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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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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세
Ptolemy I Soter
파일:external/www.livius.org/ptolemy_i_louvre.217x0-is-pid30707.jpg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프톨레마이오스 1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출생 기원전 367년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現 그리스 중마케도니아 주 펠라)
사망 기원전 283년 (향년 83 ~ 84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現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305년 ~ 기원전 285년
(약 20년)
전임자 알렉산드로스 4세
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
부모 아버지: 라구스
어머니: 아르시노에
배우자 타이스, 아르타카마, 에우리디케, 베레니케 1세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아르시노에 2세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알렉산드로스 생전2.2. 알렉산드로스 사후
3. 평가4. 미디어에서

[clearfix]

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을 분할통치디아도코이의 한 사람이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파라오.

2. 생애

2.1. 알렉산드로스 생전

마케도니아 귀족 태생으로, 가계 전설에 의하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르시노에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기록되지 않아서, 일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라는 이야기도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와 이복형제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을 나눠가진 디아도코이 중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바빌론에서 그리스로 운반되던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탈취하여 자기의 영역인 이집트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를 신격화하며 떠받들었고, 프톨레마이오스 본인이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대한 긴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이다.[1]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필리포스 2세 때, 카리아총독인 픽소다로스가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형제인 아리다이오스에게 자신의 딸을 바쳤는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람을 보내 자신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일이 필리포스 2세에게 보고되자 필리포스 2세는 한낱 카리아인에, 야만족 왕노예에 지나지 않는 자(= 픽소다로스)의 사위가 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비열하고 높은 지위에 걸맞지 않은 짓이라고 알렉산드로스를 심하게 꾸짖었다. 이 일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친구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하르팔로스, 네아르코스, 라오메돈, 에리기우스 등과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추방되었다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한 후 귀국하여 왕실 근위대원이 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종군하여 기원전 333년의 이소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인도 원정까지 참전했다. 하지만 인도 원정은 보급 곤란 및 군대 반란, 게다가 인도 토착 세력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고, 마케도니아 원정군은 바빌로니아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2. 알렉산드로스 사후

파일:ptolemy i.jpg
파라오로서 만들어진 흉상. 대영박물관 소장 중.

바빌로니아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가 후사를 명시하지 않고 급사하자[2],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은 협의 끝에 그가 남긴 제국을 분할통치하기로 결정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리비아를 차지했는데, 그리스로 운송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탈취하여 자기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그가 알렉산드로스의 관을 멤피스로 옮겨 석관에 안치하면서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났는데,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에 군사를 이끌고 갔지만, 강을 도하하려다 실패한 일로 인해 휘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르디카스가 암살당하자 페이톤, 셀레우코스 1세, 안티게네스,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1세 등과 함께 트리파라디소스 협약을 맺으면서 페이톤, 그리고 부하인 아리다이오스에게 섭정을 맡기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반대로 안티파트로스가 섭정이 되었다.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안티고노스가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의 부관 한 명을 처형한 일로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에게 바빌론에서 걷는 세금의 일부를 요구하자, 셀레우코스는 이를 거절했다가 후환이 두려워 바빌론에서 탈출해 이집트로 피신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314년 봄에 안티고노스가 남부 시리아를 선제 공격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군대를 티레까지 후퇴시켜 1년간 막았지만 결국 빼앗겼다. 그는 셀레우코스를 시켜 티레를 되찾도록 하면서 셀레우코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주고 로도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안티고노스에게서 지원을 약속받고 협박을 받았기에 로도스에게 거절당했다.

