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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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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아우 에구리노미코([ruby(殖,ruby=ゑ)][ruby(栗,ruby=くりノ)][ruby(皇子,ruby=みこ)]),
오른쪽은 아들 야마시로노오오에노오오키미([ruby(山,ruby=やま)][ruby(背,ruby=しろノ)][ruby(大,ruby=おほ)][ruby(兄,ruby=えノ)][ruby(王,ruby=おほきみ)])다.
8세기 목판본을 복제한 예진(睿眞)이다.
시호 쇼토쿠 태자(/성덕태자)
우마야도()
부황 요메이 덴노
생몰년도 574년 2월 7일 ~ 622년 4월 8일 (향년 48세)

1. 개요2. 역사적 일화3. 전설4. 저주5. 역사적 과장과 허구설 논쟁6. 창작물7. 기타

[clearfix]

1. 개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스이코 덴노 시절에 활약한 야마토섭정이자 정치가이다. 고대 일본의 정치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나, 현대 역사학계는 업적이 불확실하다고 여긴다.

요메이 덴노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황후 아나호베노하시히토(穴穗部間人)이다. 두 사람은 이복남매로 어머니가 소가씨 이나베의 딸이다.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어린 시절에는 우마야도(), 장성한 뒤에는 도요사토미미노미코()라고 불렸다. '쇼토쿠 태자'라는 명칭은 사후에 추증된 시호이다.[1] 그리고 일본에서 태자라는 말은 차기 황위계승자라는 말로 직계 후손이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다.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와 불교를 배웠다. 백제의 아좌태자는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알려졌다.

19세에는 고모 스이코 덴노의 섭정이 되었다. 당시 소가씨의 대표이자 조정의 대신이었던 소가노 우마코가 외척으로서 강대한 권력을 휘둘렀는고, 그런 우마코가 자신의 조카딸 스이코의 섭정으로 역시 자신의 조카 손자인 쇼토쿠를 임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기야 원래 그의 아버지 역시 우마코의 조카, 어머니 또한 우마코의 조카에 아내 마저도 우마코의 딸이니 이만하면 사실 그도 소가씨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한반도 삼국과 수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왜의 문화와 정치를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아스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소가씨의 뜻대로 불교를 부흥시켜 호류지(法隆寺, 법륭사)[2], 고류지, 시텐노지 등 많은 절을 창건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지금도 조금 오래된 절이면 대부분 쇼토쿠 태자가 처음 창건했다는 창건담이 전해진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고 그저 유명세를 빌리기 위한 것이다. 한국에서 오래된 사찰 대다수가 창건자를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자장율사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쇼토쿠태자는 그 외에도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17조 헌법과 관위 12계 등을 만들었다. 쇼토쿠 태자가 제정한 관위제. 유교의 덕목인 덕()ㆍ인()ㆍ예()ㆍ신()ㆍ의()ㆍ지()에 각각 대大 자와 소() 자를 붙여 12관위를 만들고, 보라파랑빨강노랑흰색검정으로 위계를 표시했다. 제정된 이후, 주로 귀족이나 관리신분과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조정에 출사하는 귀족이나 관리의 관복의 색상에 반영되었다. 한국의 제도와 비교하자면 신라17관등제와 유사하다.

또한 전통적인 귀족 가문의 수장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일으킨 정미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는가 하면 불교를 공인했다. 그가 만든 정치 시스템은 이후의 다이카 개신 등을 거치며 약간씩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가령 관위 12계는 후에 다이카 개신 이후 관위가 늘어나 최종적으로 26등급으로 나뉘었다. 후대 정치 시스템의 토대를 놓은 셈이다. 중국으로 치자면 구품중정제와 같은 영향을 미친 것. 쇼토쿠 태자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래인 스승들한테 유교도 배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 재무성의 전신인 대장성(大蔵省)은 2001년까지 무려 약 1300년 동안 같은 이름을 유지했다. 이름을 바꿀 때에도 많은 공무원들이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년에는 소가 가문의 권력이 강해지고 자신의 권한이 축소되자 속세에 허망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 아내에게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난다.' 했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정말로 죽은 뒤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쇼토쿠 태자가 자살했다는 설도 떠돌 정도. 한편으로는 그 당시 수도에 전염병이 돌아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 쇼토쿠 태자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내도 하루 만에 사망했다.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겨 유력한 차기 천황으로 꼽혔지만 스이코 천황보다 먼저 죽었고, 그의 아들 야마시로 황손은 다무라 황자 지지파에게 밀려서 천황이 되지 못했다. 이후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인 소가노 이루카의 음모로 일족이 자살하여 혈통이 단절되었다.

