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225년 3월 2일[1], 압록강 근교에서 고려를 방문한 몽골 제국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정체 불명의 괴한들과 맞서 싸우다가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 미제사건은 고려의 역사를 바꿀 여몽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age(1225-03-02)]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건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여부가 아직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은, 사건의 비중 자체만 놓고 보면 외교적으로 적당히 무마가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몽골이 이 사건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2. 사건 배경
2.1. 대요수국의 난
고려와 몽골 제국이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1219년에 있었던 강동성 전투 때였다. 당시 만주 지역의 정세는 굉장히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여진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가 말기에 접어들어 나라가 막장이 되어 거란족과 몽골족 등 주변 민족들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몽골족은 1206년에 태조 칭기즈 칸이 몽골 내 소부족들을 규합하여 몽골 제국을 세웠다.그리고 거란족들도 슬금슬금 독립할 준비를 했다. 그때 거란족의 야율유가(耶律留哥)란 인물이 몽골의 지원을 받아 금나라에서 독립하여 대요국(大遼國)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동요(東遼)라고 한다. 이때 금나라는 요동선무사 포선만노(蒲鮮萬奴)에게 무려 대군 400,000명을 주어 야율유가의 동요 군대를 토벌하도록 했으나 포선만노의 군대는 처참하게 박살이 났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요령성의 요양에서 동진(東眞)→동하(東夏)라는 새 나라를 세우고 독립해버렸다.
그런데 거란족은 독립한 건 좋았으나 곧바로 내분에 휩싸였다. 몽골의 지원을 받아 독립한만큼 동요의 야율유가는 철저하게 몽골 제국의 제후국 노릇을 했으나 일부에서
"몽골의 지배를 받는 거나, 금나라의 지배를 받는 거나 뭐가 다르냐?"
며 반기를 들고, 거란족만의 독자 노선을 걷는 새 나라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유가의 동생인 야율시불(耶律厮不)이었다. 그는 형인 야율유가를 축출하고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이를 후요(後遼)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야율시불은 몽골에서 보낸 다루가치 300명도 몰살해버리는 간이 부은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렇게 천지분간 못하고 까불던 야율시불은 나라를 세운지 꼴랑 70일 만에 암살당했다.야율시불이 암살당한 후 몽골은 축출당했던 야율유가를 파견하여 대대적으로 반몽 강경파인 후요 토벌에 돌입했고, 이제 후요에 남은 선택지는 항복 또는 버티기밖에 없었다. 야율시불의 아들인 야율금산(耶律金山)과 야율금시(耶律金始)[2]는 몽골과 금나라에 비해 비교적 허약한 고려로 들어가 거점을 마련해 부족한 물자를 충당하고, 장기간 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정해 승상 야율걸노(耶律乞奴)를 필두로 해서 고려로 쳐들어갔다.[3]
이것이 1216년 8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고려는 거란 유민 세력의 이 공격을 상시적인 국소 분쟁으로 간과했다, 실권자였던 최충헌은 이 방심으로 인해 초동 대응에 실패했다. 평상시의 국지전이었다면 이런 지원 요청이 오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국경에서 구원을 청하러 온 전령을 귀양보내는 황당한 짓을 저질렀고, 1개월 뒤인 9월에 1차 저지에 성공했지만 고려에 침범코자 한 거란 세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같은 해(1216) 12월에 거란족 전체 전력이 드디어 고려 국경을 넘어와 수도인 개경 인근에 출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면전으로 비화되고 나서도 최충헌은 핵심 전력을 내부 단속에 우선시해 투입하지 않았다. 고려 내부에선 천민 계급이었던 '양수척'들이 거란족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내통[4]했고, 근거지를 상실해 고립무원이었던 거란 세력은 배수진을 친 채 도주와 반격을 반복하며 고려 영내에서 후퇴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전열을 재정비한 우봉 최씨 무신정권은 즉시 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김취려를 중심으로 해서 반격에 돌입, 7번의 전투에서 대승하고, 1217년 7월 간신히 거란군을 국경 밖으로 격퇴시켰다, 보통 연패를 겪은 군대는 후퇴하기 마련이나 전술했듯이 이 거란 잔당은 이미 돌아갈 곳이 없었다. 바로 3개월 뒤인 10월, 갈라현 여진 세력을 지원군으로 삼은 거란 유민은 고려 영내를 재침범했다. 