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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2:01:10

백제-가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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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기원2.2. 초반2.3. 중반2.4. 후반2.5. 결말
3. 관련 사건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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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가야연맹에 해당되는 여러 나라들의 관계들이다.

2. 역사

2.1. 기원

삼국사기 기년상으로는 기원후 42년 수로왕을 중심으로 육가야를 비롯한 가야제국이 세워졌을 때 백제는 다루왕 15년이었으나, 이 시기에 고고학적으로는 백제도 가야도 각자 그 위치에 없었으므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고학적으로는 김해에 선진 문물을 가진 낙랑 집단이 출현해 해당 지역 토착 세력을 아우르던 시기는 3세기 초반 경이며 고구려 유민들이 오늘날 경기도 근처인 임진강 유역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2세기 중후반 경이다. 어쨌든 고고학적으로도 문헌과 마찬가지로 백제가 금관국보다 출발 시기가 아주 약간 빠른 건 사실로 보인다.

금관국이 김해에 처음 확립된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그 시기에는 목지국이 마한 수장국이던 시절이다. 이 당시 백제는 마한 연합에 속한 목지국 마한왕 휘하의 거수국이었고, 가야연맹은 변한으로 분류되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마한왕을 상전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면 마한 목지국을 거쳐 간접적으로나마 건너건너 관계는 있었다고 할 순 있다.

2.2. 초반

백제와 가야는 처음부터 다툴 이유가 별로 없어 원삼국시대 말기 및 삼국시대 초기부터 관계가 좋았다. 물론 일부 정치적 대립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은 경우가 더 많았다.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정했던 한성 시대부터, 가야는 금관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전기 가야 시대부터 긴밀한 외교를 맺었고 무역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마한 일대에 진출하여 남해안까지 세력을 뻗고 침미다례의 무역 세력권을 빼앗으면서 가야와 접했고, 백제는 새로 확보한 해상통로로 동진- 가야 - 왜(일본)와 무역ㆍ왕래ㆍ외교로 사실상 동맹을 결성했다.

이는 신라와 고구려를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367년, 탁순국을 시작으로 백제와 가야가 밀접한 외교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근초고왕 시기는 전성기다 보니 가야의 몇몇 나라들을 백제가 공격하여 점령한 적도 있으나 백제는 영토 정복이나 확장하는 것보다 동맹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 강역들을 지키는 점을 더 우선시했었고, 가야의 여러 나라들 역시 신라와 대립이 강한 시기였기에 상대적으로 백제와 우호적 협조를 요청하는 관계였다. 이는 근구수왕 때에도 유지되었다.[1]

