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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6:28:20

야구 해외파 선수들

(2024년 4월 2일까지의 변화를 반영)

1. 해외파 선수 명단
1.1. 현역 미국 진출 선수
1.1.1. 메이저리그
1.1.1.1. 한국계 선수
1.1.2. 마이너리그
1.1.2.1. 트리플A
1.1.2.1.1. 한국계 선수
1.1.2.2. 더블A1.1.2.3. 하이싱글A
1.1.2.3.1. 한국계 선수
1.1.2.4. 싱글A
1.1.2.4.1. 한국계 선수
1.1.2.5. 루키
1.2. 현역 일본 진출 선수
1.2.1. NPB 리그1.2.2. 독립리그
2. 과거의 해외파 선수들
2.1. 국내리그(군경팀, 독립리그 포함)로 복귀한 현역 선수2.2. 해외에 진출했던 은퇴, 방출선수
2.2.1. 미국 진출2.2.2. 일본 진출2.2.3. 대만 진출2.2.4. 호주 진출2.2.5. 중남미 및 유럽리그
2.3. 메이저, 마이너리그를 경험했던 한국계 1/4 이상 혼혈 선수 중 이름이 알려진 선수
3. 미국 진출의 역사
3.1. 박찬호 이전3.2. 박찬호와 황금의 90년대 세대3.3. 소강기3.4. 마이너리그 진출 버블시대3.5. 2011년 이후 : 포스트 류현진 시대
4. 일본 진출의 역사

[clearfix]

1. 해외파 선수 명단

이하는 해외 리그에서 활동 중에 있는 선수 명단이다. 2020년 정규 시즌의 미국 / 일본 / 및 기타 지역의 프로 리그와 독 립리그 명단이다. 참고로, 2018/19 시즌 이후 한국인으로만 구성되는 호주 리그 구단인 질롱 코리아는 제외하며[1] 이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파일:MLB 로고.svg 현역 한국인 메이저리거
이름 나이[a] 포지션 소속팀(소속연도) 비고
김하성 [age(1995-10-17)] 내야 유틸리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2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배지환 [age(1999-07-26)] 내, 외야 유틸리티 피츠버그 파이리츠 산하 마이너 (2018~2022)
피츠버그 파이리츠 (2022~)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이정후 [age(1998-08-20)] 외야 유틸리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24~)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일:MILB 로고.svg 현역 한국인 마이너리거
이름 나이[a] 포지션 팀 레벨 소속팀(소속연도) 비고
최지만 [age(1991-05-19)] 1루수/지명타자 AAA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마이너 (2010~2015)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 (2015)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2016)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산하 마이너 (2016)
뉴욕 양키스 (2017)
뉴욕 양키스 산하 마이너 (2017)
밀워키 브루어스 (2018)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2018)
템파베이 레이스 (2018~2022)
템파베이 레이스 산하 마이너 (2018)
피츠버그 파이리츠 (202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23)
뉴욕 메츠 산하 마이너 (2024~)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박효준 [age(1996-04-26)] 내, 외야 유틸리티 AAA 뉴욕 양키스 산하 마이너 (2015~2021)
뉴욕 양키스 (2021)
피츠버그 파이리츠 (2021~2022)
피츠버그 파이리츠 산하 마이너 (2021~202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마이너 (2023)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마이너 (2024~)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고우석 [age(1998-08-06)] 불펜 투수 AAA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마이너 (2024~)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최현일 [age(2000-05-27)] 투수 AA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2019~)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조원빈 [age(2003-08-20)] 외야수 A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 (2022~)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심준석 [age(2004-04-09)] 투수 루키 피츠버그 파이리츠 산하 마이너 (2023~)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엄형찬 [age(2004-04-24)] 포수 루키 캔자스시티 로열스 산하 마이너 (2023~)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심종현 [age(2002-02-27)] 내, 외야 유틸리티 A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산하 마이너 (2023~)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신우열 [age(2001-12-20)] 내, 외야 유틸리티 루키 탬파베이 레이스 산하 마이너 (2023~)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최병용 [age(2002-04-20)] 내야수 루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마이너 (2023~)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참고: KBO 드래프트 대기자>
국내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마친 뒤 KBO 리그를 거치지 않고 미국 마이너리그 및 일본 리그와 계약한 자만 해당된다. 중학교 이전에 미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나 미국 및 일본 독립리그, 대만 리그, 호주 리그에서만 뛴 선수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미국 마이너리그 팀 및 일본 리그 팀을 떠난 뒤 독립리그 팀에 속한 기간은 유예 기간에 포함된다. 독립리그는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프로 팀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
이지태 - 2024년 3월 28일 유예 기간 만료. 2025년도 신인 드래프트 신청 가능.[4]
최지만, 박효준, 배지환, 최현일, 조원빈, 심준석, 엄형찬, 장현석, 이찬솔 등은 MLB, MiLB, NPB 최종 소속 팀 계약 만료 이후 2년 경과 시점에서 드래프트 참가 가능.[5]

1.1. 현역 미국 진출 선수

1.1.1. 메이저리그

파일:MLB 로고.svg 현역 한국인 메이저리거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파일: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로고.svg
No.7
파일:피츠버그 파이리츠 엠블럼.svg
No.3
파일: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고.svg
No.51
파일: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로고.svg
No.21
김하성 배지환40인 이정후 고우석40인
▶ 현역 한국인 마이너리거
}}}}}}}}} ||

한국인 메이저리거 문서도 참고할 것.
1.1.1.1. 한국계 선수
그 동안 한국계로 알려졌던 코너 조는 2023년 4월 7일 MK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중국계 미국인이며 한국계가 아니라고 밝혔다.

1.1.2. 마이너리그

1.1.2.1. 트리플A
1.1.2.1.1. 한국계 선수
1.1.2.2. 더블A
1.1.2.3. 하이싱글A
1.1.2.3.1. 한국계 선수
1.1.2.4. 싱글A
1.1.2.4.1. 한국계 선수
1.1.2.5. 루키
참고로 고교생 신분으로 현재 계약 상태에 있는 이찬솔과 장현석의 경우, 현재 각각 팀 배정이 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장현석의 경우 도미니카루키리그로 배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서류상의 이관일 뿐, 실제로 뛰는 팀과는 연관이 없고 이들은 당연하게도 2024년 2월까지 한국 고교 야구부 소속이다.

1.2. 현역 일본 진출 선수

1.2.1. NPB 리그

2017시즌부터 2024시즌 현재까지 NPB 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는 아무도 없다.

이미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수많은 재일교포 선수들이 일본 리그에 진출해 왔다. 하지만 재일교포 3-4세 선수들은 이미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은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거나 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옅은 상황이라 해당 문서에 세부적으로 기재하지 아니한다. 현 시점에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현역 NPB 선수는 없으며 최근 야쿠르트의 우에다 츠요시(한국명 주강사)가 조선적 선수였으나 방출되었다.

