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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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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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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위까지 성씨는 내국인 인구의 99.16%임 (2015년 통계청 자료)
 
인구 비율이나 100위 아래의 성씨 등은 한국의 성씨별 인구 분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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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
1.1. 로마자 표기1.2. 지역별 인구 통계 및 계파1.3. 목록 1.4. 인물별 목록
2. 異3. 伊4. 㛅, 怡5. 관련 문서
<colbgcolor=#dddddd,#222>로마자 표기
통용 표기 Lee
RR식 표기 I
MR식 표기 I[1]
기타 표기 Yi, Li, Rhee, Yee, Rhie

1.

(오얏 리)[2]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모든 이씨들이 두음 법칙을 적용함으로써 라고 읽고 쓰며, 두음 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한자 본음대로 라고 읽고 쓴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성씨로,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총 7,306,828명이 있으며 본관은 문헌에 546본이 전해진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의 약 14.3% 수준이다. 이씨는 한국에서 인구수로 보았을때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뉘는데, 가장 유명한 첫 번째 이씨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물인 이한을 시조로 하며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성씨인 전주 이씨 계열이 있고, 두 번째로는 박혁거세신라를 건국할 때 당시 경주 6부 중 알천 양산촌의 촌장이었던 이알평에서 유래된 경주 이씨 계열이 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홍콩, 대만, 베트남, 싱가포르아시아한자문화권 전반에 걸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수는 무려 1억 명이 넘는다. 전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성씨이기도 하다.[3][4]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성씨인데 중국과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미국에서 Lee 씨는 69만 3023명으로 21번째로 흔한 성인데 이것은 미국에서도 존재하는 백인 성씨 Lee와 아시아인 Lee를 합친 숫자로, 백인을 제외한 아시아인 Lee 인구수는 29만 2455명이다. 여기에 기타 동아시아권 이씨들이 사용하는 철자인 Li 씨 인구수(11만 1786명)를 더하면 미국 내의 이씨 성을 가진 인구수(Lee와 Li)는 40만 4241명이 된다. 즉, 이씨는 미국 내에서 43만 7645명인 베트남응우옌(Nguyen) 다음으로 아시아인으로서 2번째로 흔한 성씨가 된다. 가장 흔한 대한민국의 성씨인 김씨는 미국에 총 26만 2352명이 있으며, 아시아인 성씨 순위로는 3위이고 전체 순위로는 77위이다.

캐나다밴쿠버에서는 이/리씨(Li)가 2위 Smith를 따돌리고 제일 흔한 성씨라고 한다. Lee씨는 28,343명으로 8위이다. #

매우 극소수이지만 한국에서도 '리'를 쓰는 사람이 2015년 기준으로 240명 존재한다. 전 대학교수인 리영희와 리대룡이 대표적이며 이승만이기붕당대의 선거 포스터에서 '리승만'과 '리기붕'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두음법칙 적용이 강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유씨류씨로, 나씨라씨로 사용하는 것도 허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에서는 이씨와 왕씨가 1위를 엎치락뒤치락한다.# # 또한, 중국 본토에 있는 모든 인구의 성씨를 정확하게 집계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국 본토 내에서 이씨와 왕씨 가운데 누가 1위인지는 조사 기관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의 리씨를 합하면 10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왕씨는 한반도 내에 거의 없다는 점[5], 그리고 대만싱가포르에서도 이씨가 왕씨보다 많으며, 베트남에도 리(Ly)씨가 꽤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중국 본토를 포함한 전 중화권 및 전 세계적으로는 이씨가 왕씨보다 많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중화권 전체로 본다면 이씨가 왕씨를 넘어 최다 성씨인 것이다. 2위는 장씨나 왕씨이지만, 정확한 통계를 각 나라에서 제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6]

이씨는 장(張)씨와 함께 보통의 중국 사람들을 의미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관용구에 쓰인다.# 즉 이씨나 장씨가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매우 흔한 성씨라는 뜻이다. 또한 당나라를 세운 국성이 바로 이씨이기도 하다. 특히 유(劉)·이(李)·조(趙)·주(朱) 4개 성씨는 중국 본토에서만 2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며 중국 역사 속에서 중국 한족 왕조들의 국성이자 중요한 인물들의 성씨로 상당히 많이 나오기에, 4개 성씨를 알면 중국 역사를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즉 이씨는 중국에서도 과거부터 오랫동안 대표적인 성씨였음을 알 수 있다.[7]

