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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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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대원군3. 권한4. 경칭5. 대원군 사손6. 유사 사례7. 대원군궁(大院君宮)8. 비유적 표현

1. 개요

大院君

조선시대(君) 작호(爵號)의 일종. 선대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면 방계 종친이 유교 종법(宗法)에 따라 예전 왕(추존 왕 포함)의 아들로 입적한 뒤 왕위를 계승하는데, 그때 새 임금의 친아버지가 받는 작호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그 사람의 친아버지가 이나 왕세자 직위에 오른 적이 없으면 그 친아버지에게 주는 작호가 대원군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왕과 세자를 제외하고 왕실에서 가장 높은 작호가 대군(大君)인데, 왕의 아버지는 그보다도 한 단계 높아야 하니 을 덧붙여준 것.

왕의 친부가 단순히 왕자가 아니라 예비 국왕, 즉 세자였을 경우에는 당연한 얘기지만 세자가 대원군보다도 높은 지위이므로 아예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러한 첫 사례인 의경세자는 친아들인 성종의 즉위와 함께 명나라에서 시호를 받으면서 조선에서도 '덕종(德宗)'이라는 묘호를 받는 절차를 거쳤고, 이런 전례를 따라 효명세자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특이 사례로 정원군의 경우 당연히 대원군 추봉이 한계였으나 선조정원대원군(원종) → 인조로 계승되는 새로운 종통을 세워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예법에 맞지 않다는 서인 세력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존을 강행했다.[1]

조선 역사상 최초의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지만, 그 이전에 대원군이 될 뻔했던 사람이 있으니 바로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다. 세자였을 적인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논하면서 처음 제시된 대안이 장자 이개를 왕세손으로 세우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 세자는 대원군이 아닌 왕으로 추존되나 양녕대군은 세자 지위를 유지한 채 사망 등으로 유고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폐세자가 되었으므로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면 그대로 양녕대원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실은 폐세자된 아버지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세자 자리는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돌아갔고 첫 대원군이 나타나는 데는 5세대가 더 걸렸다.

같은 식으로 대원군의 부인이자 왕의 생모는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예우했다.[2] 조선시대에는 예우가 곧 호칭이니 심각하게 구분될 것은 아니다. 종친이나 외가에 부마들에게 진짜 벼슬은 아니지만 조정 벼슬 품급을 적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누구의 종통을 이어받았느냐가 혈연보다 중요했으므로, 새 국왕이 전임 국왕의 양자로서 즉위한 이상 대원군은 공식적(법적)으로는 왕의 아버지가 아니다. 일가 친척 집에 양자로 보내지면 호적이 바뀌기 때문이다.[3] 예를 들어 선조명종의 양자이고, 철종순조의 양자이며, 고종문조의 양자이다.

2. 역대 대원군

3. 권한

본래 대원군은 죽은 사람에게 붙여주는, 시호와 다를 바 없는 칭호였다. 어찌보면 당연한 게, 그 사람이 살아있었으면 그 사람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자기 아들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법적으로 명시되었던 대원군의 권한은 전혀 없었다. 애시당초 죽은 사람한테 내려주는 칭호였으니 권한을 따로 명시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본인이 왕이 되는 게 아닌,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걸 택한 까닭은 철종 승하 이후 차기 왕위계승자 지명권한을 갖게 된 효명세자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다음 왕은 효명세자의 계보를 잇게 하길 원했기 때문인데, 이하응은 효명세자와 같은 향렬이라 본인이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자기 아들을 익종의 양자로 삼도록 한 것이다.

이때문에 전례없었던 '살아있는 대원군'의 예우를 놓고 조정에서는 한동안 고심해야 했다. 왕의 생부이니만큼 일개 신하처럼 대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대우를 해주면 왕이 두 명이 되는 것과 다를바없으니 골치아픈 문제였다. 일단 대원군은 대군에 준하는 예우를 하되, 왕에게 글을 올릴 때 신하 신(臣)은 쓰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대군 역시 종친이니만큼 원래대로라면 정치에 관여할 수 없어야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겠다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10년간 사실상 왕이나 다를바 없는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

이를 생각하고 보면, 왜 흥선대원군이 어느 권력자보다도 많은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에 비해 맥없이 실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흥선대원군 평가 문서에 있는 권력 기반의 문제 항목 참조.

