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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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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삼풍백화점
三豐百貨店ㅣSAMPOONG DEPARTMENT STORE
파일:삼풍백화점.jpg
<colbgcolor=navy><colcolor=#fff> 연계역 파일:Seoulmetro2_icon.svg 파일:Seoulmetro3_icon.svg 교대역
개점일 1989년 12월 1일
폐점일 1995년 6월 29일 (붕괴)[1]
휴무일 매주 월요일[2]
영업 시간 백화점: 오전 10시 30분~오후 8시
식당가: 오전 10시 30분~오후 10시
슬로건 GOLDEN LIFE
(편리한 생활, 건강한 생활, 행복한 생활)
건설 삼풍건설산업 유통사업본부
소유
창업주(회장) 이준
사장 이한상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85-3[3]
(現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188, 아크로비스타 부지)
전화번호 02-535-0002
080-022-8999(고객상담실)

1. 개요2. 당시 층별 구성3. 부(富)의 상징4. 문제점
4.1. 부지 용도 불법 변경
5. 사건/사고
5.1. 꽃뱀 사건5.2. 가스누출 사건5.3. 붕괴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85-3[4]에 존재했던 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과거 운영사는 삼풍건설산업 유통사업본부.

2. 당시 층별 구성

파일:20230118_125241.jpg
붕괴 전 중앙광장의 모습[5]
당시 삼풍백화점 층별 구성[6]
파일:sampoongfloor.jpg
<rowcolor=#ffffff> A동(백화점)(붕괴된 동) B동(근린시설)(붕괴되지 않은 동)
5F 전문식당가 아트홀 삼풍스포츠맥스(수영장, 헬스클럽, 실내골프장) 5F
4F 문화, 가정용품, 혼수용품 삼풍스포츠맥스(사우나, 이발소, 미용실) 4F
3F 남성의류, 캐주얼, 스포츠 중앙광장 문화센터, 갤러리, 업무시설[7][8], 내과, 치과 3F
2F 여성의류 업무시설(증권사)[9], 상가 2F
1F 잡화, 해외수입브랜드, 화장품 업무시설(은행)[10], 약국, 상가, 고객휴게실, 사진관, 커피전문점(아로마), 한일투자신탁 1F
B1 식품관, 주방용품[A], 가전제품[A], 유아용품[A], 수퍼마켓(B동), 서점(B동)[B] B1
B2 지하주차장 입구(A동), 창고, 임대매장 B2
B3 지하주차장, 직원식당, 미화원 대기실 B3
B4 기계실 B4

3. 부(富)의 상징

파일:attachment/sampoong10.jpg
삼풍백화점의 신문 광고당시 신문광고 모음[15] 삼풍백화점 마지막 신문광고(11면) 당시 조선일보 광고 모음[16]
삼풍백화점 광고 모음[17] 그리고 삼풍그룹 회장 이준 조사 내용 보도[18]
삼풍백화점 개업식 당시 영상
3:01에 붕괴 이후 모습과 사이렌 소리가 나오는 것을 유의할 것.
삼풍백화점 붕괴 이전 내부 영상 모음
4:13부터는 붕괴 이후의 모습이다.

