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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일본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 이전에 쓴 명칭이자 이후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별칭. 왜국(倭國)이라고도 한다.야마토 정권이 지배하던 7세기 이전까지 일본의 공식 대외 국명은 '왜(倭)'였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 '일본'이라는 국호를 새로 제정하고 주변국들에게 이를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 이후 주변국의 공식 문서에는 '일본'이라는 이름이 쓰였지만 19세기까지도 일상적으로는 '왜'라는 이름이 많이 불렸으며, 현대에는 일본에 대한 비칭으로 인식된다.
일본사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공식적으로는 아스카 시대까지가 왜국에 해당한다. 아스카 시대 후반부에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야마토 문서 참고하십시오.《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같이 고대 중국과 한국의 사서에서는 일본을 공식적으로도 '왜국'으로 칭했다.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 신라가 이름 변경을 인정했기에, 그 뒤로 일본과 주고받는 외교 관련 기록에서도 더 이상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이라고 불렀다. 발해 역시 841년 작성된 〈함화 11년 중대성첩〉 등 외교 문서에서 일본을 '일본국'이라고 불렀다.
'태양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일본이란 이름을 지은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일본이 동아시아권에서는 거의 가장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일본 열도 동북쪽의 도호쿠 중북부와 홋카이도는 야마토 정권에 복속되지 않았고 해당 지역은 연맹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통일된 국가체계가 형성되지 못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공포 때 공식적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으로 나오는데, 이미 7세기부터 일본이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8세기 초인 701년 이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경우 703년에 측천무후 정권이 '일본'이란 이름을 승인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본인을 가리키던 말인 왜(倭)라는 글자의 비하적인 의미를 희석하기 위해 이를 일본어로 발음이 '와'로 같은 '화'(和) 자로 바꾸고 앞에 '대'(大)를 붙여서 '大和'를 국명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일본 내에서 사용하던 국명인 야마토(やまと)와 연결시켜 '大和'라고 쓰고 やまと(야마토)라고 읽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주변국은 일본을 왜(倭)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다. 공식적인 외교 문서에서는 일본국이라고 불러줬지만, 일상적으로는 왜라는 호칭이 더 자주 쓰였다.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조선 통신사를 보좌하던 일본인들이 "우리는 일본인데 어째서 왜라고 부르냐?"라고 따지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왜라는 말을 일본 측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과 근대적 통상을 하자마자 왜국이라고 기재된 한자를 일본으로 고쳐줄 것부터 먼저 요청했다.
3. 기원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정설은 없다. 일본어에서 1인칭 대명사 'wa'의 음차라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이는 12세기에 우라베노 카네카타(卜部 兼方)가 지은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서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각종 원시 부족에게 누구인지를 물으면 가장 먼저 1인칭 대명사를 말한다는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두었다.《후한서》에 등장하는 기록에 따르면 초기에는 委(위)로 쓰였던 것 같다. 단,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해당 구절에서 저 委라는 한자는 '임명하다'라는 동사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당시의 나라 이름은 노국(奴國)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뜻을 좁히고자 委(위)에 사람 '인' 변을 붙여 倭라고 썼다. 중앙집권적 국가가 성립하면서 한자 자체의 의미가 부정적이라는 인식이 생겨,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和로 바꾸어 오늘날에도 和라 부른다.
和도 倭도 모두 일본 한자음으로는 ワ(와)이다. 和는 훈독할 때 야마토라고 읽는데, 야마토라고 읽는 경우 그냥 '和'보다는 '大和'라고 쓸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和는 멸칭의 뉘앙스가 없다고 여긴다. 일본 것을 가리킬 때 일, 왜를 주로 쓰는 한국에서도 ‘화과자’, '화변기' 등 '일본'을 뜻하는 和를 '화'로 읽어 받아들인 것이 있기는 하다. 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일본 밖에서는 '和'와 '倭'의 발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명칭은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사의 초창기에는 노국(奴國)이라는 이름도 기록과 유물에 등장한다. 이게 '왜국'이란 나라와 별개로 일본열도에 존재하던 나라일 수도 있고, 왜국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만, 종 노(奴)자는 '왜'자보다 대놓고 나쁜 의미라서인지 왜국보다 이른 시점부터 쓰이지 않게 된다.
