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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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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오스트리아 대공 포르투갈 부왕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알브레히트 7세 폰 외스트라이히 Albrecht VII. von Österreich | |
| | |
| 성명 | 알브레히트 7세 폰 외스트라이히 Albrecht VII. von Österreich |
| 출생 | 1559년 11월 13일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비너노이슈타트 | |
| 사망 | 1621년 7월 13일 |
|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 | |
| 재위기간 | 오스트리아 대공 |
| 1619년 3월 20일 ~ 10월 9일 | |
| 포르투갈 부왕 | |
| 1583년 2월 11일 ~ 1593년 7월 5일 | |
|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 |
| 1598년 5월 6일 ~ 1621년 7월 13일 | |
| 아버지 |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
| 형제 | 안나, 루돌프 2세, 에른스트, 엘리자베트,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3세, 벤첼, 마르가레타 |
| 배우자 |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
1. 개요
오스트리아 대공, 포르투갈 부왕,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1609년 12년 휴전 성립 후에는 스페인 제국과 네덜란드 공화국간 평화가 영구적으로 맺어지게 하고자 노력했다.2. 생애
2.1. 초년기
1559년 11월 13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비너노이슈타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카를 5세의 딸이자 펠리페 2세의 누이인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성직자 경력을 쌓았고, 1577년 3월 3일 18세의 나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예루살렘 성십자가 대성당을 그의 명예 교구로 삼았다.스페인 제국의 군주이자 외삼촌인 펠리페 2세는 그를 가능한 한 톨레도 대주교로 삼으려 했지만, 당시 대주교였던 가스파르 데 키로가 이 산도발은 예상과는 달리 1594년까지 살았다. 그 동안 알브레히트는 사제나 주교로 서품받지 못하고 낮은 성직만 살다가 부왕 및 총독을 맡게 되었고, 1598년 톨레도 교구에서 사임하고 추기경 직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젊은 시절 성직자로 키워진 경험은 그가 가톨릭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한 배경이 되었다.
1580년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된 후, 알브레히트는 1583년 2월 11일 포르투갈 부왕이자 포르투갈의 교황 특사이자 대심문관이 되었다. 그는 포르투갈 부왕으로서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 쓸 함대 조직에 참여했고, 1589년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에 맞서 리스본을 사수하는 데 일조했다. 1593년, 펠리페 2세는 그를 마드리드로 불러들여서 궁정에서 조언자로 삼았다. 2년 후,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의 게일인 영주 타이론 백작 휴 오닐, 타르코넬 영주 휴 로 오도넬은 스페인의 지원을 얻기고자 알브레히트를 아일랜드 국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
2.2.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2.2.1. 승승장구하는 초기 치세
1595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에른스트가 일찍 사망한 뒤, 알브레히트는 형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총독이 되기 위해 브뤼셀로 파견되었다. 그는 1596년 2월 11일에 브뤼셀에 입성했다. 이후 브뤼셀을 떠나 발랑시엔으로 가서 플란데런 주둔 스페인군과 합류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를 물리치기 위해 3월 말에 프랑스로 진군했지만, 라 페르를 구원하는 대신 칼레로 방향을 틀어 4월 8일에 도착했다. 당시 앙리 4세는 값비싼 포위 공격 끝에 가톨릭 동맹과 스페인군에게서 라 페르를 공략하기 직전으로 몰아가던 참이어서 칼레를 구원할 병력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측이 칼레를 구원하길 원했다.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총신인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에게 병사 6,000~8,000명을 맡겨 칼레를 구원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칼레를 잉글랜드에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앙리 4세는 이 요구를 따르려 하지 않아서 구원군이 제때 준비되지 못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는 칼레가 함락되면 스페인 해군이 영국해협을 장악하여 네덜란드의 존립을 위협하려 들 것이라고 여기고, 칼레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과 함대를 준비하고자 제일란트로 서둘러 갔지만, 네덜란드군 첫 번째 함대가 출항을 준비하던 시기에 칼레가 함락되었다.
칼레 시는 4월 8일 포위된 뒤 열흘간의 공방전 끝에 스페인군에게 함락되었고, 이후엔 성채만이 프랑스군의 손에 남았다. 프랑스 장성인 프롱삭 공작 프랑수아 도를레앙롱그빌은 바다를 통해 포위를 깨고 도시에 보급품과 신규 병력을 지원하려 했지만, 스페인 포병의 포격으로 저지되었다. 이후 앙리 4세는 칼레를 지키기 위해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칼레로 진군하기 시작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4월 24일, 루이스 데 벨라스코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성채를 습격했다. 수비대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잘 훈련되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스페인과 왈롱인 공격 부대에 대적할 수 없었다. 성채는 결국 함락되었고, 칼레 총독 시외르 드 위데상은 생포된 뒤 처형당했다. 이리하여 칼레 전체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성채 안에 있던 많은 양의 금화와 은화, 말, 그리고 화약과 보급품이 스페인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알브레히트 7세는 칼레를 접수하여 됭케르크와 함께 영국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훌륭한 항구를 확보했다. 그는 칼레에 강력한 수비대를 남겨둔 뒤 군대를 이끌고 아르드르로 진군해 5월 23일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플란데런으로 이동한 후, 브뤼허 시민들로부터 1,200,000 길더의 특별세를 거둬들여서 플란데런 내 네덜란드 공화국이 보유한 유일한 항구도시인 오스텐트를 포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우리츠가 새로운 병력과 보급품을 보내 오스텐트 수비대를 대폭 강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브레히트 7세는 오스텐트 공략을 포기했다.
그 후 알브레히트 7세는 안트베르펜에서 셀트강을 지나 브라반트로 이동했지만, 베르헌옵좀과 브레다 중 어느 쪽을 공략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적의 방어 상태가 미약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마우리츠는 5천 병사를 이끌고 브라반트에 주둔했고, 그동안 마우리츠와 협력했던 잉글랜드 장성 프랜시스 베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 숙련병 4,000명을 이끌고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에 참여하러 떠났다. 네덜란드 의회는 약 2,000명의 군인을 새로 모집할 수 있는 군자금을 모았지만, 이 정도로는 12,000~15,000명에 달하는 스페인군을 저지하기 힘들었다. 알브레히트 7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공세를 단행하기로 했다.