붕괴 이후 뉴스에서 자료화면 형태로 붕괴 이전 내부 모습이 나왔다. #1, #2, #3[19]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점했고, 당시 단일매장으로서는 전국 2위 규모를 자랑했다. 1위는 명동에 있는 롯데백화점 본점(당시 롯데쇼핑센터)이었다. 이 롯데 본점의 규모는 1990년대 초반 규모 측정 당시 구관 바로 옆에 (삼풍백화점 개점 2년 전인 1987년에) 새 건물로 지어진 신관을 구관과 내부까지 완전히 이어 붙인 상태에서 파악한 규모다. 따라서 별도의 증축이나 확장 없이 단일매장 규모로서는 삼풍백화점이 1위였던 셈이다.[20] 삼풍백화점의 연면적은 73,877㎡, 매장면적은 약 31,031㎡[21]. 물론 오늘날에는 삼풍백화점보다 규모가 큰 단일 매장이 넘친다. 당시 삼풍과 그나마 비슷한 크기의 매장을 현대에 찾아보자면 이케아 광명점 정도가 있다.[22] 그러나 이케아 광명점이나 스타필드 하남은 도시 외곽이었던 지역 즉, 계획 당시 지가가 낮았던 지역이었다. 반면 삼풍백화점은 지금이나 당시나 전국 최상위권 입지인 서울 서초에 위치해 있었다.
파일:167401417164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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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했고 개장 초기에는 위 사진처럼 하얀색으로 도색했다가 중간에 분홍색으로 바꿨다. 콘크리트와 유리가 조화되어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개점 초기에는 삼풍그룹의 유통업 경험이 적었기에 상당히 부진한 성과를 보였고, 한국 메이저 브랜드들이 입점을 꺼렸다. 다만 지속적인 개선과 해외 브랜드 유치를 통해 고급화 백화점으로 자리잡았다. 초호화 백화점 컨셉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삼풍백화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명품 브랜드들을 대거 입점시켜 당시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던 서초구, 강남구 지역 고객들을 쓸어모아 강남 지역 최고의 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혔다. 현재 연매출 1조를 넘긴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이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도 당시에는 삼풍백화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23] 당시 매출 면에서도 삼풍이 연간 2,200억, 갤러리아가 1,090억 정도로 삼풍의 매출이 월등히 높았다. 그리고 갤러리아백화점이 명품관을 갖추게 된 때는 1990년이며, 2004년에 명품관 EAST와 WEST로 개편했다.[24] 또한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은 90년대 초반만 해도 잠원동 뉴코아백화점과 매출 경쟁을 벌이던 시절이었다.[25] 2000년에 삼풍이 있던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한 정거장 거리인 고속터미널역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등장해 강남 상권을 평정하기 직전까지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이 잠시 강남 백화점 1위 자리를 차지했던건 현대백화점이 삼풍 참사 이후 기존 삼풍의 고객층을 흡수했던 덕이 크다.

그때나 지금이나 삼풍백화점은 강남 한복판의 핵심 지역에 위치했다. 교통의 요지라 불리는 2호선, 3호선[26]의 환승역인 교대역과 가까웠을 뿐더러, 1993년 수립한 3기 지하철9호선 사평역 예정지 1블럭 거리, 서울고속버스터미널서울남부터미널 근교라는 네임드급 입지를 자랑했다.[27] 게다가 근교 강남에 (현재 신분당선 3단계의 전신인) 11호선 강남 구간까지도 예정된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삼풍백화점은 이런 어마어마한 매장 입지와 규모를 바탕으로 공격적으로 마케팅했다. 중앙홀 4층에 있던 아트홀은 서울 시내 유명 공연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MBC 라디오 공개방송 등 다양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28] 또 인테리어 또한 당시 기준으로 고급스러웠다.

또 수입품과 사치품을 많이 판매했는데 이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로비에 부가티 EB 110이 전시된 적도 있었다. 이 차량은 부가티 베이론 16.4의 아버지뻘로, 가격대가 당시 기준으로도 현재 판매되는 베이론의 2배였다. 그 유명한 페라가모[29]를 직수입해 판매하기도 했으며 아예 1994년부터는 삼풍에서 브랜드를 직접 운영했다. 그리고 붕괴 이후에 페라가모 코리아가 설립되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직수입 브랜드들을 들여왔다. 물론 이 브랜드들은 붕괴 이후 한국을 떠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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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문화전 당시 모습 영국 문화대전 당시 모습[30]

그리고 영국 문화 대전과 이태리 문화전 같은 행사를 통해 해외 문화 및 브랜드들을 소개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붕괴 당시에는 프랑스 문화대전을 준비 중이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탤런트 최명길을 모델로 대대적인 광고[31]에 나섰고 영국의 욕실 용품 브랜드인 넥타, # 이태리에서 의류 브랜드인 마리나리날디[32]를 직수입해 별도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생활용품 전문점인 아프레미디를 자체 런칭해 백화점과 압구정동에 매장을 열기도 했다. 해외에서 생산된 생활용품을 수입업체를 통해 수입해 와 아프레미디 상표를 붙여서 파는 방식이었다. 신세계에서 운영하는 JAJU와 비슷한 개념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33]

