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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9:29:19

가난한 과부의 헌금

파일:가난한 과부의 헌금.jpg
가난한 과부의 헌금, 프랑수아 조제프 나베 作 (1840년), 167.5 × 223.5cm

1. 개요2. 줄거리3. 원문4. 해설

1. 개요

성경마르코 복음서루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2. 줄거리

어느 날 예수제자들헌금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 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자들 사이에서 고작 두 렙돈[1]의 헌금을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게 된다. 그러자 예수는 "이 과부가 다른 부자들보다 많은 헌금을 냈다."라고 한다. 당연히 헌금의 액수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이 자신의 많은 재산 중에서 극히 일부만 헌금하는 것과 달리 이 과부는 하루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기 때문이다.

3. 원문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2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12:41~44 (공동번역성서)
어느 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와서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의 복음서 21:1~4 (공동번역성서)

4. 해설

과부가 헌금한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당대에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성경에서 함께 언급되는 데나리온/데나리우스와 비교한다면 1 데나리온은 대략 128 렙돈에 해당한다.

이 가치를 현대 대한민국 원 단위로 환산해본다면 1 데나리온은 성경 등에서 당대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이를 현대 한국의 최저시급 9,620원 그리고 8시간 근로(76,960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2 렙돈은 현재 가치로 약 1200원 정도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빵이나 컵라면 한개 정도 살수 있는 금액. 말그대로 과부는 예수의 표현처럼 구차하다면 구차한 돈을 헌금한 셈이다. 출처
가난한 과부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성전에서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성전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밝혀 준다.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 베드 4:8과 잠언 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 그러므로 자선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세 번째로 큰 치유의 표지로서 화해의 날(욤 키퍼)과 속죄 제물과 더불어 속죄 제도에 가까운 것이다. '그녀의 삶 전체'가 보여주는 비범함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으뜸 계명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대목에 관한 현대의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 그런 해석은 가진 것을 전부 내놓은 과부와 달리 기부금을 받고 노후 연금으로 생활을 보장받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현대 주석가들이 내세우는 타산적인 주장에 불과한 게 아닐까? 성경 전체에 의하면 과부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신다. 그리고 자신이 바치는 기도의 응답을 즉시 받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초기 공동체는 과부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정식으로 임명했다(1티모 5:5). 하느님께서는 과부들의 보호자가 되시어 이들을 기꺼이 돌보신다. 고아와 날품팔이도 보호의 대상이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고객'으로서 '직통 정화'로 연결된다. 고대 동방에서 유래한 이런 이야기와 보호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맡겨졌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해서 이런 요소가 예수의 복음 선포에 들어갔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종교적 동기가 담긴 모든 구걸 행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마르 12자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가 흡사 거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삶의 방식과 복음 선포에서 거의 주목되지 않은 요인이다. 예수도 생계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고 신심 깊은 여인들의 도움을 받거나(루카 8:1-3), 당신을 초대한 이들에게 의존해 살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어찌하여 예수는 거지처럼 행세했을까? 이것이 그분의 복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까? 혹시 먼저 그렇게 해서 독신생활, 가족과의 이별, 제자들에게 느닷없이 요청한 순명(나를 따르라!)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자동으로 따라오게 한 것은 아닐까?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다음 문장에 들어 있다.
거지는 자신의 삶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마르틴 루터는 임종을 앞두고 고백했다. "우리는 거지다. 이것은 사실이다!").
거지는 자신에게 뭔가를 주는 대상에게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때 누가 자기에게 선물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한곳에 정착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이든, 부유한 여인이든, 동정심 많은 부자이든 그에게는 상관없다. 빈손으로 살아가는 삶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하느님의 통치에서는 구속과 약속이 동시에 중요하다는 선포의 근본 요소에 해당된다. 예수의 삶의 방식은 하느님 앞에서 지녀야 할 기본자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분은 복음이 전체 안에서 의미하는 것을 작은 형태로 재현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때로는 번거롭고 귀찮다. 그러나 예수의 삶은 간졀하고 분명한 선포이다. 제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삶 역시 그렇다. 구체적인 삶이 복음의 표상이 된다. 이러한 요소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만 분명히 드러난다.
나중에 등장한 수도생활 양식은 여기서 발원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나아간 것이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69~171p 中

하지만 예수는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듯 과부가 없는 형편에도 어떻게든 헌금을 하려던 신앙심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했다. 중요한 건 액수나 크기가 아닌 마음이라는 것이다.[2]

동시에 이 일화는 과부의 신앙심을 강조하면서도 이렇게 가난한 이를 돕지 않고 고액을 바치는 부자들에게만 아부를 떠는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당대 사회에선 혼자선 생계를 감당하기 힘든 과부나 고아를 지역 공동체에서 지원하고 부양할 의무가 있었는데, 그녀가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건 이런 공동체, 특히나 당시에 현대의 복지 정책을 대신 시행하던 종교 단체에서 책임을 면피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앞에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 곧바로 다음 구절에는 예수가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는 내용을 고려해 보면 이 이야기는 종교 권력의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전세계에서 유행하는 번영신학에 대조되는 일화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예를 들면, “먼저 물질의 축복을 통해 스스로 부유해져야 많은 헌금을 할수 있다” 라는 번영신학의 이론에 대한 반례로써,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마음의 상태이지 무언가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여담으로 불교에도 정확하게 똑같은 교리가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빈자일등 참조.


[1] 당시 가장 작은 화폐단위로 작고 얇다는 뜻의 그리스어 'λεπτός(렙토스)'에서 유래했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경입자 렙톤도 여기서 이름을 따 왔다.[2] 과부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전근대, 그 이전의 과부는 사회에서 버림받아 언제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약자 중 약자였다. 유독 예수 설화의 내용중 등장인물에 과부가 많은 것은, 그만큼 예수가 당대 가장 약자를 보살피고 약자가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지도자라는 점을 부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