1.2.2. 독립리그

독립리그 항목은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다른 미/일 프로리그 경험 없이) 일본 독립리그에서만 뛴 선수의 경우 "국내로 복귀한/은퇴한 해외 진출자" 란에는 소개되지 않으며 이 문단 역시 많은 경우 불완전한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주요 독립리그는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BCL), 베이스볼퍼스트리그, 일본해 오세안 리그[17]가 있다.

2024년 현재 한국인 선수는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산하)에서 뛰고 있는 장현진(2023년 서울고 졸업)이 유일하다.

2. 과거의 해외파 선수들

2.1. 국내리그(군경팀, 독립리그 포함)로 복귀한 현역 선수

2.2. 해외에 진출했던 은퇴, 방출선수

양쪽 모두 진출했던 경우 미국 진출쪽에 소개. 이 중 미국 진출 중 메이저리그에서 뛴 선수는 굵은 글씨로 표시.

2.2.1. 미국 진출

2.2.2. 일본 진출

2.2.3. 대만 진출

이들 중 감병훈, 김종국은 삼성 소속 시절인 1994년 경험을 쌓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대만팀 준궈 베어스(현 푸방 가디언즈)와 자매결연을 맺었기에 가능했던 일. 애초 한희민의 진출도 자매결연 맺은 후 준궈팀 사장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팀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선수는 미지명 또는 실업야구에서 뛰던 선수들이다. 대부분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자세한 정보는 링크를 참고할 것.

2.2.4. 호주 진출

호주 리그는 겨울리그와 지역 리그가 혼합된 특이한 형태로, 팀에 이중으로 적을 둘 수 있어 일종의 임대 형식으로 많은 비-호주 선수들이 리그에 참가한다. 한국 선수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나온 해외파 항목 선수들 가운데에서는 최지만, 김선기가 호주리그에 임대되어 1시즌 뛴 적이 있다. 이외에도 KBO 출신으로 (이정민, 진명호, 허준혁(우)), 야수 2명 (이승화, 문규현), 포수 1명(장성우)등 2010-11시즌 당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캔버라로 임대되어 1시즌 뛴 적이 있다. 장필준은 마이너리그 방출 이후 복귀 이전에 잠깐 호주리그를 거쳤다.

시드니 블루삭스의 구대성은 오랜 기간 리그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KBO 선수들이 은퇴나 방출 이후 재기를 위해 ABL 무대를 찾기도 했다. 이혜천(전 두산, 야쿠르트), 임경완(전 롯데), NC 다이노스 고창성 , 윤기호(전 한화), 김병현 등이 그들이다.

2018-19 시즌 호주리그의 5번째 팀으로 한국 팀 질롱 코리아가 참가하면서 많은 한국선수들이 호주 리그에 참가하였다. 다만 질롱 코리아 선수단 대부분은 결국 이후 현역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멕시코에 진출한 김진우, 뒤늦게 육성선수로 KBO 리그에 발을 디딘 노학준 (단 노학준은 1년 만에 방출되었다.), 권휘 정도가 예외이고 그 외에는 몇몇 선수들이 국내 독립리그 팀에서 뛰고 있는 정도다. 결국 질롱 코리아는 2019-20 시즌부터는 KBO 리그 소속 유망주들을 파견하는 형식으로 바꿨다.

2019-20 시즌에는 SNS로 물의를 빚고 한화 이글스에서 퇴출된 김원석이 오클랜드 투아타라에 합류했다. 또한 질롱 코리아는 한국인 유망주 및 배지환 같은 임대 마이너리거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2020-21시즌에는 질롱 코리아(한국), 오클랜드 투아타라(뉴질랜드)가 임시로 리그에서 제외되었고 2021-22시즌은 아예 취소되면서 한국인 선수는 한 명도 뛰지 않았다.

2.2.5. 중남미 및 유럽리그

대부분의 중남미 겨울리그는 마이너리그의 임대 리그 형식이기 때문에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오프시즌 동안 교육적 목적이나 새로운 팀을 찾기 위한 선수들이 다수 참가한다. 한국에서도 하재훈, 최지만, 강정호 등의 선수들이 도미니카나 베네주엘라 겨울 리그에서 오프 시즌을 보낸 적이 있다.

유럽리그는 대개 세미-프로 수준이기 때문에 유럽 진출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2018시즌까지 한국인이 유럽의 주요 야구 리그에서 뛴 경우는 한손 손가락 수 안에 들어간다. 여기에는 다른 해외리그에서도 뛰던 최향남이 포함된다.

2.3. 메이저, 마이너리그를 경험했던 한국계 1/4 이상 혼혈 선수 중 이름이 알려진 선수

외할머니가 한국계 하와이안 교포 2세이다. 일본 피도 1/4 섞여 있는 다국적 혈통 선수.
2007년 시카고 컵스에서 4라운드로 지명되었으며 이후 시카고 컵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활약하였다. 2012년 2루에서 수비 능력을 인정받아 골드 글러브 상과 필딩 바이블 1위를 수상하였다.

3. 미국 진출의 역사

3.1. 박찬호 이전

1 2
이원국(NPB출신) 박철순

한국 최초로 미국 야구를 경험한 선수는 도쿄 오리온즈 출신의 이원국이다. 1969년 미국으로 간 이원국은 싱글A와 더블A를 거쳐 1972년부터 멕시칸리그에서 11년간 활약하며 리그 에이스 수준의 피칭을 보여주었다. 당시 멕시칸리그가 AAA로 분류되며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던 것과 당대의 평가는 이원국이 메이저리그 수준에 약간 못 미치는 전형적인 4A 리거[53] 수준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10여년이 지나 일본을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도전한 첫 선수가 나오는데, OB의 레전드로 알려진 박철순 이다. 박철순 역시 더블 A까지 진행하며 상당한 수준을 보여 주었지만, 대학(연세대 중퇴), 군대(대학 재학 중 병역 이행)를 거치고 데뷔한지라 이미 당시 25세로 노망주의 경계선에 서 있었으며 이 때문에 결국 국내 프로야구의 개막과 함께 복귀를 선언한다.