2. 역사적 일화

607년,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곳천자(日出處天子)가 해 지는 곳천자(日沒處天子)에게 글을 보내노라."란 구절을 넣은 일이 유명하다.
수서: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其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云云.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대업(大業) 3년(607)에 그 왕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3]가 사신[4]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그 사신이 말하기를 "바다 서쪽의 보살천자(菩薩天子)가 불법을 중흥하였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조배(朝拜)하고, 아울러 승려 수십 명을 보내어 중국에서 불법을 배우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 국서(國書)에서 이르기를,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 잘 지내는가[無恙]?" 운운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를] 보고 기꺼워하지 않고, 홍려경(鴻臚卿)에게 이르기를, "오랑캐의 글이 무례한 바가 있으니, 다시 보고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표점 적용 원문, 번역문

이에 대해서는 마침 당시 수와 대치하던 고구려의 승려 혜자가 쇼토쿠 태자에게 국서 쓰는 방향을 지시해준 결과라고도 하고, 왜로서는 평소 대중국 교류 경험이 없다보니 자기들이 주변국에 하던 대로 자국중심주의를 내비친 것이고, 수 양제는 "웃긴 놈들 다 보겠네" 정도로 넘어갔다는 해석도 있다.

수양제가 국서를 받은 이듬해에 왜국에 답사로 보낸 배세청(배청)의 관직이 문림랑(文林郞)이라는 꽤나 하급 관리였음이 그 근거로 거론된다. 수양제가 왜국을 대단하게 봤다면 하급 관리를 답사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사절이었던 오노노 이모코는 쇼토쿠 태자에게 양제가 허가 하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여기에 기분이 좋아진 쇼토쿠 태자는 다음 사절에도 이모코를 보내며 윗 내용을 천자만 천황이란 표현으로 바꿔 서신의 서문에 집어 넣는데, 이모코는 양제에게 죽을까 두려워 도망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을 한 것이 발각되어 귀양을 갔다.

파일:nihonshoki23.png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6년(608) 6월 조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수양제가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확히는 약취() 당했다고 적혔다.

이를 두고 일본 측에서는 백제 측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곡해하고 있다. 힘이나 국력으로는 백제가 일본에 깜냥이 안되니깐 비열하게 훔쳤다라고 해석하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본문에 오노노 이모코를 일본의 관료가 꾸짖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어야 했다.” 또 오노노 이모코가 “백제인이 국서를 찾아서 빼앗다”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백제인이 훔쳤다가 아니라 강탈했다라고 해석하는게 옳다. 소야신매자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이로 유추해 보면 이유가 무엇이었든 백제는 당시 의 중국 외교를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었고, 그 때문에 국서를 강탈했고, 오노노 이모코는 국서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처벌이 두려워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노중국 교수도 백제가 국서를 강탈한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당시 백제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 변화가 나타난다.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쇼토쿠 태자는 법을 제정하고, 조례()를 개정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또한 607년 수에 전해진 천황의 국서에는 ‘’ 라고 하며 독자성이 강조되어 있다.