알브레히트 7세는 스페인군 장성들 사이에서 강력한 적수로 명성이 자자한 마우리츠와 정면 대결하는 걸 피하면서 진군했고, 마우리츠도 적의 군세가 워낙 많았기에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알브레히트 7세의 목표는 1591년 마우리츠에게 함락당했던 헐스트였다. 헐스트에는 수비대 3,700명이 주둔했고, 7개월간 버틸 수 있는 보급품이 있었다. 또한 여러 개의 토루가 주위에 건설되었으며, 주변 지역을 물에 잠길 수 있는 수문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또한 해자는 더욱 깊게 파였지만, 벽은 부분적으로만 수리되었다. 마우리츠는 헐스트를 지키러 가면서도, 그곳 수비대가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으리라 믿고, 스페인군을 여유 있게 상대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스페인군은 7월 중순에 헐스트를 포위했고, 수비대가 여러 차례 성공적인 돌격을 감행해 아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와중에도 주요 제방과 모에르 요새를 접수해 성벽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군의 저항이 워낙 거세서 단 6주 만에 사상자가 600명을 넘어섰고, 수천 명이 병을 앓거나 병사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 망명한 스페인군 사령관 시외르 드 로스네는 수비대의 돌격을 막던 중 전사했다. 스페인 포병들은 이에 대응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3,500발에 달하는 포탄을 퍼부은 끝에 큰 돌파구를 만들 수 있었다.
수비대는 적군이 돌파구로 쳐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방어진을 결성했지만, 알브레히트 7세는 돌격하는 대신 수비대 사령관인 솔름스 백작 조르지 에버하르트에게 사절을 보내 즉각 항복하거나 바깥으로 나와서 야전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수비대가 거부하자, 스페인군은 성벽 아래에 지뢰를 파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수비대와 주민들은 대부분 질병으로 인한 손실이 거의 700명에 달한 데다 자기들을 파괴하려는 적군의 임박한 공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황에 빠졌다.
한편, 마우리츠는 7,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집해 헐스트를 구원하러 진군했다. 그러나 솔름스 백작은 시민들의 압력을 받자 항복을 결심했다. 1596년 8월 18일, 알브레히트 7세는 수비대 3,000명이 무기, 깃발, 짐을 챙기고 자유롭게 떠나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낸 뒤 도시에 입성했다. 알브레히트는 2차 헐스트 공방전에서 장교 60명, 병사 5,000명을 전투 또는 질병으로 상실하는 큰 피해를 보았지만,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는 그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마우리츠에게 내내 패전을 거듭했던 아군의 명예를 회복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제 스페인군이 좀 더 진군해 자신들을 짓밟으려 들 것을 우려했지만, 알브레히트 7세는 심각한 손실을 보아서 진군을 계속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고 플란데런으로 철수했다. 그가 펠리페 2세에게 철수하겠다고 알린 서신은 도중에 첩자가 가로채서 공화국에 전달했고, 네덜란드인들은 안도했다.
2.2.2. 잇따른 실패
1596년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과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 실패는 스페인 제국의 3번째 파산을 초래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군 내 용병들이 대거 탈영하거나 폭동을 일으켰다. 게다가 많은 스페인군이 플란데런에서 프랑스로 파견되어 위그노 전쟁에서 앙리 4세에 맞서는 프랑스 가톨릭 연맹을 지원했기 때문에,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의 병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1596/1597년 겨울, 알브레히트는 부르고뉴의 바락스 백작 필리베르트 드 라이에게 보병 4,000명, 기병 500명을 맡겨서 브레다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투른호우트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의 목표는 톨렌 시를 겨울에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첩자들을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에 그대로 전해졌고, 마우리츠는 헤이르트루이덴부르크에 군대를 집결했다. 보병 6,800명, 기병 800명이 집결했는데, 이 중 2/3는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이었다. 또한 지난해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에 참여하느라 네덜란드를 떠났던 프랜시스 베레가 돌아와서 잉글랜드군을 지휘했다.1597년 1월 23일 아침,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은 4개 사단으로 나뉘어 기병대를 측면에 배치한 채 헤이르트루이덴부르크에서 출발했다. 열악한 도로 사정 속에서도 38km를 하루 동안 강행군한 끝에, 그날 저녁 투른호우트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라벨스 마을에 도착해 진을 쳤다. 그날 자정, 연합군은 진영을 치운 뒤 투른호우트 외곽으로 접근했다. 한편, 바락스 백작은 적의 군세가 1만 명이 넘는다는 과장된 보고를 받았고, 투른호우트에는 조그마한 성과 울타리, 도랑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적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여기고 남쪽의 요새화된 도시인 헤렌탈스로 철수하기로 했다. 마우리츠는 적이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기병대를 급파했다.