물론 백화점 붕괴 이후 마리나리날디 대리점 사업과 아프레미디 사업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넥타'는 이후 다른 업체를 통해 매장 운영을 재개했지만 한국 매출 부진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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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당시 층별 구성을 보면 1층에는 로비와 명품관, 화장품 매장이 있었는데, 삼풍이 수입 업체와 독점계약을 맺는 등 수입 브랜드 유치에 의욕적이었던지라 일반인들은 이름도 못 들어 봤을 브랜드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입점했던 화장품 브랜드들 중에는 아모레, 드봉, 쥬단학 등 한국 브랜드는 물론 샤넬, 디올, 에스티 로더, 랑콤, 겔랑, 라프레리, 시슬리 등 지금 기준으로도 고급인 브랜드들이 많았는데, 다시 말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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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홀이라고 부르던 공간에 있었는데 정문 쪽에는 분수대와 연결통로가 있었고 후문 쪽에는 행사 매장과 지하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가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또 중앙홀을 전망할 수 있는 유리관이 설치된 전망 엘리베이터 8개[36]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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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는 여성 의류 매장이 있었는데 비싼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메이저급 브랜드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름 날리던 디자이너들은 웬만하면 이 곳에 매장을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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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층은 남성 의류와 캐주얼, 스포츠 전문점[38]이 있었는데 이 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는 리바이스 청바지를 사는 것도 사치에 게스베네통만 입어도 잘 산다고 했던 시절이었고, 라코스테는 요즘의 명품 브랜드와 비슷한 느낌이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시절에 무려 구찌가 들어섰고 이외에도 발렌티노, 버버리, 페라가모, 베르사체, 막스 마라, 겐조, 발리 등의 수입 명품 브랜드들이 대거 입점해서 '사치 1번지라는 오명을 쓸 정도였다.[39][40][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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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리빙 매장은 온갖 수입 가구와 장식품, 가전제품을 팔았으며, 쓰레기통이나 수세미까지 비싼 수입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이케아를 비롯해서 까사미아, 한샘, 현대리바트 등의 가구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에 많이 존재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일절 없었다. 1990년대까지는 중산층도 소파나 식탁이 있는 가정이 드물었고, 정말 잘 산다 싶은 집에 가야 수입 가구를 볼수 있었다. 대부분의 당시 사람들은 자개장에 개다리소반 놓고 밥 먹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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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구 매장에는 레고 같은 요즘 기준으로도[43] 만만치 않은 완구들을 판매했다고 한다. 사실 레고면 양반이고 당시로서는 더 고급스럽게 보였던 수입장난감들도 많았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진열대에 리틀타익스[44]로 보이는 제품들이나 표지에 서양 아이들이 그려진 제품들이 진열된 것을 볼수 있다. 이러니만큼 각종 게임기들도 당시로서는 고가품이었던 각종 16비트 게임기들이 전시되는건 기본.[45]

5층 식당가에는 고급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당시 방문객들의 증언에 따르면 특히 콩나물국밥집인 춘원이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46] 당시 이태리 음식점(빌라파가니니)에서 근무했던 사람에 따르면 인기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붕괴 당시 있던 식당들은 한식당 '한일관', 콩나물국밥집 '춘원', 냉면집 '미전', 일식당 '식도락', 우동집 '현지', 중식당 '월계관', 양식당 '빌라파가니니' 등이었으며, 뷔페식당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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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식품관도 비싼 식품들을 많이 팔았는데, 지하 빵집에서는 프랑스산 고급 버터와 같은 수입 홈베이킹 재료들까지 판매했고, 유럽에서 수입한 치즈와 육가공품도 판매했으며[47], 나머지 음식들도 수입품이거나 대단히 비쌌다. 당시 한국에서 고급 식품에 관심하는 사람이 적었음을 고려하면 [48] 부유층이 많이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B관 슈퍼마켓은 논외. 1993년에는 국내 최초로 제과·제빵 재료, 기구 매장을 열기도 했다. #

지하에는 햄버거 매장인 웬디스와 올리브 베이커리가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여성 고객이 많이 몰리던 1층, 2층[49], 5층에는 고급 커피숍[50]을 배치해 당시에는 드물었던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같은 각종 고급 디저트류도 취급했다.

해마다 해외 명품을 집중적으로 판매하기도 했는데, 1994년 이태리 대전이란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건물 중앙에 슈퍼카 부가티 EB 110[51]을 전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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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활관에서 전시중인 공룡들

