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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5:55:54

로어노크 식민지

잃어버린 식민지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와 실종
2.1. 1584년, 월터 롤리 경의 발견2.2. 1585년, 1차 식민지 개척2.3. 1587년, 존 화이트의 2차 식민지 개척2.4. 1587년, 존 화이트의 잉글랜드 왕국 귀환2.5. 1590년, 존 화이트의 로어노크 귀환, 식민지인들의 실종2.6. 1607년, 존 스미스제임스타운 도착
3.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3.1. 1번째 가설, 전멸설
3.1.1. 파우하탄족이 전멸시켰다는 가설3.1.2.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가설3.1.3. 에스파냐인들에게 습격받아 전멸했다는 가설: 가능성 없음
3.2. 2번째 가설, 융화설
3.2.1. 초와노크 족과의 융화설3.2.2. 투스카로라 족과 융화
3.3. 두 가지 가설의 결합 가설
3.3.1. 두 집단으로 나누어 이주설
3.3.1.1. 소수(12 ~ 15명)의 첫 집단: 헤터라스 섬으로 이주3.3.1.2. 두 번째 집단: 체서픽 베이로 이동
4. 결론5. 학술적 조사6. 대중매체7. 외부 링크

1. 개요

파일:로어노크 식민지를 묘사한 판화.webp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는 16세기 말 잉글랜드 왕국이 개척하려던 북미 지역의 식민지. 현재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데어 카운티 로어노크 섬에 1584년 3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칙허를 받은 월터 롤리 경의 주도로 잠시 건설했다가 사라진 식민지이다.

1584년 4월부터 두 차례 원정대에 의해 현지 개척이 시작됐으나 이듬해 발발한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의 여파로 본국에서 식량 등 물품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가운데, 1590년 잉글랜드에서 후발 원정대와 물자 보급이 왔을 때는 100명이 넘는 식민지인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크로아토안이라는 문구만 남겨져 있어 "잃어버린 식민지(The Lost Colony at Roanoke)"라고 불리게 되었다.

2. 역사와 실종

2.1. 1584년, 월터 롤리 경의 발견

월터 롤리 경은 1584년, 북미 동해안 연안으로 탐험대를 보냈는데, 이때 로어노크섬을 발견했다. 롤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탐험과 식민지 개척을 허락하는 칙령을 받았기 때문에 로어노크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2.2. 1585년, 1차 식민지 개척

1585년 식민지 개척을 위한 함대가 로어노크로 파견되어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지만 잉글랜드 왕국과의 거리가 멀어서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고, 인근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들을 공격해서 초기 식민지 건설은 실패로 돌아갔다.

2.3. 1587년, 존 화이트의 2차 식민지 개척

파일:external/botisrpg.files.wordpress.com/001_001_0010_1335.jpg
당시 로어노크 식민지

2년이 지나 1587년, 존 화이트가 이끄는 남녀 120여 명이 두 번째로 로어노크에 도착해 식민지 개척을 시도했다. 화이트는 첫 번째 식민지가 실패한 원인이 원주민들과 관계가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관계개선을 시도하여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화이트의 손녀이자 미 대륙에서 최초로 탄생한 식민지인 아기 버지니아 데어가 태어났다.

2.4. 1587년, 존 화이트의 잉글랜드 왕국 귀환

화이트는 성과를 보고하고 보급물자를 얻어오기 위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화이트가 영국으로 건너간 때는 1587년 말이었는데, 이 때 선장이 대서양을 건너가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로어노크로 돌아가기를 거부했으므로 구호선단을 보낼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스파냐무적함대가 등장하면서 영국 정부가 배란 배는 모두 징발해버려서 대형 선박을 쓸 수도 없었다.

