 대한 혼란 등으로 고등학생 시절 마약을 하기도 했었고 이것이 후의 정계 진출 이후에 발목을 잡았지만 오히려 이를 숨기지 않아 정직한 정치인으로 인정을 받는 요소가 되었다. 흑인에다가 무슬림 집안 출신이지만 성장 배경은 백인 및 아시아계와 함께 한 독특한 점은 후의 그에게 상당한 이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미국 흑인 중 다수를 차지하는 서아프리카 출신이거나 그 후손도 아니다. 어머니가 백인이라고 흑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미국에선 혼혈인은 자기 정체성에 따라 민족이 정해진다.

1980년대엔 리사 잭이라는 사진작가의 포트폴리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관련 글 친구나 가족들에겐 주로 배리(Barr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파일:external/wtpotus.files.wordpress.com/197720punahou20jv20basketball20pic2-2-copy.jpg
푸나호우 고등학교 농구부 에이스 시절의 오바마. 사진상에서는 혼자만 흑인이라서 굳이 누구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학생으로서는 공부와 운동을 대단히 잘했다. 오바마는 푸나호우 고등학교 시절 운동을 아주 잘했으며 특히 농구는 거의 운동선수 급으로 잘해서 재학 중이던 푸나호우 고등학교 농구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풀타임 주전은 아니었다. 위의 사진도 2학년 시절 2군팀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래도 3학년 때는 1군 멤버였다.[15]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그의 농구실력에 대해 논하면서 그가 "주전이었어야 했다"고[16] 한걸 보면 오바마는 고등학교 시절 주 챔피언에 오를 정도로 강한 팀의 식스맨 정도의 선수로, 프로진출을 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반인으로서는 굉장히 잘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오바마 내각은 유독 스포츠인들이 많았는데 이 중 교육부 장관인 Arne Duncan은 비록 호주리그이긴 했지만 프로선수 출신이었다!

일찌감치 어머니의 영향으로 약자와 소수계층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탈대학교에 입학하고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대학 1학년 때도 마리화나를 피며 히피 문화에 심취한 나태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투자철회운동'을 접하고 정치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빡세게 1년 공부하고 콜럼비아 대학교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으로 졸업한 후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 법무박사(JD) 학위를 취득한다. 하버드 로스쿨 역사상 최초로 하버드 로리뷰 (법률 학술지)의 편집장을 흑인이 맡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고 긴다는 학생들만 있다는 하버드 로스쿨에서도 상위 10% 의 성적인 학생들만 받는다는 마그나쿰라우데(magna cum laude)를 받고 졸업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고 선언했을때 그의 하버드 로스쿨 동창중 한명인 Hill Harper는 버락은 우리 하버드 로스쿨 동기중에서 최소한 가장 뛰어났었던 학생중 한명이거나 아니면 가장 뛰어났었던 친구였다고 회고 하였고 또한 그를 가르쳤던 교수중 한명인 Laurence Tribe 헌법학 교수는 버락은 내가 이제까지 가르쳤던 모든 학생중 가장 뛰어난 학생중 한명이었다고까지 회고하였다. 역시 오바마를 가르쳤던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던 Charles Ogletree은 정말로 똘똘하고 또 겸손하였던 학생이였다고 회고했다. [17] [18] [19] 하버드 로스쿨은 우선 미국 최고의 로스쿨 중 한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선거기간만 되면 정치인들이 성지처럼 다녀가는 미국 법조계/정계에서는 핵심 중의 핵심. 미국 로스쿨 법률 학술지 중 가장 파워가 있는 게 하버드 로리뷰. 따라서 오바마가 편집장이 된 것 자체로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첫번째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20]을 하버드 로스쿨 재학 중 썼는데 쓰게 된 이유도 로스쿨 입학 전 시민단체 활동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이 흑인 최초 하버드 로리뷰 편집장이 되어 엄청난 유명인이 되었기 때문. 이후 시카고의 흑인 빈민가들을 위한 사회운동가로서, 그리고 1997년부터는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으로서 활동하였고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의 인기 헌법학 교수로서 재직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historynewsnetwork.org/1169974238_2970.jpg
하버드 로스쿨 학생 시절 랑델 도서관(Langdell Library)에서

2008년 대선 전후를 통해 반토막이나마 학부를 보낸 콜럼비아 대학측에서는 오바마를 초빙하려고 애를 썼지만 출신 로스쿨인 하버드는 신나게 갔으면서 콜럼비아 쪽에는 별로 보이지도 않아 재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콜럼비아 재학시 인종차별에 대해 심도 있게 배웠다고 했는데 그게 본인이 안 좋은 꼴을 당해서 콜럼비아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루머도 돌았기도 하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마냥 인기가 좋았는지 선거기간 내내 자발적인 오바마 지지 전단지가 콜럼비아 캠퍼스 내에 휘날렸으며 대선 당일 자정 즈음 오바마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당시 캠퍼스 내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학교 정문 앞 116번가 앞으로 뛰쳐나와 그 길로 할렘까지 행진했다.

