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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23:23:14

편집자적 논평

자유 간접 화법에서 넘어옴
1. 개요2. 고전소설 속의 편집자적 논평
2.1. 예시2.2. 반대 양상

1. 개요

편집자적 논평(編輯者的論評, editorial comment) 또는 작가(서술자)의 개입[1]이란 작가(서술자)가 작중 인물이나 사건, 배경에 대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평가가 들어가야 한다. 이 때문에 다른 시점보다 주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며, 현대 소설[2]보다는 고전소설에 많이 등장하게 된다.

서양 문학에서는 특히 서술자가 작중 인물의 입장을 빌려 묘사를 시도하는 형식의 문장을 자유 간접 화법(free indirect spee
ch)이라고도 한다. 이는 서양의 전통적인 문법관으로는 성립할 수조차 없는 비문이었으나, 후대 작가들이 활발히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진부함을 떨치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한국 문학사에서는 고전소설에서 이러한 화법이 오히려 빈번하게 쓰였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정반대의 양상인 셈이다.

주로 '~더라', '~도다', '~는가', '~리라' 등의 어말 어미를 통해 실현 되는 경우가 많다.

애니나 만화 등에는 주로 내레이션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많고 이따금씩 영화에도 나타나기도 한다.

2. 고전소설 속의 편집자적 논평

편집자적 논평은 고전 소설의 특징으로 생각 될 정도로 고전 소설엔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3]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작가의 사상이나 주제의식[4]을 전달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데, 후자의 경우 선인과 악인을 평가 할 때[5] 자주 등장 하는 편이다.

2.1. 예시

“길동이 재배 하직하고 문을 나매, 운산(雲山) 첩첩(疊疊)하여 지향(指向)없이 행(行)하니 어찌 가련(可憐)하지 아니하리요.
허균의 홍길동전에서가져온 예시이다. 어찌 가련 하지 아니하리요 에서 작가(아마도 허균)의 판단이 들어가 있으므로 편집자적 논평에 해당되는 예시이다.
"범을 그리매 뼈를 그리기 어렵고 사람을 사귀매 그 마음을 알기 어렵다하니, 교씨 공교한 말과 아리따운 빛으로 외모 공순하매 사 부인이 교씨 안과 밖이 다름을 어찌 알리요. 예사 사람으로 알고 다만 음탕한 노래가 장부를 미혹하게 할까 염려하여 교씨를 진심으로 경계함이요, 조금도 투기함이 아니어늘, 교녀 문득 한을 품고 공교한 말을 지어 가화(家禍)를 빚어내니 교녀의 요악함이 여차하도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정소설인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의 한 구절이다. 어찌 알리오에서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에 편집자적 논평이 되고, 끝부분의 교녀의 요악함이 여차 하도다 에서 작중 악인인 교씨에 대해서 평가 하고 있으므로 편집자적 논평에 해당 된다.
"몇 달이 지나 가을이 되었다. 장주가 감기에 걸려 때때로 토하며 놀라는 증세를 보였다. 십랑이 말한 계책을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씨남정기에서 가져온 예시인데, 앞의 두 예시에 비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놓치기 쉽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보면 '때가 온 것이다'라는 것은 캐릭터의 생각이 아닌 서술자의 판단이기 때문에 편집자적 논평이라고 볼 수 있다.

2.2. 반대 양상

한편, 한국 고전소설에서는 반대되는 입장의 특이한 어법도 나타난다. 앞서 편집자적 논평들은 서술자가 인물의 입장이 되어 서술을 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반대로 인물이 서술자의 입장이 되어 대사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첩이 어려서 최현의 아들과 더불어 결혼하옵고, 삼 년 후 아비가 화를 당하여 곤장을 맞아 죽사오니, 어미 또한 아비의 뒤를 좇아 죽어 선산에 안장하옵고, 비복과 더불어 삼 년을 의지하여 지내오며 부모의 외로운 넋을 위로하옵더니, 본도 자사 위현이 여차여차 하옵거늘 첩이 이리이리하여 두 번을 속이옵고, ....
월영낭자전에서 호씨가 상에게 아뢰는 말에서 발췌
급한 마음에 아버지의 면전에 당도하자마자 말하길, "아버지, 제 사정이 지금 이러이러하니 도움을 좀 주소서."

'이러이러하다' 혹은 '여차여차하다'와 같은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보다시피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화법이고, 오히려 서술자가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할 때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그 역할을 맡기는 일이 한국 고전 소설에서 종종 나타난다. 이는 현대로 오면서 쓰이지 않는 화법이다.


[1] 통상적으로 이러한 문장을 쓸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는 작가와 서술자가 동일하다. 다른 시점에서는 작가와 서술자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2] 현대 소설에서는 사실주의의 영향으로 잘 나타나지 않는다. 또 편집자적 논평이 너무 강할경우 상상력이 제한되어 재미가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다.[3] 그러니 고전소설 문제에서 편집자적 논평에 관한 보기는 99.9% 맞는 보기이다.그렇다고 무조건 판단하진 말자[4] 고전 소설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작품이기 때문에 유교적 가치관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5] 선인 에겐 칭찬, 동조를 아끼지 않는 반면 악인에겐 엄청난 디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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