이후 1597년 1월 24일에 벌어진 투른호우트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에게 완패해 보병 4,000명과 기병 500명 중 거의 절반인 2,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또한 깃발 38개가 탈취되었고, 500~700명이 생포되었다. 그 후 마우리츠는 1597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해 라인베르크, 뫼르스, 흐룬로, 브레데부르트, 엔스헤더, 오트마르숨, 올덴잘, 링겐을 잇따라 접수해 스페인군을 트벤터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한편, 둘렌스 시의 스페인 총독 에르난도 테요 데 포르토카레로는 알브레히트에게 피카르디의 주도인 아미앵을 기습 공격해 접수하자고 제안했다. 알브레히트는 투른호우트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아미앵 함락으로 받아내기로 했다. 포르토카레로는 보병 7,000명과 기병 700명을 이끌고 출진한 뒤, 병과 기병 500명을 아미앵시 근처에 숨기고, 농민 복장을 한 16명을 도시 내부로 잠입해, 1597년 3월 11일 아미앵을 급습해 함락한 후 사흘간 약탈을 자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앙리 4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최고 고문인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쑨의 격려에 따라 아미앵을 즉시 탈환하기로 하고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아미앵으로 진격했다. 여기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토머스 바스커빌 지휘하에 잉글랜드군 2,000명을 파견했고, 루앙에서 1,500명의 잉글랜드군을 별도로 조직했다. 잉글랜드 병사 대부분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고, 이해 초 투른호우트 전투 승리에 공헌한 전사들이었다. 포르토카레로는 적군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포위 공격을 견뎌낼 충분한 식량이 없었다. 그래도 농성하기로 한 그는 교외의 집들을 파괴하고 성 요한 수도원 건물들을 파괴했다. 또한 알브레히트 7세는 4월 초순에 이탈리아 군사 기술공 파치오토와 스페인 군사 기술공 레킹가를 대동한 채 경기병 600명과 화승총병 4개 중대를 아미앵으로 파견했다.
1597년 9월 초, 아미앵의 상황이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알브레히트는 룩셈부르크 총독 페터 에른스트 1세 폰 만스펠트포르데로르트와 함께 25,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해 아미앵으로 진군했다. 9월 18일, 만스펠트의 군대가 아미앵에서 6마일 떨어진 솜 강둑에 나타났다. 9월 20일 아미앵에 먼저 도착한 만스펠트가 참호를 파고 있던 프랑스 진영과 잉글랜드 진영에 즉각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막심한 손실만 보고 패퇴했다. 그 과정에서 아서 치체스터가 어깨에 상처를 입었지만 용감하게 싸워 승리에 일조했고, 앙리 4세는 그의 용맹에 감동해 기사 작위를 내렸다.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한 알브레히트 7세는 만스펠트가 참호를 공격해 봤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걸 알게 되자 수비대에게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포병들에게 대포를 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베탕쿠르 수도원을 지나면서 롱프르 마을 아래 솜강에 다리를 놓으려 했지만, 악천후와 수위 상승 때문에 어려워지자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그 후 남쪽 강둑에 도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포병의 공격을 받아 밀려났고, 반대쪽 강둑으로 철수해야 했다.
다음날 또 다른 공격이 계획되었지만, 알브레히트 7세는 적의 참호가 매우 강화된 걸 보고 포위를 뚫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만스펠트와 알브레히트 7세가 지휘하는 구원군은 적군보다 수가 많았지만, 연이은 손실로 사기가 떨어진 데다 급료가 체납된 것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언제라도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컸기 때문에, 참호를 파고 대치 중인 적을 향해 무작정 공격을 퍼부었다간 참패를 면치 못할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모든 공격을 취소하고 질서 있게 철수하기로 했다.
앙리 4세는 기병대에게 철수하는 적을 추격해 끈질기게 괴롭히도록 한 뒤, 아미앵으로 돌아와서 수비대에 항복을 요구했고,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달은 스페인 수비대는 9월 25일 항복했다. 스페인군은 아미앵 공방전을 치르면서 5,000명 이상이 생포되었고, 2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반면 앙리 4세의 군대는 두 야전 병원의 도움으로 600가량의 사상자만 기록했다. 아미앵 공방전의 실패로 알브레히트의 명성은 추락했고, 사기가 급락한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내부에서 밀린 급료를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반란이 빗발쳤다.
2.2.3. 이사벨 공주와의 결혼
알브레히트는 상황이 암울해져가는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여기고, 스페인의 적들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불응했지만,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 장기화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싶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교황 특사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1세의 중재로, 스페인과 프랑스는 1598년 5월 2일 베르벵 조약을 체결했다. 스페인은 칼레를 비롯한 프랑스 내 점령지에서 철수하기로 했고, 프랑스는 캉브레 대주교령에 대한 스페인의 주권을 존중하기로 했다. 프랑스 왕실은 네덜라드 독립 전쟁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재정 지원은 유지했다.
베르벵 조약이 체결된지 며칠 후인 1598년 5월 6일, 펠리페 2세는 장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알브레히트의 결혼을 발표했다. 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딸 이사벨의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밝혔다. 이리하여 알브레히트는 아내의 권리로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네덜란드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해 전쟁을 끝내고 네덜란드를 온전히 다스리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았다. 다만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가 스페인 제국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별도의 조건을 달았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새로운 총독을 임명할 권한을 유지했으며, 이사벨과 알브레히트 7세 부부가 자녀 없이 사망할 경우, 네덜란드는 스페인 군주에게 다시 복속되었다. 그리고 두 부부의 자녀는 스페인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으며, 딸은 압스부르고 왕조의 왕자와 결혼해야 했다.
알브레히트 7세는 교황의 허락을 받은 뒤 1598년 7월 13일 추기경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9월 14일 스페인으로 떠났다.교황 클레멘스 8세는 11월 15일 페라라에서 두 사람의 대리 결혼을 축하했고, 실제 결혼식은 1599년 4월 18일 발렌시아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알브레히트는 39세였고, 이사벨은 33세였다. 결혼을 주선한 펠리페 2세는 1598년 9월 13일 밤에 사망해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2.2.4. 마우리츠와의 대결
베르벵 조약 체결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평화가 성립된 뒤, 알브레히트는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반격 작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의 지시를 받은 군사령관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라인강 하류의 강둑에 있는 오르소이를 접수한 뒤, 라인강을 건너 9월 24일 알펜에 무혈입성하고 이틀 후엔 브로이히 성을 점령했다. 10월 12일에는 1년 전 1차 라인베르크 공방전에서 상실했던 라인베르크 요새 역시 가볍게 되찾았다. 그 후 멘도사는 군대를 나누었다. 한 부대는 헬러 지방을 침공했고, 11월 8일에 두팅험 마을을 접수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부대는 리페강을 건너 10월 30일에 라인강 하류의 도시 리스로 진군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스페인군은 리스 주변 지역과 뮌스터 주교령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했다.1599년 4월, 알브레히트 7세는 헬러로 진군해 마우리츠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과 대치하면서, 멘도사에게 스페인인 사이에서 "섬으로 가는 열쇠"라고 불렀던 센켄샨츠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센켄샨츠를 공략한다면, 스페인군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독일 간의 연락망을 끊어서 네덜란드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멘도사는 지시에 따라 보병 17,000명, 기병 2,000명, 그리고 공성무기들을 이끌고 센켄샨츠로 진군했다. 그러나 센켄샨츠 공방전에서 적의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에 고전하다가, 왈롱 출신의 클로드 라 바로트가 이끄는 네덜란드군 5천 명이 미사강 상류에서 비밀리에 출발해 봄멜러바르트의 헤델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멘도사는 900명만 있는 센켄샨츠를 굳이 공략하기보다는 5천 적병을 섬멸하는 쪽이 네덜란드 공화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힐 거라고 판단하고, 센켄샨츠의 포위를 푼 뒤 적병 5,000명을 격파하러 출진했다.