2.2. 정계 입문

1996년 정계에 입문하고 난 이후에 2000년에는 일리노이주 하원의원후보에 도전했지만 경선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으로 2004년 흑인으로선 세번째로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오바마를 전 미국에 알리게 된 계기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로 이때 오바마는 찬조연설로 일약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2.3. 2008년 대통령 선거

이후 2007년 2월, 4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민주당 경선레이스에 돌입한다.

사실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힐러리의 당내 기반이 워낙 견고한 데다가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하면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바마는 겨우 초선 상원의원이었다. 그런 탓에 민주당 경선은 사상 유례 없는 치열한 혈전을 치뤘지만 오히려 이것이 흥행요소가 되어서 오바마를 유력 후보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초기엔 힐러리가 경선이 뜨거워져야 본선 경쟁력도 더 높아지기에 오바마의 출마와 선전을 부추겼지만 오바마가 이겨버렸다. 안습. 힐러리 클린턴은 매우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버린 이라크 전쟁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큰 치명타였다. 또한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의 큰 세력이 된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에게서 지지를 받은 것도 깜짝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일:external/images.dailykos.com/obama_clinton.png
힐러리와 오바마의 지지율 추이. 보면 9월달, 경선 3달 전까지도 힐러리 클린턴에게 뒤지고 있었다는것을 볼 수 있다.

파일:attachment/f0045675_4976751192a5d.gif

일찌감치 공화당 후보로 결정된 존 매케인과 사상최초 흑백대결로 관심을 끈 이번 대선에서 8월 전당대회 이후 세라 페일린을 지명하여 단숨에 관심을 자기 쪽으로 돌려버린 매케인에게 뒤지기도 했으나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 금융위기에서 차분하고 안정적인 대응과 대안제시로 결국 승부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고 11월 4일 대선 투표일까지 별다른 이변 없이 대선은 오바마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존 매케인과의 여론조사 평균
파일:2212.png




그리고 미국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2.4. 선거 운동의 혁명

오바마의 2008년 선거 운동은 오바마에 대한 지지여부를 막론하고 미국의 많은 정치 분석가들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최고"라는 평을 들었는데 초기부터 선거 운동시 기본적인 메시지와 기본 전략을 처음부터 확실히 정하고 인터넷[21]과 지역적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해 수많은 유권자들과 연락을 취해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방대한 조직망에 짜넣어 미국 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엄청난 선거 자금을 대부분 일반 유권자들로부터 벌어들였다(기부자당 기부량 평균이 약 50불). 오바마 진영은 길고 험난한 선거 기간에도 큰 실수를 범하지 않았고 기본 전략에 큰 변화 없이 충실했으며 거대하고 효율적인 선거 조직을 통해 엄청난 양의 선거 자금을 벌어들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메시지를 유지해 전체적으로 매우 절제되고 안정적인 선거 운동을 벌였다. 이는 경선 기간 중 선거 자금을 서투르게 관리해 금전적으로 홍역을 치른 클린턴 진영이나 중심적인 메시지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의 공격용 메시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페일린을 영입하는 도박을 했으면서도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한 매케인 진영과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두 진영은 이후 내부 분열로 심한 홍역을 앓았다.

미국 정치판이 돈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지만 오바마의 선거 운동은 차원이 다른 정도였다. 미국 연방 정부는 주요 정당 후보들을 위해 대선 선거 자금을 지원하는데, 이게 좀 복잡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미국 선거 운동 기간은 굉장히 길다. 몇 달간 이어지는 경선에서 피터지게 싸운 뒤에 각 당의 후보가 맞붙는데, 연방 선거 지원은 경선이 끝나고 본선 과정에 이르러서야 이뤄진다[22]. 사실 이 단계에 이르면 선거 캠프도 지치고 자금도 바닥난지라 웬만한 후보는 얼씨구나 하고 연방 정부 지원금을 받는데…오바마는 이걸 거절했다. 연방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 캠프로 직접 들어오는 기부금이 제한 되는데, 정부에서 주는 푼돈 받느니, 차라리 그냥 우리가 벌어서 쓰지라는 계산을 내린 것. 참고로 저 연방 정부 지원금을 거절한 본선 후보는 오바마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기부금 네트워킹이 탄탄하고 캠프의 능력에 자신감이 있었기에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바마는 매케인의 두 배를 기부금으로 벌어들였다. 무려 7억 8천만 달러[23]. 이쯤 되면 인간 ATM이다.