B동(레포츠동)은 '전생활관'이라는 개념으로 각종 레저시설 및 문화시설, 편의시설이 위치했다. 1~2층은 금융동을 비롯해 우체국, 여행사 등이 있었고 일반적인 아파트 상가도 있었다. 3층에는 갤러리와 문화센터, 4~5층은 고급 스포츠센터인 '삼풍스포츠맥스'[52]가 있었다. 이런 문화공간을 만들어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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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은 당시 대중적인 이미지였던 뉴코아를 제외하면 서초구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주하던 부자들이 자주 가는 장소였다. 당시 스포츠센터 회원권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에 거래되었다. 삼풍이 준공 승인을 받을 때 관할구청인 서초구청 간부들에게 스포츠센터 이용권을 뇌물로 주었을 정도이다. 백화점이 붕괴된 이후 매년 비싼 연회비를 내던 스포츠센터 회원들이 삼풍 측에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백화점 붕괴 이후 4년 넘게 당시 백화점 VIP로 등록되었던 고위층들이 백화점 카드대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 붕괴 이후 스포츠센터 회원 명단을 보니 이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고위층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 서초동 주민들을 제외하고도 인근의 압구정동이나 송파구 거주민 고객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백화점 맞은 편 삼풍주유소가 전국 주유소 매출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충청 지방의 모든 주유소 매출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았다고. 그만큼 승용차 이용 고객이 많다 보니 인근 주유소가 잘 된 것이다.

어쨌든 당시 삼풍이 이렇게 고가 상품들을 많이 팔았던 것은 수요가 충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사 1, 당시 기사 2. 이런 영업으로 삼풍백화점의 매출 규모는 무섭게 성장했는데 1991년 개점 2년 만에 두 배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1, #2) 1994년에는 전국 백화점들 중 매출 규모 7위권을 기록했다. 1992년 전국 18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다.

유튜브에서 밀라논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장명숙이 이 곳의 해외 명품 담당 고문이었다. 당시에 삼풍에서 페라가모를 입점시키기 위해서 페라가모와 인연이 깊은 장명숙을 수소문 끝에 영입했다고 한다.[53] 이 외에도 부가티 EB 110을 삼풍백화점에 전시하기 위해 당시 부가티 회장인 로마노 아르티올리와 미팅을 진행하기도 했다. 장명숙은 삼풍백화점 명품 브랜드 구성 자문은 물론, 직접 기획부터 바잉 작업, 직영 브랜드 영업까지 참여했다. 당시 삼풍에 입점해 있던 수입 브랜드들은 거의 장명숙이 입점시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54]

1989년 개장 당시 불법으로 추가 건물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를 진행했다가 이후 관계당국의 조치로 1993년 공사를 중단했고 1992년에는 다시 건물 신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당시 신문 기사가 있다.# B동 옆 주차장 부지에 빌딩을 건설해 삼풍그룹 본사 건물 겸 저층부 백화점 건물을 추가로 지어서 백화점을 더 확장시킬 계획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예정대로 추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주차장 부지에 건물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까지 진행한 정황이 발견되었고 계획이 잘 추진되지 않았는지 그대로 다시 매립해 이후 옥외주차장으로 사용했다. 주차장 부지 밑에는 불법 건축물이 존치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주차장 부지는 공동주택부지여서 아파트만 지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백화점 부지처럼 상업시설 건설은 애초부터 지을 수 없었다. 백화점 확장이 불가능해지자 삼풍은 오피스텔을 지어 복합건물을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 의외로 삼풍은 다른 재벌 그룹과는 달리 이 부지 외에 마천루를 건설할 뜻은 없었다. 백화점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부터 해왔던 건설이라던가 건물 임대업 부문에서는 그야말로 죽을 쑤고 있었기 때문에 오직 백화점 운영에만 몰두하고 있던 게 그 당시 삼풍이었다. 고로 마천루를 지을 여력조차 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

이러한 고급화 전략과 단일매장 전략 때문에 타 브랜드 백화점보다는 상대적으로 매출이 부진했고 유동인구를 제대로 흡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애초에 당시의 롯데나 신세계, 미도파처럼 도시의 유동인구를 상대로 영업한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영업을 한 것이니 당연지사이다.

사실 당시는 지금의 롯데, 신세계, 현대와 같이 전국단위로 신규 점포를 출점하기에는 한국 유통 시장의 파이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당시의 백화점들은 아파트 단지 내의 근린상가 형태로 영업을 했고 지금은 전국구 백화점으로 거듭난 현대백화점이나 갤러리아도 당시에는 각각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한양아파트의 딸린 편의시설에 가까웠다.