요컨대 국서 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 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수에 대한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계획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수나라 황제의 모욕적인 글이 쓰인 국서를 그대로 전달했다간 이모코 자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적당히 둘러 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나라 사신들이 대동하고 있는 시점에서 황제의 의중을 담은 국서 따위를 분실했다고 들러대어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수서()에는 쇼토쿠가 왜의 사신을 보냄에 답하고자 이듬해 608년 수양제는 문림랑 배세청을 보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 무령왕 9년의 기록을 포함하여 고대 한ㆍ중ㆍ일 세 나라의 사료에서 연도까지 교차 검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사이다. 삼국사기에는 수나라의 사신이 백제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흘 후에[5] 다시 대례(大禮) 가다비(哥多毗)[6]를 보내어 200여 기병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아가 위로하였다. 드디어 그 도읍에 이르렀는데, 그 왕은 배청[淸]과 만나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바다 서쪽에 대수(大隋)라는 예의를 갖춘 나라가 있다고 들은 까닭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나는 오랑캐로서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살고 있어서 예의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 땅 안에 머물러 있어서 쉽게 서로 만나지 못했다. 이제 새로이 길을 청소하고 숙소를 꾸며 대사(大使)를 기다렸다. 바라건대 대국이 새롭게 된[惟新] 가르침을 듣고자 한다."

고 하였다. 청이 대답하기를,

"황제는 그 덕이 하늘과 땅[二儀]에 버금가며, 은택은 온 세상에 미친다. 왕이 교화를 사모하는 까닭에, 사신[行人]을 이곳에 오게 하여 가르침을 베풀도록[宣諭] 한 것이다."

그런 뒤에 [배]청을 이끌어 숙소에 머물게 하였다. 그 후 [배]청은 사람을 보내어 그 왕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이미 도달하였다. 청컨대 곧 길을 경계할 것을 부탁한다."

고 하였다. 그래서 연향을 베풀고 청을 보내었고, 또한 사자로 하여금 청을 따라 와서 방물을 바쳤다. 그 후 마침내 [관계가] 끊어졌다.
수서 권81 열전 제46 동이 왜국(倭國) 대업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다음 해에 황제가 문림랑 배청(裴淸)을 사신으로 보냄

한편, 일본서기에는 600년과 602년 신라를 치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600년에는 신라를 치려고 했다가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멈추었는데, 다시 602년에 신라를 치려고 쓰쿠시에서 병력 2만 5천을 모으고 이복형제인 구메 황자(來目皇子)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가 병이 들어 사망하여 재차 다른 이복형제인 타기마 황자(當摩皇子)를 후임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마저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도성으로 귀환하는 바람에 결국 원정 자체가 백지화되었다고 한다. 이는 762년에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 것보다도 훨씬 과거에 있던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고 바람

일본인의 정신으로 유명한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와 ()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며,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신적 원류라고도 한다. 신불습합으로도 유명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일어난 것은 9세기부터이니 쇼토쿠 태자와는 큰 관련이 없다.

3. 전설

쇼토쿠 태자의 아명 우마야도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출생담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예수 탄생 이야기에 영향받은 결과라는 주장이 있지만, '우마야도노미코'라는 표기는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하고 후대의 책에는 대부분 쇼토쿠 태자라고 하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쇼토쿠 태자 이야기 중 유명한 것은 '청원자 열 명이 동시에 꺼낸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적절한 답변을 했다.'는 일화인데, 여기에서 귀가 좋다는 뜻인 '도요사토미미(豊聡耳)'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드라마나 만화, 영화 같은 매체에서 여러 명이 시끄럽게 떠들면 "내가 쇼토쿠 태자냐?" 하고 불평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독특한 일화가 하나 기록이 있다. 쇼토구가 우연히 지방을 순행하던 중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보자 가엾게 여겨 음식을 주었는데, 며칠 뒤 그 사람의 행방을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굶어 죽었으므로 쇼토쿠 태자는 잘 묻어주게 했다. 다시 며칠 뒤 태자는 그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무덤을 파보도록 했는데,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옷 한 벌만 남아 있었다. 이에 태자는 그가 진인(眞人)[7]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옷을 공양하게 했고,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성인은 성인을 알아본다 하여 태자를 더욱 숭상했다고 한다.

4. 저주

의외일 수도 있는데, 이 사람도 저주 논란이 있다.