화이트는 가까스로 작은 배 2척을 구해 물자를 싣고 돌아가려 했으나, 선장들이 과욕을 부리느라 에스파냐 배를 나포해서 수익을 보충하려다가 오히려 잡히는 통에 구호물자도 빼앗긴 탓에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후 영국과 에스파냐의 전쟁이 계속되어 화이트는 3년간 영국에서 꼼짝없이 기다리다가 1590년이 돼서야 사략함대를 통해 로어노크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5. 1590년, 존 화이트의 로어노크 귀환, 식민지인들의 실종

1590년 화이트는 로어노크로 돌아왔지만 식민지는 버려진 지 오래였고 나무기둥에 "크로아토안"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었다. 다만 화이트는 떠나기 전에 "혹시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면 눈에 잘 띄는 곳에 행선지를 기록해두라.", "만약 강제로 떠나게 되었다면 몰타 십자가를 남겨라."라고 지시를 내려뒀고, 섬 안에는 몰타 십자가 표식은 물론 어떠한 전투나 충돌의 흔적도 없었다. 따라서 화이트는 식민지인들이 안전하게 크로아토안섬(현재의 해터라스섬)[1]으로 이주했다고 추측하여 수색하려 했다. 하지만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는 참이라 함대에서 이를 거부했고 이튿날 섬을 떠났다. 졸지에 딸과 사위, 손녀까지 모두 잃고 영국으로 귀환한 존 화이트는 평생 가족들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남은 일생을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고, 1593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6. 1607년, 존 스미스제임스타운 도착

1607년, 잉글랜드 왕국의 탐험가 존 스미스제임스타운에 도착,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정보를 찾아보지만, 별 성과 없이 끝나고 귀국후 제임스 1세에게 이를 보고했다.

3.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렇게 사라져버린 식민지인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3.1. 1번째 가설, 전멸설

3.1.1. 파우하탄족이 전멸시켰다는 가설

첫째는 식민지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했다가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전멸했다는 것이다.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이들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사라진 로어노크섬의 식민지인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처의 파우하탄 족 족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어노크의 식민지인들이 파우하탄 동맹에 참여를 거부한 체서픽(Chesapeake) 족과 같이 살고 있어서 전부 없애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시체가 나오지도 않았고 고고학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3.1.2.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가설

화이트가 떠날 때 배 몇 척을 남겨두고 갔기 때문에, 기다림에 지친 이들이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3.1.3. 에스파냐인들에게 습격받아 전멸했다는 가설: 가능성 없음

에스파냐인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가설도 있긴 하나 말이 안 된다. 화이트가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와 식민지인들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닫고서 10년이 지난 1600년까지 에스파냐에서는 실패한 영국 식민지를 계속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로어노크섬의 정착지 유적에는 전투나 충돌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결정적으로 에스파냐는 로어노크 식민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2]

3.2. 2번째 가설, 융화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융화되었다는 것이다. 화이트는 2번째 식민지 건설을 시도하면서 최초의 실패를 상기하여 주변 원주민들과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상반되는데, 화이트를 따라서 온 토머스 해리엇(Thomas Harriot)은 주변 원주민들과 관계가 평온하고 우호적이라고 기록한 반면, 다른 기록에서는 충돌이 잦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만 원주민 부족이 한둘이 아니었고 부족 간 관계가 꽤나 복잡했던 걸 감안하면 둘 다 맞는 말일 가능성도 있다.

3.2.1. 초와노크 족과의 융화설

역사가 리 밀러(Lee Miller)는 2000년에 출간한 <로어노크(Roanoke: Solving the Mystery of the Lost Colony)>에서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다른 부족에게 공격을 받은 초와노크(Chowanoke)[3] 부족을 찾아가 의지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 주재 에스파냐 대사였던 페드로 데 수니가(Pedro de Zúñiga)는 1607년에 제임스타운 정착민인 프랜시스 넬슨이 그린 지도인 소위 수니가 지도(Zuniga Map)를 확보해서 펠리페 3세에게 이를 전달한 적이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roonock에서 온 옷을 입은 사람 4명이 Neuse강의 이로쿼이족 마을에서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에 더하여 제임스타운의 서기였던 윌리엄 스트래치(William Strachey)도 주변의 원주민 부족 마을에 돌로 지은 2층 집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로어노크 정착민들에게 이를 배우지 않았냐는 추측이 있다.

