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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5 01:30:27

구 조계사종

용문산 상원사 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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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舊) 조계사종?3. 조계사로 간 범종4. 국보에서 해제되다5. 위작 관련 논란6. 현재의 상황7. 같이보기

1. 개요

일제강점기 현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 사찰인 대화정 조계사에 걸려 있던 범종.

참고로 대화정 조계사는 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사찰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중에 대화정 조계사가 폐찰되고 종을 옮겨놓은 태고사가 현재의 조계사가 되면서 근 칠십여 년을 '조계사 종'이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까지도 진품인가 위조품인가를 놓고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는 뜨거운 감자 같은 유물이다. 만약 진품이라면 통일신라 시대에 만든 1200여 년이나 된 국보급 종이고, 위조품이라면 과거에 존재했던 진짜 범종을 공출하고 일제가 대신 만들어 걸어둔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화정 조계사가 폐사한 이후 종로 조계사로 옮겨졌고, 1998년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옮겨졌다가 2010년 원래 있던 경기도 양평 상원사로 옮겨졌다.

2. 구(舊) 조계사종?

구(舊) 조계사종은 원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상원사에 있던 범종이라고 하여 '용문산 상원사종'으로 불리기도 했다.[1] 그러나 본래 이 종이 있던 절은 용문산 상원사가 아니라 역시 용문산에 있던 보리사(菩提寺)였다. 보리사가 폐사가 되자 종을 가까운 용문산 상원사로 옮겨와 걸어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이 종의 명칭은 원래 있던 절의 이름을 따서 '보리사 종'이나 '보리사 범종'이라고 해야 적절하다.

좀 복잡한 문제지만, 위작설에 따르면 현재 상원사가 소장 중인 '구(舊) 조계사종'은 보리사 범종을 위조한 범종이 된다. 그러나 진품설을 따르면 보리사 범종이 바로 구(舊) 조계사종이다.

3. 조계사로 간 범종

양평 용문산 일대는 구한말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고 일본군은 의병들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용문산 일대의 사찰들을 무차별로 불질렀다. 이때 범종이 있던 상원사도 불에 타 없어졌지만 범종만은 소실을 면했다.

교토에 있는 정토종 사찰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는 일제의 후원을 받아 조선 진출을 꾀한 끝에 을사조약 이듬해 1906년에 서울시] 남산 아래에 '동본원사 경성별원'을 개원했다. 이 절이 바로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다.[2] 대화정 조계사가 있던 자리가 오늘날 서울시 중구 남산동 3가, 소파로 139 한양교회이다.

동본원사 경성별원, 즉 조계사는 범종을 걸기 위해 여러 군데를 수소문하다가 전소된 상원사에 범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들였다. 아마도 1907년쯤인 듯한데, 이능화는 1909년에 환속한 승려가 팔아넘겼다고 저서에 기술했다. 이능화가 연도를 착각했으나 조계사로 넘어간 정황은 정확하게 서술한 것 같다.

어쨌든 조계사는 범종을 구입한 뒤 상원사에서 용문역까지 인근 연수리 주민들을 대거 동원해 범종을 옮겼는데, 1908년 4월 23일에야 겨우 경성에 도착했다. 이틀 뒤 경성별원 설교장에 범종을 걸고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이 종은 '경성별원종'으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연말에 제야의 종을 이 종으로 쳤다고 한다. 그리고 경성방송국에서 그 타종을 라디오 생중계로 진행했다고 한다. 즉 현재의 보신각종이 하던 역할을 원래는 구(舊) 조계사종이 했다는 이야기다.

1939년에 조선총독부는 이 종을 보물로 지정했는데, 이 결정에는 한국 고미술과 고건축을 연구하던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의 평가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세키노 다다시는 구 조계사종이 제작연대는 불분명하나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신라양식과 중국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종이자 우아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남산의 조선신궁조선신사, 박문사등이 모두 폐쇄되고 철거될 때 조계사도 같은 처지가 되었고 그 시점에 범종은 종로의 태고사로 옮겨졌다. 이후 태고사가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조계사종이라고 불렸다. 우리나라 정부가 문화재 조사를 한 이후로는 국보 제367호로 지정했다.

4. 국보에서 해제되다

그런데 1962년 12월 12일에 문화재 관리 총국은 이 범종을 국보에서 해제했다. 해제의 사유는 이 범종이 진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위작 판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황수영 교수였다.