오바마의 승리를 이야기할 때 보통 미국민의 변화를 위한 갈망이나 부시에 대한 반감을 들며 이것이 정해진 승리였다는 의견이 있지만 어떤 감정이나 사상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지 못하면 정치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바마는 그것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해내는 조직을 창설하고 유지해냈고 드물게 닥쳐온 위기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해냈다. 이것은 그의 정치가와 조직의 장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다.[24]

2.5. 미국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 당선

파일:external/www1.pictures.gi.zimbio.com/Barack+Obama+Holds+Election+Night+Gathering+1KaC2agXfSBl.jpg 파일:attachment/2008-11-0820081106g2580.jpg
2008년 11월 4일, 당선 수락 연설을 하기 전
연단에서 가족과 기뻐하는 오바마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날, 영국 가디언[25]지의 표지
와우![26]

오바마의 부계가 아프리카 혈통이어서 흑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초기에는 많았지만 개표 결과분석에 따르면 오히려 흑인인 것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힘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백인 중에서 48%가 오바마를 지지했지만 라티노의 66%, 흑인들의 98%가 오바마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태어나서 흑인들의 굴곡과 수난 시대를 모두 거처온 어느 90대 흑인 할머니가 오바마의 취임식을 보고 We have overcome이라 말했는데, 격동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 킹 목사와 말콤X 등으로 대표되는 흑인민권운동의 상징 그 자체이자 모든 시위, 집회, 행진에서 부른 민중가요 "We Shall Overcome"에서 따온 것이다.

2.6. 퇴임 후

퇴임 후에는 워싱턴 D.C.에서 개인 사무실을 열 예정이다.# 또 캘러라마에 93억 원을 주고 새집을 샀는데, 이 지역은 이방카 트럼프 부부와 렉스 틸러슨 등이 살고 있는 부유한 동네이며 또 집은 그 동네에서도 두 번째로 비싼 집이라 한다.

같은 대통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모연설을 하였다.

2018년 10월 24일, 2018년 미국 우편 폭탄 미수 사건으로 다른 민주당 인물들처럼 그의 집으로 파이프 폭탄이 배달됐다.

3. 대통령 집권기

4. 평가

5. 어록

존 케네디, 빌 클린턴 대통령 등과 함께 언변이 뛰어난 대통령으로 평가받으며 연설 등에서 적절한 조크를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SNS 스타이기도 하다.

오바마: "우선 유킬리스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요."
오바마 지지자들: (야유)
오바마: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그가 양말(socks)[27] 색깔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오바마 지지자들: (웃음)
오바마: "여기서 야유를 받을지 몰랐네요. 야구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해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이곳에 있는) 청중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았어야 했는데.(웃음)"

케빈 유킬리스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 후 가진 보스턴 연설에서 유킬리스 보내줘서 고마워요 ㅋ라는 말을 했다가 야유를 들었다(…). 이 뒤에 백악관에서는 Boo가 아니라 Youuuuuuuuk였다는 개드립으로 천조국 황제폐하를 변호했다고.

오바마: 512호 홈런을 쳤던 어니컵스가 언젠가 반드시 정상에 오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청중: 웃음.
오바마: (참으로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심으로요.
청중: 웃음.
오바마: 화이트삭스 팬인 저도 이 점을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시카고 컵스의 레전드 어니 뱅크스의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식 중에 시카고 컵스를 돌려까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여자친구 건들지 말라는 한 유권자에 대한 반응.
오바마: 제가 더 이상 출마할 선거는 없습니다.(I have no more campaigns to run.) 저의 유일한 의제는…(my only agenda..)
공화당: (박수갈채)
오바마: 맞습니다, 왜냐하면 전 둘 다 이겼거든요(I know because I won both of them.)[28][29]
민주당: (박수갈채), (환호)


지미 키멜의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키멜이 "제가 만약 대통령이 되었다면, 취임식 이후 바로 51구역외계인들의 파일들을 찾아보러 갔을 거예요. 당신은 그랬나요?"라는 질문을 받자, "그래서 당신이 대통령이 될 일이 없어요."라는 시크한 대답을 날렸다.
지미 키멜: 만약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오바마: 혹시 모르지.
지미 키멜: 제가 대통령이…
오바마: 나도 그럴 일 없을 줄 알았거든.
지미 키멜: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성서에 손을 올리자마자[30] 바로 51구역, UFO에 관련된 파일을 다 뒤져서 찾아볼 것 같은데요, 대통령께서도 그러셨나요?
오바마: 그래서 자네가 대통령이 될 일이 없는 거야. 그게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라니. 외계인들은 자네가 대통령이 되게끔 하지 않을 꺼야. 자네가 모든 비밀을 누설시킬테니. 그들은 우리를 꽤나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지미 키멜: 많은 사람들이 지금 대통령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진 것도 다 보고 있을거라고요. 그래서, 그것(UFO와 51구역)에 관해서 무언가를 보신 적이 있나요?
오바마: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지미 키멜: 정말요? 예전에 제가 빌 클린턴 대통령께 여쭤봤더니, 직접 확인해 보셨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고 그러셨거든요.
오바마: 백악관에서는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거든
그 외에도 위의 방송에서 유머섞인 모습을 보이기도.