3.2. 박찬호와 황금의 90년대 세대

3 4 5 6 7 8 9 10 11 12
박찬호 최경환 최창양 김선우 조진호 서재환 서재응 정석 김재영 백차승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봉중근 최희섭 김병현 이상훈(NPB출신) 송승준 권윤민 오철희 김병일 서정민 정영진

그리고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성공시대를 열었다. 첫번째 타자 진출자는 최경환이었다. 12월에는 최창양도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1997~1998년 동안에 데뷔한 선수 중에서는 상당한 수가 메이저리그 경기장을 밟았다. 대표적으로 서재응, 김선우, 백차승[54], 조진호, 봉중근 등이 있으며 이외 마이너리그에만 머문 선수로는 정석(당시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되었으나 진출 전의 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뛰지 못했다.), 서재환(서재응의 형. 한국 10라운드 지명 후 동생과 함께 미국행), 김재영(고교졸업 후 실험적 진출을 했다. 금방 돌아와 한국 대학 입학) 등이 있다. 1999년에는 해외 진출 붐이 최고에 달했는데, 한국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로 꼽히는 김병현과 추신수 이전 유일한 메이저리그 타자였던 최희섭이 이 해 미국땅을 밟았다. 주니치의 이상훈 역시 이 해에 미국으로 건너와 FA 계약을 맺었으며 이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FA 계약이다. 이외 1999년 데뷔해 마이너리그에 머문 선수는 송승준[55] , 권윤민, 김병일(2차 1라운드급으로 예상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경기를 뛰지 못했다.), 오철희(추신수와 동시대의 최고 타자 유망주), 서정민, 정영진이 있다.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 99년 경 부터 상당한 수준의 유망주가 별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이 꽤 늘어났다.

3.3. 소강기

23 24 25 26 27 28 29 30 31
류제국 추신수(현 SSG) 김일엽 구대성(NPB 출신) 이승학 안병학 엄종수(KBO 출신) 유선우(유병목,KBO 출신) 정진(정성기)

2000년대 초반 류제국, 추신수 등은 해당 메이저리그 붐의 마지막을 장식했으며 둘 모두 메이저리그 데뷔에 성공했다. 특히 추신수는 현재까지도 활약하며 HoF 급인 스즈키 이치로를 제외한 아시아 야수 중에서는 최고의 누적을 기록하고 있다. 2005년에는 일본에서 선발 투수로 성공을 거둔 오릭스 구대성이 메츠에서 1년간 활약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암이 갈린 선수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김일엽이나 안병학, 이승학, 채태인 등이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KBO 리그 은퇴 선수 출신의 엄종수나 유선우(유병목) 등이 마이너리그에 도전하기도 했다. 2003년 정진(당시 이름 정성기)의 미국 진출이 있기는 했으나 2000년대 중반은 비교적 미국 진출자가 없이 한산했다.
2004년까지 도합 31명의 전직 프로 및 아마추어 선수가 미국에 진출했다. 그 중 아마추어 출신은 모두 27명이었으며 메이저리그 성공 비율은 프로-아마추어 출신 도합 31명 중에서는 12명. 아마추어 출신 27명 중에서는 10명이었다.

3.4. 마이너리그 진출 버블시대

(한국 고교 출신만 포함)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남윤성 정영일 장필준 (삼성) 이시몬 장재형 최향남(KBO 출신) 이대은 강인균 강경덕 국해성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최형록 최현욱 이학주 (롯데) 하재훈 (SSG) 김재윤(KT) 안태경 정수민 이지모(KBO 출신) 나경민 문찬종
52 53 54
남태혁 최지만(전 SDP) 신진호

2006년 이후 다시 마이너리그 진출이 시작되었다. 남윤성(당시 이름 남윤희)이 2006년에 미국에 진출하였고 그 1년 아래로 김광현과 함께 한 때 고교 좌완 트로이카로 불렸던 정영일, 장필준이 2006, 2007년 미국 진출을 선언하였다. 특히 남윤성과 장필준은 당시 각각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외면하고 미국행을 택하면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셋은 모두 부상의 덫에 걸려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시몬, 장재형 등의 선수들은 제2의 기회를 잡기 위해 조용히 마이너리그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KBO 출신의 최향남은 구단의 양해 하에 포스팅 최저 금액인 101달러의 이적료로 AAA에 진출하는 도전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해외파로 집계하기는 애매한 경우지만 쿼터코리안 다윈 바니, 한국인 2세 행크 현 최 콩거와 미국으로 야구유학을 간 강경덕이 드래프트에 지명되기도 했으며 이들 이후로도 에릭 현석 심, 데릭 병조 정, 대니얼 세윤 오, 로버트 레프스나이더, 코너 곡위 조 등 1.5~2세 미국 선수들의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행크 콩거("Hank" Hyun Choi Conger)가 잘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외국인 친척에게 양자로 들어가며 성이 콩거가 되었지만 한국 교포 3세로, 혼혈은 아니다.[56] LA 에인절스, 휴스턴과 탬파베이를 거치면서 메이저리그 생활을 했으나 빈약한 타격과 극악의 도루 저지율 때문에 방출당했고 멕시칸리그까지 흘러갔으나 거기서마저도 방출, 결국 일찌감치 은퇴해 고교 팀 코치를 하다가 2020년에 롯데 자이언츠 1군 배터리 코치로 합류했다. 그 외에도 2세 혼혈 제이크 더닝(전 시카고 화이트삭스 AAA 우완 투수)[57] 같은 혼혈 선수도 최근까지 뛰었다.

2008년에는 이대은을 필두로 강인균, 최형록, 최현욱 등 유/무명의 아마추어 선수들의 계약이 이어졌다. 국해성이 컵스와 계약을 했다가 팔꿈치 상태를 이유로 계약이 파기된 뒤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는 이대은을 제외하면 국내 지명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다. 이대은은 컵스에서도 주목받는 유망주였으나 팔꿈치 수술이 원인이 되어 성장이 늦어지다가 AAA에서 좌절했으며 이외 선수들은 모두 싱글A 레벨에서 멈추었다.

2009년에는 이학주와 하재훈, 김재윤, 안태경, 정수민 등 당시 아마추어 야구에서 내로라하는 선수 중 상당수가 미국 진출을 선언하였다. 당시 롯데 방출 선수 출신 이지모가 잠시 다저스 루키/싱글A에서 뛰기도 했다. 이학주는 BA 100위 안에 드는 등 유망주로서 가치가 상당했고 하재훈 역시 성실한 모습으로 구단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명은 AAA까지 올라갔지만 둘 모두 부상의 덫에 걸렸고 결국 일본 독립리그 및 NPB(하재훈)등을 거쳐 국내 복귀를 선언하게 된다. 김재윤은 애리조나에서는 포수로 뛰며 수비력은 극찬받았으나 타격이 싱글A에서도 통하지 않아 상위싱글A에서 멈추고 돌아왔으며 결국 한국에서 투수 전향을 하게 된다. 안태경은 루키리그에서 실패하였으며 정수민은 초반 싱글A까지 올라갔으나 제구력 문제로 오히려 퇴보하며 결국 국내로 복귀하였다.