클로드 라 바로트의 군대는 멘도사의 스페인군이 추격하는 가운데 북쪽의 잘트봄멜로 후퇴했고, 스페인군은 그들을 추격해 5월 15일 케셀과 테렌사이의 뫼즈강을 건너 봄멜러바르트 섬에 있는 잘트봄멜 요새를 포위했다.(잘트봄멜 공방전) 그러나 수비대가 강력하게 저항했고, 마우리츠가 선박 다리를 통해 보급을 꾸준히 공급했기에 막대한 손실만 볼 뿐 공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6월 13일 플란데런으로 퇴각했다. 잘트봄멜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페인군은 거듭된 패배로 군기가 문란해졌고,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면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스페인 측은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 플란데런 방면군의 모든 추가 공세를 보류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는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1600년 1월 반격 작전을 감행해 와흐텐동크에 무혈 입성했고, 뒤이어 크레브쿠어 요새를 포위해 급료 미지급에 불만이 많던 수비대에게 상당량의 금화를 지급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스페인군이 잘트봄멜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건설했던 산안드레스 요새를 포위했다. 멘도사는 이곳마저 네덜란드 공화국을 정복할 원정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상실하기에 루이스 데 벨라스코에게 4,000 병력을 맡겨 구원에 착수하게 했지만,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포위선을 철저히 요새화한 데다 산안드레스 요새로 접근하는 모든 길이 연합군의 제발 건설로 인해 강물로 침수되면서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고, 산안드레스 수비대는 구원이 올 가망이 없자 항복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에 가담한 7개 주에 남아있던 마지막 스페인 요새가 무너졌고,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수뇌부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반면에, 네덜란드 의회는 연이은 성공에 고무되었고, 이참에 플란데런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고 저지대 국가를 통합할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감행하자는 의견이 거세졌다. 이때 대연금관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가 됭케르크를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됭케르크는 1585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네덜란드 주변을 운항하는 스페인 함대 주력을 그곳에 배치한 이래 스페인 해군의 주요 항구로 활용되었으며, 스페인 당국에 고용된 사략선이 그곳에서 자주 출항해 네덜란드 공화국의 해운 및 어업에 큰 피해를 줬다.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는 그곳을 공략한다면 사략선을 퇴치해 상선과 어업을 보호할 수 있고, 스페인 정부가 플란데런 방면 자국군에 보내는 금화를 전달하기 곤란해지며,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스페인과의 전쟁을 재개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됭케르크를 접수한 뒤 잉글랜드에 넘긴다면, 그동안 공성전을 치를 군자금을 대기 위해 대출을 받은 공화국의 잉글랜드에 대한 빚을 청산할 수 있고, 잉글랜드 해군이 영국해협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요한의 주장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지만, 마우리츠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됭케르크를 지금 당장 포위하면 적의 영토에 깊숙이 진입해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므로, 겐트, 브뤼허 같은 친 스페인파 도시들을 후방에 둬야 하고, 스페인군의 반격도 매서울 테니, 자칫했다간 네덜란드군이 포위되어 섬멸당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공화국은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우리츠의 사촌이자 프리슬란트 총독인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도 이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스헤르토겐보스, 그라브, 펜로 등 공화국에 가까운 도시들을 공략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한이 됭케르크 공략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이에 설득된 의원들이 마우리츠에게 지시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자, 마우리츠는 결국 이에 따르기로 했다. 다만 정부 구성원들이 군대와 함께 플랑드르로 진군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 후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16,000명이 됭케르크로 진군하고 있을 무렵, 알브레히트는 디스트에서 수개월째 급료 지급이 밀린 것에 분노해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 장병들과 대치 중이었다. 그는 소식을 접하자 반란군에게 스페인을 위해 다시 싸워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병사들이 가톨릭에 경도되어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네덜란드의 침략을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위협으로 묘사했다. 또한 유럽 최강의 국가인 스페인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던 그들의 심리를 이용하고자 네덜란드군이 승리한다면 그들의 명성이 추락할 거라고 설득했다. 이에 반란군이 협상할 의사를 전달하자, 알브레히트 7세는 반란군 병사들이 급료를 즉시 받고, 장교들의 지휘를 받으며, 최전선에 배치되어 이단자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수행할 거라고 선언했다. 이에 디스트의 반군은 알브레히트 7세와 함께 하기로 했다.
