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공화국 Հայաստանի Հանրապետութիւն Republic of Armenia | ||
국기 | 국장 | |
위치 | ||
1918년 5월 28일 ~ 1920년 12월 2일 | ||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오스만 제국 | '''소비에트 연방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자캅카스 SFSR ]]''' | |
러시아 제국 | 튀르키예 공화국 | |
<colbgcolor=#0033a0><colcolor=#ffffff> 수도 | 예레반 | |
면적 | 최대 160,000 ㎢ | |
정치 체제 | 의회제, 공화제 | |
언어 | 아르메니아어 | |
인구 | 약 1,300,000명 | |
민족 | 아르메니아인 | |
통화 | 아르메니아 루블 |
[clearfix]
1. 개요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존재한 현대 최초의 아르메니아인 독립국가이다.2. 역사
2.1. 배경
아나톨리아 고원은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셀주크 제국등 거대한 제국이 부딪치는 험지로, 일찍이 3~4세기 경 나라를 잃은 아르메니아인 귀족들은 페르시아와 로마 양쪽에 흩어져 살며 힘의 균형이 변할 때마다 중간지대에서 나라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들에게 러시아 제국의 확장 정책은 페르시아계 칸국의 자리에 아르메니아인의 독립국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의 국가 운영 정책은 "Orthodoxy, Autocracy, and Nationality"#로, 이를 제국 운영 실태와 종합하면 이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거부하는 루스 정교도의 내셔널리즘에 가까웠다. 어쨌든 이 점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이슬람 제국을 벗어나고 싶은 소수민족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러시아는 캅카스를 정벌하기로 되어 있었다.러시아의 캅카스로의 확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표트르 1세의 1682~1725년, 예카테리나 2세의 1762~1796년, 파벨 1세의 1796~1801년, 알렉산드르 1세의 1801~1825년에 걸쳐 러시아의 캅카스 영토는 차츰 넓어져 갔고 최종적으로 아할치헤(오늘날의 조지아), 카르스, 에르제룸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최후의 경합을 벌인다. 1829년 아드리아노폴 조약으로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이 때 동유럽에서 격변이 일어난 것에 비하면 그리 큰 일은 아니나, 캅카스에서도 약간의 변동이 일어난다. 오스만 제국은 예레반 칸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영유하던 아할치헤와 카르스에 대한 러시아의 접근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오스만 치하에 남은 에르제룸과 러시아에 복속된 아할치헤, 카르스는 상호 추방을 통해 민족 교환을 한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에 살던 아르메니아인 9만 명이 아르메니아주와 메스헤티, 자바헤티, 트리알레티 지역으로 이주했다.[1]
1828년 2월 21일 체결된 투르크멘차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페르시아와의 국경 협정도 매듭을 짓는다. 아라스강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여 오늘날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국경이 이 때 정해진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끝으로 획득한 지역의 권역을 재조정해 주(Oblast)를 설치하고 통치한다. 러시아는 예레반 칸국과 나히체반 칸국을 병합해 아르메니아주를 설치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한다. 이 당시 아르메니아주의 영토는 예레반과 아라스 계곡의 비옥한 저지대를 영유하면서 캅카스 동서를 잇는 괜찮은 관문 지역으로 그 영향력이 조금 커진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을 흡수하고도 그들의 민족명을 딴 아르메니아주에서도 간신히 숫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2] 아르메니아의 입장에서는 5세기 이전 훼손된 기독교인의 땅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기뻐했겠으나, 최소 4세기부터 정주하던 페르시아계 튀르크인들과 칸국의 국경 따위에 관심이 없던 북페르시아 유목민들에게는 무슬림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엘리트들은 러시아에 충성해 척식사업에 앞장서고 특혜를 받았으나, 내치가 안정된 1840년 니콜라이 1세는 캅카스의 유력 종교인과 정치인들을 모두 추방하기로 한다. 또한 1880년대까지의 행정구역 재편을 통해 아르메니아주가 병합을 원하던 서부권역은 카르스로, 북부권역은 티플리스로, 동부권역은 엘리자베트폴로 병합하여 단순화하고 주 체제에서 총독부 체제로 통치 방침을 바꾼다. 차르를 외교로 구워삶아 대아르메니아주의를 구현하려던 엘리트들의 꿈은 무너진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속령들의 민족주의를 싫어하였고, 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협력할 때부터 우려하였던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되었든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주(Armyanskaya oblast)에서 예레반주(Erevan gubernia)로 민족 명칭까지 뜯기고 러시아화를 맞이한다.