2010년은 해외파 진출 최대이자 마지막 전성기였다. 동산고 최지만을 필두로 세광고 에이스 김선기, 강타자로 주목받은 김동엽, 덕수고의 대통령배 우승을 이끈 나경민, 문찬종, 신진호, 남태혁 등의 선수가 계약하였다. 대개 국내에서는 주목받는 선수였지만 미국 기준에서는 2-3라운더 또는 B급 해외계약인 50만달러 내외의 계약금이 대부분이었으며 대부분의 선수들은 초기부터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약물의 힘을 빌린 최지만. 그는 포수로서 데뷔해 타격까지 빼어난 모습을 보이며 주목받았으나 등 부상으로 1루수로 전향해 전망이 어두웠지만, 놀라운 타격을 보여주며 싱글A-호주리그-더블A를 순식간에 제패하게 된다.이후 AAA레벨에서 정체되었고 어렵게 메이저리그로 올라와서도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다가 2018년에는 비록 플래툰이고 주로 지명타자로 뛰기는 해도 추신수 이후 최초의 마이너리그 출신 한국인 메이저 타자 자리를 차지했다. 김선기는 결국 시애틀 상위 싱글A에서 2년간 벽을 뚫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문찬종은 3년차에 루키리그까지 레벨이 떨어지는 와중에서도 절치부심해 6년차때 AAA 데뷔도 성공했으나, 결국 마이너리그 FA가 된 뒤 새 팀을 찾지 못한 채 귀국했다. 나경민은 수비력을 바탕으로 상위싱글A까지 올라갔으며 부상을 틈타 더블 A와 트리플 A에서도 두세경기 출전하기도 했으나 방출당해 일찍이 국내로 복귀, 수비 능력을 살려 KBO에서 전문적 제4외야수로 활약하고 있다. 나머지 선수들은 부상 등을 이유로 루키~싱글A만을 맴돌다 방출되었다. 이중 김동엽은 수비 문제와 부상, 컨택능력 미흡 등이 승격을 가로막았으나 국내에서 지명타자로 활약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한편 KBO는 국내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나간 선수(예를 들어 2008년의 최형록, 최현욱, 강인균, 2009년의 김재윤이 이에 해당. 미국 진출을 하기 위해 지명을 포기해 달라고 한 경우 정도가 아닌 정말 국내 신고선수가 될 상황이었던 선수 의미.) 에 한해 국내 복귀 2년 유예 기간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으나 7명이 한꺼번에 미국행을 택하자 이를 없었던 일로 해 버렸으며 2년 유예 후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 국내 팀과 계약할 시 계약금을 받지 못하고 첫 시즌은 최저 연봉만 받도록 하는 조항을 규약에 추가하게 된다.[58]

2005~2010년까지 (교포 및 미 고교 졸업자 제외) 21명의 아마추어와 2명의 프로출신 선수가 나간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 메이저리그에 올라간 선수는 최지만 단 1명이며 일본 프로야구에 이대은과 하재훈 2명을 더 보낸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가 된다. 2010년까지 도합 54명의 선수가 미국 진출을 했으며 그 중 아마추어 출신은 모두 48명. 48명 중 메이저리거는 11명이 배출되었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성공률 40%의 미국 진출은 이제 성공률 20%대의 도박이 된 것이다.[59]

이 시점을 계기로 1차지명 부활 등과 맞물려 해외파 진출은 크게 감소하고, 소위 "국내 리그에서 커서 FA로 진출하자"는 인터넷 및 야구계 풍조가 생기게 된다. 다만 이 바람도 오래가지는 못하는데..

3.5. 2011년 이후 : 포스트 류현진 시대

55 56 57 58 59
김진영 류현진(전 TOR, KBO 출신) 김성민 임창용(NPB 출신) 최은철
60 61 62 63 64
윤석민(KBO 출신) 강정호(KBO 출신) 박효준 (ATL 마이너) 손호영 (LG) 윤정현(키움)
65 66 67 68 69
박병호(KT, KBO 출신) 권광민(한화) 김현수(LG, KBO 출신) 오승환(삼성, NPB 출신) 이대호(KBO, NPB 출신)
70 71 72 73 74
황재균(KT, KBO 출신) 배지환(PIT) 최현일(LAD 마이너) 진우영 [60] 김광현(SSG, KBO 출신)
75 76 77 78 79
김하성 (SD, KBO 출신) 이지태 양현종(KIA, KBO 출신) 조원빈(STL 마이너) 엄형찬(KCR 마이너)
80 81 82 83 84
심준석 (PIT 마이너) 심종현 (ARI 마이너) 신우열 (TBR 마이너) 최병용 (SDP 마이너) 이찬솔 (BOS 마이너)
85 86 87 88 89
장현석 (LAD 마이너)

2011년 김진영, 2012년 김성민(포수) 등이 미국으로 진출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실패를 맛보는 등 유망주 진출은 당시 크게 사그라들었다. 한편 건강 문제로 인한 2011년 정대현의 메이저리그 계약 실패를 딛고, 2012년 류현진이 한국야구 최초 메이저리그 직행에 성공하고,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게 되면서 2011~12년 경은 이전의 올림픽, WBC에서의 선전에 더해서 한국 야구에 대한 자존감이 가장 높던 시기가 되었다. 이후 KBO(혹은 KBO-NPB 출신) 선수들 다수가 미국 진출을 시도했는데, 2013년 임창용, 2015년 강정호, 2016년 박병호, 김현수, 이대호, 오승환, 2017년 황재균 등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데 성공했으며 비록 마이너리그에 머물렀지만 2013년 윤석민 역시 미국 진출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길게 가지 못하고, 2019년 이후에는 오승환, 강정호 마저 사실상 빅리그 무대에서 밀려났다. 20시즌 시점에서 KBO를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 중 남은 것은 사이 영 상 2위에 빛난 류현진과 늦깎이 신인으로 들어온 김광현 둘 뿐.

2012년의 김성민 이후 약간의 소강기가 있었으나, 고교 출신 특급 야수 계약은 2011년 ~ 2019년 까지 9년 동안 총 4명이 존재했다. 2015년 고교야구 최대어 유격수 박효준이 110만달러에 양키스와 계약했으며, 2016년에는 장충고 외야수 권광민이 120만달러의 깜짝 계약을 맺었다. 2018년에는 역시 고교야구 최대어 유격수 배지환이 125만달러에 파이리츠와 계약했다. 반면 2011년 이후 고졸유망주 투수 진출의 명맥은 2018년까지 끊겼다.[61] 2019년에 이르러서야 투수 해외계약의 물꼬가 트였으나 야수들과 같은 특급 계약이 아닌, 30만 달러 이내의 계약이었다. (최현일, 진우영) 이들 중 권광민은 3년 동안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헤메다가 결국 방출당했고 진우영도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공백기를 보낸 여파인지 2021년에 부진한 성적을 보인 뒤 방출되었다. 박효준은 2021년에 간신히 MLB 무대를 밟았으나 이후 승격과 강등을 반복했고 2022 시즌 종료 후 3번의 DFA를 겪은 끝에 마이너 리그 소속으로 남은 데 이어 MLB 스프링 캠프 명단에도 제외되는 등 시련을 겪고 있다. 착실히 성장했던 최현일도 2022년 부상에 발목이 잡히며 향후 전망이 불투명하다.