그 후 알브레히트 7세는 겐트로 이동해 벨라스코와 합류했다. 6월 28일,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 왈롱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보병 6,000명, 기병 1,200명이 겐트에 집결했다. 남편 곁에 선 이사벨은 병사들에게 애정어린 인사를 건네며 그들을 자신의 사자라고 불렀고, 그들의 명예를 기렸다. 6월 30일, 알브레히트 7세는 전군을 이끌고 오스텐트로 빠르게 이동해 스네스케를레와 오덴부르크의 보루를 접수했다. 살아남은 수비대는 오스텐트로 후퇴했고, 오스텐트는 곧 니우포르트를 포위하던 네덜란드군과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스페인군은 7월 1일 저녁에 레핑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정찰병으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던 마우리츠는 7월 1일 적군이 레핑에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처음에는 슬로이스에 2,000 병사와 함께 주둔하고 있던 후안 데 라바스가 기만 작전을 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오덴부르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비로소 대규모 적군이 몰려왔으며 전투가 임박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우리츠는 오스텐트에 있는 의원 대표단에 서신을 보내 레핑에의 다리를 파괴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서신이 도착하기 전, 스페인군은 이미 레핑에를 통과하여 그 일대를 장악했다.
당시 보병 2,500명과 기병 5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 후위대는 아직 이제르 강을 건너지 않고 있었는데, 마우리츠의 사촌인 에른스트 카시미르 나소디츠의 지휘 아래 오스텐트 인근의 마리아케르케로 파견되어 알브레히트 7세를 저지하기로 했다. 그들이 시간을 충분히 끌어준다면, 마우리츠는 그 사이에 주력군을 이끌고 사촌과 합류할 것이었다. 그러나 7월 2일 일출에 벌어진 마리아케르케 전투는 불과 30분 만에 스페인군의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 보병대는 정면에서 돌격해 강력한 전투력으로 상대를 압도했고, 스페인 기병대는 측면을 빠르게 강타해 적군을 짓밟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북해 인근으로 도망쳤다가 추격받아 800명이 살해당했다. 에른스트 카시미르와 남은 생존자들은 오스텐트로 도주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우리츠는 패전 소식을 접하자, 병사들이 동요하는 걸 막기 위해 비밀에 부치라고 명령했다.
알브레히트 7세는 마리아케르케에서 승리한 뒤 니우포르트로 직접 진군할지, 아니면 오스텐트 외곽에 있는 알베르투스 요새를 점령할지 고민했다. 알베르투스 요새를 접수한다면, 오스텐트와 네덜란드군 사이의 연락망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 이때 니우포르트에 있는 네덜란드 함선들이 북해로 떠나는 걸 관찰한 알브레히트 7세는 적군의 가장 중요한 장교들을 오스텐트로 피신시키려는 거라고 추측했다. 부관들은 알베르투스 요새는 방비가 강력할 가능성이 높지만, 니우포르트에 있는 적군은 갈수록 약해질 테고, 스페인군은 회전에서 무적이나 다름없으니 니우포르트로 진군해 적군을 섬멸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에 전투를 늦추면 네덜란드군이 프랑스나 잉글랜드에 지원을 요청할 기회를 얻을 테니 서둘러 분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알브레히트 7세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니우포르트로 진군하기로 했다.
이후 1600년 7월 2일에 벌어진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알브레히트는 최선을 다해 병사들을 통솔했고 한때 적군을 허물어지기 직전까지 몰아갔다. 이에 그는 마지막 대규모 공격을 감행해 적군을 섬멸하려 했다. 알브레히트 7세의 지시를 받은 예비 부대들이 명령을 받들어 최전선으로 진군했지만, 가장 높은 모래 언덕 위에 배치된 네덜란드 대포들의 포격을 받자 주춤했다. 그 순간, 마우리츠는 예비로 남겨둔 마지막 예비 기병대, 즉 고데바르트 반 발렌이 지휘하는 3개 중대를 급파했다. 전장으로 향하던 스페인 예비 부대는 갑작스러운 적 기병대의 공격에 놀랐고, 스페인 기병들은 재빨리 후퇴했다. 이에 알브레히트 7세가 그들을 막아서서 전투에 재참전하라고 촉구해 수습에 성공한 뒤, 다시 기병들을 몰고 가서 적 기병들과 교전했다. 그때, 한 독일 출신 병사가 휘두른 창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부상이 심했기 때문에, 그는 전장을 떠나야 했다. 그 후 스페인군은 대거 퇴각했고, 네덜란드-잉글랜드군은 추격전을 벌여 여러 병사를 사살했지만, 곧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추격을 중단하고 물러났다.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의 사상자는 1,700~2,700명이었으며, 스페인군 사상자와 포로는 4,000명에 달했다. 또한 스페인군의 주요 장성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마우리츠는 아군의 피해가 크고, 식량도 부족하며, 새로운 스페인군이 또다시 몰려올 것이 걱정되어 더 이상의 공세를 벌이지 않고 오스텐트에 군대를 집결한 후 수송선에 실어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한편, 알브레히트 7세는 브뤼허로 이송된 뒤 건강을 회복한 후 겐트로 이동해 아내 이사벨과 재회했다. 이사벨은 남편에게 전투에 가능한 한 빨리 복귀하라고 촉구했고, 알브레히트 7세는 브뤼허로 돌아와서 생존한 병사들을 모아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한 뒤, 루이스 데 벨라스코에게 니우포르트 주변의 마을과 요새를 요새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면서도 네덜란드 공화국에 평화 제안을 했고, 공화국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양측 사절단이 베르헌옵좀에서 협상했다. 그러나 종교 문제를 비롯한 여러 요인 때문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2.2.5. 오스텐트 공방전
스페인 당국은 하마터면 됭케르크가 함락되고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이 고립될 뻔했던 상황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고, 플란데런 내 유일한 친네덜란드 항구 도시인 오스텐트를 반드시 공략해서 플란데런 해안의 안보를 완벽하게 확보하기로 했다. 스페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알브레히트 7세는 1601년 7월 5일 17,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오스텐트 요새에 도착했다. 그는 군대를 2개, 나중에는 4개 진영으로 나누었다. 아우스틴 데 멕시아는 도시 서쪽 모래 언덕에 6개 연대를 주둔시켰고, 프레데릭 반 덴 베르흐는 동쪽 브레덴 근처에서 2개 연대로 진영을 세웠다. 나머지 2개의 사분지는 더 작았고, 나중에 추가되었다. 알브레히트 7세는 직접 신트알베르투스 요새를 점령했고, 라베르사데에 기병대를 주둔했다. 오스텐트 요새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시 양쪽의 모래 언덕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도시 남쪽 지역은 하루에 두 번씩 밀물에 잠겼기에 군대가 행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알브레히트 7세는 참호와 흙벽을 포위망 바깥쪽에 건설해 적 구원군의 외부 공격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도시는 바다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봉쇄는 이뤄지지 않았다.1601년 7월 8일, 스페인군 대포들이 처음으로 동쪽에서 도시를 포격했고, 오스텐트 주민 대부분은 배를 타고 제일란트로 대피했지만 남자 600명은 방어를 돕기 위해 남았다. 알브레히트 7세는 도시 북서쪽의 구시가지와 신 항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는 두 곳이 방어의 가장 약한 지점이라고 여겼다. 7월 10일과 11일, 도시 남서쪽의 포르크에스픽, 잔딜, 헬몬트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머스킷 부대원들이 요새에 끊임없이 사격하는 동안, 왈롱 중대가 요새를 습격했다. 이와 동시에, 프레데릭 반 덴 베르흐의 군대가 도시 동쪽을 포격해 수비대의 주의를 분산하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보루를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 큰 피해를 보고 퇴각했다. 이후 도시 수비대 1,000명이 서쪽에서 반격해 적의 대포를 무력화하려 했지만, 스페인 기병대가 그들을 격퇴했다. 오스텐트 공방전 첫 주 동안 네덜란드군 500명, 스페인군 7,000명이 전사했다.