1218년 4월에 이르러 최씨 무신정권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각 도의 안찰사들에게 동시 경계 태세를 조율케하고, 거란 세력이 주력군의 공격을 회피해 타 지역으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1218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고려군은 동북면으로 침범한 거란족을 서쪽으로 퇴각시켜 강동성으로 몰아넣고,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와 동시에 몽골 제국이 남진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칭기즈 칸은 장군 카치운(哈眞, 합진)[5]에게 10,000명의 군사를 주어 후요의 유민들을 토벌하도록 했고, 몽골의 위성국가였던 동하에게도 명령하여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지휘하는 20,000명의 군사가 몽골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강동성에서 거란 유민과 고려군 사이에 대치 상태가 전개되고 있었으나, 몽골과 연합한 동하는 도방과 고려 무신정권에 일방적인 통보를 날리고 참전했다. 고려 조정은 이들 연합군의 막강함을 알고, 강동성의 조충과 김취려의 주력군에게 확전을 주의하며, 연합군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라고 황급히 지시했는데 몽골군은 거란 유민의 침입 경로를 그대로 답습해 영내로 침입했다. 그해 12월 강동성 전투가 시작되었고, 1219년 1월에 거란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었다.
2.2. 형제의 맹약
한편, 거란 유민들이 진압된 후 고려와 몽골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때 맺어진 맹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첫 번째는 몽골이 자국의 강성해진 국력을 믿고 고려를 너무 무시하며 무례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특히 포리대완(푸타우)이라는 자는 고려의 고종이 나와서 자신을 맞이하라고 하거나, 고종의 양 손을 맞잡는 무례함으로 저의를 모를 만행을 저질렀다. 두 번째는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의 강경한 대몽 외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양국의 관계는 이름만 형제였을 뿐, 속은 잔뜩 곪아터져 있었다. 이 곪을 대로 곪아터진 결과 일어난 사건이 바로 이 저고여 피살 사건이었다.몽골은 고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고, 노골적으로 공물을 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가 몽골 제국이 그저 흔해 빠진 북방 오랑캐가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푸대접을 했다는 것이었다. 남송 및 금나라와 통교하면서 고려 조정이 국제 동향을 모를 리도 없었거니와 강동성 전투에서의 몽골군에 대한 《고려사》와《고려사절요》 양쪽의 상반되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두 기록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당시부터 몽골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세력이라는 사실을 고려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1221년에 몽골 사신들이 고려를 방문했을 때, 최우는
"성 밖에 몽골 사절단이 왔습니다"
라는 동북면병마사의 보고를 받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병마사에게 "적당히 위로해서 보내라"
며 사신에게 푸대접을 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때부터 몽골과 틈이 생겼다고 했다.[6] 그리고 몽골의 공물 요구에 대충 조잡한 주단을 모아서 주는 등 뒷일에 대한 생각이 없이 막가파로 나갔다. 당시 칭기즈 칸은 호라즘 원정을 떠난 상태였고, 내정은 막내 아우인 테무게 옷치긴에게 일임한 상태였다.고려가 잇달아 자국 사절단을 푸대접했다는 보고를 받은 테무게 옷치긴은, 그 보복으로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무리한 공물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몽골 측에서 요구한 공물은
수달 가죽 10,000장, 고운 주단 3,000필, 가는 모시 2,000필, 솜 10,000근, 용단먹 1,000장, 붓 200자루, 종이 100,000장, 자초(紫草) 5근, 홍화(葒花)·남순(藍荀)·주홍(朱紅) 각 50근, 자황(雌黃)·광칠(光漆)·동유(桐油) 각각 10근씩
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온 자가 바로 저고여라는 인물이었다. 저고여는 테무게 옷치긴의 친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후, 갑자기 꾸러미 하나를 들고 와서 바닥에다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 꾸러미 안에 든 건 1년 전에 고려에서 보낸 조잡한 주단들이었다. 즉, 고려에서 보낸 공물을 그대로 반품한 것이었다. 이후로 저고여는 몇 차례 더 고려를 방문했는데 이때마다 심한 행패를 부려 원성이 자자했다.