소아시아 남서부 해안의 카리아와의 협력에는 성공했고, 기원전 313년에 동생 메넬라오스를 시켜 해군과 전함으로 셀레우코스를 돕게 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12년에 남부 시리아를 공격해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를 이기고 시돈을 점령해 남부 시리아를 되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되찾을 수 있도록 군대를 제공했으며, 안티고노스가 배후를 찌른 셀레우코스와의 싸움으로 약해지면서 화의를 맺게 되었다. 기원전 309년에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간 사이 안티고노스의 킬리키아, 리키아, 카리아를 공격해 리키아, 카리아를 점령했다.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는 기원전 308년에 코린토스, 시키온, 메가라 등을 점령했다. 기원전 305년에 왕을 칭했고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로도스를 공격하자 지원군을 보냈으며, 이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도스로부터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 소테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제5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는 기원전 295년, 마케도니아에서 키프로스로 가던 도중이었던 데메트리오스 1세의 부인인 필라를 사로잡았다가 잘 대해준 후에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냈으며, 기원전 288년에는 그리스쪽에 함대를 보내 폴리스들을 상대로 데메트리오스 1세로부터 독립하라고 선동했다. 그리고 리시마코스, 피로스와 협공하여 데메트리오스 1세를 마케도니아에서 쫓아냈다.

이 시점에 이미 노쇠했던 그는 기원전 285년부터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공동으로 통치했고, 기원전 283년에 사망했다.

3. 평가

"아마 그는 페르디카스만큼 과감하지는 못 하고, 크라테로스만한 권위도 없고, 그리스인 에우메네스만큼 영리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세 가지 자질을 고루게 갖추고 있었으며, 이것이 어느 한 자질만 특출한 것보다 나았다."
James Romm,《Ghost on the Throne》[3] , p. 142.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 중에서 가장 복 받은 인물이다. 즉,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인 디아도코이들 중에서 자연사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디아도코이 중 자연사한 인물은 그와 안티파트로스, 카산드로스 부자, 폴리페르콘 밖에 없다. 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배한 안티고노스 1세셀레우코스 1세도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장자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한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30세 조금 넘어 사망했으니 프톨레마이오스의 장수는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를 따라서 온갖 전쟁터를 누볐음에도 80년이 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서나 군주로서나 모두 성공했다.[4] 여기에 학식도 출중하여 알렉산드리아헬레니즘 문화권의 중심의 하나로 육성했고, 본인 자신이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회고록도 남겼다. 이 회고록은 로마 시대아리아노스가 자신이 편찬하던 역사서에 인용했다. 이렇게 디아도코이들 중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다른 디아도코이의 왕국이 얼마 못 가 망하거나 혹은 반란에 시달렸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통치는 대체로 안정적이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집트의 전통을 따르면서도[5] 헬레니즘의 문화를 꽃피웠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일군 기초가 매우 튼튼했기 때문에 로마 공화정, 고대 카르타고, 셀레우코스 제국, 마케도니아 같은 강대국들의 배틀필드이자 개판 5분 전으로 돌아가던 지중해의 정세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왕조를 유지했다. 다만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왕위를 위해 로마의 세력을 끌여들였다가, 이후 아우구스투스안토니우스가 벌인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 말려들어가 아우구스투스에 맞서 안토니우스에 올인했다가 함께 멸망해 버렸으나,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3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다. 지중해 세계에서 한 왕조가 이 정도 장기간 집권한 경우는 거의 없다.

어찌 보면《삼국지》의 손권을 연상시키는 수성의 달인.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요충지인 이집트를 잘 지키는 것에 만족하였으며, 페르디카스안티고노스의 침공도 여유 있게 막아내며 역으로 그들을 관광보냈고,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주변국들에 외교 공작을 시전하며 우월한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러한 현실 감각과 정치적 능력으로 인해 그는 가장 안정된 삶을 영유한 디아도코이로 남을 수 있었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명언인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이 사람한테 한 말이라고 한다. 에우클레이데스로부터 기하학을 배우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좀 쉽게 하는 법이 없냐?"는 물음에 한 대답이다. 에우클레이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동시대에 같은 도시에 살았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믿을 만한 이야기다.