원래는 수도권과 지방에도 지점을 추가로 내려고 했으나[55] 사업 과정에서 난관이 많아서 착수 기한을 미룬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경영 성과가 부진했더라도 일단 타 계열 프랜차이즈 백화점들 사이에서 버젓하게 자리를 잡고 살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백화점의 경쟁력이 장난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던 목산백화점(現 이마트 천호점), 비바백화점 등 수많은 중소형 백화점들이 문을 열었다가 얼마 안 가 도산하기를 반복했던 시기다.

만일 건물을 튼튼하게 지어서 붕괴만 되지 않았으면 1997년 외환 위기에 따른 도산 위기도 자력으로 극복하고 그 이후에 부도가 난 지방 백화점의 건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추가 지점들을 여기저기에 냈을 수도 있다. 또한 붕괴 이후 들어온 억대급 어음들도 다 결제해냈을 만큼 삼풍백화점 자체의 재정도 안정적인 편이었다. 물론 모기업인 삼풍건설은 자본잠식 상태인 데다 유통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본업인 건설업에는 투자에 너무 소홀해서 재정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삼풍건설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추후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현금 마련이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단지 메이저 백화점들과 비교했을 때 단순 매출액이나 유동 고객이 비교적 후달렸다는 것이지 절대 파리 날리는 가난하고 장사 안 되는 백화점은 아니었다. 도떼기 시장마냥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롯데나 뉴코아랑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령 삼풍그룹이 IMF 사태를 버티지 못해 파산했다 하더라도 삼풍백화점은 이후 다른 메이져 백화점에 인수되어 21세기까지도 럭셔리한 느낌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경영이 잘되었더라면 과거 일본에서 유명했던 호화 백화점 브랜드였던 소고처럼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이준 회장 일가 또한 IMF 사태로 삼풍그룹이 파산했다고 해도 IMF 사태때 파산하여 사라진 여타 재벌들 처럼 산하에 운영되던 사립학교 법인인 숭의학원이라도 건져서 이후로는 사학 재단 형태로 계속 잔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백화점에서 세일이나 경품 행사를 하면 주변 교통이 마비되던 시절이었다. 교통 문제 때문에 세일 행사를 할 때는 대중교통 이용 권장 문구를 광고에 넣도록 하고 지하철 승차권을 나눠주는 행사를 했어야 할 정도. 물론 역설적으로 삼풍이 차라리 파리 날리는 열악하고 사람 없는 백화점이었다면 이 정도로 인명피해가 심각해지진 않았겠지만...

이렇게 화려했던 삼풍백화점은 사실 최악의 부실건물이었다. 붕괴 이후 국내외 건축 전문가들은 이 따위로 지어 놓고도 5년 반 넘게 버텼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4. 문제점

4.1. 부지 용도 불법 변경

파일:삼풍 백화점 실제 사진.jpg
1995년~1998년경의 삼풍백화점 B관 전경[56]
사고 원인에 앞서 설명할 것은 삼풍백화점 시공 계획이 세워지기 전 본래 이 부지는 주거용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삼풍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삼풍건설산업에서 지었던 외인 주택 단지의 일부였고 주거용 건물만 세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삼풍백화점은 본래 그 자리에 지어질 수 없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풍 측은 이 외인 단지를 허물고 삼풍아파트와 함께 백화점을 짓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 용도를 변경하여 공사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매우 가까운 거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까딱 잘못되면 아파트의 연쇄 붕괴로 인하여 수십 배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부지 용도 비리를 두고 붕괴 직후 부실공사가 붕괴 원인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허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붕괴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이 지근거리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하 진동에 의한 원인을 붕괴의 한 요인으로 보기도 했다. 물론 저런 큰 백화점 건물이 지하철 진동 때문에 붕괴된 것이라면 그것도 부실공사다.

실제로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지반공사(+ 당시 기술의 한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기울어졌으며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에서도 나오듯 약한 지반이 쭉 무게를 지탱하면 뭔 짓을 해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물론 그 전에 부실공사도 한몫 했지만. 다른 예시로 롯데월드타워의 경우 인근 지반이 매우 연약해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지하 깊숙한 곳에 강화 철근을 박고 콘크리트를 부어 굳히는 지반강화 공사를 상당 기간 진행했다.[57] 그만큼 지반공사가 중요하다는 뜻.