제구예 등이 균지를 전달한 다음, 전 아래로 내려가면서 각자 품속에 있었던 물건을 꺼내어 왕 앞에 던져버렸는데 모두 작년에 주었던 거친 명주였다.
《고려사》 〈세가〉 고종 8년(1221) 8월 13일
《고려사》 〈세가〉 고종 8년(1221) 8월 13일
3. 사절단 몰살 사건
몽골 측의 무리한 공물 요구로 인해 고려는 막대한 재정 지출을 하게 되었다. 사실 조공이란 건 세간의 인식과 달리 조공을 바치는 쪽보다 받아 먹는 쪽이 적자를 보는 구조였다. 왜냐하면 조공을 받아먹었으면 그보다 더 많은 하사품을 내려야했기 때문이었다. 조공을 받아먹는 쪽은 형님 대접을 받으며 자존심을 세우게 되고, 바치는 쪽은 흑자를 보니까 경제적인 실리를 취하는 것이었다. 허나 문제는 그건 어디까지나 중원 왕조와의 이야기일 뿐이고, 몽골은 그런 거 없었다. 농경계 한지파(漢地派)[7]의 수장이었던 세조 쿠빌라이 칸(忽必烈汗)이 제5대 칸으로 즉위하여"한족은 한족의 법으로 통치한다."
고 천명하기 이전까지 몽골 제국은 철저하게 유목민 방식대로 약탈 경제를 고수했다. 그렇기에 고려는 쎄빠지게 공물을 갖다바쳤지만 돌아오는 건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래서 고려는 갈수록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테무게 옷치긴이 요구한 공물은 안 그래도 허리가 휠 정도로 과중했다. 그런데 이걸 어렵사리 맞춰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 사절단들이 국경 근처에서 그걸 모조리 다 갖다버리고 수달 가죽만 덜렁 챙겨 갔다고 한다.[8] 즉, 고려는 그냥 돈을 길바닥에다 뿌린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그들에게도 손해이고, 고려에게도 매우 모욕적인 행위로 몽골 사신단의 목적이 꼭 공물 그 자체가 아닌 시비거는 행위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저고여 일행들에 대한 민심이 점점 악화되었다. 이렇게 파열음을 내면서 위태롭게 이어지던 형제의 맹약은 결국 휴지쪼가리가 되고 말았다.
1225년 1월에 고려를 방문하여 또 다시 공물을 두둑이 뜯어낸 저고여의 일당들은, 또 국경 근처에 이르자 비단 등의 물건들은 다 갖다버리고 수달피만 덜렁 챙겨서 갔다. 그런데 그때 수십여 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사절단 일행들을 습격했고, 결국 그 과정에서 저고여가 피살당했다. 보고를 받은 테무게 옷치긴은 당장 고려를 침공하려고 했으나, 우선 탕구트족의 서하 원정을 앞두고 있었고, 또 1227년에 칭기즈 칸이 붕어하여 후계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6년을 지체하다가, 1231년에 고려를 침공하게 되니 이것이 길고 긴 여몽전쟁의 시작이다.
몽골 사신이 서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면서 다만 나라의 예물인 수달 가죽만 가지고 가고, 그 나머지 비단 등의 물품은 모두 들에 버리고 갔는데, 도중에 도적에게 살해당하자 몽골에서 도리어 우리를 의심하여 마침내 국교가 끊어지게 되었다.
《고려사》 〈세가〉 고종 12년(1225) 1월 22일
《고려사》 〈세가〉 고종 12년(1225) 1월 22일
4. 범인은 누구인가?