4. 경칭

'저하(邸下)', '합하(閤下)' 등으로 불렸다. '국태공 저하(國太公 邸下)', 또는 '대원위 합하(大院位 閤下)' 이런 식으로. 다만 조선이 갑오개혁 직후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자주국 체제를 굳힌 이후에는 '전하(殿下)'로 불렸다. '대원군 전하(大院君 殿下)', '국태공 전하(國太公 殿下)' 하는 식으로.[5]

당연하지만 흥선대원군 외에는 누구도 생전에 대원군이었던 적이 없기에 저런 경칭을 들을 일이 없었다.

5. 대원군 사손

순조 시기부터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들은 몇 대를 가도 왕족으로 인정받았다. 덕흥대원군도정궁 사손, 전계대원군누동궁 사손, 그리고 흥선대원군운현궁 사손이 그 예다.

원래 왕통 직계를 제외한 의 후손들은 4대손까지 왕족으로 인정받고 이후로는 일반 양반이 되었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도정궁 계열에서는 3대 사손 응천군 이돈[6]까지, 누동궁 계열에서는 2대 사손 청안군 이재순[A]까지, 그리고 운현궁 계열에서는 1대 사손 흥친왕 이희[A]까지만 종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실제로 도정궁가에서 응천군의 아들인 4대 사손 이정한부터 9대 사손 이풍까지는 일반 양반 신분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손들의 수가 줄고, 그나마 있는 왕손들도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졌다. 순조는 이대로 가다간 왕실의 후사가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그래서 1819년(순조 19년)부터 대원군가 사손들에 한해 대대로 왕족 지위를 세습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례가 드문 것은 아니다. 옆나라 일본에서도 미야케라는 분가를 만들어서 왕실의 후사를 유지하려고 했던 사례가 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쇼군직을 이을 정통이 끊길 것을 우려해 막부의 개창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직계가 끊어질 경우 바로 이를 이을 방계'인 고산케를 지정하여 놓았다.[9]

이후 원래대로라면 왕족이 될 수 없던 사손들이 정식으로 봉군되는 왕족이 되었다. 도정궁의 경우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부터 14대 사손 창산군 이해창까지,[10] 누동궁에서는 3대 사손 풍선군 이한용[11] 4대 사손 청풍군 이해승, 그리고 운현궁의 경우 2대 사손 영선군 이준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헌종과 법적 촌수로는 27촌인[12] 도정궁 13대 종손 이하전이 헌종 사후 왕위 후보 물망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13]

다만, 상술했듯 왕족으로서의 군 작위 세습은 사손 본인만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왕의 4대손을 넘긴) 사손의 '동생이나 조카'는 왕족이 아니다.

6. 유사 사례

고려에서 조선의 대원군과 비교될 수 있는 작호는 대공이었다. 이 작호가 사용된 유일한 사례는 공양왕의 아버지 삼한국 인효대공 왕균 뿐이다. 친아버지가 왕이 아니었던 다른 고려의 왕들은 입양으로 계승권을 획득한 사례가 없어서 친아버지를 곧바로 왕으로 추존했고, 공양왕 역시 딱히 입양을 통해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여말선초의 정국에서 공양왕의 정통성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안배되면서 나온 특수한 사례이다. 대공이든 대원군이든 각각 왕조에서 사용되었던 작위 중 최고 등급(공→대공, 부원군→대원군)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면이 있다. 신라갈문왕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지만 갈문왕은 좀 더 넓은 범위의 왕족 및 인척에게 수여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가끔 스페인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대원군에 빗대기도 한다.[14] 후안대원군[15]

한편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한때 조운장판파에서 목숨을 걸고 유선을 구해낸 이유가 유선이 사실은 조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운을 순평대원군[16]이나 자룡대원군[17]으로 추존해야 한다는 드립이 흥하기도 했다.

7. 대원군궁(大院君宮)

각 대원군들 및 그들의 사손이 살았던 곳이다. 대개 이 곳이 대원군들의 아들들인 왕의 잠저(潛邸)[18]인 경우가 많다. 정원대원군의 경우, 원종으로 추숭받았기 때문에 따로 대원군궁이 없다.[19][20] 그리고 각 대원군궁마다 대원군의 사당이 있었다.

