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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500> 우크라이나어 | Помаранчева(Оранжевая) революці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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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2. 상세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임기 만료에 따라 물러나면서 치르게 된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쿠치마의 후계자 격인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Віктор Янукович)와 그에 맞서던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Віктор Ющенко) 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갔다. 쿠치마 대통령은 이미 레임덕에 시달렸지만 야누코비치가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동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면서 공산당 지지층으로부터 어느 정도 지지세를 올리는 데 성공했고, 야권의 유셴코도 2002년 총선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극했다.대선을 두 달 반 정도 남겨둔 2004년 9월 5일 유셴코 후보는 독살당할 뻔했다. 사건 이후 유셴코의 혈액에서는 기준치의 1천 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 이 암살 기도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이고르 스메쉬코 전 국장, 블라디미르 사추우크 전 차장과 식사한 후 일어났는데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은 우크라이나 보안국이나 러시아 측에서 친러 후보인 야누코비치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식에 다이옥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었다.[1] 구사일생으로 유셴코는 목숨을 건졌다.
사건 이전 | 사건 이후 | 시간이 지나면서 안경 착용과 치료로 많이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
결국 2004년 11월 대선 결선투표 결과는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되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지만 유셴코와 러닝메이트인 율리야 티모셴코의 지지자들은 투표에서 대규모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했다. 이에 키이우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우크라이나 대법원과 중앙선거위원회가 개입한 끝에 재투표를 거쳐 유셴코가 51.99%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했다.
3. 이후
하지만 개혁 노선 차이로 유셴코 대통령과 티모셴코 총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가 틀어져 갈라섰다. 뚜렷하고 강경한 친서방 정치인으로서 과감한 개혁을 주장한 티모셴코 총리와 달리, 큰 틀에서 친서방 성향에 가까웠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유셴코 대통령은 친러 진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이들의 눈치를 보며 속도 조절을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티모셴코 총리와 갈등을 빚던 유셴코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고 티모셴코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막나가던 티모셴코를 견제하려고 했다. 심지어 유셴코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기도 했다.그래도 당시는 호경기였기 때문에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편이었지만 결국 대침체의 후폭풍[2]으로 1인당 GDP가 3,900달러에서 2,500달러로 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IMF가 우크라이나에 금융지원을 하였으나, 우크라이나는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 반동으로 결국 2010년 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야누코비치 전 총리가 1차 투표에서 유셴코를 탈락시키고 2차 투표에서 경쟁자였던 티모셴코를 꺾고 당선되면서 다시 친러 성향을 보였다. 당장 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나토 가입을 철회했고 특히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2010년 4월 흑해 주둔 러시아 해군의 철수도 취소하고 시한을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장시켰다. 사실 당시에야 야누코비치와 우크라이나 정부는 훗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몰랐겠지만[3] 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혈점령하는 가장 큰 병크가 되어 버렸다.
오렌지 혁명은 단지 정치적인 시위에만 그치지 않아서 위의 지도(2010년 대통령 선거. 적색이 티모셴코, 청색이 야누코비치)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에 따라 친러 성향과 친서방 성향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결선투표에서 티모셴코는 서부 지역에서 최대 91%, 야누코비치는 동부 지역에서 최대 93%를 득표했는데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는 기권표도 집계하는 걸 감안하면 93%면 한국 기준으로는 95% 넘게 득표한 셈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가 내부적으로 앓던 갈등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유로마이단 혁명과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란 최악의 형태로 터져 버렸다.
4. 기타
- 조지 소로스는 2005년 6월 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렌지 혁명과 안디잔 학살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에게 시위대에게 발포하라고 조언했으며, 쿠치마는 이를 따르지 않았으나 카리모프는 이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물론 러시아 정부는 이를 날조라면서 전면 부인했다. # 만약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쿠치마가 시위대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면 유로마이단보다 더한 참극이 벌어지고, 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역사도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1] 사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이 선거를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직접 방문하는 등 야누코비치를 노골적으로 밀어주었다. 푸틴이 우파 성향이라고 해도 친서방 우파보다는 친러 중도파를 더 선호한 것이다. 다만 푸틴이 굳이 선거를 앞두고 야당 후보 독살 같은 걸 벌일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푸틴보다는 쿠치마나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더 유력해 보인다.[2] 사실 금융위기 이후 타격을 입은 경제를 회복하지 못한 우크라이나가 경제지원을 위해 EU와 러시아와 협상했음을 감안하면 유로마이단의 간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3] 이미 우크라이나는 1994년에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크림 반도 등의 영토 주권을 보장받고 1997년에 최종적으로 러시아와 크림반도 영유권 문제를 해결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설마 러시아가 이를 어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