국내에서는 이씨를 역사적으로 '니'라고 읽고 쓴 적도 있다. 광해군 때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한자로 李라는 성씨를 표기하고 그 옆에 한글 발음을 병기해 놓은 이름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전부 로 표기되어 있다. ㄹ→ㄴ 두음 법칙은 16세기부터, 구개음 ㄴ→탈락은 18세기 후반부터 간간이 나타났는데,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된 17세기 초반 당시에는 ㄹ→ㄴ만 나타났고 구개음 ㄴ→탈락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씨뿐만 아니라 ㄹ음이 초성으로 오는 다른 성씨도 마찬가지.

즉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이나 율곡 이이도 당시 16세기 발음으로 하면 '니슌신',[8] '니'[9]가 된다. 이게 19세기 후반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흥선 대원군이 중국에 잡혀 갔을 때 흥친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홍장을 '니 즁탕'이라고 표기한 바 있다.[10]

오만 원권이 생기기 전 대한민국 원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은 모두 이씨였다. 1950년대 이래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절 도안에 들어있던 이승만부터 시작해 백 원-'이'순신, 천 원-'이'황, 오천 원-'이'이, 만 원-'이'도까지. 다만 본관은 모두 달랐다. 이순신과 이이는 덕수 이씨, 이황은 진보 이씨, 세종대왕은 전주 이씨. 그래서 오만 원권 지폐가 생기기 전에는 화폐에는 이씨만 들어갈 수 있다는 농담이 존재했다. 이 기록은 2009년 오만 원권 지폐(평산 신씨)가 생긴 이후로 깨지기는 했으나, 그 신사임당마저도 이씨 가문에 시집가서 오천 원권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를 낳았으니. 참고로 1962년 냉면전문점 흥남집 사장 일가(권기순, 윤재순)가 도안으로 들어간 백환권 지폐가 존재했으나, 딱 1달만 유통되어서 수집가들이나 가지고 있는 신세다.

1.1. 로마자 표기

<colbgcolor=#dddddd,#222>로마자 표기
통용 표기 Lee
RR식 표기 I
MR식 표기 Yi
기타 표기 Li, Rhee, Yee, Rhie
<colbgcolor=#dddddd,#222>국립국어원 이씨 로마자 사용 실태조사[11]
Lee 98.5%
Yi 1.0%
Rhee 0.2%
Yee 0.05%
Rhie 0.02%
기타 I, Ii, Lii, Ree, Rhi 등

대한민국은 주로 Lee(리)로 쓰고, 북한은 Ri(리)라고 쓴다, 중화권에서는 주로 Lee, Li(리)를 사용한다. Lee라는 이름 혹은 성은 전술되었듯 영어권에도 존재하는데 Lee 브랜드로 유명한 데이빗 헨리 리 역시 이 Lee가 성이며, 미국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E. 리, 앵무새 죽이기 작가 하퍼 리 등 Lee가 성씨인 영어권 시민들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 Lee를 쓰게 된 이유 역시 외국 사람들이 생판 모르는 표기를 쓰는 것보다는 이미 있는 이름을 활용해서 써주는 것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던데다 1세대 이민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이름 표기를 기존 성씨에서 사용한 것에서 기원한다.

표기 방법 자체는 많은 편이다. Ee 역시 존재하며 사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르면 I가 올바른 표기인데도 이 표기를 채택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실제로 국립국어원2001년에 해외에 한 글자로 된 성이 드물고[12]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에 I라는 표기에 대해서 지적하며 Yi(이) 사용을 권고했다. 실제로 '이' 발음에 가까운 Yi를 쓰기도 하는데 이순신이나 퇴계 이황의 성씨는 주로 Yi를 사용한다. 실제로 조선 왕조Yi Dynasty/House of Yi로 통용되는데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선 왕조 왕족 성씨를 Lee가 아니라 Yi로 쓰고 있다. 때문에 세종대왕 역시 Yi Do(이도)로 표기한다.