2009 MTV 뮤직비디오 시상식에서 테일러 스위프트가 수상소감을 말하던 도중 카니예 웨스트가 난입해서 방해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사태에 대해서 "He's a jackass"라고 했다.(오프 더 레코드였다.) 애초에 카니예 웨스트가 엄청 까일만한 행동을 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오바마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자회견 마무리 짓는 멘트로 "이제 스타워즈 보러 갑니다. 고맙습니다.(Get to 'Star Wars. Thank you.)"라는 애드립을 날렸다.

2016년 신년 연설에서 "니들 지겨워하는 거 같으니까 짧게함 ㅋㅋ"이라고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2012년 3월 14일, 백악관을 방문한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내외를 예방하는 자리에서 미영전쟁을 들먹이며 캐머런을 놀리는 오바마. 받아치는 캐머런의 모습도 재미있다.
18:05부터
"오바마": 200년 전, 영국은 처음으로 이 곳 백악관을 방문했습니다. 비록 다른 이유였긴 하지만요.
청중: (웃음)
"오바마": 상당히 인상깊었죠.(They made quite an impression.)
청중: (웃음)
"오바마": 말 그대로 이 곳을 환히 밝혀주었습니다.(They really lit up the place.)(화르륵)[31]
청중: (웃음)
"오바마": 여하튼 그 후로는 잘 지냈죠.(But we moved on.)
청중: (웃음)
25:25부터
"캐머런": 이 곳에 서서 200년 전 그 일을 생각하니 상당히 당황스럽군요.
청중: (웃음)
"캐머런": 우리 조상님들이 이 곳을 불태우려 했다니.
청중: (웃음)
"캐머런": 오늘 쭉 둘러보니 그 때보다는 방비를 잘 해놓으셨더군요.
청중: (웃음)
"캐머런": 이번에는 우리 영국인들에 대한 대비책을 허투루 세우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6. 가족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rack_Hussein_Obama%2C_Sr..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nley_Ann_Dunham_1960_Mercer_Island_High_School_yearbook.jpg

파일:StanleyDunham.jpg오바마의 외모는 외할아버지와 가장 닮았다는 평이 많다. 또 오바마의 작은 외할아버지에 따르면 오바마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Now look, ..."과 같은 언어적 표현과 손동작들은 오바마 외할아버지로부터 배운거 같다고 한다. 성장기에 아버지가 없었던 만큼 외할아버지가 Male Figure로서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셸은 시카고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를 졸업하고 역시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는데 시민단체와 지역사회개발활동에서 5년간 시간을 보낸 오바마보다 3년 선배다. 로펌에서 버락과 만나 1992년 결혼했다.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002829112_001_20170614105619671.jpg
2017년 6월 10일 만 16세의 샤샤

버락 오바마가 37세와 40세, 미셸이 34세와 37세에 본 늦둥이 딸들. 말리아는 하버드 대학 입학했고 미국 10대 사이에서는 유행을 선도하는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차녀 사샤는 워싱턴 D.C.의 시드웰 프렌즈 고교에 재학 중이며 당분간 오바마 부부도 딸이 졸업할 때 까지 이 지역에 머물 예정이다. 샤샤만 다소 통통한데 샤샤는 외삼촌을 닮았다. 그 때문에 샤샤는 아버지를 닮은 장녀 말리아와는 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크게 차이난다.

7. 기타


파일:attachment/koreastudent.jpg
한국에서는 오바마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는 것을 별 비중없이 다루었으나 실질적으로 원자력발전소 사업은 오바마의 재선의 발판이 되는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오바마는 사고 이후 한동안 발전소 건설에 대해 함구하다가 한 해가 지난 후에야 다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사실 이 발표를 제일 기뻐하고 있는 건 그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그는 좀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달 착륙은 조작됐는가? 로스웰에서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비기2pac은 어디에 있나? 같은 것들 말입니다."[40][41]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l4nkpVXrx1t3n5zjo6_r1_1280.jpg
파일:external/2.bp.blogspot.com/B43EwVSCUAAX4gn.jpg
2014년 크리스마스 사진
* 오바마의 가족들은 전부 장신이다. 오바마 자신의 키부터 187cm인데 그의 아내인 미셸 오바마의 키가 5피트 11인치(180cm)이다. 오바마는 루오족 계통인데 루오족이 포함된 나일로트계 민족들이 키가 큰 편이라고 한다. 2011년에 말리아 오바마(1998년생)은 6 피트에 육박했고 샤샤 오바마(2001년생) 역시 2015년을 이후로 175cm가 다 되어간다. 심지어는 미셸 오바마의 오빠인 크레이그 로빈슨의 키가 198cm로 말리아와 샤샤 자매는 부계, 모계 양쪽 다 키가 크다.
아니오, 하지 마세요. 그냥 저 청년은 이 자리에 있게 해 줍시다. 가족을 걱정하는 저 청년의 열정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는 절차라는 게 있고 그 절차라는 건 여기서 소리지르는 것과는 달리 그리 쉬운게 아닙니다.
경비요원들이 이 청년을 연설장에서 쫓아내려고 할 때 오바마는 그걸 막고 오히려 이 청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발언을 했다.
파일:attachment/NISI20120325_0006092374_web.jpg 파일:attachment/2012032517325432031_1.jpg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방문 기간 동안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한 모습
파일:external/i.telegraph.co.uk/obama-shoot_2469253b.jpg
* 2012년 8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클레이 사격을 하는 오바마. 한참 위에 언급한 총기 사건 때문에 NRA의 로비,언플이 발생하는 중 찍힌 장면이다. 그런데 백악관에서는 규정때문인지 이 사진에 절대 포샵 하지 말 것이라는 경고문을 넣었다. 그리고 이 문구를 본 미국의 약쟁이들은…