4. 미디어에서

올리버 스톤 감독의 2004년 영화《알렉산더》에서는 이집트를 무난하게 다스리는 파라오로서 생의 만년에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가 보았던 알렉산더의 인생 전반을 서기들에게 받아적게 하는 화자이자 해설 역으로 나온다.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노년의 프톨레마이오스를 맡았다.[6] 이렇게 기록된 회고록이 바로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이 보았다던《프톨레마이오스의 알렉산더 원정기》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를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칭송하며 페르시아 정복을 신화화한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병사들을 사지로 버린 인도 원정과 역모를 꾸몄다가 발각된 음모가 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학살하는 잔인성, 말다툼 끝에 총애하던 장군까지도 살해하는 다혈질, 그리고 지나치게 영토를 확장하여 알렉산더의 사후 몇년간 내전 상태가 계속되어 난세가 벌어졌다는 것을 언급하며, 계속 무작정 꿈을 쫓기만 하는 그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무모했다는 비판을 한다.[7]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알렉산더의 야망 때문에 자신이 파라오에 오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을 상기한 듯, 알렉산더의 위대함을 다시 상기하며 마무리를 한다.[8]

이 밖에도 안정적인 삶을 살은 거의 유일한 디아도코이이다 보니 대중적 이미지가 괜찮은 모양인지, 주로 젊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회고하는 역할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상술한 영화《알렉산더》는 물론이고, 발레리오 마시모 만프레디의 소설《알렉산드로스》에서도 에필로그를 서술하는 자가 프톨레마이오스이며, 아동용 세계사 학습만화에서도 나이든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회고하는 모습으로 곧잘 등장한다. 반면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알렉산더》에서는 이러한 회고자의 역할을 리시마코스가 맡는다.

Fate/Grand Order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수하들이라는 묶음으로만 간접적으로 언급되다가[9], 산다 마코토가 시나리오를 쓴 성배전선에서 5성 아처로 실장됐다. 프톨레마이오스(Fate 시리즈) 항목 참고.

[1] 이 회고록은 나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기독교도 혹은 이슬람교도에게 불살라졌을 때, 없어졌다고 추정되지만,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이 이 회고록을 보고 역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에 대강의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다.[2] 정확히는 사경을 헤매다가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 때, "후사가 누구냐?"고 질문하는 장군들에게 "가장 강한 자"라는 밑도 끝도 없는 애매한 말을 남기는 바람에 디아도코이들이 단체로 멘탈이 나가는 대참사가 일어났었다.[3] 한국에서《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고 번역되어 출판되었다.[4] 사실 이 당시에 디아도코이들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은근히 장수했는데, 안티고노스(81세), 리시마코스(79세), 셀레우코스 1세(77세)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암살당했다는 특징이 있다.[5] 왕실의 근친결혼 같은 것은 당대 이집트 풍속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근친상간은 금기였다.[6] 젊은 시절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엘리어트 코원이 맡았다.[7] 더불어 이 부분에서 그리스인아시아인의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제국을 추구하던 알렉산더의 계획과 이상을 평가절하하며, 당대 그리스인 엘리트로 운영되던 전형적인 헬레니즘 제국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알렉산더를 이해하지 못 한 프톨레마이오스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계 왕국들은 현지 토착민들의 반발 및 로마의 침공으로 모조리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졌다.[8] 알렉산더의 입장에서 작중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런 평가는 상당히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알렉산더의 유산을 자신의 이권을 위해 분열시키고 그의 아내와 아들을 꼭두각시로 이용하고 살해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를 포함한 알렉산더의 부하들 자신들이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는 분리주의자로서, 이집트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왕국과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알렉산더가 세운 제국을 분열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사실상 알렉산더의 입장에선 천하의 개쌍놈 그 자체인 셈이다.[9] 사건부 복각 당시 헤파이스티온이 사용한 왕의 군세에 등장하지 않았다면서, 본래 이스칸다르가 사용했을 경우에는 등장하는게 맞다고 간접적으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