당대에도 미제 사건이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추측밖에 할 수가 없다. 용의선상에 떠오른 국가들은 아래와 같다.4.1. 용의국가 1: 고려(최우)
사건 보고를 받은 몽골 측은 고려인들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몽골은 곧바로 고려에 국교 단절을 통보했고 그를 빌미로 6년 후 고려로 침입하게 된다. 몽골이 고려를 의심한 이유는 1231년에 그들이 침입했을 때 당시 몽골군을 이끌었던 원수 살리타이(撒禮塔)가 고려 조정에 보낸 편지에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만약에 너희들이 투항했다면 우리들은 사신 저고여(瓜古與)[9]를 너희에게 보낼 뿐 너희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저고여는 살해당했다. 우리들은 사신을 파견해 저고여를 찾으려 했으나 너희들은 화살을 쏘아 저고여를 찾으러 간 사신을 쫓아내었는데 이는 너희들이 저고여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12월
즉, 몽골 측에서 저고여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 측에서 그 사신 일행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만약 고려가 결백하다면 당당하게 저고여의 시신을 넘겨주고 결백함을 호소했을 것인데 사건 조사를 위해 온 사신들을 향해 경고 사격을 가해 쫓아냈다는 것은 뭔가 뒤가 구리다는 뜻이므로 이로 미루어볼 때 고려 사람들이 저고여를 살해했다는 것이 몽골 측의 주장이었다.-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12월
물론 고려 측에서 정말로 저고여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저고여는 고려에서 수시로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 질 나쁜 자여서 고려인들치고 그에게 원한이 없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건이 고려의 소행이었다면 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였을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범인이 고려 사람이라면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실권자 최우이다. 암만 최우가 멍청하고 무능했다기로서니 그렇게 앞뒤 계산 없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 최우라는 인물은 대단히 막가파적 인물로 대책없는 막장 외교를 구사했던 인물이었다.
여몽전쟁/평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생각보다 그 전쟁은 큰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 씨 정권 측 집권자들은 자신들 정권 수호에만 눈이 멀어 몽골군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부랴부랴 항복한다고 사신을 보냈고, 몽골군이 그 말을 믿고 항복 시 이행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철군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차일피일 핑계를 대며 모든 합의 사항 이행을 배째고 버티다가 유야무야 파기해버리는 짓을 30년 동안 반복했다. 덕분에 죄 없는 고려 백성들만 들락날락 쳐들어오는 몽골군의 칼날에 죽어나갔다. 또 최우는 1232년에 서경에 주둔했던 72명의 다루가치들을 모조리 살해했던 적도 있었다.[10] 그야말로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보는 인물이었다.
본래 역사서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만 기록되다 보니 당시 고려 백성들의 여론 등에 대해선 《고려사》에 그다지 많이 기록되어 있진 않다. 다만 당시 몽골 측에서 요구한 공물의 양이 매우 과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것이고 이렇게 몽골에 끌려다니는 조정의 태도에도 당연히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최우가 국민적 불만을 잠재우고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고여 일당들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론 나름대로 몽골 측에 경고 메시지를 던져주는 효과도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무시하고 깽판치면 저고여같이 뒈질 줄 알아라!"는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우가 이 사건의 범인이란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물론 몽골 측에는 공식적으로 "우리 소행이 아니다."고 부정했겠지만 그냥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기록하는 역사서에까지 그걸 숨길 필요는 있었을지 의문이다. 공식적인 외교 문서에는 당연히 "이건 우리 소행이 아니다."고 적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 돌려보는 역사서에는 최우가 범인이라면 "최우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저고여 일당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식으로 기록이 되었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1232년의 다루가치 살해 사건은 최우가 사람을 보냈다고 한, 몽 양쪽 사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11]
4.2. 용의국가 2: 금나라(우가하)