파일:external/s3.caradvice.com.au/cadillac-the-beast-obama.jpg
파일:external/images.thecarconnection.com/president-obamas-limousine_100350545_l.jpg

7.1. 인종

아버지가 캐냐 출신 흑인이고 어머니는 백인인 1세대 혼혈, 즉 하프다. 절반은 백인인지라 첫 흑인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첫 유색인종 대통령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미국에 '순수한' 흑인은 얼마 없다. 대부분 20~30% 정도는 백인 피가 섞여있다. 미국 흑인 상당수가 흑인이라고 해도 피부가 짙은 황색이나 갈색에 가까운 것도 그 때문이다. 오바마가 흑인이라는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일부의 의견이고 일단 본인 스스로가 흑인이라고 하고있으므로 사실상 논외.

이런 식의 흑인 분류는 원래 악명 높은 한 방울 규칙(One-drop rule) 에서 시작되었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있다면 흑인이라는 것으로 '순수한 백인의 피' 에 유색인종의 피가 섞일 경우 피가 '더럽혀지는' 것으로 보는 인종차별적인 법칙. 오바마의 경우에는 백인 어머니에 의해 길러진 것도 '반쪽 흑인'의 이미지에 한몫하는 듯하다.

7.2. 스포츠광 오바마의 오바마 징크스

스포츠광이기도 해서 그 중에서도 자신의 연고지인 시카고 관련 팀들의 팬이다. 이제까지의 대통령들이 주로 야구 팬이었던 것처럼 야구도 좋아하는데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이기도 하여 워싱턴 내셔널스의 시즌 개막 경기에 화이트삭스 모자를 쓰고 시구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2009년 카디널스의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게임에 화이트삭스 저지와 모자를 쓰고 시구를 하고 마크 벌리퍼펙트 게임을 했을때 격려 전화를 하는 등 화이트삭스 광팬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이후 US셀룰러 필드에서 시구를 한 적은 없다(2005년 상원의원일 때 시구를 했다).[44] 또 2012년에 케빈 유킬리스가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 되자 표 텃밭인 보스턴에서 '"유킬리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농담을 했다가 야유받은 적도 있다. 축구도 좋아해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당시 미국이 치르는 경기들을 모두 직관했다. 또한 콜로라도 라피즈 구단으로부터 유니폼을 선물받는데 등번호가 10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싸! 리오넬 메시랑 등번호가 같다!며 환호하기도 했다.

아이스하키도 역시 시카고를 연고로 하는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팬인데, 재임 중 3번이나 우승해서 오바마를 기쁘게 하는 팀이라 하더라….

농구광이기도 하다. 농구로는 시카고 불스, 풋볼로는 시카고 베어스 팬이다. 2010년 추수감사절 연휴에는 농구 경기를 하다가 입술 부위를 12군데나 꿰메는 부상을 입었을 정도. 물론 보는 것도 좋아해서 NCAA 경기를 관람하거나 항공모함에서 연 적도 있다! NCAA는 3월의 광란 (플레이오프 혹은 포스트시즌) 때 항상 대진표를 채우는걸로 유명한데, 이걸 ESPN에서 Baracketlogy라는 이름으로 세그먼트를 해서 매년 틀어준다. 정확도는 그리 높지도 않고, 우승팀을 맞춘것도 1번, 2009년 첫 임기 첫해때였다. 심지어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중에 건설한 백악관 지하의 1개 레인짜리 볼링장을, 2009년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밀어버리고 # 거기에 농구장을 건설했다가 볼링협회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선거에 출마했을 경우, 개표 직전에 농구 시합을 벌이면 당선된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존 매케인과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오바마는 지인들을 불러모아 농구 시합을 실시했는데 당선되었고 밋 롬니와의 최후반 선거 경합을 벌일 때 역시 그랬다.

특히 2012년 대선때에는 롬니가 마지막 며칠을 내내 죽을 힘을 다해 오하이오 주에서 유세전을 펼친 반면, 오바마는 그 마지막 며칠동안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역시 친구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농구 시합을 했다. 그 이후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한마디로 농구시합을 하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것이 오바마 징크스이다.