황 교수는 구(舊) 조계사종은 한국 범종의 전통 양식과 확연하게 다름을 근거로 제시했다. 결정적으로 종의 윗부분인 용뉴()가 한국종은 단룡인데[3] 이 종은 두 마리 용을 묘사한 쌍룡뉴였다. 또한 종의 문양이 가사문인데 이는 일본 범종의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만든 조잡한 가짜라고 주장했다. 황수영 교수는 원래 있던 보리사 범종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빼돌리고 경성별원에는 대충 만든 위작을 옮겨서 걸어두었다고 보았다.

이런 황 교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구(舊) 조계사종은 결국 국보에서 해제되었고 일본이 만든 가짜 범종이라는 비난 속에 결국 1998년 조계사는 이 종을 파주 보광사로 옮겼다. 그랬다가 2010년에 원래 종이 있던 양평 상원사가 재건되자 다시 양평 상원사로 돌아왔다..

5. 위작 관련 논란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황수영 교수의 위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위작설을 반박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전각서예가 석도륜(昔度輪)이다. 그는 국보에서 해제된 지 2년 후인 1964년에 <한국고금순례>라는 책에서 구(舊) 조계사종은 진품이고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황수영은 이듬해 <조명기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에서 다시금 위작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1967년에는 츠보이 료헤이(坪井良平)가 진단학보 31호에 낸 '전 상원사종고'에서 세키노 다다시의 평가와 비슷하게 한국 범종과 초기 중국 범중의 형식을 절충한 독특한 범종이라고 평하며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1972년에 남천우 교수가 다시금 진품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남천우 교수는 7세기에 제작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낙주 또한 구(舊) 조계사종은 진품이라고 주장하며 이 종이 중국의 범종양식을 들여온 신라가 오대산 상원사 범종과 성덕대왕신종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단 하나뿐인 신라범종이라고 보았다. 그 근거는…

6. 현재의 상황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구(舊) 조계사종에 다시금 정밀조사를 시행했다. 카이스트 전통과학기술단이 진행한 진행된 과학조사 결과 구(舊) 조계사종은 한국 전통의 재료를 사용한 밀랍법에 의해 제조된 범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게다가 구(舊) 조계사종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구성성분과 일치했다. 일본에서 만든 가짜 범종이라는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의 나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 에도 시대 등 범종의 구성성분과도 비교해 보았지만 화학적 조성에서 차이가 컸다. 오히려 납동위원소비는 804년에 만든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종과 일치했다.
성덕대왕신종과 선림원종, 구(舊) 조계사종이 모두 납동위원소비가 같고, 한국의 전통적인 청동제품의 납동위원소비보다는 낮은 쪽이지만 북한, 중국, 일본의 납광산의 납동위원소비와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서 성덕대왕신종과 선림원종, 구(舊) 조계사종은 모두 신라에서 채굴된 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비천 부조의 신녀가 4현 비파를 타는데, 이는 당나라 시대의 4현 비파로 통일신라시대와 일치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결과는 구(舊) 조계사종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진품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다만 범종의 내부가 근대의 재료로 훼손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종의 윗부분인 천판 중심부의 납 성분이 천판의 다른 부위의 납 성분보다 납 함유량이 9배나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범종 주조 이후에 누군가가 근대의 재료로 범종을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천판에 새긴 명문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았는가 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과학적 분석결과를 근거로 일각에서 구(舊) 조계사종을 국보로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구(舊) 조계사종이 통일신라의 진품으로 공인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 주류의견이다.

7. 같이보기


[1]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와는 당연히 다른 절이다. 용문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오대산 상원사의 범종과 오해할 우려가 있다. 마침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동종통일신라 시대의 범종이라 오해하기 쉽다.[2] 현재의 조계사는 일제강점기에는 태고사라 불렸다.[3] 오대산의 상원사 범종과 국립경주박물관성덕대왕신종, 선림원지 파종 등이 모두 단룡 형식 용뉴의 대표적 형태다.[4] 고유한 단룡뉴 양식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쌍룡뉴 양식을 사용했다. 화재로 파괴되었던 낙산사 동종이나 선암사 소장 대원사 부도암종과 화순 만연사종 옛 보신각 동종등 여러 조선시대 범종 유물들만 해도 쌍룡뉴이다.[5] 일본 범종과 한국 범종은 제작기법이 다르기 때문에 범종의 소리도 판이하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