6세기 야마토 조정이 제도의 한계에 부딪히자 7세기에 율령제를 도입함으로써 해결해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여기서 쇼토쿠 태자와 소가씨가 적극적으로 율령제를 도입했는데, 정치권력 분쟁으로 645년 을사의 변이 일어나 소가씨가 몰락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쇼토쿠 태자는 이상할 정도로 찬양받고 소가씨는 이상할 정도로 매도된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들이 주도한 율령제를 보면 중앙집권제가 목적이었는데, 기존 호족들과 기득권 귀족들의 눈에 과연 쇼토쿠 태자가 좋게 보였을리는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 소가노 이루카는 재앙을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움을 샀다. 사이메이 덴노가 죽기 직전 나타난 귀신이 소가노 이루카라고 여겼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기 직전 그의 사저에 내리친 낙뢰는 그가 내린 신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서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과 저주와 재앙을 내리는 귀신은 표리일체의 존재였다. 그가 신성화되었음은 역으로 그가 두려운 귀신으로 간주되었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쇼토쿠 태자의 저주 설은 이렇다. 호류사와 간교사라는 유서 깊은 절들에게서 쇼토쿠 태자는 동자의 모습으로 제사를 받는 경우가 많다. 동자는 귀신을 퇴치하는 힘이 있으면서 거친 귀신의 속성도 같이 지녔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서기에서 쇼토쿠 태자는 귀신을 연상시키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가노 우마코모노노베노 모리야가 불교 도입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일 적 578년 7월 소가노 우마코는 쇼토쿠 태자 일행과 함께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자택을 공격했다. 모리야 세력이 격렬히 저항해서 좀처럼 쳐부술 수 없었는데, 이때 쇼토쿠 태자가 승리를 기원하자 무너졌다고 한다. 이때 일본서기는 그의 머리 형태가 히사고바나라고 특기하였는데, 이는 동자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무리로 덤벼도 이길 수 없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동자, 즉 귀신의 저주로 무찔렀다는 것이다.

거기다 일본 황실에서 저주와 연관된 자들은 많다. 진무 덴노는 야마토로 동진하다 좀처럼 못 이기자 꿈에서 신들에게 들은 조언으로 이겼다고 하는데, 이 방법이 영락없는 저주다. 고대 일본의 원령숭배사상에서 강력한 원령은 신이기도 했다. 스진 덴노도 저주로 인해 나라가 초토화되어 신들의 신주를 옮겼다고 하며, 오진 덴노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진구 황후가 야마토로 가지 못하자 모종의 주술적인 행위로 야마토로 돌아갔다고 나온다.

후대의 이야기지만 후지와라 4형제에게 억울하게 주살당했다고 정사에조차 명시된 나가야 왕도 사후 저주를 내려 4형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간무 덴노 치세 나카오카쿄 시절 후지와라 씨족에게 주살당한 사와라 친왕 사후 재앙이 발생하자 사와라 친왕 저주 소문이 돌자 간무 덴노가 사와라 친왕을 스도 덴노로 추존하기도 했다. 스토쿠 덴노로 가면 원령신의 정점을 보여준다. 중세 시절 일본 왕의 깃발이 전장에 나타나자 적들이 두려워서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일본 황실이 신의 자손으로 여겨졌다는 시점에서 저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흔히들 생각하는 신격화도 있지만, 일본의 원령 사상을 보면 알다시피 저주를 내리는 귀신이 곧 신이었다. 역으로 일본 왕실이 저주, 재앙과 관련이 깊었기에 신=재앙을 내리는 무서운 귀신으로서 여겨져 저주받기 싫어서 아무도 안 건드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호류사 유메도노(夢殿 몽전)의 본존인 구세관음보살입상(救世観音菩薩立像)은 호류사에 안치되어 아무도 볼 수 없는 비불(秘佛)이었다. 심지어 호류사 주지조차도 구세관음상을 볼 수 없었다. 1884년(또는 1886년)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고 미국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와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본명은 오카쿠라 카쿠조(岡倉覚三))이 방문했을 때 이 비불은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쐬었다. 비불을 열어 바깥에 드러나게 하면 천변지이가 벌어진다며 승려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도망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두 사람은 비불을 모신 단의 문을 열었다. 내용물은 미라처럼 450미터 남짓한 긴 천으로 둘둘 말린 채였는데, 천을 벗기는 것조차도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이 첫을 다 벗기자 비로소 구세관음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났다.