비록 삼풍백화점의 붕괴 원인은 지반이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이 건설 시작부터 철저하게 비리의 온상인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5. 사건/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5.1. 꽃뱀 사건

1991년 11월 15일 삼풍백화점으로 2천만 원을 내지 않으면 뱀을 풀어 놓겠다고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관계자는 이를 무시했고 다음날 낮 12시 쯤 꽃뱀[58] 6마리가 비상계단 화단에서 발견됐다. 범인은 유통사업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백화점에 본인이 뱀을 넣었다고 알렸다. #

이후 범인들은 체포되었으며 이들의 정체는 전직 은행원들로 밝혀졌다.#

5.2. 가스누출 사건

1994년 12월 21일 삼풍백화점 옥외주차장에서 가스가 누출돼 인근 지역 주민들이 대피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날 오후 10시 35분쯤 가스냄새가 난다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긴급복구반이 현장에 출동해 행인과 주민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11시 15분쯤 누출 부위에 대한 보수를 완료했다. #

5.3.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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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삼풍백화점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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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건물 붕괴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폐점되었다.[2] # 애석하게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휴일인 월요일이 아닌 목요일에 발생했다.[3] 이전 지번은 서초동 산 192-4.[4] 도로명주소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188, 아크로비스타 부지.[5] 중앙광장은 높이 11m에 소나무를 심어 놨다고 한다.[6] 출처[7] 당시 삼풍건설산업 입주[8] A동이 붕괴될 때 이한상 사장 등이 대책을 마련하고 있던 장소였다.[9] 당시 한진투자증권(現 메리츠증권), 쌍용투자증권(現 신한투자증권)[10] 당시 서울은행(현재 하나은행으로 합병.)[A] A동 4층에서 지하층 확장공사를 통해 지하1층으로 이동[A] [A] [B] B동 2층에서 이동[15] '광고'목록 클릭[16] 한글 로고체도 있었는데, 한글 로고체는 주로 TV광고에서만 사용했다.[17] 두 번째 광고의 23초 즈음에 나오는 여자 어린이는 배우 김민정이다. 마지막 광고의 모델은 배우 최명길인데 당시 최명길은 1994년 말부터 TV CF를 비롯해 각종 전단 광고 등에 등장했다. 두 번째 광고의 남성 목소리는 장세준. 1990년 당시의 광고(CF)에 쓰인 음악은 존 윌리엄스올림픽 정신(The Olympic Spirit)으로 미국 NBC1988 서울 올림픽 중계방송 주제곡으로 쓰였으며, 한국 SBS2020 도쿄 올림픽 중계방송의 오프닝 음악으로도 쓰였다.#[18] 여기서 이준 회장의 상식 밖의 망언과 무책임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19] 이 영상들은 사람들의 옷차림과 백화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행사들로 보아 계절이 초여름이라는 점과 건물 도색이 핑크색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1993년 11월에 진행되었던 영국대전 당시만 해도 건물 도색이 흰색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핑크색으로 건물 도색을 바꾼 것은 1994년 초반경이 된다. #) 1994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20] 붕괴된지 약 14년 후부터는 이 곳이 타이틀을 가져가서 7년동안 유지했었다.[21] 원문에는 9387평으로 언급된다. #[22] 백화점이 아니라 종합쇼핑몰이지만 스타필드 하남의 연면적은 460,000㎡으로 스타필드 하남이 삼풍백화점보다 6.5배나 더 크다. 백화점 중 2021년 기준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이다.(연면적 418,000㎡)[23] 당시 갤러리아는 지금의 명품관 이미지가 아닌 강남 오렌지족과 신세대를 위한 백화점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가의 물건을 많이 판매했고 대한민국 최초 수입품 전용 백화점(물론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비판으로 인해 은근슬쩍 수입품 비율을 줄이고 한국 브랜드를 팔기도 했으나, 2024년 기준으로 EAST관은 건물 전체가 수입 명품으로 도배되어 있다)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당시 많은 관심과 함께 비난을 받은 건 사실이다.[24] 갤러리아가 명품관으로서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삼풍이 붕괴된 이후 IMF 등을 거치면서 고급화 전략을 강화하고 때마침 한국 진출을 한 샤넬, 에르메스, 루이 비통 등 3대 명품을 유치해낸 이후다.