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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스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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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스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Аҧснытәи Автономтә Советтә Социалисттә Республика
აფხაზეთის ავტონომიური საბჭოთა სოციალისტური რესპუბლიკა
Абхаз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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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국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Атәылақуа ӡегьы рпролетарцәа, шәҽеидышәкы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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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월 19일 ~ 1992년 7월 23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SSR 압하지야 압하지야 공화국
위치 서아시아
수도 수후미
정치 체제 공산주의
언어 압하스어, 조지아어, 러시아어
민족 압하스인, 조지아인, 러시아인

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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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하스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치공화국이다.

본래 1931년까지 압하지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그루지야 SSR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조약 공화국"이었으나 소련 정부의 결정으로 그루지야 SSR 산하 자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2. 역사

1936년 12월 말 압하스 ASSR 중앙집행위원장이자 당대 압하지야의 실권자였던 네스토르 라코바라브렌티 베리야에게 독살당했고,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살벌한 숙청이 벌어진다. 스탈린니콜라이 예조프가 주도한 대숙청으로 1937년 7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압하지야에서 최소 2,186명이 탄압을 당했으며 그 중 754명이 총살되고 377명이 감옥에서 실종되었다. 이런 대규모 탄압은 특히 압하지야의 토착 엘리트에 극심한 악영향을 미쳤는데 일례로 1937년 5월 제15차 압하지야 당대회에서 선출된 그루지야 공산당 압하지야 지역위원회 위원 51명 중 39명이 처형되었고, 1936년 압하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120명 중 78명이 탄압을 당했다. 1937년 10월부터 11월까지 수후미에서 열린 공개재판에서는 잘 알려진 지역인사 13명이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

2차대전 당시 소련은 압하지야에서도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당시 압하스인의 15.5%가 참전하여 1/3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1] 이어 1949년에는 제5민족이었던 흑해 그리스인(1939년 당시 압하스 ASSR 주민의 11.1%)이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오지로 대거 추방되었다. 그 결과 압하스 ASSR의 "조지아화"가 일어난다. 조지아인은 스탈린의 의도치 않은 고향 사랑의 최대 수혜자로서 압하스 ASSR로 대거 이주하여 기존 토착민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따라서 1989년이 되면 압하스 ASSR은 명색이 압하스인의 자치공화국인데도 불구하고 조지아인이 제1민족(45.7%)이 되고 압하스인은 17.8%로 오히려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조지아화의 결과로 압하스인과 조지아인의 분쟁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조지아 본토는 야권을 중심으로 반소 독립운동이 벌어지는데 반해 압하스 ASSR에서는 압하스인을 중심으로 오히려 친소 성향이 강해지면서 조지아와 자신들이 별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게 된다. 1957년, 1967년, 1978년, 1989년에 압하스인 지식인들은 수차례 소련 중앙정부에 독자적인 압하스 SSR을 재건하거나 또는 중앙정부가 아예 압하지야를 "직할통치"해줄 것을 청원했다. 조지아인과 압하스인의 분쟁은 18명의 사망자와 448명의 부상자를 낳은 1989년 7월 수후미 폭동으로 극단에 치달았다.

결국 소련 붕괴 후 발발한 조지아와의 압하지야 전쟁 이후 압하지야로 사실상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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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높은 사망률은 다른 공화국도 다르지 않았다. 그루지야 SSR도 인구 350만 중 70만을 동원하였고 그 중 절반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