한편, 17-18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눈 색깔이 회색인 원주민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조상이 백인이라고 주장했다. 1696년, 타르(Tar) 강에 정착한 프랑스 개신교도(위그노, 현재 프랑스 개혁교회)들은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서 금발에 푸른 눈인 원주민들을 만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들의 정착지에서 가장 가까운 영국 식민지가 제임스타운이었는데, 투스카로라 족에게 공격을 받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잃어버린 식민지인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존 로슨(John Lawson)은 1709년에 캐롤라이나 주로 가는 새로운 항해(A New Voyage to Carolina)라는 책에서 해터라스섬에 살던 크로아토안인들이 로어노크섬에서 살았었고, 백인 조상이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상들은 '책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눈 색깔이 회색인 사람들이 섞여 있었으며, 영어에 친숙하다는 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3.2.2. 투스카로라 족과 융화

1880년대 후반에는 로베슨(Robeson) 카운티에 거주하는 투스카로라(Tuscarora)족[4]이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에는 폐어가 된 영어 단어와 굉장히 유사한 흔적이 남아있었고, 식민지인들의 성씨도 제법 많았다.

이렇게 되자 1885년 2월 10일에는 크로아토안 법안이 통과되어 이들을 크로아토안인으로 인정하였다. 이 가설에 따르면, 투스카로라 족은 백인들과 사이가 가까웠는데, 극심한 가뭄에다 영국의 지원도 끊겨서 빈궁하고 고달프게 살던 식민지인들에게 로어노크섬을 떠나 본토로 이주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식민지인들이 새로 이주해 정착한 곳이 로베슨 카운티라는 것.

남북 전쟁 때 남부군 장군이었던 새뮤얼 애시(Samuel A'Court Ashe)는 역사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로어노크 섬의 식민지인들이 버티(Bertie) 카운티의 초완(Chowan)강 쪽으로 이주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사라져버린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행보에 관한 추측 중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투스카로라뿐만 아니라 카타우바(Catawba), 코리(Coree), 지금은 전멸한 사포니(Saponi)족 등이 더 있어서 검증이 필요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바로,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 DNA 프로젝트다.

3.3. 두 가지 가설의 결합 가설

거일스 밀턴은 <대추장 엘리자베스(Big chief Elizabeth)>의 마지막 장에서 위의 두가지 가설을 결합한 견해를 내놓았다. 파우하탄 동맹에 참여를 거부해 몰살시킨 체서픽족 가운데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있었다는 파우하탄 족장의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밀턴은 주장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인물은 파우하탄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제임스타운의 지휘관 존 스미스인데, 익히 알려진 대로 파우하탄 족장은 스미스를 처형하려 했고 이를 막은 사람이 파우하탄 족장의 딸 포카혼타스였다.

파우하탄 족장의 이야기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지만, 생각해보면 처형할 생각이었던 스미스에게 굳이 있지도 않은 일을 이야기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스미스를 살려보내서 그 이야기를 전파해 제임스타운의 영국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밀턴에 의하면 파우하탄 족장은 스미스에게 체서픽 족을 공격했을 때 노획한 머스킷총과 청동제 박격포, 무기의 파편으로 보이는 쇳덩어리 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가졌음은 적어도 체서픽 족에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있었거나 한때 머물렀거나 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 파우하탄 족장이 보여준 이 무기들은 십수 년 뒤에 파우하탄 족과 제임스타운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제임스타운에 반환했다고 한다.