우메하라는 쇼토쿠 태자의 등신불이라는 구세관음의 후두부에 주목했는데, 광배가 두드려 박혔기 때문이다. 이는 길이 15 cm나 되는 대형 못으로 주로 저주에 사용한다. 이는 쇼토쿠 태자에게 저주의 대못이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호류사는 역대 후지와라 씨족들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나가 그들을 저주하는 원령들을 모시고 자신들이 어려울 때 성대히 제사를 지내서 진정시키려는 의미가 더 컸다.

쇼토쿠 태자를 신격화했음은 역으로 그가 내릴지 모르는 재앙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쇼토쿠 태자의 행보를 보면 야마토의 기득권층과 충동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태자의 죽음에서 미심쩍은 것이 있었고 생전에 저주, 주술과도 관련이 깊던 그가 사후 모종의 일로 인해 동자의 모습으로 저주를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움을 사서 신격화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5. 역사적 과장과 허구설 논쟁

결론적으로, 쇼토쿠태자 행적이 역사적으로 과장되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받으나, 허구설은 정설 내지 주류설이 아닌 극단적인 일설이다.

쇼토쿠 태자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것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쇼토쿠 태자의 행적 상당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쇼토쿠 태자가 반포했다고 하는 '17조 헌법'은 일찍이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당시 일본 열도중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 및 여러 문장상의 특징 등으로 보아 덴무 덴노 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유명한 인물인 쓰다는 1940년 만세일계를 부정하고 스진 덴노 이전의 왕가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가(결사팔대 참조) 형을 살기도 하는 등, 일본 사학계 내에서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일본서기>의 철저한 비판을 이끌어낸 선구적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언급된다. 문제는 그 자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삼국사기 등에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 결과적으로 한국의 고대사 문헌에 회의적인 입장을 도출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측면에서는 근대 실증주의라는 관점이 가져올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찬반 양론이 치열하게 제시되었으나, 이후 모리 히로미치(森博達)는 언어학적인 입장에서 17조 헌법의 한문체는 7세기 초에는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역사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부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국내에서는 황소자리 출판사에서 심경호에 의해 번역된 『일본서기의 비밀』(2006)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 쇼토쿠 태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삼경의소(三經義疎)>(<법화경의소(法華經義疏)>, <승만경의소(勝鬘經義疏)>, <유마경의소(維摩經義疎)>의 3종류 문서)는 마찬가지로 이후 시대에 성립했으리라는 설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등 학자들이 제기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의 둔황 문서에서 발견된 <법화의기(法華義記)>, <승만경의소본의(勝鬘經義疏本義)>, <유마경의기(維摩經義記)>라는 문헌과 <삼경의소>의 내용이 70% 가까이 동일하다는 점이 드러나, 적어도 쇼토쿠 태자가 전체 내용을 직접 썼다는 서술은 분명히 틀렸음이 확실해졌다. 현재로서는 이를 8세기의 위작으로 보는 설과, 수대 중국과 교류하며 수입한 경전 주석서를 쇼토쿠 태자의 저작으로 조작했을 가능성 등이 제시되었다. 물론 후자의 설에서는 돈황 문서의 서술연대를 입증해야 하는 꽤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 밖에 호류지 약사여래상(法隆寺 藥師如来像), 호류지 석가삼존상(法隆寺 釋迦三尊像)의 명문에서 쇼토쿠 태자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을 기술했는데, 1930년대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로 이 명문에 등장하는 '치천하천황(治天下天皇)', '원흥(元興)', '법황(法皇)' 등 용어가 8세기 후반 이후에만 성립 가능하다는 설을 제시하여 반론 측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다. 또 마찬가지로 쇼토쿠 태자의 행적과 관련된 천수국 수장(天壽國繡帳)이라는 자료가 있는데, 이 천수국 수장에 나타난 일본어의 한자 음차 표기가 7세기까지 한자음보다는 8세기 한자음에 어울린다는 지적, 천수국 수장의 날짜 표기(일간지와 일자)가 지토 천황(재위 690~697) 시기까지 쓰인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이 아니라 지토 천황 이후 쓰인 의봉력(儀鳳曆)과 맞아떨어진다(정확히는 1일 차이)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사실 9세기 이후에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9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신불습합' 경향 때문에 불교와 관련지어 신격화하고 기원설화를 조작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열도에서 불교를 퍼뜨리는 데 큰 공적을 세웠다는 왕가의 인물 쇼토쿠 태자는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이전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던 행적이 후대 문헌에서 널리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의 연구에서는 8세기 전반까지 자료까지 신뢰성을 의심하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쇼토쿠 태자 당대의 유물이라는 7세기 자료까지도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이런 문제의식이 근대 역사학이 성립되기 전이라고 아예 없지는 않았다.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등 근대 초기의 인물부터 쇼토쿠 태자가 허구적인 인물이라거나 그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지적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근래에 이러한 설을 가장 종합적으로 다룬 인물로는 오야마 세이이치(大山誠一)가 있는데, 1999년 저작에서 그는 이상의 쇼토쿠 태자 관련 자료들이 8세기 중엽에 조작된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주장을 학문적으로 종합하였다.[8]