191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예레반주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66만 9천명으로 지역 인구의 60%를 차지했으며 카르스, 트빌리시, 엘리자베트폴, 바쿠에는 각각 11만 9천명(30%), 41만 5천명(28%), 41만 9천명(33%), 12만명(9%)의 아르메니아인이 더 있었다.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중 37%(66만 9천명)만이 예레반주에 거주했으며, 때문에 1840년대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권역 설정에 불만을 갖고 여러 차례 제국에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애초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주 편성을 배제하고 모두 러시아화를 원했던 제국에게 이러한 이의는 심기를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인구 비율에서도 알 수 있듯 1917년 당시 750만명이 살던 캅카스 전 지역에 30% 이하의 비율로 엷게 흩뿌려져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곳을 모두 아르메니아의 속령으로 인정한다면 나머지 70% 주민의 반란을 감당할 수 있는지 또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계의 불만의 일례로 이들은 아직 제정 치하인 1880년 티플리스에서 아르메니아 혁명연맹이라는 사회주의 결사를 결성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불문하고 양쪽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을 사주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들에게 아르메니아 교회의 자산을 차르 아래 둘 것과 복종을 명령하는 한편 아르메니아 교육 기관들을 폐지하고 러시아식 교육 보급에 박차를 가한다. 아르메니아 혁명연맹은 진압에 반발하며 이후 2년간 백 단위의 러시아 관료들에 대한 암살 등 테러를 집행하여 제정 말기 러시아의 혼란에 기여한다.
2.2. 약사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독일 제국에게 패배하고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신생 러시아는 캅카스 영유권을 포기하기로 하였고, 1918년 4월 22일 남캅카스 위원회가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동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는 이로부터 독립해 제1공화국을 선포한다. 이 당시 영유한 지역은 나흐츠반과 슈니크주의 소유주가 바뀐 정도에 북부지방을 확장하지 못한 것으로, 오늘날과 대동소이하다.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독립 직후부터 주변 국가들과 갈등을 빚는다. 자캅카스 설립 이전부터 볼셰비키를 배후로 1918년 3월 바쿠 학살을 주동한 전적이 있는 아르메니아는 독립과 동시에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과 엘리자베트폴(또는 카라바흐, 아르차흐) 지역에서의 분쟁을 시작했고, 동년 12월 7일 아르메니아는 함께 독립했던 조지아 민주 공화국을 상대로 남부 영토 병탄을 위한 국경 전쟁을 벌였다.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은 볼셰비키가 다시 남캅카스를 점령할 때까지 미결로 남았고, 조지아 침공은 열강의 중재로 절반의 성공에 그쳤으며 반영구적인 비우호관계의 근원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1918년 5월 28일 독립을 선포한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이 실질적으로 병력과 행정력을 투사할 수 있는 영역은 예레반 일대에 머물렀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철군에 발맞춰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과 영토 협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알렉산드로폴~이흐디르~나흐츠반을 잇는 선을 긋고 안쪽의 전지역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군의 저항과 1차대전의 망조가 겹치며 오스만군은 예레반 입성까지 7km를 앞두고 1918년 6월 4일 바툼 협정을 체결해 영토를 확정한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으로부터 분리될 때 조지아와 한 가지 큰 견해 차이를 보였는데, 그것은 오스만 제국이 1918년 4월 11일부터 5월 26일에 걸친 군사 작전으로 바툼과 카르스를 점거하며 러시아군이 철수한 공백지역을 거의 무혈로 접수하고 있는 가운데 오스만 제국과 협상할 의사가 있는지의 여부였다. 조지아는 우선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이해관계가 이 지역에서 상충함을 들어 우선 오스만과 협상하고 독일의 도움을 받도록 아르메니아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러한 거래로는 카르스 주와 아나톨리아 동북부를 영구히 상실한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는 최종적으로 조지아와 연합을 유지해 독일의 도움을 받는 안을 거절한다. 비록 바툼 협정이 금방 휴지통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이 협정으로 아르메니아는 직할하고 있던 독립군 병력과 국토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기존에 행정력을 투사하고 있떤 영역의 1/3 가량을 뜯기고 수도가 최전선이 되고 만다. 한편 조지아는 독일군과 그 대표단이 주둔하고 있었던 고로 자연국경선인 아할치헤 권역 일부를 떼어 주는 것으로 평화 협상을 마칠 수 있었다.