8. 비유적 표현

정권, 기업의 막후 실세 또는 외국 또는 외국인 상대로 폐쇄적인 정책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따지고 보면 전부 흥선대원군에서 비롯된 말이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기간 동안의 정책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1] 그나마 명분이 있었다면 인조는 애시당초 선조의 친손자였고,(생부 정원군이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서자) 선조에서 인조로 이어지는 가운데 항렬이 빈다는 문제도 있었다.[2] 왕비의 생부는 부원군(府院君)으로 생모는 부부인(府夫人)이다. 부원군의 경우 왕비의 생부가 아닌 신하에게 주기도 하고 부부인의 경우 대군의 정실부인 명칭과 같다.[3] 일례로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면 그때부터 친부는 작은아버지라 불러야 하며, 큰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 이를 잘 고증한 것이 KBS 2TV에서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했던 드라마 명성황후이다. 배경을 설명하자면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부자관계이지만 양자 입적을 통해 호적상으로 복잡한 관계가 되었다. 먼저 흥선대원군의 친부인 남연군은 본래 인평대군의 5대손으로 왕위계승권과 먼 왕족이었다. 그러나 남연군은 영조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숙종을 공통 조상으로 하여 고종은 숙종의 차남인 영조의 5대손이 되고, 흥선대원군은 숙종의 삼남인 연령군의 4대손이되어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아들 사이지만 호적상으로 11촌 아저씨-조카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극 중에서 고종은 양어머니인 신정왕후에게는 어마마마라고 호칭하며,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는 보통은 대원군이라 부른다. 하지만 종종 아버님이라 부르는 때도 있는데, 인척 집안에 양자로 갔기 때문에 더는 아버지라 할 수 없지만 생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아버님이라 불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4] 형제들의 정보가 기록마다 분분하여 서4남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5] 네이버 지식백과 - 1897년 7월 31일 토요일 독립신문: #. 운현궁 근처에 어느 죄인을 잡으려 매복해있던 별순검을 운현궁을 지키는(감시하는) 줄 알고 때리고 경무청가서 꼬장부렸다는 내용이다.(...)[6] 중종의 4대손.[A] 장조(사도세자)의 4대손.[A] 장조(사도세자)의 4대손.[9] 이후 몇 대가 지나지 않아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고, 방계 3가 중 서열 2위인 기슈 번에서 후사를 이었다. 이후 또다시 직계 단절을 우려해 '고산쿄'라는 방계 계승 3가를 따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쿠가와 막부 말기~멸망 이후에는 이미 끊긴 적통은 물론 고산케 2개 가문 마저도 씨가 말라 고산케 말석 미토가의 핏줄이 쇼군, 고산케, 고산쿄를 모두 채워 승리(?)하였다.[10] 단, 13대 사손 경원군 이하전은 사후 추증됐다.[11] 사후 추증됐다.[12] 덕흥대원군의 친자 선조가 덕흥대원군의 형제 명종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실제 촌수는 25촌이다.[13] 하지만 물망에는 오를 수 있었어도 즉위 가능성은 없었다. 헌종과 7촌이라는 가까운 관계의 친척 이원범이 있었기 때문. 단, 이원범보다 유리한 점이 하나 있긴 있었다. 바로 항렬. 이원범은 아저씨 뻘이지만 이하전은 당시 왕족들 중 유일하게 헌종의 조카 뻘이었다.[14] 생전에 왕위에 즉위하지 못했고 자기 대신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자기 사후에 스페인 왕정을 복구시키기로 결심했는데(왕실은 혁명으로 축출돼 망명 중이었음) 당시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축출된 부왕 알폰소 13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국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장남이 아니었지만 형들이 일찍 죽거나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해 왕위(?)를 승계한 상태였다. 프랑코는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성향을 좋지 않게 봐 그를 대신해 그의 아들인 후안 카를로스를 자기 사후 후계자로 세우기로 하고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에게 왕을 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으로서는 마땅치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왕정을 복구시킬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프랑코의 제안을 수락하고 더 이상 왕을 칭하지 않았다. 그 후 본인이 생존하던 중에 프랑코가 사망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즉위 직후 프랑코의 기대를 져버리고(...) 군부 독재 대신 민주화를 택했다.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사후에 추존왕 후안 3세으로 예우되었다.[15] 사실 원래 후계자였고,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의경세자와 대원군 개념이 혼합된 사례다.[16] 조운은 사후 순평후로 추증되었다.[17] 자룡은 조운의 자(字).[18] 왕이 되기 전에 살았거나 태어난 집. 왕은 용에 비유되는데 그래서 용이 승천하기 전 잠겨있었던 집이란 의미다.[19] 게다가 정원군의 저택은 인조반정 이전에 광해군에게 빼앗겼다. 그 자리에 궁궐이 들어섰으며 이게 바로 경희궁이다.[20] 다만, 인조 즉위 직후부터 1632년(인조 10년)에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기 전까지는 계운궁이 대원군궁 역할을 했다. 계운궁은 옛 광해군 잠저로, 인조반정 이후 인조가 어머니 연주부부인에게 드렸다.[21] 이 쪽은 기사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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