문제는 이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주장이 7세기 일본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식으로 과잉 해석된다는 것이다.

일단 당시 일본 열도에 유력한 국가가 있었음은 <수서> 왜국전으로도 명확히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관위 12계' 등 국가체제는 <수서> 왜국전에서도 확인하고 대응할 수 있다. 여러 논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 일본 열도에 일정한 수준을 갖춘 국가가 있었음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부정하지 않는다. 또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되면서, <일본서기>의 기술과 같이 당시에 아스카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화된 국가가 있었다는 점, 6세기 후반부터 불교 건축이 이 지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 쇼토쿠 태자의 근거지라고 한 이카루가 궁(斑鳩宮)이 실제로 7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점, 서쪽 해안 방면으로의 도로의 건축 등 중국과의 교류를 염두에 둔 대규모의 국가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점 등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과장된 서술과 부분적인 오류 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일본서기>에 기술된 이 즈음의 국가 형성 과정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에 번역된 서적이 많지는 않으나, 앞의 오야마 세이이치의 번역서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것이 있으니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나온 『일본사의 변혁기를 본다』(지식산업사)에 실린 이근우의 글(「고대 일본의 율령제律令制 도입과 국가권력의 시각화視覺化」 )라는 글과 2014년 번역된 이치 히로키, 『아스카의 목간』(주류성)에서 소개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오야마 세이이치조차도 쇼토쿠 태자의 원형이 되는 인물인 우마야도 왕은 존재했다고 분명히 인정한다. 다시 말해 당시 왕가의 일원으로서 이카루가 궁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력한 정치인물이 있었음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오야마는 이 두 논지를 별 문제 의식 없이 섞어 사용했지만,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문장과 '쇼토쿠 태자의 원형이 되는 인물은 있었지만 행적이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주장의 온도차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오야마의 주장은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그의 주장은 소가노 우마코-소가노 에미시 부자가 당시의 왜국 왕가였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 구조는 ①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왕)의 행적은 후대에 많이 조작되었다 ② <수서> 왜국전에 등장하는 왕은 남성이다(= 스이코 덴노가 아니다) ③ 당시 일본 열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은 소가씨 일가였으므로, 소가씨 일가가 군주였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이 논리 구조가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령 수의 사신을 만난 남성 왕이 일종의 섭정 개념으로 통치하던 우마야도 왕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스이코 덴노가 군주가 아니었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소가씨가 군주였다는 주장의 입증에는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함에도 현재로서는 당대 자료가 없다시피 하고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다. 이후 일본사에 보이는 여러 바지사장의 형태(천황-상황/법황/섭정/관백, 천황-쇼군, 쇼군-싯켄, 쇼군-오고쇼 등)를 보아도, 소가 씨가 왕가가 아닌 채로 국정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문제도 있다.