그러나 현대시대 이후 Yi를 성씨로 사용하는 이는 위 표에서도 보이듯이 드문데 일제강점기의 작가 이상이나 우주비행사 이소연, 야구선수 이정용 등이 Yi를 사용하고 있다. Yi 혹은 I는 굳이 쓴다면 성씨보다는 이름에 '이'가 들어갈 때 사용. 대표적인 예시가 박한이. 실제로 대한민국의 이씨 중에서 Yi라고 쓰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Lee로 적는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이재명, 이강인, 이상화, 이민호 등 해외에 알려진 이씨 유명인들도 대부분 Lee로 통용된다.

그 밖에 이승만과 해군 예비역 대위 이근, 야구 선수 이대은처럼 Rhee를 쓰는 사람도 있다. 만화가 이원복은 Rhie를, 현대 미술가 이수경은 Yee를 사용한다. 참고로 이완용Ye 이거?라고 썼다. 성이나 이름의 로마자 표기는 처음 여권을 만들 때 정하는 표기에 따르며, 웬만해서는 바꾸기 어렵다는 서약이 동반된다.

1.2. 지역별 인구 통계 및 계파

국내 이(李)씨중 가장 많은 비율율 차지하는 것은 전주 이씨로, 전체 이씨중 36%를 차지한다. 총 인구수는 약 267만명 이며 이는 김해 김씨, 밀양 박씨에 이어 전국 3위에 해당하는 인구수를 차지한다. 두 번째는 경주 이씨로 21.4%를 차지한다.총 인구수는 약 156만 명으로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에 이어 전국 5위에 해당하는 인구수를 차지한다.#

전주 이씨의 대표 집성촌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상도동, 경기도 연천군 중면 도연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완곡리,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 등이 있으며 전주 이씨의 본관 지역인 전라북도 전주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이 존재한다.

전주 이씨의 시조는 태조 이성계의 21대 선조인 이한(李翰)이며 기존의 분파(分派)는 총 122개로 나뉘어져 있는데[13] 왕자인 대군과 군을 시조로 하는 분파들이며 이것 또한 크게 태조 이성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태조 이성계 이전의 분파는 또다시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선대에서 갈라진 분파와 이안사 이후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분파로 나뉜다.

이안사 이전의 분파로는 이한의 14대손인 이단신(李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 15대손 이거(李巨)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17대 이영습(李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이안사의 종손 이윤경(李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 이한의 21대손 이귀을(李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 등이 있다. 이안사 이후, 태조 이성계 이전의 분파로는 이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 등의 5대군파와 이행리의 아들인 함녕(咸寧) 등 7대군파,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등 4대군파, 이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第)인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가 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 후손의 분파로는 그 후손이 99파(고종까지 大君 25, 君 74명)로 알려져 있으나, 미혼으로 죽거나 후사가 없는 대군, 군이 20여명 되기 때문에 그 분파는 많이 줄어든다. 그래서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종회는 총 86개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주이씨의 분파 중에서 가장 번성한 분파는 효령대군[14]이 파조로 있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이며, 그 인구는 50만에 달한다. 그 외에도 정종의 열 번째 아들 이후생(李厚生)을 파조로 하는 덕천군파(德泉君派),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여(李璵)를 파조로 하는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그리고 태종의 제1남인 이제(李禔), 즉 양녕대군을 파조로 하는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번창한 가문으로 알려진다.

경주 이씨의 집성촌은 대구광역시 북구·달서구·수성구, 울산광역시 북구, 경상북도 경주시·영천시, 경상북도 상주시·의성군·구미시·칠곡군, 경상남도밀양시 등이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는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의 이야기와 관련된 표암(瓢巖) 유허비(遺墟碑), 광림대(光臨臺)등이 존재한다.