또한 두 나라는 왜와의 교류와 왕래가 자주 있었고 셋이서 신라와 고구려를 공격했으며,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어 아스카 문화가 나타났다. 일본 도래인 비율 중 백제ㆍ가야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2.3. 중반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통치하면서 고구려는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백제 아신왕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왜, 가야의 여러 나라들[2]과 손을 잡고 신라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400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의 수도를 포위하며 신라군을 협공했을 때 광개토대왕은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도와 세 나라를 협공한 건 물론 연합군의 뒤를 쫓아 금관가야의 종발성에서 연합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었고 이는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약화로 이어졌다. 금관가야는 이 때 너무 큰 타격을 입어 쇠퇴하였고 신라는 고구려에 한동안 간섭을 받는 체제가 이어졌다. 이는 대한민국에 주둔 중인 주한미군과 그 상황이 비슷하다. 그러나 404년에 이 삼국 연합군은 고구려가 차지한 한강 이북, 개성, 황해도 일대를 침공해 들어갔고, 일단은 승전하여 한북 일대와 개성까지는 수복했다. 물론 고구려 주력군이 후연을 한참 두들겨주던 때 뒷치기했다는 상황은 있었으나, 이기긴 이긴 거였다. 이후 극도로 분노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에게 역공받아 패하여 황해도 일부는 모조리 빼앗기지만, 이때 삼국 연합군이 수복한 한성 북쪽과 개성까진 어떻게든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5세기 중반, 가야와 왜가 그나마 줬던 도움이 허무하게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수도였던 위례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처형했다. 직후 한강은 물론 경기도 전체가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지자 백제는 웅진성으로 도피해 명맥을 다시 유지했다. 그러다가 동성왕 때 나제동맹이 결성되어 잠깐 백제-가야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이후에도 여전히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의 수많은 나라가 백제와 외교관계를 맺어 사이가 유지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백제가 마한 수장국으로서 휘하 거수국으로 거느리고 있던 전라도 동부 옛 마한 소국들이 마한 연맹을 이탈해 반파국이 주도하는 가야 연합에 참여한 사태였다.[3] 전라도 동부의 옛 마한 소국들이야 이제 약해진 백제를 믿을 수 없었고, 부유한 가야 연맹이 제공하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이득이 훨씬 매력적이었으니 나름 이유는 있었으나 백제 입장에선 화날만 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견제해야 했기에 이걸 갖고 반파국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양면 전선이 벌어져 신라, 백제, 가야 모두 사이좋게 공멸할 수 있는데다, 마침 반파국과 역시 동맹 관계였고 절대로 백제가 버릴 수 없었던 강한 동맹국인 신라도 이 일에 엮여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백제가 크게 양보하여 고구려에게 대항하는 백제-가야-신라 동맹은 여전히 이어진다.

2.4. 후반

그러나 이러한 줄타기 외교관계는 6세기 초, 백제 무령왕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512~513년, 백제 무령왕이 후기 가야 22국 가운데 모루, 대사, 사하,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의 가야 7국을 멸망시켜 백제에 복속시키는 사건이 일어닜다.

이 7개 가야국 중 대사국을 제외한 6국은 5세기 후반에 백제에게서 이탈한 전라도 동부의 옛 마한 거수국들(구례, 광양, 순천, 여수, 남원, 임실 등)이었다. 상술했듯 대가야가 군사력으로 마한에게서 빼앗은 게 아니라, 마한 수장국이었던 한성백제가 그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전라도 동부의 옛 마한 거수국들이 마한 연맹을 이탈하여 대가야가 주도하는 연맹 체제에 참여했다고 보는 게 진상에 가깝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백제 입장에선 한성 공함으로 상황이 어려울 때 가야 연맹에게 전라도 동부를 잠깐 양보한 것에 불과했고, 때문에 512~513년에 개전하게 된다. 다만 당시 이 일대는 반백제친가야 여론이 강했고, 대가야도 허수아비는 아니었기에 몇 년 못가 백제에게서 다시 빼앗았지만[4], 520년대 초반에 백제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기어이 도로 되찾아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름아닌 침미다례 일대가 백제 왕실에게 나름 우대받으면서 직접 지배령으로 편성되었고, 대가야전에서 백제의 일부로서 한몫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벌어진다. 이 6국 정도만 백제가 빼앗았다면 백제-가야의 와교관계가 최악까지 치닺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대사국이었다. 대사국은 3세기 후반, 금관가야 시기부터 왜와 교류하는 가야의 주요 해상 교역창구였다. 즉, 백제 무령왕이 300년 가까이 이어져온 가야의 최중요 항구 가운데 한곳을 무력으로 강탈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해 후기가야의 맹주였던 대가야가 친백제에서 친신라로 외교노선을 틀어버리게 된다.

