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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04040><colcolor=#ffffff> 표어 | [미정] |
약칭 | 예장총공회 |
설립연도 | 1966년 |
소속국가 | 대한민국 |
총공회장 | [미정] |
부총공회장 | [미정] |
위치 | [미정] |
대구공회 / 부산공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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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로회의 종파중 하나.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예장총공회)는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소재 대한예수교장로회 분파인 예장고신 서부교회 전도사였던 백영희 목사가 고신측의 입장 중 예배당 소송, 유엔군 철수 반대 등 몇 가지를 비판[5]하다가 1959년 고신 측으로부터 제명당한 후 1966년 창설한 교단이다.[6][7] 흔히 줄임말로 예장총공회나 '한국총공회'라고 불리기도 한다.[8]
2. 특징
신학적으로는 예장고신이나 예장재건보다도 더 강경한, 기성교회 중에서 가장 강경한 보수주의 성향을 띤다. 또한 인간론 3분설(몸/마음/영)과 인간구원 2분설(기본구원/건설구원)이라는 독특한 교리를 따른다. 기본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모두가 받은 기본적인 구원을, 건설 구원은 앞으로 이루어나가야할 구원, 즉 기성교회에서의 성화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9]성경관도 극보수 성향이라서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같은 현대어 번역본은 아예 성경도 아닌 일개 주석서로 간주할뿐더러, 심지어 단순히 고어를 현대 어휘로 바꾸는 것(예: 약대 → 낙타)조차 반대한다.참고글 즉 성경 번역 개정은 개악이라고 보는 입장.[10] 따라서 한국 주류 개신교가 쓰는 개역개정판이 아닌, 개역한글판을 여전히 사용한다. 성경의 영어 번역본 중에서는 KJV, NKJV, NASB 같은 직역본을 권장하고, NIV 같이 의역이 들어간 것이나 현대 번역본들은 초심자가 영어 성경을 접하기 위한 참고서(주석서)로만 쓰라고 한다. 참고글 대구공회는 개역한글 이외 판본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과 같은 교회연합기관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 교단의 모교회인 부산의 서부교회도 폐쇄적 성향을 보이나 2021년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백영희 목사 생전에는 모든 교회가 기성교회에서 사용하는 21세기 찬송가나 통일찬송가가 아닌 1983년 이전의 한국교계가 사용했던 신편찬송가[11]와 새찬송가를[12] 총공회가 자체 검토하고 201곡 찬송가를 사용하며 일부 복음성가도 수록[13]되어 있으며 예배 때는 201곡만 사용했다. 그러나 현재 부산공회 계통은 여전히 자체찬송가를 사용하나 대구공회의 경우 기성교회와 같이 21세기 찬송가나 통일찬송가를 사용한다. 또한, 일부 부산공회의 경우 예배 외에는 CCM을 부르기도 한다. 총공회 찬송가 책은 부공1의 목회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제삼자도 구입이 가능하다.
백영희 목사 생전에 찬송가 반주 시 사용되는 악기의 경우 오직 피아노와 오르간, 관현악단 등의 오케스트라 반주로만 사용하였고, 부산공회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신디사이저나 키보드, 일렉트릭 기타, 전자악기 등의 현대적 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14] 대구공회는 기성교회와 같이 현대적 악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성교회에는 100년 전 과거에나 볼 법한 남녀칠세부동석[15]을 백영희 목사 생전까지 유지했으며 현재 부산공회는 유지하고 대구공회는 폐한 상태이다.
유치부,아동부(주일학교)의 경우 각 반을 따로 분리하여 반마다 반사라 칭하는 교회의 집사나 권사 등의 교사를 두는 것이 특징이다. 백영희 목사 생전 서부교회 주일학교는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기성교회들과 다르게 장년부 예배 설교와 동일하며 각 반마다 반사가 1명씩 인솔되어 반에 소속된 아동들에게 공과의 내용과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해주는 방식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현재 신자 여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릴적 교회에서 간식을 얻어 먹은 기억이 많이 있는데, 그 흔한 간식조차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서부교회는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하며, 타 교회는 미상.