경주 이씨는 경주의 옛 이름이 월성(月城)이므로 월성 이씨(月城 李氏)라고도 하며 경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고려 말 중시조의 15~21세(14~20세손)에서 14대파로 분파하였다.
중조 15세 열헌(悅軒) 이핵(李翮)의 본손 계대가 중조 16세, 17세에서 평리성암공파, 이암공파, 익재공파, 호군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 사인공파 8대파로 나뉘고, 중시조 지손 계대가 15세, 21세, 19세에서 판전공파, 월성군파,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 6대파 총 14개 대파로 분파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소 70여개 파로 분파된다.
14개 대파는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 파조 16세 李仁挺 이인정)· 이암공파(怡庵公派- 파조 17세 李琯 이관)· 익재공파(益齋公派- 파조 17세 李齊賢 이제현)· 호군공파(護軍公派- 파조 17세 李之正 이지정)· 국당공파(菊堂公派- 파조 17세 李蒨 이천)· 부정공파(副正公派- 파조 17세 李邁 이매)· 상서공파(尙書公派- 파조 17세 李薖 이과)· 사인공파(舍人公派- 파조 17세 李蓨 이조)· 판전공파(判典公派- 파조 15세 李康+羽 이강)· 월성군파(月城君派- 파조 21세 李之秀 이지수)· 직장공파(直長公派- 파조 19세 李養吾 이양오)· 석탄공파(石灘公派- 파조 19세 李存吾 이존오)·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 19세 李存中 이존중)· 교감공파(校勘公派- 파조 19세 李存斯 이존사)이다. 경주 이씨 14개 대파 중에서 익재공파, 국당공파, 상서공파 이들 3파가 가장 번창하고 주축이다.

1.3. 목록

1.4. 인물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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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異(다를 이). 오얏나무 리/이(李)씨와 달리 원래 발음이 "이"이다. 그러니까 북한에서도 "이"씨 그대로 읽는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5개 본관 339명이 존재한다. 남원, 밀양, 청양 등 이씨가 여기에 해당되며 공식적으로는 밀양 단본이다.

밀양 이씨로는 1784년(정조 8)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 97위로 급제해 1801년(순조 1) 경희궁 위장(衛將, 종2품)에 오른 이재풍(異在豊, 1762 ~ ?)이 있었다. 당시 거주지는 한성부였고,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이경기(異景基)[23]였다.

시인 이하윤이 이 성씨를 쓴다.

3.

伊(저 이). 본관은 백천, 충주 등이다.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고 하며 역시 이쪽도 한자가 다름에 주의하자. 2와 마찬가지로 원래 발음도 "이"이다. 마찬가지로 이 성씨도 북한에서도 그대로 "이"씨이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남한에 249명이 있는것으로 확인되었다.

4. 㛅, 怡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나타난 성씨이다. 시조와 본관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㛅)씨는 전국에 5명, 이(怡)씨는 전국에 7명이 있다고 나타났다.

