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
{{{#!wiki style="color:#fff; margin: -0px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초대 브뤼기에르 주교 (1831~1835) | 2대 성 앵베르 주교 (1836~1839)* | 3대 페레올 주교 (1843~1853) | 4대 성 베르뇌 주교 (1854~1866)* | 5대 성 다블뤼 주교 (1866)* |
6대 이복명 리델 주교 (1869~1884) | 7대 백규삼 요한 주교 (1884~1890) | 8대 민덕효 뮈텔 대주교 (1890~1933) | 9대 원형근 라리보 주교 (1933~1942) | 10대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1942~1967) | |
교구장 서리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 (1967~1968) | 11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1968~1998) | 12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1998~2012) | 13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2012~2021) | 14대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2021~ ) | |
* 한국 103위 순교성인 |
아드리앙장 라리보 주교 관련 틀 | ||||||||||||||||||||||||||||||||||||||||||||||||||||||||||||||
|
초대 천주교 대전교구장 | ||||
<colbgcolor=#7B0039><colcolor=#fff> {{{#ffffff 제9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원형근 아드리아노 元亨根 | Adrien-Jean Larribeau}}} | ||||
M.E.P. | ||||
본명 | 아드리앙장 라리보 (Adrien-Jean Larribeau) | |||
출생 | 1883년 2월 4일 | |||
프랑스 제3공화국 제르 라 호미유 | ||||
선종 | 1974년 8월 12일 (향년 91세) | |||
프랑스 타른에가론 몽베통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재임기간 | 경성대목구 부대목 | |||
1926년 5월 1일 ~ 1933년 1월 22일 | ||||
제9대 경성대목구장 | ||||
1933년 1월 23일 ~ 1942년 1월 5일 | ||||
초대 대전지목구장 | ||||
1948년 5월 8일 ~ 1958년 7월 3일 | ||||
초대 대전대목구장 | ||||
1958년 7월 4일 ~ 1962년 3월 9일 | ||||
초대 대전교구장 | ||||
1962년 3월 10일 ~ 1965년 4월 30일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7B0039><colcolor=#fff> 사제수품일 | 1907년 3월 10일 | ||
주교임명일 | 1926년 5월 1일 | |||
STELLA DUCE (별을 따라서)[1] | }}}}}}}}} |
[clearfix]
1. 개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9대 교구장이며 천주교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이다. 한국식 이름은 원형근(元亨根).2. 생애
프랑스의 라로뮤(La Romieu)에서 태어났으며, 1904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907년 3월 10일에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되어, 곧 임지인 조선 파견을 향해 고국을 떠났다. 1907년 5월 21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1908년에 만주 간도로 파견되어 삼원봉(三元峰)에서 첫 전교 활동을 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젊은 선교사들이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자, 한국 천주교는 일손이 달려 더욱 바빠지게 되었는데, 라리보 신부는 이때 충청도 지방을 맡아 40여개의 공소를 돌아다녀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1916년에는 경성대목구의 당가신부가 되어 교구살림을 맡아 보았고, 1926년에 부교구장인 드브레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계승권을 가진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1일 성성식을 갖고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위임으로 실질적으로 경성대목구를 다스렸다. 1933년에 뮈텔 주교가 사망하자 자동적으로 그의 뒤를 이어받아 경성대목구장으로 취임, 1942년 1월 5일 사임할 때까지 일제하의 어려운 시기에 경성대목구를 무사히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외국인 성직자를 구금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자, 라리보 주교는 사임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한국 천주교의 보존을 위해 한국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기남 바오로 신부가 방인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주교로 성성되어 서울대목구를 다스리게 되었다. 대목구장직을 노 주교에게 넘긴 뒤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은거한 라리보 주교는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1948년 충청남도 지역이 독립된 포교지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됨에 따라 이 지역 대전지목구의 지목구장으로 책임자가 되었고, 1958년 이 지역이 대목구로 설정됨으로써 초대 대목구장이 되었으며,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정식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천주교 대전교구장이 되었다. 그 후 주교좌성당을 신축하는 등 대전교구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격무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1965년 3월 현직에서 은퇴하고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1974년 8월 12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58년간에 걸친 한국 천주교를 위한 봉사와 공로로, 196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문화훈장(현재의 국민훈장 모란장으로 승계됨)을 수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