520년대, 이러한 대가야의 친신라 행보는 더욱 강화되는데 522년 대가야 이뇌왕이 신라 공주와 혼인하여 동맹을 맺은 것이다. 다만 여전히 탁순국을 비롯한 동부의 가야들은 친백제를 주장했고 가야연맹이 세력권에 따라 크게 분열되었다. 이후 529년, 신라가 가장 동부에 위치한 가야 제국, 탁기탄을 복속시키면서 혼인동맹이 파기되었고 후기가야의 맹주가 대가야에서 아라가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가야가 친백제로 돌아섰으며 백제-가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안라회의 이후, 백제가 아라가야의 걸탁성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다시 백제-가야 관계가 악화되었다. 뒤이어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병합하자 가야연맹의 제국들은 친백제와 친신라를 두고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후 538년, 신라가 탁순국을 병합하자 백제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주장이 늘었고 백제와 가야의 외교관계는 소강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541년과 544년, 아라가야의 주도하에 1차, 2차 사비회의가 개최된다. 두차례 회의에서 가야는 백제에 신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백제의 강경한 정책[5]에 두 회의는 모두 무산되고 만다.

사비회의 이후, 오히려 소강기보다 백제-가야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백제는 결국 노골적으로 가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아라가야는 백제를 떨쳐내기 위해 고구려 양원왕에게 백제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아라가야 연합은 548년 6월,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를 도우면서 고구려의 대패로 끝이 났고 아라가야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한 것을 안 백제는 아라가야를 식민지격으로 전락시켰다. 이후 백제-가야의 관계는 더 이상 협력이 아닌 백제의 일반적인 압박으로 이어졌다.

2.5. 결말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왜 연합이 신라에 대패하자 소가야가 신라에 병합당하였고 555년, 가야가 신라의 부용국이 됨과 동시에 백제-가야는 더 이상 뚜렷한 외교를 하지 않게 된다. 이후 561년 아라가야가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차례로 멸망하면서 백제-가야 외교는 끝나게 된다. 하지만 616년에 백제 무왕이 신라에게 오래도록 준비한 대공세를 펼쳐 성왕 때보다도 더욱 옛 가야 일대를 깊이 지배하게 되면서, 옛 가야 일대에 백제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 적어도 의자왕 당시 대야성 함락 직전 및 직후에는 옛 대가야 일대를 모조리 제패하고 있었을 정도. 김유신이 반격하여 대야성을 도로 빼앗지만 백제 멸망 이후에도 신라가 오늘날 대전 일대 및 전북 동부 일대를 직접 지배령으로 편재한 시점까지도 경상남도 서부 일대 백제가 지배한 영역은 되찾지 못했을 정도로, 백제의 옛 가야 일대 지배 강도는 강했다. 신라는 663년도에야 잔존 백제 군세를 옛 가야에서 일소하면서 가야 영역을 두고 벌인 백제와의 쟁패를 끝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옛 가야 일대는 그로부터 거의 250여년만에 백제와 또 다시 인연을 맺게 된다. 918년도에 서라벌 내부에서 박씨 왕가의 부활에 반대한 김씨 족단 반란이 서라벌에서 일어나 신라 내부 상황이 어수선했던 시기에 견훤의 (후)백제군이 전광석화같이 진격하여 옛 대가야 일대를 모조리 제패한 것이다. 이후 옛 가야 일대는 간혹 고려가 유리할 때는 고려에게 귀부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이후부터는 후백제의 판도 아래 있었던 기간이 상대적으로 더 길다. 후백제가 망하기 몇 년 전에는 충청도 일대와 나주가 고려에게 귀부했지만, 후백제가 경상도 일대에 대한 통제만은 여전히 놓고 있지 않아 멸망 직전까지도 옛 대가야 영역은 경북 서남부 일대와 함께 후백제의 판도에 속했다.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1] 실제로 이 당시 출토되는 유물들 중에서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가야의 유물들이 나오기도 한다.[2]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등[3] 다름아닌 백제의 옛 상전인 마한 목지국도, 기리영 전투에서 위나라에게 패한 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의 적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목지국을 버리고 위나라에게 붙어 위신과 세력에 큰 타격을 받은 바 있었다. 거의 이백년만에 백제 또한 마한 수장국으로서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만 것[4] 다만 이때도 순천, 여수, 광양 일대는 백제가 사수해냈다.[5] 안라왜신관 해체, 주요 성에 백제 병사 배치, 6성 건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