중고등부에선 '중간반'이라는 명칭으로 남녀가 따로 분리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고[16] 담임목사가 따로 없고 중간반사라 칭하는 목회자들 5~6명 정도가 주마다 서로 돌아가며 설교를 하는 방식으로 한다. 대구공회는 미상.
부산공회3에서는 청년이 되면 최대한 빨리 결혼하길 권하고 공회 내에서 중매를 서기도 한다. 부산공회3의 핵심 교회인 신풍교회[17]는 공동으로 주택[18]을 지어 살기도 한다.
백영희 목사 생전에는 연 2회 산상집회를 열었다. 매년 5월 첫째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대구 북구 노곡동 448 일대에 위치한 총공회 대구기도원[19]에서 위 문단에서 서술한 내용대로 집회를 했다. 규모는 거창집회보다 작은 편. 현재 내부 갈등과 건축 문제로 대구기도원이 철거된 듯하다. 매년 8월에는 첫째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백목사의 고향인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20]로 집회를 가는데 고신 소속 다른 소규모의 교회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규모와 인원 수가 매우 방대하다. 백영희 목사 생전에는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들었지만 지금은 백영희 목사가 당시 집회에 했던 설교를 재독하고 있다.[21] 그러나 부산공회3과 대구공회는 현직 목회자가 설교한다. [22]
3. 공회 분열사
1989년 8월 27일 주일 새벽 4시 50분 무렵, 백영희 목사가 새벽예배 설교 도중 한 신자에게 피살된 이후[23] 하나였던 공회가 분열하였다.첫번째 표면적 원인은 설교 재독과 관련한 문제로 분열하였다. 백영희 목사의 친동생인 백영익 목사, 백태영 목사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목회자들이 예배 시 백영희 목사의 생전 설교 비디오로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며 반대하였다. 반면, 이외 교인들은 임시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재독예배는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대구에 위치한 교회를 중심으로 분열되었다 하여 대구공회와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분열되었다 하여 부산공회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연초부터 예견된 일었다. 당초 총공회의 수정을 요구하는 측이 수정노선 개선안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영희 목사 생전 실현하기가 어려웠으며 백영희 목사가 개선 요구에 관하여 몇 가지 조치를 행하여서 일단락 되었던 문제였다.
이후 대구공회는 타 교단의 교회와 유사한 형태로 점점 바뀌었다.[24] 그래도 여전히 외부 교인이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수정노선으로 변경하였음에도 불구 성문헌법 제정 문제 등을 계기로 서울공회와 대구공회로 갈라졌다. 서울공회는 비교적 인지도가 있는 서울의 잠실동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서울공회이다. 말이 서울공회지만 현재 사실상 교단은 없는 상태이며 독립교회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부산공회는 백영희 생전 노선을 유지하는 보수측이라 할 수 있는데, 서부교회의 백영희 목사 후임 담임목사 시무투표를 계기로 3~4개의 공회로 분열하였다. 부산공회1은 백영희 목사의 장녀이자 최재현 목사의 부인인 백순희 사모가 운영하는 부산 백영희목회연구소[25]를 중심으로 한 공회이다. 5월, 8월 거창집회의 주최측이다. 부산공회2는 백영희 목사 후임 이재순 목사 다음 서영호 목사를 지지하는 측이다. 부산공회 중 규모가 가장 크다. 2010년대까지 서부교회는 2층의 서영호 목사측과 시무투표의 무효를 주장하는 4층의 백명희 사모가 별도로 예배를 드렸다[26] 부산공회3은 백영희목회연구소의 연구부장을 비롯한 직원 출신의 교역자들이 모인측이다. 여수 목회연구소에서 '백영희 노선'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27].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은 총공회 소속은 유지하되, 특정 공회에 소속을 원치 않기도 한다. 교세는 전국 200여 교회이며 현재 대구공회 소속 교회가 절반 정도다.