오스텐트 수비대는 마우리츠의 야전군에서 20개 중대, 베르헌옵줌에서 10개 중대로 증원되었다. 7월 15일 잉글랜드 증원군을 이끌고 오스텐트에 도착한 프랜시스 베레는 요새 수비 책임을 이양받았다. 그는 네덜란드 의회로부터 요새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도시 밖에서도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8월 초, 프랜시스 베레는 병사 2,000명을 추가로 요청했다. 마우리츠는 저지대 국가에서 다른 곳으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할 병력이 너무 적어진다는 이유로 많은 병력을 오스텐트로 보내길 꺼렸지만, 의회는 마우리츠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고, 오스텐트의 병력은 8,000명으로 늘어났다.
프랜시스 베레는 적군이 페를리강을 우회하여 해자를 메우는 걸 저지하고자 도시 남서쪽 요새를 강화했다. 7월 16일, 새로운 보루, 성벽, 흉벽이 하룻밤 사이에 완성되었다. 또한 그는 새로운 병영, 무기고, 병원을 건설했다. 그 후 프레데릭 반 덴 베르흐가 병사 1,000명을 거느리고 잉글랜드군을 격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프레데릭은 일단 물러나서 새 보루와 포대를 건설하여 적군의 반격을 저지하다가 프레데릭 반 덴 베르흐의 뒤를 이어 부코이 백작 샤를 보나벤투라 드 롱게빌이 동부 지역에서 포위군을 지휘했다.
스페인군은 7월 말부터 오스텐트 항구를 향한 보급을 점점 더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이에 오스텐트에 있던 네덜란드 기술공 다비드 반 오를리언스는 동쪽의 반대쪽 경사면을 파괴하여 그쪽에 게울레 강과 연결되는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알브레히트 7세는 첩자들을 통해 이 계획을 알게 되자 게울레 강어귀에 돌과 어망을 실은 배들을 재빨리 침몰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선박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다비드 반 오를리언스가 건설한 새로운 항구에 도착했다. 프랜시스 베레는 새로운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초승달 모양의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던 중 잔딜 요새를 시찰하다가 머리 상처를 입고 오스텐트를 잠시 떠나야 했다. 그동안 카렐 반 데르 노트가 그의 후임자가 되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마우리츠에게 속히 오스텐트를 구원하라고 독촉했지만, 마우리츠는 직접 공격을 가하기에는 스페인군의 방비가 워낙 굳건했기에 적의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마우리츠는 2차 라인베르크 공방전을 감행해 적병 3,000명을 포위함으로써 알브레히트 7세가 오스텐트에서 군대를 빼서 자신을 상대하러 오기를 희망했지만, 알브레히트 7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7월 31일 마우리츠가 라인베르크를 함락한 후, 오스텐트 수비대는 라인베르크로부터 23개 중대를 받았다. 샤티용 백작 앙리 드 콜리니가 지휘를 맡았지만, 그들은 며칠 후 포위된 도시에서 전사했다. 스페인군은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진격을 이어갔고, 8월 22일 서쪽의 그루엔넨다이크(초승달 모양 성벽과 포르크에스픽 요새 사이의 방파제)를 돌파했다. 그러나 얼마 후 바닷물이 이 틈을 타고 흘러 들어와 스페인군의 참호를 침수하고 휩쓸었다. 게다가 썰물 때에도 해자에 물이 고여 있어서, 서쪽에서 오스텐트로 접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프랜시스 베레가 돌아온 직후인 9월 말과 10월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보았다. 참호는 방치되었고, 전염병으로 앓아눕는 자들과 탈영이 급증했다. 한편, 도시에서는 수백 척의 함선이 계속해서 물자를 보급했다. 이에 초조해진 알브레히트 7세는 겨울에 폭풍 때문에 도시에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 무척 어려울 거라고 판단하고, 겨울 포위 공격을 이어가기로 했다. 10월 초, 그는 목조 병영을 건설해 월동 준비를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럴 의사가 없었고, 도시 동쪽의 브레데네폴더에 대포를 놓을 수 있는 큰 포대를 건설하고 '루이스보스'라는 이름을 붙여서 게울레 강을 지나가는 배를 공격하게 했다. 그 결과 11월 중순에는 선원들이 더 이상 오스텐트로 항해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에 네덜란드 의회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보상금을 크게 늘리고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나중에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알브레히트 7세는 도시 서쪽에도 40m 높이의 포대를 건설하고 '그로테 카트(큰 고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 설치된 대포 8문은 오스텐트 전체를 포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 중순에 화재와 폭풍으로 신트알베르투스 요새가 파괴되었다. 11월 2일, 마우리츠와 프리슬란트 총독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의 군대가 스헤르토겐보스 공방전을 벌여서 다시 한번 알브레히트 7세의 주의를 끌려고 했지만, 군대 규모가 작아서 도시를 완전히 고립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군이 증원하기 쉬웠다. 3주 후, 마우리츠는 강추위가 불어닥치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2월, 겨울의 사나운 날씨 때문에 바다로부터 보급받지 못하게 된 오스텐트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질병과 탈영 때문에 건강한 남성의 수는 2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남은 병력에 대한 압박을 가중했다. 여기에 서리가 내리고 연료가 부족해져서, 수비대는 울타리의 나무를 연료로 사용해야 했다. 방어 시설은 복구되지 않았고, 어떤 곳은 방치되었다. 알브레히트 7세는 이때를 틈타 요새를 공격했고, 수비대는 간신히 격퇴했다. 이후 첩자들이 도시의 열악한 사정을 알리자, 알브레히트 7세는 다시 한번 공격하기로 했다. 주요 공격은 12월 22일 밤에서 23일 사이로 계획되었다.