바툼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은 조지아의 아할치헤, 아르메니아의 알렉산드로폴을 영유하고 그 바깥쪽으로 국경을 긋게 된다. 이 국경은 나흐츠반으로 통하는 철길까지 이어진다. 아르메니아 입장에서는 수도 서부와 남부의 기존 예레반 주 영역을 모두 상실한 셈이 되었으나 단기간의 항전 외에 마땅한 탈출구가 없었기에 이 조약에 서명한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트랜스캅카스 괴뢰국을 구상하던 독일 제국의 구상을 직접 침범한 셈이 되어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급기야 동맹국 내부의 유혈 충돌로 이어지고 만다.
1918년 봄 시점에서 독일은 이미 서부전선 이니셔티브를 잃은 상황으로 바쿠 유전의 확보가 더욱 급해져 있었다. 같은 시기 러시아는 적백내전으로 국경 권역에 들끓는 백군을 해소해야만 했다. 독일 제국과 볼셰비키 러시아는 조지아에서의 독일의 지위와 바쿠 유전의 산출량 할당을 대가로 백군 토벌에 협력하는 내용을 골자로 거래를 추진한다. 아르메니아는 이 사이에 끼어 오스만군 퇴출 및 독립 승인을 거래해 보려 하였으나 양국의 관심사는 트랜스캅카스 철도망과 바쿠의 유전이었기에 묵살된다. 더불어 소비에트 러시아는 공산주의자도, 볼셰비키도 아닌 아르메니아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1918년 8월 26일, 오스만군은 14,000여명의 병력으로 바쿠 포위에 성공한다. 바쿠에는 영국군과 러시아 백군, 여기에 붙은 아르메니아 민병대까지 2만 이하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1918년 8월 27일, 독일 제국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오스만의 바쿠 진공을 목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보충 조약을 체결한다.
1. 러시아는 독일의 조지아 승인을 반대하지 않는다.
2. 독일은 조지아 국경 밖에서 제삼국(역주: 오스만 제국)의 군사 작전을 돕지 않는다.
3. 독일은 제삼국의 바쿠 주 진입을 적극 저지한다.
4. 러시아는 바쿠 유전 산출량의 1/4 또는 추후 협의되는 월간 최소량을 제공한다.
이 조약으로 조지아의 존재가 독-러 양국에 승인된다.2. 독일은 조지아 국경 밖에서 제삼국(역주: 오스만 제국)의 군사 작전을 돕지 않는다.
3. 독일은 제삼국의 바쿠 주 진입을 적극 저지한다.
4. 러시아는 바쿠 유전 산출량의 1/4 또는 추후 협의되는 월간 최소량을 제공한다.
1918년 9월 13일, 바쿠 전투가 종료된다. 전투는 카자크 기병대, 아르메니아 민병대, 러시아 백군이 지리멸렬하게 와해되는 와중에 영국군이 바쿠 유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오스만 제국군은 바쿠를 전리품으로 얻었으나 석유를 채굴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은 협상국에 강화를 요청한다. 하지만 협상국은 독일을 항복시키기로 한다.
1918년 9월 23일, 팔레스타인 전선에서 병력이 궤멸당하고 망국이 임박한 오스만의 탈리트 파샤는 캅카스 문제에서 빠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 외무상 폰 힌체와 의정서를 하나 체결한다.
1. 오스만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승인할 준비가 되었다.
2. 독일은 조지아를 승인할 준비가 되었지만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3.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질 러시아-오스만 전쟁에 대해 독일은 중재를 노력한다.