또한 중-고교 야구부를 거치지 않고 미 독립리그로 데뷔한 최은철, 대학 야구부에서 중도 탈퇴 후 야구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마이너리그를 택한 손호영, 드래프트 8라운드 지명 후 대학진학을 택했다가 중퇴한 윤정현 등이 2014~15년 경 미국 진출을 했던 바 있다. 이런 선수들은 계약금 역시 최대 수만 달러 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도 좋은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와 같이 2018년까지 한국 출생 마이너리거는 프로출신 포함 75명여, 아마출신 60명 정도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는 약 20명 배출되었다. (한/일 프로 출신과 아마추어 출신은 대략 반반) 관련 정보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참조.

2019년 이후, 김광현이 포스팅 계약을 통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했으며, 2020년에는 김하성이 역시 거액의 포스팅 계약을 통해 (2020년 12월 31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입단했다.

양현종은 텍사스 레인저스와 스플릿 마이너 계약을 통해 (2021년 2월 12일) 입단해 메이저리그 데뷔에 성공했다. 2020년 아마추어 선수로는 덕수고 투수 장재영이 주목받았으나 키움 히어로즈의 1차 지명을 받으면서 국내에 남았고, 덕수고 나승엽이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계약에 근접해 있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국제 유망주 계약이 올스톱 상태가 됐고 롯데 자이언츠가 지명하면서 미궁 상태였다가 최종적으로 롯데와 계약했으며 이는 대한민국 아마추어 야구에서 KBO 드래프트에 참여할 경우 신청을 받는다는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62] 그 외에 2021년 2월 포철고 출신 투수 이지태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으나 루키리그에서 고작 3경기 등판에 그친 채 1년 만에 방출되었고 이후 일본 독립리그로 향했으나 부상으로 중도 하차했다. 포스팅을 시도했던 나성범은 어느 팀과도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다. 2021년에는 2022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서울권 1차 후보로 꼽혔던 서울컨벤션고 외야수 조원빈이 드래프트 참가 신청을 하고도 미국 진출을 선언했으며 2022년 국제계약시기 기점인 2022년 1월 15일에 정식 계약이 성사되었다..

2021-22 시즌 양현종과 김광현이 차례로 국내 복귀를 선언하면서 류현진과 김하성 두 명만이 KBO 출신 선수의 명맥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최지만, 박효준 등이 마이너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태이다.

2022년에는 고교 최대어로 꼽히는 덕수고 투수 심준석스캇 보라스와 에이전트 계약을 하면서 미국 진출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2021년 4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몸 상태 문제로 공식 대회에서 부진을 보이면서 미국 진출이 성사되더라도 거액의 계약금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오히려 포수 빅3로 불리던 경기상고 포수 엄형찬이 7월 4일 먼저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동기 중 가장 먼저 미국으로 진출했다. 심준석은 신인 드래프트 신청 마감일인 8월 16일 미국행을 공식 선언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계약금(최소 100만 달러)을 줄 수 있는 구단이 당장은 없기에 조원빈처럼 2023년 1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2023년 1월 15일 목표 금액에 못 미치는 75만 달러(추정치, 각종 부대 비용 포함)에 계약했다.

2023년 서울고 투수 이찬솔이 7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었으며, 고교 최대어로 꼽히는 마산용마고 투수 장현석 역시 8월 9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계약을 맺으며 미국으로 진출했다. 한편 2023 MLB 드래프트에서 3명의 한국인 선수가 지명되었는데, 심정수의 둘째 아들 심종현이 애리조나의 5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며, 나머지 두명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지만 각각 2020년 신인드래프트과 202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배재고 외야수 신우열과 신일고 내야수 최병용이 각각 탬파베이와 샌디에이고의 지명을 받으면서 미국 무대에서 뛰게 되었다.

2022년 이후부터 다시 미국 진출이 늘기 시작했는데, 하나의 이유는 2022년 3월 MLB의 새로운 노사 협정을 통해 마이너리그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연봉이 기존에 비해 2배 이상 상승하였고, 루키 및 싱글 A 선수들에겐 경기장 교통 수단과 식사가 공급되고 여기에 더블A로 가면 주거지까지 제공될 정도로 개선이 많이 되었다. 또한 미국 유학이 증가하였으며 2023년 드래프트에만 한국인 부모를 가진 선수가 3명이 지명되었는데 하위라운드 선수들의 경우 한국 고교에서 미지명되고도 미국 대학을 통해 실력을 끌어올려 프로에 입성하게 된 선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졸 선수 중에도 드래프트 유망주 200위권에 들었으나 NCAA 유명대학인 LSU, UCLA 등으로 입단하게 된 선수들이 나오고 있어, 한국 고교 이외에도 마이너리그 입단 루트가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 되었다.

4. 일본 진출의 역사

한국 아마추어 출신 일본 진출자 명단
[63]
1 2 3 4 5
백인천(경동고 졸) 이원국(중앙고 졸) 선동열(해태) 조성민(신일고 졸, 96년) 박봉수(고려대 중퇴, 96년)
6 7 8 9 10
이종범 (해태, 98년) 이상훈 (LG, 98년) 정민철 (한화, 00년) 정민태 (현대, 01년) 구대성 (한화, 01년)
11 12 13 14 15
이승엽 (삼성, 04년) 이병규 (LG, 07년) 임창용 (삼성, 08년) 이혜천(두산, 08년) 김태균 (한화, 10년)
16 17 18 19 20
이범호(한화, 10년) 박찬호 (MLB, 11년) 김병현 (MLB, 11년, 2군) 이대호(롯데, 12년) 오승환 (삼성, 14년)
21 22 23
이대은 (MiLB, 15년) 하재훈 (MiLB, 16년)

해방 전 10여 명의 한국인 야구선수가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밟았다고 전해진다. 박현명(1938)[64] 이 오사카 타이거즈(현 한신 타이거즈) 소속으로 처음 진출했고, 원래 이북사람으로 북한 야구계의 원로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65] 그 외에도 유완식(야스다 노부오), 김영조, 이팔용[66] 등이 1세대 일본리그 한국 야구인으로 불릴 수 있겠다.