반면, 고려는 자국에 쏟아진 혐의를 부인했고 이 사건의 범인은 금나라의 잔당인 우가하(于加下)라고 주장했다. 고종이 당시 몽골 제국의 칸이었던 오고타이 칸에게 보낸 국서에 고려 측의 진술이 들어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저고여(著古與)가 죽었던 것은 이웃 나라의 도적들이 저지른 일임을 폐하께서도 쉽사리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거쳐 온 행로로도 넉넉히 증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12월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12월
원수(元帥)가 말하기를, ‘도로가 매우 험난하니 그대 나라에서 왕래하기에는 분명 어려울 것이다. 매년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보내되 10인에 불과할 것이니, 그들이 올 때 공물을 보내도록 하라. 오는 길은 반드시 포선만노(浦鮮萬奴)의 땅을 지날 것이니 그대는 이것으로 증거를 삼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사신이 오는 것은 한결같이 약속한 것과 같아 매년 우리나라에서는 번번이 국신예물(國贐禮物)을 맡겨 황제께 진상하였습니다. 오직 갑신년(甲申年, 1224)에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포선만노의 영역을 지나지 않고 파속로(婆速路)를 따라 우리나라로 왔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사신을 접대하던 것에 의거하여 매우 신중하게 접대하였고, 또 국신도 보내었습니다. 그 뒤 사신이 왕래하는 것이 조금 뜸하기에 소국은 그 까닭을 적이 괴이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오래 뒤에 들으니 우가하(于加下)가 중간에서 길을 가로막고 상국(上國)의 사신을 살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후 우가하는 거짓으로 상국의 복장을 갖추고 우리의 북쪽 변경지역[北鄙]에 들어와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포선만노 또한 동쪽 변경지역의 2개 성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는데, 그들의 복색 또한 상국과 같았습니다. 이때 이후로 침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9년(1232년) 11월
본래 고려와 몽골이 처음 형제의 맹약을 맺었을 때 몽골 사신은 반드시 포선만노의 동진/동하를 거쳐 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는데 저고여 일행들이 동하가 아닌 금나라의 파속로(婆速路)를 따라 고려로 왔다는 것이다. 당시 파속로 일대엔 금나라 원수 우가하(于加下)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즉, 저고여 일행이 안전하게 합의된 동하 땅이 아니라 위험한 금나라 파속로를 거쳐서 고려로 들어왔고 또 고려에서 몽골로 돌아갈 때에도 역시 동하 땅이 아닌 금나라 파속로를 거쳐서 갔으니 고려와는 전혀 무관한 파속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우가하 휘하의 금나라 군대들이 저지른 소행이란 게 고려 측의 진술이었다. 또한 일전에 몽골 사절단을 향해 화살을 쏘아 쫓아낸 것 역시 그 즈음에 금나라 잔당들과 동하 잔당들 즉, 여진족들이 몽골인 복장을 하고 북방을 노략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경고사격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9년(1232년) 11월
그리고 1232년 11월에 보낸 국서를 계속해서 읽어보면 동하에서 몽골 사신에게 "고려는 그대 나라를 배신하였으니 삼가 가지 마십시오."라고 이간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 사신이 그 말을 듣지 않고 저고여 피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가던 길을 계속 가자 먼저 사람을 보내 고려인 복장을 하고 계곡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사신이 지나가자 활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금나라와 동하가 서로 짜고 고려와 몽골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게 고려 측의 주장이었다. 그 증인으로 포선만노의 부하로 있다가 도망쳐 온 왕호비(王好非)란 사람을 들었다.
당시 금나라는 몽골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거의 멸망 직전까지 이른 상황이었다. 당시 금나라는 막장스런 외교 행보 덕분에 거의 주변국들 대부분이 적대관계였다. 우선 몽골 제국과는 정말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 이유는 칭기즈 칸 본인의 작은할아버지인 암바가이 칸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 제국이 성립된 그 이후부터 금나라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금나라로서는 칼끝을 다른 나라로 돌릴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의로 고려를 방문하고 온 사절단을 습격하여 고려인의 소행으로 위장하여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가도록 유도하고 국력 회복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이런 일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다만 금나라 입장에서 불행이라면 여몽전쟁/평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몽골은 처음부터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는 없었다. 단지 속국으로 두는 것에만 만족하고 금나라 멸망에 오히려 더욱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이 금나라 소행이라면 그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재나 역사책에서는 보통 이 주장을 채택을 많이 한다.
