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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22:37:38

장안 전투

장평관 전투에서 넘어옴

<colcolor=#000> 장안 전투
長安之戰
시기 194년
장소 사례교위부(司隸校尉部) 경조군(京兆郡)
원인 마등의 군량 요청을 이각이 거절
교전 이각·곽사 마등·한수·유언 연합
황제 황제 유협
군주 대사마 이각
곽사
정동장군 마등
진서장군 한수
익주목 유언
지휘관 이각·곽사군 서량군
이각
곽사
이리
번조






마등
한수
마우[내부호응]
충소[내부호응]
두품[내부호응]
유언군
손조
유범[내부호응]
병력 이각·곽사군
불명
서량군
10,000명 이상[5]
유언군
5,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10,000여 참수
결과 서량과 유언 연합군의 참패, 이각·곽사군의 승리
영향 유언의 은퇴, 권력을 양분한 이각과 곽사의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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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2.1. 발단2.2. 전개
3. 이후4. 평가5. 기타 창작물

1. 개요

194년에 마등, 한수, 유언이 연합 및 중앙 조정 내부의 호응 세력과 연결하여 이각곽사가 장악한 중앙 조정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

2. 정사

2.1. 발단

192년, 관동 제후들이 연합하여 동탁을 공격하자, 위기감을 느낀 동탁이 마등과 한수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원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마등과 한수가 장안으로 향하는 중에 동탁은 왕윤에게 암살되었고, 또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윤도 이각, 곽사에게 살해당하며 정권이 연속으로 바뀌게 된다. 그제서야 장안에 도착한 마등과 한수가 도착하는데, 이각과 곽사 등은 마등과 한수에게 각각 정서장군, 진서장군의 관직을 내리고 다시 양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다가 194년에 마등이 이각과 곽사에게 군량을 요청했으나, 이각이 이를 거절당하자 마등은 매우 분노한다. 마침 조정에 있던 시중 마우, 간의대부 충소, 그리고 익주목 유언의 장남인 좌중랑장 유범 등은 이각의 무리가 천자를 끼고 조정을 장악한 상황을 못마땅히 여겨서 서로 모의하여 마등이 장안을 공격하도록 부추기니, 마등은 군사를 일으켜 미현에 주둔하며 장안을 공격하려 하게 된다. 이때 한수가 마등과 조정의 싸움을 중재하러 왔는데, 결국엔 마등에게 가담하여 장안으로 향하게 된다. 더불어서 장남인 유범이 마등과 호응하기로 했던 만큼, 익주목 유언 역시 교위 손조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마등과 한수를 지원하도록 한다.

2.2. 전개

그러나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되어있었던 마우, 충소, 유범 등의 계획이 발각되어 마우, 충소, 유범 등은 괴리로 달아나게 된다. 서량과 촉의 연합군과 이각·곽사군은 잇다른 전투에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평관(長平觀)아래에서 마침내 크게 싸워 이각과 곽사는 마등의 군대를 1만여나 참수했으며, 마등과 한수는 겨우 목숨만 건져서 양주로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번조는 달아나던 한수를 추격했는데, 한수는 뒤쫓던 번조에게 둘이 동향인[6]이라는 점을 들어 말로써 번조를 설득하자, 번조는 한수와 한참 동안 웃으며 얘기하다가 한수를 그냥 놓아주고 되돌아간다. 이때, 이각의 조카 이리는 말 위에서 번조를 따라오다가 그 광경을 목격한다. 말 위에서 이야기한 그 내용은 알지 못했지만 그 뜻이 매우 친밀해 보였으므로 후에 이리는 이를 이각에게 알리게 된다.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자들 역시 공격받아 모조리 죽임을 당하며, 싸움은 이각과 곽사의 대승으로 끝난다.