이들 이후에 일본 야구계에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리그에서 뛰었으며, 심한 차별 등으로 인해 대부분 귀화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그럼에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고 일본야구계의 레전드로 활약한 김경홍(가네다 마사이치, 일본 유일의 400승 투수),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3000안타 등을 비롯한 전설적 타격 기록), 김기태(재일교포)(가네시로 모토야쓰), 김소인(가네시로 아키히토), 김일융(전 삼성, 니우라 히사오), 장명부(후쿠시 아키오) 등의 한국계 선수가 많으며 현재에도 많은 재일교포 3세, 4세 선수들이 존재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해방 후 실업야구 시대의 일본 진출은 백인천이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진출하여 외야수로 장기간 활약한 사례가 있고, 이원국(Ernesto Carlos Won-Kuk Lee, 전 MBC)은 도쿄 오리올즈를 거쳐 멕시코리그로 진출해 통산 200승을 거두기도 했다. 프로야구 출범 후 최초 일본 진출은 1996년 선동열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FA제도가 없어서 임대 형식이었다. 1999년 FA제도가 생기면서 국내에서 실력과 명성을 쌓은 유명 선수들이 FA로 진출하는 것이 일본 진출 사례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고교, 대학 아마추어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것은 미국 진출보다 더욱 적다. 1996년 조성민이 최초의 선수이고, 고려대 출신 박봉수가 신인지명 7순위 지명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기도 했으나, 박봉수는 재일교포였다.[67] 재일교포를 제외한 한국인 아마추어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단에 최초로 지명된 것은 2008년 신인지명(김무영, 신성현)이 되어서였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일지라도 일본에서 고등학교 혹은 대학을 나온(드래프트 당시 최종학력 기준) 아마추어 선수는 일본인 선수처럼 대우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신인지명에 참가할 수 있으며, 외국인 선수 쿼터도 적용받지 않는다.(일본은 외국인 선수 보유가 무한대라서 쿼터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1군 등록은 4명까지 가능.) 그 때문에 2000년대 들어서 중학 야구선수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무영, 신성현, 송상훈[68] 모두 그러한 케이스.[69]

한국프로야구를 거쳐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 크게 성공한 선수들은 투수, 그 중에서도 마무리 투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선동열로, 3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일본에 진출했는데 첫 시즌에는 부진했지만 절치부심한 2년차에는 세이브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맹활약하는 등 약 3년간 리그 탑 마무리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비슷한 위치인 선동열과 정반대 케이스 임창용이 국내에서 부진하다 30대의 나이에 진출하였는데, 일본에 진출한 이후 구위를 완전히 회복해 리그 정상급 마무리로 활약한 바 있다. 그리고 같은 팀 후배 오승환은 2014시즌-2015시즌 2년 연속 세이브 1위를 차지하는 등 또다른 한국인 특급 마무리의 위상을 일본에 보여주고 있다.

반면 정민태, 정민철 등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한국의 에이스 선발 투수들은 탈탈 털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정민철의 경우는 여러 문제가 얽힌 복잡한 케이스인데 항목에서 보면 이해를 할 것이다. 정민태는 타자판 김태균 멘탈 자체에 충격을 먹고 2군에 짱박힌 채 역시 2시즌 만에 고향 팀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한다. 그나마 선발로 자리잡아 활약한 건 구대성 정도였고, 이상훈의 경우 혈행장애가 계속 괴롭혀 선발에서 내려와 불펜 투수로 보직을 바꾼 뒤에야 리그 우승으로 제 몫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진출로 야구계를 놀라게 했던 이혜천은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하지 못했고 2년 뒤 친정팀인 두산 베어스로 복귀했다.

타자들은 전반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경우가 많다.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5툴 플레이어로 꼽혔던 이종범이 그 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잘 나갔으나 시즌 중반으로 향하면서 점차 하락세를 겪게 되었고, 유격수로서 공수 양면에서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평을 받던 와중에 팔꿈치 사구로 인해 하락세가 더욱 심해지면서 결국 외야수로 전향했다. 이후 호시노 감독과의 불화, 프로 의식 문제, 향수병까지 겹치며 결국 2001년 중반에 친정팀 해태를 인수한 기아 타이거즈로 컴백한다. 컨택 하나는 국내 1인자라고 평가받던 이병규 역시 3년간 출루율 3할을 넘긴 시즌이 단 한 시즌도 없을 정도로 고전하다가 2010년 친정팀 LG 트윈스로 돌아왔다. 주루능력 퇴화는 덤.그러나 뜬금없는 라뱅쓰리런은 여전했다. 이병규를 뒤이어 2010년 치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한 김태균은 첫 해 개막전 5연타석 삼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삽질을 보여줬으나 이후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올스타전에도 뽑혔다. 이후 체력이 방전되면서 후반기에는 부진했으나, 어쨌든 21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팀도 우승했으니 이만하면 첫 시즌치고는 괜찮지 않느냐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에는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도 못하는 와중에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 등을 이유로 2년간의 일본생활을 마무리한 후 2012년 한화로 돌아왔다. 김태균과 같은 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한 이범호는 타격, 수비 모두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의 절반 이상을 2군에서 보냈다가[70] 결국 1년 만에 짐을 쌌고,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경우 3년 연속 30홈런을 날리는 등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장기계약 이후에는 부진만 거듭하다가 결국 오릭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다보니 '빅보이' 이대호가 일본에 진출했을 때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많았는데, 이대호는 진출 첫 해부터 팀의 중심타자로 거듭났고 이후에도 꾸준히 3할 타율과 적절한 장타력, 높은 타점14시즌은 제외한다으로 4년간 베스트나인을 두 번 수상했고 2015년에는 일본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프로야구 출신 타자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한일 양국에서 홈런왕에 오른 선수가 타이론 우즈 뿐이라는 것은 넘사벽. 물론 홈런왕 타이틀 빼면 이대호 활약도 종합적으로는 밀리지 않는다.

이후 국내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진출했다가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진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대은하재훈이 대표적인 사례. 그러나 치바 롯데 마린즈와 계약한 이대은은 반 시즌만 제대로 활약을 보인 뒤 부진 및 2군 강등을 반복한 끝에 2년 만에 병역 의무 문제로 귀국했고, 일본 독립리그를 거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한 하재훈 역시 별 활약 없이 한 시즌 만에 일본 독립리그로 돌아갔다. 남윤성 역시 NPB 입단 테스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탈하며 쓸쓸히 한국행.

