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20:12:08

가야-후한 관계

가야-한나라 관계에서 넘어옴
가야의 대외관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백제 한나라 신라 일본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발해 · 고려 · 조선 · 대한민국
}}}}}}}}} ||



1. 개요2. 역사
2.1. 성립2.2. 초반2.3. 중ㆍ후반
3.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가야한나라(후한)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이다. 편의상 한사군을 가졌던 삼국시대(중국), 서진도 같이 언급한다.

2. 역사

2.1. 성립

42년 가야가 성립된 후 가야는 한반도 남부 바다를 건너 한나라와 무역을 했다.

2.2. 초반

1세기 가야는 금관국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때이며, 금관국에는 철이 많이 있었고, 철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많은 철제 물품들을 고구려, 백제 등 주변국들은 물론 일본, 그리고 중국의 한나라에도 팔았다. 당시 후한은 한반도 북부를 점유하여 한사군을 두었는데 가야는 이 지역들을 통해 한나라와 교류를 했었다. 대표적인 증거가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복숭아씨다. #

가야는 후한과도 교류함으로써 문화 수준이 더 높아졌다. 또한 금관국의 중심지였던 김해에는 한나라 때의 화폐였던 화천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나라와 가야의 상호왕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수로왕은 벼슬이나 관리, 관직 제도를 주나라의 법과 한나라(전한)의 제도도 참고해서 나누어 설치했다.[1]

2.3. 중ㆍ후반

금관국을 비롯한 가야의 제국(諸國)들은 때로는 연맹을 이루어 성장을 했으며, 반파국, 고차국, 안라국 등도 금관국을 중심으로 연맹을 했을 때는 금관국을 통해 한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시에 가야에서는 포상팔국의 난과 같은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후한 시기 주변 외국에 다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포상팔국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었다. 큰 전쟁이 있었지만 완전한 타격을 입지 않았던 가야의 여러 국가들과는 달리 한나라는 황건적의 난, 관도 대전으로 쇠퇴할 무렵이었으나 동시에 무역은 여전히 이어졌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가야는 철을 한(삼한), 예(동예), 왜, 낙랑과 대방에도 수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220년, 조비가 헌제를 몰아내고 위, 촉, 오나라로 나눠지면서 한나라는 망했고 이로써 가야와 한나라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가야는 310년대까지 한사군 지역을 통해 후한 이후 중국의 여러 국가들(위ㆍ촉ㆍ오, 서진)과 교류를 했으나 고구려 미천왕이 한사군을 고구려 영토로 만들어 한사군이 없어짐으로써 더 이상 중국과 무역을 하기 힘들어졌으며 백제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수입해야 했다. 그리고 전연, 후연 등 북방 유목 국가들과 교류함으로써 군사문화, 기마전술을 받아들였다.

3. 같이 보기


[1] 출저: 삼국유사가락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