도시의 열악한 상황에 낙담했던 프랜시스 베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대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항복할 의사가 있으니 나흘 동안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알브레히트 7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스텐트 항복은 큰 화제를 몰고 와서, 주변 지역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수비대의 항복을 지켜보기 위해 찾아왔고, 유럽 궁정에서도 이에 관해 논의했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레는 그사이에 요새를 수리하고 제일란트에서 파견된 지원군을 접수했다. 그 후 그는 알브레히트 7세에게 항복을 철회한다고 알렸다. 알브레히트 7세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분노했고, 내년 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1602년 1월 7일 스페인군의 오스텐트 공세.
1602년 1월 7일, 알브레히트 7세는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아침에 약 2,000발을 도시에 발사하도록 했고, 저녁에 사방에서 도시를 습격했다. 당시엔 썰물이어서 게울레강과 웨스트헤이븐강은 거의 말랐다. 그러나 동쪽에서의 공격은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그 바람에 게울레강 수위가 도로 높아져서 강을 건너는 게 불가능했다. 이에 공격자들은 목표를 바꿔서 크레센트를 접수했지만, 뒤이어 남쪽 보루의 맹렬한 포격을 받고 막대한 손실을 보고 후퇴했다. 서쪽에서는 스페인인과 이탈리아인 4,000명이 옛 항구와 잔딜 요새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포르크에스픽과 헬몬트, 폴더 요새도 마찬가지로 공격받았다. 프랜시스 베레는 이에 대응해 서쪽에 대다수 병력을 배치했고, 못, 사슬, 고철을 대포로 쏴서 몰려오는 적군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히게 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공격에도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자, 알브레히트 7세는 철수 신호를 내렸다. 그 순간, 프랜시스 베레는 올드 하버(Oude Haven) 제방의 수문을 열라고 명령했고, 도시 주변 지역이 급격히 침수되면서 많은 스페인군이 익사했다. 이날 스페인군 2,500명이 죽거나 다쳤고, 수비대는 40명이 죽고 100명이 다쳤다. 이렇게 공격이 실패한 후, 스페인 진영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자기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킨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알브레히트 7세는 반란군 50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50명을 갤리선 노예로 보냈다.
얼마 후, 네덜란드 의회는 프랜시스 베레가 지난해 말에 알브레히트 7세와 항복을 논의하는 척했다가 도로 취소하는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해서 자국의 명예에 상처를 입혔다고 판단하고, 그를 헤이그로 소환했다. 후임 총독으로는 프레데릭 반 도프가 선임되었다. 새로운 병력이 도시에 꾸준히 파견되었고, 3월에는 수비대 전체가 교체되었다. 알브레히트 7세는 몇 달 동안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고, 보급선을 교란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는 서쪽의 루이스보스 해로와 반대편의 그로테 카트 해로 건설을 실시해, 적 수송선들을 파괴할 대포들을 배치할 공간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느리게 진행되었고, 2월에 폭풍이 발생하면서 기껏 지었던 시설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수비대는 요새를 수리하고 로이게나르와 모제슈타펠의 초승달 모양 언덕 사이에 3번째 항구를 건설했다. 또한 도시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마을의 가옥들을 철거하고 다른 곳을 재건했으며, 철거되지 않은 가옥 일부는 이웃 가옥들을 보호하기 위해 흙으로 메웠고, 거리에는 거대한 방어용 방패를 세웠다.
한편, 네덜란드 의회는 알브레히트 7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끄는 전략으로는 오스텐트 포위를 풀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서 직접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했다. 따라서 군대를 1만 명으로 증강했고, 독일 기병 2천 명과 용병 6천 명을 고용했다. 마우리츠는 이들을 이끌고 브라반트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이에 스페인군 일부가 오스텐트에서 철수했고,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의 지휘 아래 신트트루이덴 인근에 참호를 건설했다. 마우리츠의 군대가 이들에게 접근했지만, 멘도사는 대결을 회피했다. 마우리츠는 참호를 판 적군을 섣불리 공격했다간 막심한 피해를 볼 것으로 판단하고, 그 대신 2차 그라브 공방전을 감행해 7월 18일에 함락했다.
마우리츠가 브라반트를 침공했을 무렵, 알브레히트 7세는 새로운 반란에 직면했다.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스페인은 130만 두카트에 달하는 급료를 삭감했다. 이에 현지 스페인 군인들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다. 일부 반란군은 마우리츠에게 투항했고, 다른 반란군은 후흐스트라텐 성에 숨어들어서 1604년까지 2년간 반란을 이어갔다. 알브레히트 7세는 반란군과 협상해 봤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작전을 실패한 책임을 물으려는 스페인 당국으로부터 소환 통보받았다.