4.3. 용의국가 3: 동하(포선만노)
또 하나 떠오르는 용의자는 바로 동하의 포선만노이다. 본래 포선만노가 세운 동하란 나라는 거의 몽골의 위성국가나 다름 없었던 나라였다. 애초에 본래 이 나라의 이름은 대진(大眞)이었고 요령성 요양에서 세운 나라였는데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고 동쪽으로 쫓겨나 동진(東眞) 혹은 동하(東夏)라고 부른 것이다. 그 때문에 포선만노는 급 쭈그리가 되어 몽골이 하라는 대로 하던 하수인 노릇을 했다. 그런데 1221년에 칭기즈 칸이 호라즘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와 러시아 지역의 소국들을 정복하느라 한 몇 년을 돌아오지 않자 슬그머니 배반을 계획하게 된다. 그리하여 포선만노는 1224년 1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제안했다.즉, 칭기즈 칸은 현재 먼 외국에 나가 있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대신 국정을 돌보고 있는 테무게 옷치긴은 탐욕스럽고 포악한데다 덕이 없는 자라 우호 관계를 끊었으니 우리끼리 서로 잘 지내보자며 동하는 청주(靑州)에 고려는 정주(定州)에 교역소를 설치해 이전처럼 교역을 하자는 것이었다. 말이 수교 제안이었지 사실상 고려와 몽골 사이에 끼어서 이간질하려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고려 입장에선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선 몽골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동하란 나라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었다. 본래 동하란 나라는 몽골 제국의 위세에 호가호위하여 고려를 상대로 행패를 부렸던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끼리 서로 힘을 합쳐서 몽골이랑 같이 맞서자고 하는 걸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고려는 이런 동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1225년 음력 1월에 이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동하는 이 사건이 있고 불과 7개월이 지난 1225년 8월부터 1229년까지 4년여에 걸쳐서 틈나는 대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런 점을 볼 때 저고여 피살 사건은 동하 측에서 자국의 수교 제안을 거부한 고려에 앙심을 품고 저지른 사건이었고 1225년 8월부터 1229년까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로 소규모 부대를 보내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사건에 동하가 개입되었다는 의심은 이미 고려시대 당대부터 있었다. 위에서 본 고종의 국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또한 저고여 일행이 고려와 합의된 대로 동하의 영토를 거쳐가지 않고 금나라 파속로 일대로 간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몽골 측에서 어느 정도 동하의 배신을 눈치 챘기 때문에 사절단 보호를 위해 의도적으로 경로를 변경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한다.
4.4. 용의국가 4: 몽골 제국(자작극설)
근래엔 이 사건이 몽골 측의 자작극이란 의견도 일부 제기되고 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할 명분을 쌓기 위해 일부러 저고여 일행들을 살해했다는 것인데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자작극을 벌이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종 있어왔기 때문이다.그러나 현실성이 떨어져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는 않다. 몽골이 범인이라고 하기에는 가장 큰 문제가 위에도 서술된 것처럼 저고여 일행이 살해된 뒤 진짜 몽골의 침공이 이뤄진 것은 6년이나 지난 후였다. 정말 몽골이 자작극으로 저고여를 희생시키고 전쟁을 시작하려고 했다면 피살되는 즉시 군을 전개하는 등의 행동이 있어야하지만, 6년이나 지난 다음에 침공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 몽골은 서하와 일전을 벌이느라 도저히 고려까지 전선을 확대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또한 침공의 명분을 찾는 것은 통상적인 중원 국가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유목 왕조인 몽골이 굳이 자기편까지 죽여가며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특히 몽골은 상대 국가에 항복, 조공, 무역 등의 조건을 제시하고 거부하면 바로 쳐들어가는 일을 즐겨했기에 지금까지 하던대로 그냥 쳐들어가면 되는데 고도의 공작까지 벌여가며 침공 명분을 만든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고 얻는 이익은 크지 않다.