2017년은 약 20여 년 만에 최초로 NPB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가 없었으며[71] 이후로도 일본 프로야구 진출자는 없다. 2020년 말 성남고 졸업 예정 투수 이준명이 오릭스 버팔로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입단에 실패했고 동의대로 진학했다.[72] 향후 A급 FA가 수 년간 거의 씨가 말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KBO 출신 선수는 쉽지 않을 듯. 이는 급속히 폭등한 한국 FA 시세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구단과의 자금 경쟁에서 이길 만한 구단은 요미우리, 한신, 소프트뱅크 같이 일본에서도 빅마켓으로 분류되는 구단 정도뿐이다. 또한 데이비드 허프, 윌린 로사리오와 같이 KBO를 거쳐 아시아 시장에서 검증된 외국인 선수들이 NPB에 진출하는 사례가 더 많아졌다. 한국인 내에서 따져보더라도 오히려 최지만 같은 메이저리그를 거쳤으며, KBO에서 4년 FA 계약이 불가능한 선수들이 실력이 떨어진 이후 찾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1] 질롱 코리아는 전원이 파견 형식이어서 큰 의미를 두기 어렵기 때문이다.[a] 만 나이 기준[a] 만 나이 기준[4] 2021년 5월 25일 규약 107조가 개정되어 신인 드래프트 절차에 따라 지명 대상이 되었다가 지명 받지 못한 선수가 외국 프로 팀과 계약할 경우 유예 기간을 적용 받지 않게 되었으나, 이지태는 2019년에 시행한 2020년도 신인 드래프트 대상이었고 필라델피아와의 계약 시점이 2021년 2월 15일이어서 개정된 규약 적용 대상이 아니다.[5] 신우열, 최병용은 계약 당시는 규약 개정 이후였으나 KBO 신인 드래프트 대상이 된 것은 개정 전이어서 새 규약 적용 여부는 미지수.[6] KBO 시절의 주포지션은 유격수였으나 메이저리그 이적 이후 내야 모든 포지션을 경험했으며 2023년부터 2루수로 전향.[MLB] 네트워크에 따르면 30만 달러 + 60만 달러 총 90만 달러의 계약이라는 루머가 있었다.[8] 데뷔 시절에는 2루수였으나 수비 문제로 외야 전향[9] 이로 인해 출생지 기준으로 출신 국가를 기록하는 메이저리그 관습상 한국 출신으로 분류된다.[10] 메이저리그만 한정해도, 양키스, 토론토, 템파베이, 텍사스, 미네소타, 보스턴까지 6개의 구단을 경험했으며 마이너리그까지 포함할 경우 9개 구단에 적을 둔 적이 있다.[11] 좌익수로도 뛴 경력이 있지만 수비력 문제로 실험에 그쳤다.[12] 2020년까지는 유격수와 2루수만 보았으나 2021년부터 3루수/좌익수/중견수/우익수 등 모든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게 되었다. 2023년 기준, 수비력의 평가가 높지 않고, 귀넷 스트라이퍼스의 내야수가 포화인 사정상 지명타자와 우익수 출전 비중이 높다.[13] 과거 언론 보도 등에서 계약시점을 밝히지 않은 때문에 계약 당시 계약 일자가 언제인지 의문이 있었는데, 현재 엠엘비닷컴에 나오는 공식 계약일자는 2018년 8월 24일이다. 계약을 앞두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14] 시즌을 늦게 시작하는 루키 리그 선수들을 비롯해 부상, 재활 중인 선수들이 참여하는 캠프.[15] 다만 해군 사관학교가 장교 복무 포기를 거절한다면 5년간 군 복무를 더 해야한다.[16] 군 입대 전 마지막 등판이었던 2019년 8월 29일 이후 3년 10개월 만의 실전 등판이다.[17] 2022년에 BCL 소속 네 팀이 분리해 출범.[18]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미지명선수 노학준의 타율도 0.267이었다.[19] 오클랜드 김성민과는 동명이인. 볼티모어의 불법 계약으로 인해 계약이 취소.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일본 후쿠오카 경제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해외파는 아니다. 그래서 계약금도 정상적으로 받았다.[20] 삼성이 SK로부터 김동엽을 받고, SK가 넥센으로부터 고종욱을 받고, 넥센은 삼성으로부터 이지영을 받는 트레이드.[21] 아마추어~미국 시절에는 포수였다.[22] 사실 베이징 올림픽 전까지는 팀 성적이 괜찮았기에 그냥 젊은 리그 최고급 선발투수 정도로 인식되었으나, 그 이후로 팀이 완전히 무너지며 우리가 아는 소년가장 이미지가 고착화된 것이다.[23] 2,573만 7,737달러 33센트.[24] 신진호는 2014년 4월 캔자스시티를 떠난 뒤 2년 이상 공백기가 있었지만 하재훈은 일본 프로야구 팀 소속으로 2016년 1군 기록이 남아 있다. 하재훈 측은 컵스와의 계약이 끝나 마이너리그 FA가 된 시점부터 유예기간이 산정된다고 주장했지만, 주장대로라면 야쿠르트를 비롯한 일본 프로 팀들은 해외 프로 팀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성립하기에 자연히 가처분신청은 기각되었다.[25] KD Kang, Kyeong Kang 등 다양한 등록명을 썼다. 발음이 어려워서인듯.[26] 탬파베이 레이스는 유망주가 잘 한다고 바로 올리지 않고, 마이너리그 단계를 차근차근 밟게 해 실력을 확실하게 다지도록 하고 메이저로 부른다.[27] 기존 포지션은 유격수. 미국에서는 사실상 3루수로 전향했으나, 2019년 이후 백업이 되면서 3루와 유격수를 모두 맡는다.[28] 소위 "악마의 재능"론.[29] 역대 한국인 선수 아마추어 자유계약 최고액[30] 당초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참가하는 청소년대표팀에 들어 있었으나 이 계약으로 인해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한 선수들은 예외없이 청소년대표에서 탈락시키고 있다.[31] 비슷한 경우로 추신수의 미국 진출 당시 부산고 동기인 정근우가 신인 2차지명 때 보복성으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정근우는 작은 체구 때문에 발전 가능성을 낮게 봤던 게 미지명 사유였다.[32] 한 기사에서 2016년 7월 11일 방출이라고 되어 있는데 미국 날짜 표기(월/일/연도)를 거꾸로 보면서 연도/월/일로 오독한 듯 하다.[33] 이는 신인 특별 지명 당시 한화만 유일하게 지명하지 못했던 것이 작용했다.[34] 미국 이름은 차승 백. 문서를 보면 나오지만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한국 출신 미국인이 되었다.[35] 이 기간 중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역 일반병이나 사회복무요원으로만 복무가 가능하며 군팀인 상무와 경찰청 입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위의 김선기의 경우처럼 입대 자체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KBO가 퓨처스리그 출전을 공식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 2년 경과 후 복귀하는 선수는 반드시 KBO에서 주최하는 트라이아웃을 거쳐야 하며(다만 이 트라이아웃이 규약에 없는 임의 행사이고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데다가 일부 구단이 사전에 미리 접촉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잡음이 일고 있다.)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2차 지명에만 나설 수 있고 지명을 받고 입단하더라도 계약금을 받지 못하며 연봉도 신인 최저 연봉만 받는다.[36] 다시 말해 캔자스시티 구단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야구규약에는 분명히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 관계가 완전히 종료된 시점부터 2년이 지난 뒤에 복귀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다.[37] 안병학에서 개명.[38] 개명 전 이름 유병목.[39] 당초 TO는 1명이었으나 특혜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1명이 추가되어 박준표가 같이 합격했다.[40] FA 자격을 얻은 상태에서 일본으로 진출했기에(단, 규약 개정 전 규정 적용) 국내 복귀시 롯데에 우선권이 있었다. 