4. 오스만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서 철군하고, 독일은 오스만-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승인 문제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주장을 포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5. 오스만은 북캅카스와 투르키스탄에 별도 국가를 건설하고 동맹을 맺으나, 독일이 협조해 줄 수 없음을 이해한다.
6. 독일은 캅카스 국가들이 경제 자원을 모든 동맹국에게 공급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7. 독일은 오스만의 크림 반도에 대한 관심을 인지한다. 오스만은 아제르바이잔이 독일과 우호적이기를 기대한다.
8. 오스만군은 영국군을 상대로 한 작전이 끝나는 대로 페르시아에서 철수한다.
오스만은 일단 자국이 병력 확보를 위해 철수해야 하는 캅카스 삼국을 독일이 병합하지 않길 희망하며 독립보장을 걸었으나 독일은 듣지 않았고, 어차피 떠날 독일 제국이 볼셰비키로부터 캅카스를 방어해 주기를 기대하였으나 이 의정서 체결 일주일 전에 독일은 이미 협상국에 조건부 백기를 들었다. 탈리트 파샤는 일주일 뒤 실각하며, 1개월 뒤인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은 협상국에 항복하고 제국 해체에 들어간다.2. 독일은 조지아를 승인할 준비가 되었지만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3.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질 러시아-오스만 전쟁에 대해 독일은 중재를 노력한다.
4. 오스만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서 철군하고, 독일은 오스만-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승인 문제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주장을 포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5. 오스만은 북캅카스와 투르키스탄에 별도 국가를 건설하고 동맹을 맺으나, 독일이 협조해 줄 수 없음을 이해한다.
6. 독일은 캅카스 국가들이 경제 자원을 모든 동맹국에게 공급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7. 독일은 오스만의 크림 반도에 대한 관심을 인지한다. 오스만은 아제르바이잔이 독일과 우호적이기를 기대한다.
8. 오스만군은 영국군을 상대로 한 작전이 끝나는 대로 페르시아에서 철수한다.
아르메니아는 이 의정서를 자국 외교의 승리라 자평하는데, 오스만군이 카르스에서 물러가면 자국이 점령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독일이 아르메니아를 승인하지 않는 대신 러시아에 승인을 강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는 누구의 관심사에도 없었으며, 그런 일은 실현되지 않았고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만, 독일 양쪽이 모두 항복하면서 러시아의 비웃음 속에 종료되었다.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체결하며 항복한다. 이 협정에는 아래와 같은 조항들이 있었다.
11. 오스만군은 페르시아 북서부에서 철군해 전쟁 이전 국경으로 돌아간다. 캅카스의 오스만군은 이미 철수하였으나, 잔여 인원은 협상국이 현지 사정 파악을 마친 뒤 철수를 원할 경우 마저 철수한다.
24. 6개 아르메니아인 빌라예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협상국이 점령할 권한이 있다.
이 조항으로 아르메니아가 가지고 싶어하는 카르스, 바툼, 아드라한 주 등에서 오스만군이 1919년 철군하였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거의 절반은 유사시 협상국이 달려가 점령해 버려도 오스만측이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24. 6개 아르메니아인 빌라예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협상국이 점령할 권한이 있다.
무드로스 협정 직후인 1918년 12월 1일 카르스 주에서는 남서 캅카스 임시 정부라는 이름의 튀르키예인 임시정부가 선포된다. 카르스 주는 19세기까지 튀르크인 우세 지역이었으나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벌어진 이민족 대학살[3]의 여파로 피난민이 몰리며 1916년에는 아르메니아인이 32%로 1등을 차지하는 주가 되었다. 이 튀르키예 임시정부는 카르스, 바툼, 아할치헤를 자국 영토로 선포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강역을 관철하기 위해 조지아와도 정면 충돌을 감행한 것이다.
영토 확장을 노리던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인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영국군의 비호 아래 1919년 1월 13일 60명의 자국 관료를 바툼에 파견해 아르메니아 주지사직을 설치한다. 신생 임시 정부, 조지아, 아르메니아 세 국가가 무력 충돌 양상을 보이자 영국군이 나서서 튀르키예 임시정부를 진압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 및 추방했으며, 영국군은 바툼과 카르스를 각각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인계한다. 이 때가 1919년 4월 19일이었다.