2016년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백악관을 방문했을때에도 (장난삼아) 자기는 스테판보다는 클레이 탐슨의 점프슛폼이 더 맘에 든다고했고, NBA단일시즌 최강팀의 일원이 팀을 이끌고 감독으로 오자, 오바마는 "NBA 최강팀의 일원이 온다는거는 아주 드문일이죠.. 운좋게도… 1995/1996 시카고 불스의 멤버, 스티브 커가 여기있슴다!"라고 했다.

NCAA 칼리지 풋볼 플레이오프(College Football Playoffs) 제도의 도입에 찬성하기도 했다. 2008년 당시, BCS(Bowl Champions Series) 랭킹 산정에 다소 논란이 있었는데[45] TV에 출연해서 플레이오프 제도를 도입해야 할 시기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7.3.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잡음

2009년 4월, 프라하에서 오바마는 "핵무기 없는 사회"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여 전략무기감축협정 갱신,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CTBT)의 비준, 핵물질 방호와 안전을 국제적으로 논의하고 공조하기 위한 핵안보정상회의의 구상을 밝혀 핵무기 확산에 강력한 제재를 천명하였고, 그 해 노벨상(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것도 재임 10개월만에 받았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논란이 되었다. 아직 취임 10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시점인 만큼 정책상으로도 평가받기가 모호하고 유화정책의 취지는 좋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란드 자유 노조 지도자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이후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레흐 바웬사도 '축하할 일이고 기쁘지만 너무 이른데' 라는 발언을 하였고 뉴스위크CNN을 비롯한 미국 언론사도 반응이 엇갈리며 미국의 극우파들도 입에 거품 물며 노벨 심사위원들을 비난했다. 오바마 대통령 지지자들마저도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은 만큼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인권운동가 러셀 민즈[46]는 이를 사기라며 비판했고, 심지어 오바마 본인도 수상 소식을 듣고는 '뭐 내가?! 벌써?!'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해 수상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시각도 있으나 같이 후보로 선출된 후보들을 보게 된다면 세계평화를 위해서 오바마보다 나은 성과를 올린 사람이 과연 없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다.

2009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총 205건의 인물 혹은 단체가 추천되어 역대 최다 후보수였던 2005년의 199건을 약간 상회했다. 게다가 후보들 중에는 오랜 기간 에이즈퇴치운동과 인권운동에 종사해왔던 중국의 반체제 인사 후자아나 히말라야 오지에 여학교 78개를 세운 그레그 모텐슨[47] 등 쟁쟁한 인사들이 대거 포진했다. 게다가 노벨 평화상은 노벨상 중 유일하게 단체에게도 수여가 가능한 상이다. 정 인물이 없었다면 차라리 단체를 선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예를 들어 비정부기구인 집속탄연합(CMC)는 국제 집속탄 사용금지 협약 체결을 위해 100여개국에 파견되어 설득 작업을 벌여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노벨 평화상 수여 원칙인 국가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거나 상비군을 폐지·축소하거나 평화회담을 개최하고 주장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나 단체에 가장 적합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신 전략무기감축협정 또한 '상비군을 폐지·축소'라는 조건에 충분히 해당 가능한 사안이기 때문. 게다가 같은 서방세계에서도 대놓고 반기를 드는 국가가 이나 있고, 서방세계의 맹주인 미국도 별 관심 없어서 사실상 영향력이 제로에 가까운 국제 집속탄 사용금지 협약과 달리, 신 전략무기감축협정은 세계 핵전력 1위 국가2위 국가의 핵전력을 직접 감축하는 직접적인 효력을 가진 협정이다. 세계 평화에 대한 실질적인 기여도로 따지자면 국제 집속탄 사용금지 협약 따위보다 몇 배는 위로 쳐줘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오바마를 좋아해서 줬다기보다는 '부시에 대한 반감' 으로 준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대통령이 된 후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대통령이 되기 전 유색인종의 인권을 위해 노력한 일, 아니 흑인 대통령 당선 그 자체만으로 미국 내 화합에 기여한 점을 고려한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다. 노벨평화상이 원래 주는 이유가 좀 모호한 상이기도 하고.

오바마가 퇴임한 이후에는 2009년에 러시아와 미국 간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이 갱신되었기 때문에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48] 사실 신 전략무기감축협정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바는 의외로 작지 않은데, 핵전력 감축에 대한 신규 협정이 없는 상태에서 START I이 만료될 경우 미국과 러시아가 다시금 핵무기 전력을 증강하더라도 그걸 막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49] 게다가 오바마는 학생 시절은 물론이고 상원의원 시절 대표적인 핵전력 감축론자로 유명했다. 2010년에는 공약대로 워싱턴에서 제1차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였고, 2012년 서울, 2014년 헤이그를 거쳐 2016년까지 네 번의 회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2기 임기 막바지에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와 이란과의 핵 협상 타결이라는 빅 이벤트가 성사된 뒤에는 오바마가 충분히 상 받아간 값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다.