5. 관련 문서



[1] 규정상 I이다. 다만 Yi를 선호하는 것을 예로 들어 언급하였다.[2] 두음 법칙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이'로 표기하고 발음하며 북한에서는 '리'로 표기하고 발음하고, 여권(旅券)에는 '리', 중국에서도 '리'로 표기하고 발음한다.[3] https://en.wikipedia.org/wiki/Lists_of_most_common_surnames, A world ranking is only approximate because some countries do not provide a specific number of people who bear a certain surname.[4] 영어권 국가만으로 한정한다면 Smith가 제일 흔한 성씨가 되고, 베트남에서는 응우옌, 한국에서는 김씨 등 각 지역별로 성씨 순위는 차이가 있지만, 이씨가 중국에서 약 9500만 명 이상이 있으며, 한국에 약 730만 명이 넘는 이씨가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1위가 된다.[5] 그런데 왕씨가 한국에 없는 이유이씨 때문인 게 포인트다. 사실 세계 1위 성씨를 공고화하게 하기 위한 이성계의 큰 그림이었다 카더라[6] https://www.reference.com/education/10-common-last-names-world-ff45abb098a0454b A world ranking is only approximate because some countries do not provide a specific number of people who bear a certain surname.[7] https://m.newspim.com/newsamp/view/20180514000274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을 통치해 온 유(劉)·이(李)·조(趙)·주(朱) 4개 성씨[8] '슌'은 오타가 아니다. 실제로 舜의 역사적 한국 한자음은 '슌'이다. ㅅ,ㅈ,ㅊ에 ㅑ,ㅕ,ㅛ,ㅠ가 붙은 음가를 가진 한자는 모두 현대에 ㅏ,ㅓ,ㅗ,ㅜ로 발음이 변화하였다. 成도 본래는 셩이었다.[9] 珥와 같은 일모(日母) 발음, 즉 반치음은 이이가 사망했을 무렵은 이응으로 계승되던 시기였다. 이 음은 중국에서는 권설음(r)으로 계승되고, 일본에서는 ザ행(サ가 아니다.)이나 ナ행으로 계승되었다. ジン으로도 발음되고 二ン으로도 발음되는 人이 그 예시다.[10] 현대 한국어로는 '이 중당'이 되는데, 중당(中堂)은 재상을 의미한다.[11] '성씨의 로마자 표기 실태', 성씨 로마자 표기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 부록 2, 국립국어원, 2009.6.25.[12] 한국의 성씨 가운데 로마자 한 글자로 표기될 수 있는 성씨가 넷 있는데, 이씨를 비롯해서 A(아씨), O(오씨), U(우씨)가 있다.[13]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의안대군파(宜安大君派), 의평군파(義平君派), 순평군파(順平君派), 선성군파(宣城君派), 종의군파(從義君派), 진남군파(鎭南君派), 수도군파(守道君派), 임언군파(林堰君派), 석보군파(石保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임성군파(任城君派), 도평군파(桃平君派), 장천군파(長川君派), 정석군파(貞石君派), 무림군파(茂林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 경녕군파(敬寧君派), 함녕군파(咸寧君派), 온녕군파(溫寧君派), 근녕군파(謹寧君派), 혜령군파(惠寧君派), 희령군파(熙寧君派), 후령군파(厚寧君派), 익녕군파(益寧君派),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화의군파(和義君派), 계양군파(桂陽君派), 의창군파(義昌君派), 한남군파(漢南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수춘군파(壽春君派), 익현군파(翼峴君派), 영풍군파(永豊君派), 영해군파(寧海君派), 담양군파(潭陽君派), 덕원군파(德源君派), 창원군파(昌原君派),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 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 계성군파(桂城君派), 안양군파(安陽君派), 완원군파(完原君派), 회산군파(檜山君派), 봉안군파(鳳安君派), 견성군파(甄城君派), 익양군파(益陽君派), 이성군파(利城君派), 경명군파(景明君派), 전성군파(全城君派), 무산군파(茂山君派), 영산군파(寧山君派), 운천군파(雲川君派), 양원군파(楊原君派), 복성군파(福城君派), 해안군파(海安君派), 금원군파(錦原君派), 영양군파(永陽君派), 덕양군파(德陽君派), 봉성군파(鳳城君派),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 임해군파(臨海君派), 신성군파(信城君派), 순화군파(順和君派), 인성군파(仁城君派), 경창군파(慶昌君派), 흥안군파(興安君派), 경평군파(慶平君派), 인흥군파(仁興君派), 영성군파(寧城君派),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숭선군파(崇善君派), 낙선군파(樂善君派), 연령군파(延齡君派), 은언군파(恩彦君派), 은전군파(恩全君派), 의친왕파(義親王派)[14]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양녕대군의 동생이자 세종의 작은 형[15] 시조 후손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陜川李氏- 분적조 강양군 李開 이개) · 차성 이씨(車城李氏- 분적조 차성군 李渭 이위)· 우계 이씨(羽溪李氏- 분적조 중서사인 좌복야공 陽植 양식)와 중시조 후손 계대에서 원주 이씨(原州李氏- 분적조 23세 경원군 李攀桂 이반계) · 아산 이씨(牙山李氏- 분적조 6세 증사공공 李周佐 이주좌) · 재령 이씨(載寧李氏- 분적조 7세 재령군 李禹偁 이우칭) · 진주 이씨(晋州李氏- 분적조 18세 대제학공 李永榟 이영재. 벽호공 李君榟 이군재)· 장수 이씨(長水李氏 - 분적조 林幹 임간 - 直幹직간)가 이에 속한다.[16] 경주 이씨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용인 이씨익산 이씨의 조상을 짜깁기한 흔적이 있다.[17] 이징옥의 난의 주동자인 이징옥의 본관으로, 인천 이씨로 통합했다.[18] 양산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을 가리키며, 공주 이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19] 이수광이 송나라 사람이 맞는지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바이두에서 검색해 보면, 양성 이씨의 시조나 이영애의 성씨로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송사(宋史)에 나오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20] 다만 승안군파의 경우는 1979년에 발간한 전의이씨성보에서 들어갔다가 대수상의 혼란과 여러 가지 문제로 이후 편찬된 족보에서 빠졌다.[21] 정확히는 이성계의 가문이 전주 이씨에 속하는 것이다.[22] 이종범의 아들.[23] 아들과 마찬가지로 무과에 급제해 1786년(정조 10) 광량진 병마첨절제사(廣梁鎭兵馬僉節制使, 종3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