3.3.1. 두 집단으로 나누어 이주설

3.3.1.1. 소수(12 ~ 15명)의 첫 집단: 헤터라스 섬으로 이주
밀턴은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서 이주했다고 추정했다. 첫 번째 집단은 12명에서 15명 남짓한 소수 인원이 나무에 새긴 대로 크로아토안섬으로 이동했다고 보았다. 이들이 크로아토안섬으로 간 이유는 크로아토안 섬의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크로아토안섬의 동쪽 해안은 탁 트여서 섬에서 바다를 전망하기 좋았고, 바다에서도 섬에서 피워올리는 연기 등을 관찰하기 용이했다는 것이다. 밀턴은 이 소수의 인원들은 크로아토안섬에서 존 화이트의 구호함대를 기다렸다고 추정했다.
3.3.1.2. 두 번째 집단: 체서픽 베이로 이동
두 번째 집단에 속한 대부분 사람들은 체서픽 베이로 이동해 체서픽 족과 같이 살았다고 추정했다. 본래 1587년에 존 화이트가 이끄는 식민지인들은 로어노크섬이 아니라 체서픽 베이로 가려고 했지만, 함대 안 갈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어노크 섬에 내렸다고 한다. 체서픽 베이에는 존 화이트와 토마스 해리엇이 환대를 받은 부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우호적인 부족을 기대하고 그곳으로 이동했으리라는 것. 체서픽 족 또한 갈등을 빚는 파우하탄 동맹과 전쟁이 일어날 상황을 대비해서 우수한 무기를 가진 영국인들을 환영했고, 한동안 이곳에서 같이 동거했다가 파우하탄 동맹의 한 부족의 공격을 받아서 대부분이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턴은 전멸하지는 않았고 일부는 살아남아서 파우하탄 족보다 덜 호전적인 부족들로 도망쳤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존 스미스도 몇몇 원주민 부족에 소수 영국인들이 산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들을 만나보려고 해당 부족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고 한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존 화이트가 크로아토안섬을 수색하기만 했어도 그곳에 있던 영국인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행방도 알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1607년에 세운 제임스타운에서 살아남은 영국인들을 찾아나서지 않은 것은 밀턴에 의하면 존 스미스는 파우하탄 동맹에 의해서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사실을 숨겼고, 제임스 1세에게만 비밀리에 보고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제임스 1세는 파우하탄 족장에게 대관식을 치러주고 영국의 신하로 인정했는데, 만약 파우하탄 족장이 영국인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제임스 1세는 물론이고 식민지 개척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들의 이야기를 접했고, 존 스미스는 이들을 찾아나서기도 했으나 현지 원주민들이 안내를 거부하고, 또한 영국인들을 데리고 있는 원주민 추장들이 제임스타운 측과의 접촉을 거부해 실제로 살아있는 영국인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존 스미스제임스타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파우하탄 족과의 협상을 통해서 살아남은 영국인들을 데려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존 스미스가 부상으로 제임스타운을 떠나게 된 뒤에 후임 총독들은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의 수색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결국 이들의 행방은 영원히 묻혔다는 것.

5. 학술적 조사


1998년, 이스트캐롤라이나 대학이 로어노크섬에서 대대적으로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다. 의미 있는 성과가 나왔는데, 특히 16세기 영국에서 쓰이던 인장 반지가 발굴되었다.

또한 기상학자들이 16세기 후반의 로어노크 섬 일대의 기후를 조사해본 결과, 1587년에서 1589년 사이에 로어노크 섬 인근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음을 확인했다. 이 연대는 화이트가 영국에 있다가 로어노크섬으로 돌아온 시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런 결과로 미루어보면 극심한 가뭄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이주라는 결단을 내렸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6. 대중매체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7. 외부 링크


[1] 영국인들이 1584년 로어노크에 처음 왔을 때 완치스(로어노크 출신)와 맨티오(크로아토안 출신)라는 원주민 청년 두 명을 영국으로 데려가 구경시켜 주고 이듬해에 로어노크로 귀환하는 영국 보급선에 태워 돌려보냈는데, 돌아온 이후 완치스는 영국인들을 적대했으나 맨티오는 영국인들에게 호의적이어서 로어노크 식민지인들이 타 원주민 부족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수차례 도움을 줬다. 이 무렵 맨티오는 크로아토안 섬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족의 유력자로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고 적대적인 원주민 부족에게 포위당한 식민지인들 입장에서는 크로아토안 행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2] 당시 스페인과 영국은 서로 경쟁하던 사이였고, 화이트의 귀환이 늦어진 것도 다름아닌 영국-스페인 간 전쟁 때문이었다. 때문에 영국은 북미에 세워둔 정착지와 요새의 위치를 타국에는 최대한 숨겼다. 이 때문에 스페인은 로어노크 식민지의 위치를 끝까지 몰랐으며, 다만 식민지인들이 몽땅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스페인 함선들이 주변을 지날 때마다 사라진 식민지인들이 있나 계속 찾아다녔던 것이다.[3] 알곤킨어를 사용했고 당시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서 가장 강성했던 부족. 서양인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17세기에 전멸당하고 지금은 혼혈만 남아있다.[4] 이로쿼이어를 쓰는 부족. 5대호 지역에 있다가 남부로 이주했는데 로어노크 섬에서도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