[25] 이 둘은 당시 상권이 약간 다르긴 했지만 강남 이미지와 비슷한 매장 크기, 잠원동, 논현동, 신사동, 압구정동의 고객층이 겹쳤기 때문에 가장 직접적인 경쟁 상대였다.[26] 일산선은 삼풍이 붕괴되고 7개월 후인 1996년 1월 개통했다.[27] 단 남부터미널은 백화점 오픈 당시에는 용산에 있었고 오픈 7개월 뒤에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남부터미널로 개명한다. 또 사평역은 백화점이 무너지고 14년 뒤인 2009년 7월에야 개통했다.[28] 당시 삼풍백화점 아트홀은 총 800석 규모의 중극장으로 백화점 내 공연장치고는 상당한 규모였다. 때문에 강수지 같은 유명 가수의 콘서트도 개최한 경험이 있으며 방송 프로그램 녹화도 종종 했다. # 1995년 7월 4일에는 SBS 명사 초청 특강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백화점 붕괴로 영영 열리지 못했다.[29] 요즘은 다른 명품 브랜드에 밀려서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긴 하지만, 이때는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가 한국에 미진출 했을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최고급 브랜드로 취급되었다.[30] 오른쪽 두번째 뒷짐진 대머리 노인이 이준 회장이다.[31] 그 중에서도 다이아몬드 편. 최명길이 모델로 나온 이 광고는 대부분 아침 시간대에 지상파에서 방영되기도 하였다.[32] 막스 마라 계열의 정장 브랜드로, 삼풍이 당시 페라가모와 함께 대표 브랜드로 내세운 브랜드다. 현재는 한국 사업을 접고 철수했다. 당시 광고(날짜상으로 백화점 붕괴 며칠 후 나온 광고인데도 삼풍백화점 매장 전화번호가 그대로 실려 있다.)[33] 당시 기사당시 잡지 광고 1, 당시 잡지 광고 2.[34] 후에 삼풍백화점의 부실공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 탁 트인 천장이 묘하게 소름끼친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35]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모레, 드봉이나 쥬단학, 나드리, 피어리스 등 한국산 화장품을 사용했고 수입 화장품은 고급을 넘어 사치로 취급되던 시대였다.[36] A관 쪽에 4개, B관 쪽에 4개가 각각 위치[37] 붕괴가 일주일도 채 안 남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38] 붕괴 당시 스포츠매장을 새단장한 지 한 달도 안 된 상태였다. 1995년 6월 24일(붕괴 5일 전) 경향신문 기사[39] 버버리나 페라가모는 지금도 비싼 명품 브랜드지만,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에는 상술한 것처럼 루이 비통, 샤넬, 에르메스 등 3대 명품 브랜드가 한국에 진출하지 않던 시기라 삼풍백화점이 존재하던 당시 버버리와 페라가모의 위상은 요즘의 3대 명품 이상이었다. 특히 구찌는 요즘도 3대 명품 다음 가는 최상위급 명품 브랜드인데, 당시의 위상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1991년 외제 사치품 열풍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동아일보 기사만 봐도 가장 비싼 명품 의류가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 1944~2007,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옷이었고(구찌와 버버리보다도 비싸다고 언급되었다), 3대 명품이나 프라다, 디올 같은 구찌보다 더 높은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언급된 옷들도 근로자 평균 월급이 60만 원 가량이던 시절에 100만 원을 넘겼고, 가장 비싼 지안프랑코 페레 여성복은 지금 기준으로도 살인적인 가격인 244~334만 원 수준이었다!! #[40] 당대 한국 백화점에서 살 수 있던 3대 명품은 1992년부터 한국 유명 백화점들에 진출한 샤넬 코스메틱이 전부였다. 한국에 샤넬 부티크와 에르메스가 들어온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 2년여 후인 1997년부터였으며, 루이비통은 삼풍백화점 영업 당시에는 신라호텔 아케이드에서만 살 수 있었고 삼풍백화점 붕괴 후인 1996년에야 백화점 판매를 시작했다. 물론 면세점에서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샤넬과 루이 비통을 살 수 있었다.[41]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1995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2,500달러를 넘어서 경제 수준만큼은 선진국이라 부를 만한 수준까지 도달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사치를 부리는 것과 외국산 제품들을 사용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시기였다. 당장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중반 당시 TV 공익광고를 보면 사치를 부리지 말자는 내용을 자주 내보냈었고, 명품 쇼핑을 하는 부유한 X세대(일명 오렌지족)를 꼭 2020년대 현재 MZ세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한 수준으로 안 좋게 봤으며, 한국 사회가 사치를 국가주도적인 수준으로 말리는 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때보다 외화를 비롯한 돈 자체가 부족해 국민 모두가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돈을 아껴야 했던 IMF 외환 위기 이후부터다.