5. 결론
일단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수백 년이나 흘러서, 명확한 사료가 새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이 사건은 그저 범인은 숨졌다는 사실 하나 말고는 전부 추측만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국내 학계에서는 이 사건의 범인에 대해 고려나 금나라보다는 동하 쪽에 좀 더 무게를 싣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포선만노가 몽골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포선만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일으켰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은 한 둘이 아니다. 우선 첫 번째로 고려와 몽골 양국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국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되고 2번째로 이 사건을 끝까지 고려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면 몽골의 칼끝을 자국이 아닌 고려로 돌릴 수 있게 된다. 3번째 일행으론 사절단이 가지고 가던 막대한 공물을 그대로 탈취하여 경제적 이득을 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포선만노가 이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을 하게 한다.또 이 사건 전후의 행적으로 볼 때도 가장 의심이 가는 나라가 동하이다. 이 사건을 기준으로 전후를 살펴보면 이 사건 직전만 하더라도 포선만노는 적극적으로 고려에 수교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갑자기 고려를 노골적으로 적대하며 계속해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고려가 자국의 수교 제안을 거부한 것에 크게 앙심을 품었고 이대로 가다간 혼자 죽을 판이라서 물귀신 작전으로 일부러 저고여 일행들을 습격해 죽이고 자신들의 소행을 고려의 소행으로 덮어씌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교 제안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4년여 간 소규모 군대들을 보내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들 때문에 이 사건의 범인이 '동하인'일 가능성을 좀 더 높이 보고 있다. 물론 이것조차 결국에는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괜히 역사적 미제 사건이 아니다.
2016년 7월 31일,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내레이션이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 셜록 홈즈의 성우인 장민혁 성우인 점을 이용해 고려 병사 얼굴에 베네딕트 컴버배치 셜록을 합성하고 그 톤으로 전화 연결을 하는 컨셉으로 나왔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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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한 날짜이다. 태음력으로는 1225년 1월 22일에 해당한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2] 《고려사》에는 금산 왕자와 금시 왕자로 기록되었다.[3] 내분이 어지간히 심했는지 야율걸노는 후에 야율금산에게 암살당했다.[4] 이 역시 최충헌의 애첩이었던 자운선의 행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자운선과 순천사 주지의 횡포 때문에 자신들이 거란의 편에 붙었다며, 이들을 죽이면 다시 고려 편에 서겠다는 익명의 글이 붙기도 했고, 그때문인지 어쨌는지 이후 순천사 주지는 도망가고, 최충헌은 자신의 애첩 자운선과 상림홍 등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5] 칭기즈 칸의 동생 카치운과는 동명이인이다.[6] 출처: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3 -최충헌 부 최이-.[7] 제4대 헌종 몽케 칸의 사후에 몽골 제국의 제위 계승을 놓고 두 파벌로 갈라졌는데 하나는 카라코룸을 근거지로 하는 아리크부카의 유목계 본지파(本地派)였고, 다른 하나는 상도 개평부를 근거지로 하는 쿠빌라이의 농경계 한지파였다. 유목계 본지파는 본래 몽골 제국 영토에 근거지가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이들은 유목민들의 법과 관습대로 중국 대륙을 통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농경계 한지파는 한인 즉, 옛 금나라인들의 땅에 근거지가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이들은 한족의 법대로 중국 대륙을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8] 정작 고려에서는 수달의 가죽을 만들 줄도 몰라서, 수달을 잡아 가죽을 벗기는 방법도 이때 몽골인들한테 처음 배웠다고 한다.[9] 한자를 읽으면 과고여인데 이것은 조(爪)의 오기(誤記)이다.[10] 다루가치 살해사건 문서 참조[11] 물론 내용은 조금 다르다. 《고려사》에는 최우가 내시 윤복창이란 사람을 보내 다루가치들의 무장해제를 하고 오라고 명했으나 윤복창이 선주에 도착하자마자 다루가치가 쏜 화살에 맞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민희와 최자온이 서경에서 다루가치 살해를 모의하였으나 서경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최자온을 가둔 뒤 최임수 일행은 저도로 도주했다고 나와 있고 《동사강목》에는 민희와 최자온이 다루가치들을 모살하다가 서경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왔다. 반면에 《원사》나 《신원사》에는 고려 측에서 사람을 보내 다루가치들을 몰살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다루가치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다루가치들의 대부분이 살해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