4. 산하 신학교
각 공회별로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 목회자양성원이 존재한다. 양성원이라 지칭하지만 신학사상 교육은 거의 하지 않고, 성경통독 100회 등 성경 연구와 영성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어 신학대학이라기 보다는 수도원에 가까운 형태로 보아야 한다.[미정] [미정] 공회의 분열로 공회별로 난립해있다.[미정] [미정] [5] 총공회 측 입장은 교회 내부 법률 다툼을 세속 법원으로 끌고 감은 성경에서 금한 바요, 유엔군 철수 반대운동 동참 등은 정교분리에 위배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6] 제명 후 교단 창립까지는 백영희 신앙노선을 따르는 교회들이 독립교회 형태로 운영되었다.[7] 따라서 찾기 힘든 분파이다. 특히 부산공회 계통 총공회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다가 교인 수평이동으로 다른 교회로 옮겨가면, 아무리 장로교회일지라도 너무나도 특성이 달라서 괴리감이 심하게 든다. 심한 경우 유명한 복음성가를 하나도 몰랐던 사례가 있다.[8] 대부분 장로회 소속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에게는 한국총공회라고 하면 듣보잡 취급을 받을 수 있으니 자신이 총공회 교회를 다닌다면 친절히(?) 설명해주자.[9] 현 서부교회 서영호 목사도 설교에서 건설구원을 매우 강조한다.[10] 현대에 갈수록 신학적 영성이 떨어지고, 타락한 세속분위기에 더 물들기 쉽다고 보기에 번역자의 자질도 날이 갈수록 뒤떨어진다고 주장한다.[11] 일제강점기에 사용됨[12] 전자의 새찬송가는 21c 찬송가를 의미하며, 후자는 고신시절 발행된 찬송가이다.[13] 주님 고대가 外[14] 2010년대 들어 현대적 악기를 도입하고 있는 예장고신에 비하면 완전한 전통보수주의를 지향한다.[15]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어져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장로회 교단 중에서는 한국총공회만 이런다.[16] 사용하는 예배공간은 같은데, 한 공간 안에서 남자, 여자가 앉는 의자가 구분된다.[17] 여수공항 앞에 있음[18] 넓은 평수는 없으며 원룸부터 세대원이 많을 경우 방3개 주택[19] 참고로 입구 바로 옆에는 '지원정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20] 공회별로 다른 장소에서 진행한다. 부공1은 도평리, 부공3은 내계, 대구공회는 내오에서 한다. 부공2는 부공1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21] 그것도 첫 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면 새벽기도, 오전예배, 오후예배 3번을 모두 듣게 된다.[22] 왜냐하면 우선 대구공회가 분리된 계기가 재독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것이므로 당연히 재독집회를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부공3의 경우 백영희 목사의 자녀들에게 백목사 생전 설교록의 저작권이 있어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법정 문제로 불거졌으나 자녀들이 승소하여 타 공회는 백목사 생전 설교를 사용하면 안 된다.[23] 새벽예배가 끝나갈 무렵 한 신도가 갑자기 강대상 위로 올라가서 칼로 찔렀다고 한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막을 도리가 없었다고... 이후 장례식에 교인 1만 5천 명 이상이 조문객으로 모였다고 한다. 해당 신도는 교회에 가끔 나오는 자인데 정신분열증을 앓느라 산상기도 중 백 목사를 죽여야 천국에 간다는 환상을 보고 실행한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90도1328 대법원 판결로 확인할 수 있다.[24] 대표적으로 총공회 자체 찬송가보다 일반 찬송가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25] 주요 업무는 백영희 목사 설교록, 총공회 찬송가 판매 및 설교 녹음본을 제공한다.[26] 백명희 사모는 백영희 목사의 막내딸이자 서영준 목사의 부인이다. 과거 백영희 목사는 서영준 목사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건강상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27] 다만 과거와 달리 설교 녹음본 및 설교록은 제공하지 않는데, 백영희 목사 일부 자녀들이 백영희 목사의 설교 저작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법원이 유족들의 손을 들어주어 유족의 허락 없이는 더이상 제공이 불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