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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20:11:00

알비 십자군

1. 개요2. 배경3. 상세

1. 개요

남프랑스의 카타리파를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십자군.

2. 배경

파일:랑그도크.png

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카타리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기독교보다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1]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경을 엉터리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2], 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더군다나 카타리파는 정치적 이유로 남프랑스 영주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후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카타리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 십자군이 결성된 배경에는 프랑스 남부를 완전히 왕권 아래에 두고 싶어했던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러한 프랑스 왕의 의도가 카타리파(알비파)의 확대에 고민하던 교황청의 의도와 일치하였다. 다만 당시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존 왕과 한참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카타리파 정벌에 협조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직접 십자군에 참여하는 대신 십자군이 북프랑스를 통과할 때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에 그쳤다. 카타리파 정벌에 적극 나선 것은 필리프 2세 다음으로 프랑스왕에 즉위한 그의 아들 루이 8세였다.

3. 상세

첫 공격 대상이 된 베지에(Béziers) 시[3]를 점령한 후, 병사 하나가 도시 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물었다. 이때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4]의 대답이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베지에 학살에서 20년 후에 독일 시토회 수도자가 적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 가려 내실 것이다(Kill them all. Let God sort them out.)"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이쪽의 번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두 문장 모두 결국 뜻은 같다. 누가 이단인지는 주님께서 알고 계실 테니, 일단 다 죽여서 하느님께서 심판하게 하라는 것. 이 발언은 알비 십자군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적 광기를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된다.

이렇게 베지에 시의 학살로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 후의 알비 십자군은 교황과 교황 특사란 작자가 단단히 미친 놈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무조건 학살이 아닌 항복 권유와 목에다 칼을 들이댄 채 개종을 권유했다. 물론 그래봤자 자기들도 미친 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개종을 거부하면 얄짤없이 화형에 처했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아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툴루즈의 카타리파 영주들[5]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1213년의 뮈레 전투(Battle of Muret)다.[6]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비교도 안 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다(레몽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7]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이다.

파일:Cathars_expelled.jpg
알비 십자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성과를 거뒀다. 남프랑스의 영지와 도시는 차례차례 점령되었고, 카타리파는 각지에서 학살, 처형되었다. 1209년 말에는 난공불락의 요새 카르카손까지 함락되었다. 1215년 즈음 십자군은 남부 프랑스를 거의 평정하지만, 카타리파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전향한 척 했던 알비파는 레몽 백작의 아들(툴루즈의 레몽 7세) 지휘 아래 다시 봉기하여 툴루즈를 되찾았다. 이어 1218년엔 십자군의 리더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공성전에서 전사하고, 1226년에는 알비 십자군을 지원하던 프랑스 왕 루이 8세까지 병사하면서 카타리파는 반전의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대세를 뒤집진 못하고 1228년에 툴루즈가 완전히 함락되고 레몽 7세[8]가 결국 1229년 자신의 딸을 루이 9세의 동생[9]과 결혼시키고, 툴루즈 지역을 이 둘의 자손에게 넘기는 대신 프랑스 왕과 교황청의 사면을 받는 화의를 받아들였다. 툴루즈 백작령의 항복으로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세속 영주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1229년부터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이 실시되었다. 붙잡힌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영주에게 인도되어 처형되었다.

공식적인 알비 십자군은 이때까지였으나, 이후로도 남부 프랑스는 지역 영주와 교황청 사제들에 의해 십수년간에 걸쳐 종교탄압과 민중봉기가 발생하며 악전고투가 벌어졌다. 마지막 남은 카타리파의 거점은 산악 지역에 있는 몽세귀르(Montségur)의 산성 요새였다. 카타리파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마지막 저항을 계속했다. 1244년 3월 16일,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던 카타리파 신도 2백 명 이상은 화형에 처해졌다.[10]

그럼에도 이들의 기세는 여전했는지 1303년 카타리파의 근거지였던 남프랑스 지역을 방문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현지 주민들의 프랑스 왕실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높은 증오심을 직접 겪고 크게 놀랐을 만큼 알비파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으므로 1308년부터 1323년까지 로마 교황 클레멘스 5세종교재판관들을 남프랑스 지역으로 보내 남아있는 알비파 잔당들을 뿌리뽑아야 했다. 1321년에 마지막 완덕자(Perfecti) 기욤 베리파스토가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1350년이 지나서야 알비파가 비로소 완전히 사라졌다.[11]

알비 십자군의 카타리파 토벌은 사실상 독립국으로 한 때 프랑스왕보다 더한 권력을 누렸다고 평가되던 툴루즈 백작국이 왕실에 종속화되며 필리프 2세 - 루이 9세 시대의 프랑스 왕권 신장에도 큰 도움을 준 사건이었다.

[1] 비슷한 주장을 한 정교회의 이단 교파가 9세기의 바오로파 및 카타리파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보고밀파다.[2] 교회로서는 중대한 사항이다. 교리의 자의적인 해석은 교회의 일체성을 훼손하기 때문. 그러니까 주류교회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건 문제 없지만, 카타리파가 해석한 건 문제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시전한 자의적 해석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 그 후에도 수십 차례 시전한 공의회시리즈(...)를 참고하라.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집단으로 한 해석은 자의적이지 않고, 남프랑스와 알프스 산맥 서쪽 끝자락 지역민들이 한 해석은 자의적이니 죽어야 한다는거냐, 내로남불 아니냐 따질 수 있지만 이런 관점을 들이밀면 역사적 평가, 역사학이란 학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3] 프랑스 남부 랑그도그루시옹(Languedoc-Roussillon)지역의 상업도시[4] 시토 수도회 출신 수도원장으로 나중에는 대주교까지 올라갔다.[5] 이들이 정말로 카타리파를 믿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레몽 6세도 그렇고, 오히려 이해관계로 인해 가톨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문당한 뒤 카타리파에게 연대감을 느낀 영주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6] 나머지 유럽사에서야 이런 일도 있었다 주석으로 넘기는 수준이지만, 스페인아라곤 연합 왕국, 그리고 카탈루냐의 역사에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라곤의 왕들의 영향력이 피레네 산맥 이북으로 완전히 끊겨버리는 나름 중대한 사건이었다. 현대 프랑스-스페인 국경은 이 뮈레/뮤렛 (카탈루냐어) 전투 이후 큰 틀이 정해진 이후 머어어어나먼 훗날 16세기 루이 14세의 전쟁으로 북 세르다냐 (불어: 세르다뉴), 로세요(루시용)를 정복한 이후 현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7] 저 위에 4차 십자군에서 같은 기독교 왕국인 헝가리령 자라 공성 밑 약탈 이후 "더러워서 이런 막장 드라마 더 못 보겠다!"하고 때려친 인물이다. 우트르메르에서 6년간 싸우고 부친의 사망에 따라 몽포르로 돌아와 몽포르 백작이 되어 있었다.[8] 카타리파 지역의 군주이기는 했으나 결국 카타리파는 아니었다.[9]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 유아기에 죽은 형제들을 제외하면 4형제 중 셋째인데, 둘째형은 7차 십자군에서 전사, 본인과 큰형 루이 9세는 8차 십자군에서 병사, 동생 샤를은 다음 항목인 아라곤 십자군의 주인공이 된다. 한마디로 십자군 가족. 하지만 알비 십자군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모두 패전.[10] 다만 이때는 베지에 함락과는 다르게 개종한 사람들은 무사히 성을 떠날 수 있게 해 주었다. 화형을 당한 이 200명은 그러한 관대한 조건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불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죽어갔다.[11] 출처: 신의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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