이는 이승엽이 복귀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41] 사실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선수가 이승학이었다. 미국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자 국내 복귀를 결심했지만 군 면제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2년을 꼼짝없이 날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42] 마이너 리그 사이트의 선수 페이지에는 Active로 표시가 되어 있으나, 역시 Active 표시가 있음에도 텍사스 산하 AAA 로스터에서 삭제된 타이슨 로스의 예를 봤을 때 방출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43] 2014 시즌 도중 '정진'으로 개명.[44] 다만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야만 하기에 근 1년을 더 쉬어야 했지만 그걸 좀 더 앞당긴 셈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고교 대선배인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45] 비 야구부 출신으로는 한선태가 LG에 입단하기 전의 유일한 프로급 선수였다![46] 게다가 그는 당시 롯데 연고였던 마산고등학교 출신이다.[47] 다이이치경제대-후쿠오카 레드와블러스[48]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이영미 특유의 감성팔이가 예외 없이 나오고 있어서 어느 정도 걸러 볼 필요가 있다.[49] 역대로 가장 오랜 기간 NPB에서 활약한 한국 선수이다. (8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1년만 더 뛰었다면 용병 신분을 벗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랜 기간. 리그의 경제적 규모가 좁혀진 것등을 감안하면 한동안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50] 신고선수로 입단하려해도 해당 연도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야만 한다.[51] 이해창의 아들이다. 대만에서도 실패한 후 세미프로인 중국 리그까지 갔다.[52] 보유권이 롯데 자이언츠에 있는 상황에서 무단 입단을 한 것.[53] 즉, 지금으로 치자면 일본야구나 한국야구 외국인으로 뛰는 선수들 정도?[54] 백차승은 병역 기피 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법적인 처벌만 받지 않을 뿐 사실상 범죄자 신세가 되어버렸다.[55] AAA에서 감독이 선발 경기 후 승격 소식을 전하려고 했으나 해당 경기에서 손 부상을 당하며 김선우가 대신 승격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56] 국뽕이라는 이유로 최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행크 콩거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 존재하나, 최현은 엄연히 본명이며, 오히려 행크라는 이름이 별명이다. 정 정확히 말하고 싶다면 현 최 콩거라고 부르면 된다.[57]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한국인.[58] 이에 대해 해당 규정이 삽입된 2009년 4월 이전에 해외로 진출한 선수들까지 최저 연봉만 받게 하는 것은 소급 적용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으나 KBO는 나간 시점이 아니라 돌아오는 시점이 기준이라고 못박았다.[59] 참고로 고교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진출하려던 2012년 경의 오타니 쇼헤이를 설득하기 위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제시한 게 2005년~2009년 경 한국인 마이너리거들의 실패 사례들 일부였다. 2012년이면 아직 멀쩡한 유망주도 많아서 이학주는 Top 100 유망주였고, 이대은 하재훈 최지만 역시 백업급이나마 메이저 입성 가능한 속도로 성장하던 중이었는데 그 때 상황만 가지고도 오타니를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면 당시 마이너리거들 대부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몰락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60] LG 트윈스 입단예정[61] 현대 야구의 흐름상 구속이 90마일 근처인 경우가 많은 아시아리그 투수들은 중남미 해외계약 유망주에 우선순위가 밀렸으며, 최근의 엄격한 해외 계약금 제한 추세에 따라 아시아 지역 유망주들의 계약금은 대개 100만 달러 이내로 머무르고 있다.[62] KBO 신인 드래프트가 기존의 졸업 예정자 자동 지명 대상에서 신청제로 바뀐 이유가 나승엽 때문만은 아니다. 학폭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63] 하기 명단은 최종학력상 한국 고교/대학 졸업 이후, KBO/메이저/마이너 입단 등을 한 이후 일본프로야구에 입단한 경우만 서술한다. 일본의 학교나 아마추어 야구계를 거쳐 일본 프로에 입단한 한국인 선수(김무영, 신성현 등)나 수백명에 이르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사례는 일본 '진출'에는 엄밀히 해당하지 않을 수 있어, 글로는 서술하지만 명단에 넣지는 아니한다.[64] 박현덕, 박현식 선생의 장형[65] 동생들은 해방 전후 인천에 월남[66] 후지모토 히데오, 3세 때 도일, 거인군의 200승 투수, 일본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 단일시즌 최저 평균자책점 0.73 기록 보유.[67] 여담으로 박봉수는 고교 시절에도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을 받았기에 역대 최초로 한일 양국 신인지명에 지명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68] 2012년 LG 트윈스에서도 지명을 받은 적이 있다.역대 2번째로 한일 양국 신인지명에 지명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1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방출되었다. 그리고 2016년 KBO 드래프트에 다시 나갔지만 4년 전과 달리 어느 구단에서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2019년 현재 무직 상태이며 근황도 알려지지 않았다.[69] 송상훈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다.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를 보면 외국인 선수가 일본인 대우를 받는 방법 중에 일본 학교를 다닌 적이 있지만 그 기한이 3년이 안 되는 선수는 드래프트로 프로에 입단해야 하나, 일본 학교를 다닌 시기+일본프로야구 등록 시기를 합쳐서 5년이 돼야 내국인 선수 대우를 받는다.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론상으로만 가능하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일본프로야구에 간 선수는 아무도 없었는데 송상훈이 최초로 이렇게 입단했다.(송상훈은 일본에서 학교를 2년만 다녔기 때문에 일본프로야구에서 일단 3년을 뛰어야 일본인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근데 3시즌 찍고 방출잼) 사실 이런 상황에 처한 선수는 꽤 많다. 왜냐하면 일본으로 고교유학을 간 후 2년만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3학년 때 한국으로 와서 KBO 진출을 노리는 선수들은 상당히 많기 때문. 이 선수들도 본인이 원하면 NPB 드래프트에 지원이 가능했다. 신청을 안 했거나, 드래프트 신청 후 지명받지 못해서 그렇다.[70] 이 때 2군에 가 있는 이범호의 빈 자리를 메웠던 선수가 로베르토 페타지니였다.[71] 김정후치바 롯데 마린즈 입단 테스트를 받기는 했는데 불합격하여 입단에는 실패했다.[72] 이준명은 이후 2023년도 신인 드래프트에 얼리로 나와 kt에 10라운드 지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