덧붙여 앞서 언급한 호류지 석가삼존상에서는 1989년 재조사하여 대좌(불상 받침대) 안에서 묵서명을 발견하였다. 이 묵서명은 석가삼존상 대좌를 보수하면서 묵서명이 씐 목재를 채워넣으면서 남은 듯한데, 여기서 "신사년(辛巳年) 8월 9일 만들었다(辛巳年八月九月作)."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신사년은 621년 또는 681년인데 오야마 세이이치는 681년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7~8세기 목간을 연구해 온 학자 이치 히로키(市大樹)에 따르면, 이 묵서명에 나오는 '고관(尻官)'은 '고(尻)'가 '시리(しり)' 또는 '시로(しろ)'로 읽혀 다이카 개신(646) 이전의 왕실 직할령을 말하는 '나시로(名代)' 또는 '고시로(子代)'의 관청(官)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묵서명이 쓰인 대좌의 '신사년' 묵서명은 다이카 개신 이전인 621년에 쓰인 것이 되며 석가삼존상 자체가 621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절충설이나 재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해석도 현재로서는 결코 상대의 주장을 찍어 누를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

이 때문에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고, 7세기 자료라는 것도 검토하여 수용할 필요가 있음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상식이 되었다. 그 반면 이른바 '쇼토쿠 태자 허구설'은 파격적이기는 하나 그대로 따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다. 물론 '이런 설도 있다'고 할 만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정설 내지 주류설은 되지 못하는 주장이라는 것. 일본어가 가능하다면 일본어 위키백과'쇼토쿠 태자' 항목의 허구설 단락도 참고. 일본어 위키백과의 신뢰성이 낮다고 하나 이 항목은 전공자의 손이 갔는지 나름대로 충실하게, 최소한 한국에서 찌라시처럼 언급되는 단편적 자료들보다는 훨씬 성실하게 정리하였다.

어쨌든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설 자체는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그 영향 때문인지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2017년 2월에 공표한 초, 중학교의 차기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기존의 '쇼토쿠 태자'라는 표기를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왕)' 또는 '우마야도 왕(쇼토쿠 태자)'으로 교체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쇼토쿠 태자라는 인물에 후대의 인식과 과장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고대사학계의 동향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이지만, 새역모와 같은 단체는 이에 대해 '일본 율령 국가 역사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출처). 물론 새역모는 역사연구단체가 아닌 극우정치단체이므로 주의해 읽을 것.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으나 '고조선 건국 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학계의 상식에 따라 해당 서술을 제외할 경우에,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보일 반발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6.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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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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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본 엔 지폐에 그의 초상이 있었다.

쇼토쿠 태자의 지구의라는 물건이 그가 세운 아카루가사에 전해진다. 실제로는 쇼토쿠 태자가 살던 시절이 아닌 에도 막부 시절의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019년에는 일본인 1만 2천 명(조사 대상은 10대~60대 남성, 여성)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다.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 #


[1] 현재는 쇼토쿠 태자 대신 당대에 칭해진 이름인 우마야도 왕(廐戶王)으로 쓰는 경향이 늘어나는 추세이다.[2]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목조건축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3] '존귀하다'는 뜻의 '다리시'와 남성에 대한 존칭인 '히코'가 결합된 말을 소리로 옮긴 듯하다. 한편 다른 기록에는 왜왕의 성이 '아매(阿毎)', 이름이 본 기록과 같은 '다리사비고'라고 나와 있는데, 천황은 성이 따로 없으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의 '아메타라시히코(天足彦, 天帶彦)'라는 호칭을 중국식으로 이해하여 성과 이름으로 나눈 듯하다.[4]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수(隋)에서 그를 소인고(蘇因高)라고 불렀다고 하였다(『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89). 소(蘇)는 소야(小野)라는 성(姓) 중에서 한 글자만 나타낸 것이고 인고(因高)는 이름인 이모코(妹子)를 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5] 일본서기에는 8월에 왔다고 적었다.[6] 일본서기에 나오는 누카타베노무라치 히라후(額田部連比羅夫)의 ‘카타베’를 음사한 듯하다.[7] 도교에서 일정한 수준에 오른 사람[8] 이러한 내용은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적이 있다. 2012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오야마 세이이치,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에 관련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