[42] 의외로 현재 국내 백화점 중에서도 이 정도의 라인업을 가진 백화점은 흔치 않다. 소득 수준이 말도 안 되게 오르고 한국 명품 시장이 1995년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성장한 지금도 당장 현대백화점 내에서 중상위권 매출을 올리는 현대백화점 중동점이나 롯데백화점의 7년 만의 야심작인 롯데백화점 동탄점 등도 당시 삼풍 명품 라인업에 미치지 못 할 정도이다.[43] 지금도 8~10만 원을 호가하는데 당시면 정말 비싼 장난감이었을 것이다.[44] MGA계열의 완구회사. 한국에서는 구니카가 수입하고 있었다.[45] 1993년 기준 현대 미니 컴보이 가격이 9만 9천 원, 현대 컴보이 가격이 12만 원, 현대 슈퍼 컴보이 가격이 21만 5천 원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근로자 월평균 급여가 96만 원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1993~1999년 근로자 월평균 급여[46] 응답하라 1994에서는 이 가게 대신 냉면집이 언급되지만 당시 냉면은 대치동에 있던 그랜드백화점 당시 본점이 더 유명했다. 2024년 기준으로 그랜드백화점은 일산점만 남아 있다. 물론 삼풍에도 '미전'이라는 이름의 냉면집이 있었지만 춘원보단 덜 유명했다.[47] 이 당시에는 가공식품을 구입하려면 동네 구멍가게나 번화가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그곳에서 파는 육가공품은 흔히 ‘벽돌햄’이라고 불리는 스모크햄이나 켄터키후랑크 정도가 고작이였고, 치즈는 슬라이스치즈라고 불리던 노란색 체다치즈와 뿌리는 하얀색 피자치즈정도가 전부였다. 한국 백화점에 수입치즈가 처음 들어온 것이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후인 1995년인데,(그 이전에는 외국인이 출입하는 주요 관광호텔에서만 수입치즈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수입치즈가 처음으로 판매된 백화점이 바로 삼풍백화점이었다. #[48] 당시 인근의 뉴코아만 보더라도 고급 식품은 고사하고 슈퍼마켓에 분식집을 더한 형태였다.[49] 2층은 1992년 개장한 '카페라리'라는 카페체인점이 있었는데 당시 케이크같은 디저트류가 유명했고 고급 원두커피를 취급하던 카페였다. 참고로 카페라리 1호점을 연 곳이 바로 삼풍백화점이라고 한다. 라리는 지금도 서울과 수도권에 있지만 1999년에 매각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운영 중이다.[50] 식당가 에스컬레이터 쪽에 위치해있던 '돌비' 커피숍.[51] 여담으로 이 차는 건물 붕괴로부터 살아남았는데 건물 붕괴는 이미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붕괴 전 값비싼 전시물 등은 미리 다 빼 놓은 상태였으며 이 차량은 붕괴되기 며칠 전 일본총판으로 반환되었다. 참고로 이건희가 소유했던 차량과는 다른 종류다.[52] 헬스클럽, 실내골프장, 수영장, 사우나, 이발소[53] 당시 고3이었던 큰아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삼풍백화점의 임원이나 고문 중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장명숙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픈 아들을 중환자실에 두고 미팅을 해야 했다고 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가장 크게 바꿔 놓은 일이었다고.[54] 사건이 발생한 날은 본인의 출근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고는 다행히 면했지만 자신의 비서와 대학 동기가 사망하는 등 주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많이 당했고 본인에게도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라고 한다.[55] 분당신도시대전광역시에 추가로 지점을 내려고 했다. 특히 대전은 1993년 개점을 목표로 구체적인 부지선정까지 이루어진 상태였다.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 땅을 국제특수금속과 부지를 두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는지 추진이 지지부진했고 그 사이에 서울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삼풍은 도산하고 부지는 롯데에게 넘어갔는데 이게 2000년 롯데백화점 대전점이 된다. 지금 건물에는 삼풍의 손이 닿은 곳은 없으니 무너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56]A동의 완전 붕괴 이후에 촬영된 사진이다. 자세히 보면 백화점 유리가 깨져 있고 펜스가 둘러져 있다.[57] 그렇게 개고생을 했음에도 건물 내에서 수십개의 크고 작은 균열이 확인되어 이를 보강하는 공사가 추가로 진행되었다. 그만큼 강에 떠내려온 퇴적물이 그대로 퇴적된 충적층이던 잠실 일대의 지반이 극도로 연약했던 것이다.[58] 원래 이름은 유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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