3. 이후

전투가 끝나고, 자신의 조카 이리로부터 앞서 언급한 한수와 번조의 회담을 전해들은 이각은 번조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장은 번조의 세력이 강하기에 일단은 놔뒀고, 같은 해 8월에 좌빙익으로 쳐들어온 강족을 토벌하는데 곽사와 번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년에 번조가 동쪽으로 관을 나가려 하면서 군사를 요청하자 이각이 번조를 연회에 불렀고, 번조가 술에 취했을 때 이각은 자신의 생질 호봉에게 명하여 번조를 주살한다. 원래는 비슷한 위치였던 이각, 곽사가 번조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 장제는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장안에서 이탈하여 홍농에 주둔하기로 하여, 권련은 고스란히 이각과 곽사가 양분하게 된다.

마등과 한수는 또다시 조정으로부터 사면을 받게 되어 마등은 안적장군(安狄將軍)에, 한수는 안항장군(安降將軍)에 임명된다. 아무래도 이각과 곽사 입장에서는 마등과 한수를 죽이지 못한 이상, 서량에서 영향력이 강한 이들이 언제 다시 자신들을 노릴 지 모르니 이렇게라도 조치를 취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마등과 한수를 지원한 유언은 전투에 참여한 모든 세력 중 가장 처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장남 유범은 이각과 곽사에게 살해되고, 장안에 있던 차남 유탄 역시 연좌제로 사형되었다. 여기에 면죽에 화재까지 덮쳐 온통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유언은 아들들의 잇따른 비보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심신이 쇠약해져 4남 유장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은퇴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4. 평가

흔히들 이각과 곽사의 군사적인 능력을 평가할 때, 장안 전투를 예시로 들기도 한다. 상대였던 서량군은 결코 약한 군대가 아니었으며, 촉땅의 군세까지 서량군을 원조하는 형세에서 깔끔하게 서량과 촉의 병사들을 박살내고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각과 곽사가 비록 정치적 능력이나 전략적 식견은 형편 없어도 전술적인 능력만큼은 진짜라는 의견이다.

다만 이각과 곽사의 승리는 병력의 질과 양에서 우위에 의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 이각과 곽사가 운용하던 병력의 구성을 살펴보면, 마등이나 한수와 마찬가지로 서량 출신의 병사들과 후한 조정의 정예된 중앙군합쳐진 것인데, 그 머릿수도 많았으니 상대적인 군사력으로 비교하면 당대 중국 전토 최강, 최대의 군대를 보유한 셈이었다. 저 당시의 관동 군웅들 중에서도 강대하다고 할 수 있던 공손찬, 원소, 원술, 유표조차도 이에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어찌되었든 이각과 곽사는 수중에 든 군사를 적절하게 운용하여 적을 격파하는 수준의 군재는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장 대군을 이끌면서도 연거푸 패했던 원술의 사례가 있으니...

결과적으로, 이 전투를 기점으로 당장에 이각과 곽사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관동의 군벌들은 이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거나 보전하기에만 급급하여 관중까지 진격할 여력이 없었으며, 서량과 익주는 한동안 공세로 나올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주변에 난립하는 약소 군벌이라면 몰라도 이각과 곽사가 위기감을 느낄 수준의 강성한 군벌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정치나 민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이각과 곽사가 전횡을 일삼게되고, 기어이 서로 권력다툼을 일으켜 서로 싸우는 통에 장안일대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그러다가 196년에서야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조조가 헌제를 구출하고, 내분으로 피폐해진 이각과 곽사를 토벌하게 된다.

5. 기타 창작물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는 이각과 곽사가 천자를 옹립하여 장안에 할거한다. 세력의 군주는 이각으로, 곽사는 이각의 부하로 나온다. 마찬가지로 이때 서량은 마등이 장악한 상태고, 한수는 마등의 부하로 나온다. 서로가 인접세력이기 때문에 초반부터 실제 역사대로 격돌을 피하기 어렵다.
삼국지 11에서는 194년 6월 군웅할거 시나리오에 이각은 안정과 장안을 장악한 상태로, 마등은 무위와 천수를 지배하는 상태로 시작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익주의 유언은 이미 사망하고 유장이 승계한 상태로, 해당 시나리오 자체가 장안 전투 직후를 다루고 있기에 장안전투는 구현되어있지 않다.
[내부호응] [내부호응] [내부호응] [내부호응] [5] 1만의 참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봤을 때, 최소한 1만 이상의 군세였을 것이다.[6] 둘 다 서량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