알브레히트 7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로부터 질책받고 플란데런에 복귀한 뒤 공성전을 이어갔지만, 이미 왕의 신임을 잃었다. 펠리페 3세는 알브레히트 7세와 상의도 없이 기병대장 프란시스코 데 멘도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루이스 데 벨라스코를 선임했다. 또한 병사들의 급료 관리를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에 지원한 자금의 관리를 스페인 당국이 직접 맡게 했다. 이제 알브레히트 7세의 권력은 최고 사령부에서 무력해졌고, 그의 명성은 손상을 입었다. 그는 몇 달간 지휘권을 유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603년 10월 암브로조 스피놀라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현장에서 물러났다.
오스텐트에 입성하는 알브레히트 7세와 이사벨 부부.
1604년 9월 22일, 3천가량의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3년여간 이어지며 양측 통합 10만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오스텐트 공방전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며칠 후, 알브레히트 7세와 이사벨 부부는 완전한 폐허로 전락한 도시를 방문했다. 도시에 입성한 스페인 인사들은 참혹한 현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사벨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후 알브레히트 7세는 도시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고, 면제와 특권을 부여했다. 오스텐트로 이주한 사람들은 세금 면제, 자유로운 시민권, 그리고 직업을 마음대로 가질 권리를 얻었다. 그 결과, 1604년 함락 이후 40년이 지났을 무렵, 오스텐트 인구는 4,381명으로 증가했다. 오스텐트 항구는 개선되었고, 암브로조 스피놀라의 주장에 따라 오스텐트와 브뤼허, 겐트를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1607년 4월, 네덜란드 공화국은 암브로조 스피놀라의 1605-1606년 원정으로 인하 여러 도시의 상실과 잉글랜드 왕국의 이탈로 인한 외교적 고립 위협 때문에 휴전 협상을 수락했다. 이후 알브레히트 7세는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스페인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휴전 협정 기간 동안 주권 국가로 간주하는 걸 용인했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게 휴전을 받아들여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1609년 4월 9일 안트베르펜에서 12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펠리페 3세가 비준서를 제출하면서, 저지대 국가의 평화 회복을 위한 알브레히트 7세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2.2.6. 휴전기
1609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알브레히트 7세는 아내 이사벨과 함께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복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침수된 토지의 매립을 장려했고, 현재 벨기에-프랑스 국경에 걸쳐 있는 습지대인 뫼렌을 메꾸는 걸 후원했다. 농업이 회복되면서 인구가 어느정도 늘어났고, 산업, 특히 사치품 무역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국제 무역은 스헬더강이 네덜란드 해군에게 폐쇄되어서 방해를 받았다. 이에 그는 오스텐트와 브뤼헤를 거쳐 켄트를 연결하고, 뫼즈 강과 벤로와 라인베르크 사이에서 라인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해, 스헬더강 봉쇄를 우회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1]의 생성을 지원했다.알브레히트 7세는 애초에 이단 탄압에 힘썼지만, 오스텐트의 참혹한 상황을 목도한 후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1609년,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한 개신교 신자들을 탄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되었고, 종교적 토론에 참여하는 걸 법으로 금지했다. 또한 1607년 메헬렌의 네덜란드 대평의회가 결의한 관용령도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러면서도 플란데런을 재가톨릭화하기 위해 수도회를 신설 및 개혁했다. 예수회는 그의 후원하에 브뤼셀과 안트베르펜에서 야심찬 건축 계획을 완수할 수 있었고, 카푸친회와 같은 다른 가톨릭 개혁 세력도 상당한 액수의 지원을 받았다.
알브레히트와 이사벨의 통치 기간에 네덜란드 총독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충성스러운 속주들의 의회는 1600년에 단 한 번 소집되었다. 그 후 정부는 속주들과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총독은 휴전기에 다양한 문제에 대한 법률을 공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611년 영구칙령은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관습법에서 성문법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그 외에도 화폐 문제, 귀족 문제, 결투, 도박 등에 대한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1609~1610년 율리히 공국과 클레베 공국의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가톨릭 진영을 지원했는데, 그 과정에서 개신교 진영을 지원한 네덜란드군과 스페인군이 충돌했지만, 전쟁이 재개되는 걸 원하지 않은 알브레히트는 네덜란드 당국과 협의한 끝에 1614년 잔텐 조약을 체결해 분쟁을 해소했다. 1618년 보헤미아에서 사촌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항하는 대규모 반란이 벌어지자, 알브레히트 7세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는 한편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게 오스트니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의를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2.3. 말년
알브레히트 7세는 이사벨과의 사이에서 1605년, 1607년, 1609년에 세 자녀를 낳았지만 모두 갓난아기 때 사망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할 게 분명해졌고, 1613년에서 1614년 겨울에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하자, 양도법에 따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군주가 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가 내려졌다. 그 결과 각 주들은 1616년 5월과 1617년 1월 사이에 여러 의식을 통해 알브레히트와 이사벨 부부의 상속인으로 펠리페 3세를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펠리페 3세는 1621년 3월 31일에 알브레히트 7세보다 먼저 사망했고, 게승권은 펠리페 4세에게 넘어갔다.1619년 3월 20일 마티아스가 사망한 뒤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같은 해 10월 9일 페르디난트 2세에게 양위하면서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집권한 대공이 되었다. 1620년 말, 알브레히트 7세의 건강은 다시 현저히 악화되었다. 그는 이듬해 4월에 만료되는 12년 휴전 협정 갱신에 마지막 힘을 다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광범위한 양보를 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제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모두 그의 평화 호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재개되자 깊은 절망감에 빠진 채 1621년 7월 13일 브뤼셀에서 병사했다. 사후 브뤼셀의 성 미카엘과 성 구둘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자선 기부자들의 기금을 자본으로 삼고, 빈민들이 착취적인 대부업자들에게 돈을 빌리지 않도록 합리적인 이자율로 대출받게 해주는 체게. 15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처음 조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