이후 스티븐 콜베어의 레이트 쇼에 나와서 노벨 평화상 수상과 관련한 셀프디스를 하였다. 솔직히 본인도 왜 받은지 모르겠다고(...) 물론 쇼를 위한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50]

8. 등장 매체



[1] 영어병영을 뜻하는 Barrack이 아니다. '버락(Barack)' 은 스와힐리어에서 따온 것으로 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아랍어에도 이와 같은 의미의 이름으로 무바라크(مبارك‎)가 있다.[2] 코미디언 크리스 락은 전 NBA 선수 디켐베 무톰보와 동급 수준으로 듣기만 해도 흑인인 걸 알 정도로 흑인 이름이라고…[3] 마지막에서 2번째는 Yes, We can!(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Yes, We did!(네, 우리는 해냈습니다!)[4] 아버지는 원래 무슬림이었으나, 자라면서 무종교인이 되었다.[5] 정확히는 이라크 전쟁에서 죽은 아랍계 미군의 예를 들면서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훌륭한 미국인이라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는 아랍 출신 기독교인에서도 제프리 후세인 압둘이라든지 가브리엘 아사드, 피터 무함마드(이 사람은 재미교포와 갈등을 빚어서 한국에서 잠깐 알려진 목사) 같은 목사가 실제로 있기에 이 이름 드립도 따져들면 역효과가 날 법했다.[6] 앨러배마주에서는 45%, 미시시피에서는 무려 52%가 무슬림이라고 믿고 있다.[7] 미국인의 대부분이 기독교, 혹은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8] 다만 최초의 무슬림 하원 의원이 탄생하면서 꾸란 선서가 이루어졌다.[9] 오바마의 경우엔 148년 전 에이브러햄 링컨이 취임식에 쓴 성경으로 선서를 했다.[10] 제이지에미넴의 곡 'Renegade' 등 흑인 문화에서 renegade는 대개 이런 의미로 쓰인다.[11] 대다수의 남부주에서는 1967년 Loving vs. Virginia 판결로 뒤집어지기 전까지 인종간 결혼 혹은 성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주지사가 대학앞에서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대학 못 다닌다고 대놓고 말하던 시절이다.[12] 이부 여동생에게도 그녀의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이복 동생들이 있다.[13] 木屋烧烤(무우샤오카오), http://www.muwubbq.com/ 꼬치집이라기보단 바베큐집에 가깝다. 간판에 오바마 사진도 있다.[14] 이 사진들은 그의 대학 시절을 그린 영화 '배리'에서 차용되기도 하였다.[15] 천하의 마이클 조던 역시 2학년까지 JV에서 뛰다가 3학년때 Varsity에 합류했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농구부 탈락 사건이 이때 일어난 것이다. 대부분의 1,2학년들은 JV에서 뛰지만 소수의 뛰어난 저학년들은 Varsity에서 뛰는데, 조던은 자기가 뽑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키가 더 큰 동급생이 뽑힌 것.[16] http://www.nbcnews.com/storyline/president-obama-the-legacy/obama-s-high-school-basketball-coaches-teammates-remember-barry-n700986[17] https://www.youtube.com/watch?v=_ZfEFly8ShE[18] https://www.youtube.com/watch?v=mR14k1Sna8M[19] https://www.bloomberg.com/politics/videos/2014-12-01/laurence-tribe-is-a-bit-disappointed-in-obama[20] 하버드 로스쿨 입학까지 자신의 인생에 관해 쓴 책이다. 로스쿨 재학 중에 썼으나 1995년 정치 활동 준비하면서 출간했다.[21] 특히 Twitter가 여기에서 큰 역할을 하여 오바마를 트위터 대통령이라고도 하기도 한다.[22] 경선 과정에서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액수가 기부금에 비하면 너무 적어서 양당의 주요 후보들은 거절하는 게 대세다.[23] 2019년 현재 한화로 약 9021억 원[24] 물론 이것이 대통령으로서의 자질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 W. 부시도 매우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선거 운동을 해냈다.[25] 타블로이드판인 G2이다.[26] 전임 조지 W. 부시의 재선 성공 때의 문구는 "Oh, God", 신이시여.[27]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와 시카고 화이트삭스(Chicago White sox)의 팀명을 빗댄 언어유희.[28] 미국 대통령은 중임(두 번 당선)이 가능하며 그 후에는 대선 출마를 할 수가 없다. 조지 워싱턴이 초선 이후 재선까지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선이라는 선례를 만들고 자리에서 내려옴으로써 FDR 이전에는 미 대통령은 2선까지가 관행이자 일종의 관습법이었다. 근데 그걸 깨고 무려 4선을 한 어느 인물 때문에 헌법에 3선 불가 규정을 넣었다.[29] 여기서 말하는 캠페인은 자신이 출마할 대선 뿐 아니라, 같은 당원들이 출마할 중간선거 역시 자신의 임기 내에는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바마 본인이 더이상 자신의 인기나 지지도를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오바마 때문에 비교적 보수적인 남부/중서부 지역구에서 질까봐 덜덜 떠는 딕시크랫(민주당내 보수파)들 눈치 볼 필요도 없으니, 이제 내가 늬들 눈치 볼 일은 없다는 의미로도 말을 한 셈.