1920년 8월 10일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킨 세브르 조약에서 아르메니아는 우드로 윌슨 개인[4]의 지지로 103,599 km²의 아나톨리아 동북부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160,000 km²에 달하는 영토를 관할하게 된 신생 아르메니아의 새 영토는 서쪽으로 흑해의 트라브존, 남쪽으로 반 호수에 이르렀다. 이는 "윌슨 아르메니아"[5]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이상향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새로 획득한 영토에는 정작 아르메니아인이 거의 없었고[6] 이어지는 무슬림 반란과 튀르키예 독립 전쟁으로 상실하게 된다.
세브르 조약으로부터 한 달 뒤인 1920년 9월 24일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 서부 영토를 침공하며 독립전쟁 동부전선을 개전했고, 2개월간의 전쟁 동안 아르메니아는 새로 얻은 영토를 계속 까먹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진하던 붉은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반대편에서 침공하고 공산당 봉기를 사주하며 아르메니아는 소멸의 위기에 놓인다. 1920년 12월 2일 아르메니아 정부는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권력을 이양하는 한편 12월 3일 튀르키예와 알렉산드로폴[7]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끝낸다. 소련과 아르메니아 공산당은 붉은 군대의 예레반 입성 당일에 체결된 제1공화국의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나중에 자신들의 명의로 재협상한다.
제1공화국의 멸망 다음날 체결되어 기술적으로 무효였던 알렉산드로폴 조약은 서부 전체와 아르차흐 등 기타 영토를 튀르키예 및 아제르바이잔에 할양하도록 하는 조약이었는데, 우방국이 필요했던 신생 소련은 이 조약을 즉시 부인하는 한편 1921년 3월 16일 모스크바 협정을, 10월 13일에는 카르스 협정을 통해 튀르키예에게 알렉산드로폴 조약과 비슷한 수준의 국경 획정 조건을 직접 제시하였다. 이 때 합의된 국경은 소련 붕괴 후 재독립한 남캅카스 국가들의 국경 기반이 되는 한편 소련의 일방적인 조정이라는 한계로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멸망하여 공산당이 선포한 대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체제가 변경되며,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이후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일부가 되었고 이후 1922년 신생 소련의 일부가 된다.
[1] 다만 아르메니아인의 이주로 아르메니아인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데, 적어도 자바헤티 지역은 러시아 제국이 정복하기 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인 곳이었다. 1829년 조사에 따르면 자바헤티의 가구 중 아르메니아인은 1,176개로 67.7%에 달했다. 무슬림(639개, 25.2%), 조지아인(179개, 7.1%)은 그 다음이었다. 아르메니아인의 이주는 적어도 자바헤티 지역의 경우 기존 아르메니아인의 숫적 우위를 더 강화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2] 이란 출신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조지 부르누탼(George Bournoutian) 교수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의 이주가 어느 정도 완료된 1832년 아르메니아주 인구 16만 4,450명 중 아르메니아인은 82,377명으로 과반을 정말 간신히(50.1%) 유지하는 형편이었다.[3] 흔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고 하나 쿠르드, 그리스, 유대인들도 죽었고 함께 피난했다.[4] 의회 승인이 안 났다. 1920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 결과 기존 윌슨 대통령의 민주당이 패배하고 공화당의 워런 하딩이 승리하면서 이 개인 지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간다.[5]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국무부가 제정한 강역이라는 뜻에서. 아르메니아어로는 Վիլսոնյան Հայաստան.[6]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전에도 그들은 고원 전지역에 너무 옅고 넓게 흩어져 살아서 반 호수 인근의 몇몇 마을에서나 과반을 형성했을 뿐 전체적으로 튀르크인과 쿠르드인을 합쳐 70% 이상이 살았다. 이 아르메니아인들 중 10만 이상이 피난해 상대적 다수를 이루었다는 카르스 주에서도 1916년 기준 118,217명으로 32%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최대 소수민족일 수는 있어도 이 땅을 독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7] 오늘날의 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