(…)[30] 취임식을 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취임식 때 성서에 손을 올리고 대통령 선서를 한다.[31] 미영전쟁 때 영국군에 의해 백악관이 불탄 것을 빗댄 유머다. light it up은 문자 그대로 밝혀준다는 뜻도 있지만 속어로서는 '태워버리다' 또는 '날려버리다'라는 뜻도 있다.[32] 이는 모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무능의 아이콘으로 이미지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동일하게 임기 전과 후 폭삭 늙고 흰머리가 많이 생긴 비교사진이 있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정부 비서실장 시절 격무로 인해 이를 9개나 발치했다는 일화가 있다.[33] 특히 디트로이트 같은 곳은 겨우 25% 정도로 한 반에 중퇴자가 4분의 3이나 된다. 반면 한국은 2008년 OECD 보고서에 의하면 97%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34] 그리고 국제관례상 군주국의 국가원수에 대해서는 공화국의 국가원수가 상대를 극존중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35] 참고로 바로 전임의 전임 또한 46 갑인데다 또 한번 재밌게도 아들 부시 & 트럼프 한쌍과 함께 그 생일조차 각각 1달씩이나 차이남.[36] 오바마 본인은 바로이 분의 집권 시기 출생자이다.[37] 참고로, 더 락 오바마를 연기한 사람은 이름에서 알다시피, 프로레슬러 더 락으로 유명한 배우 드웨인 존슨. 그리고 그 드웨인 존슨도 2017년 현재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자 트럼프가 탄핵당할 것 또는 재선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서 대통령으로 밀어주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38]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위한 행사로 게스트들과 대통령이 유머 섞인 연설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39] 이때를 기점으로 트럼프는 민주당의 완벽한 정적이 되어버리고 취임이후에도 틈만나면 오바바의 행적을 물고 늘어진다.[40] 오바마는 웃으면서 이 개그를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래의 넵튠 스피어 작전을 실행하러 갔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빈 라덴의 위치를 가지고도 농담을 했다. 레알 충공깽.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바마가 트럼프를 비웃는 짤방이 양산되고, 당시 공화당 경선주자였던 트럼프의 지지율은 급감했다.[41] 그리고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오바마는 유쾌한 분위기 에서 재치있는 단어 선택으로 트럼프를 엿먹였고 모든 사람이 다들 빵 터진 가운데 트럼프 혼자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적나라 하게 찍혔다. 그리고 5년 반 정도 지난 뒤, 트럼프가 어느 위치로 올라갔는지를 보면...[42] 6호 전차 티거의 방호력이 강철 수직장갑 10cm였다. 꾸준히 향상된 복합장갑의 성능을 예상하면 아무리 못해도 M60 패튼의 전면장갑 수준이다.[43] https://www.yna.co.kr/view/AKR20160903052400009[44] 이 경기가 ALCS 2차전. 피어진스키의 낫아웃 사기극이 일어난 경기이다. 여담으로 이해 화이트삭스는 AL 전체1위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45] 텍사스대학교오클라호마 대학교와의 Red River Shoot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정작 BCS 랭킹은 1단계 밑이었다.[46] 이 사람은 오바마 집권기를 조지 부시의 3선이라고 표현했다.[47] 자신의 경험과 약속을 다룬 <세 잔의 차>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책은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아 공동저자가 자살했으며, 그레그 모텐슨과 그의 자선단체 또한 부패와 거짓 논란에 휩싸여 있다.[48] 엄밀히 따지면 New START가 2010년 4월 8일에 체결되었고 START I은 2009년 12월 5일에 만료되었으므로 그 해(2009년)에 갱신된 것은 아니긴 하다. 다만 협상을 개시한 시점으로 따진다면 2009년 5월이므로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닌 셈.[49] 전략공격능력삭감조약(SORT)이 있긴 했지만 전략무기감축협정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검증 관련 규정이 전무하여 실질적인 효력에 꾸준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50] 대통령직이 끝난 뒤 새로운 직업을 찾을때 있을 수 있는 면접(...)을 연습하는 꽁트 영상이다. 영상 4분 13초~20초경에 노벨상 관련 언급이 나온다.[51] 퇴장하기 전에 '분노 통역사보다는 상담이 더 필요하신 듯합니다만'이라고 말한데다가 퇴장할때에도 영부인 미셸 오바마에게 '미쳤나봐요' 말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