'矮'(키가 작다)에서 이 왜(倭)라는 나라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도 왜(倭)의 기원을 연구한 가설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두 한자가 발음이 같은 한국어와 달리 倭와 矮의 중국어(방언 포함), 일본어(음독) 발음은 전혀 다르므로 그리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니다. 표준중국어의 경우 倭를 '워(Wō)', 矮를 '아이(ǎi)'라 발음하고, 일본어 음독으로는 倭를 '이(イ,ヰ)', '와(ワ)', 矮를 '에(エ)'(오음), '아이(アイ)'(한음), '와이'(ワイ)(관용음)로 발음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당한다. 또한 고대 중국어, 중세 중국어 발음을 봐도 이 두 단어는 전혀 혹은 미묘하게나마 다르게 발음한다.
현대 한국어에서 '倭'와 '矮'의 발음이 모두 '왜'로 같지만, 이 둘은 모두 속음이다. 『훈몽자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중세 한국어에서 '倭'는 '와'로, '矮'는 '얘〯'로 발음하였다. 중고한어에서 '倭'는 평성에 합구음인 烏禾切이고 '矮'는 상성에 개구음인 烏蟹切이었기에 중세 한국어의 발음이 한대 한국어보다 원음에 훨씬 가깝다.
4. 기록
왜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중국 사서는 대체로 전한 대에 성립이 완료되었다고 추정되는 《산해경》이다. 여기에서는 왜가 전국시대의 연나라에 신복한 것으로 나오지만, 애초에 《산해경》이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 모음집이라 그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왜국이 연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의 사실을 기록한 《한서》 〈지리지〉에서도 "낙랑 바다 안에 왜인이 있으니 나뉘어 100여 국이 되었고, 해마다 와서 조공하였다고 한다"고 짤막하게 언급된다.왜가 분명하게 역사에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후한 세조 광무제 때인 서기 57년 1월로, 지금의 규슈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노쿠니(奴國)의 왕이 대부를 파견해 후한에 조공하여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받고 나서이다. 이 금인은 에도 시대인 1784년 규슈 후쿠오카현 시카노 섬에서 발견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2] 그 후에도 후한 안제 때인 107년에는 왜면국(倭面國)의 국왕 스이쇼(帥升)가 후한에 입조하여 노예 160명과 공물을 바친 기록이 남아있다. #
그 후로 중국 기록에서는 왜에 대한 언급이 한동안 없어졌다. 180년대를 전후로 왜국에서 대란이 벌어져 한동안 무정부 상태였다는 기사만이 전해질 뿐이다. 삼국시대 위나라 때인 239년 6월,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의 여왕인 히미코(卑彌乎)가 대방군을 통해 조공의 의사를 밝히면서 재등장했다. 그해 12월 위의 명제에게 나시메와 츠시고리 등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 10명을 바치고는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왜는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에 올라섰다.
여자가 다스리는 바다 건너의 섬나라라는 흥밋거리 때문인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왜의 소국들과 사회 및 풍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정도이다. 읽어보기 히미코가 죽은 뒤 다시 남자가 왕으로 올라 통치하였지만 오히려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가, 히미코의 종녀(宗女)인[3] 토요(臺與)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나라가 정리되어 서진에 입공하였다.
한편 한국 기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신라에 왜인이 쳐들어오거나 왜국과 우호를 맺는 등의 묘사가 나오나, 〈신라본기〉의 3세기 이전 기사들은 동시대 문헌 및 고고학적 연구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대체로 후대의 사건들을 연대만 앞당겨 서술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신빙성이 높지 않다. 아달라 이사금 20년(173년) 5월에는 상술한 왜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었는데, 신라에 사신을 보낸 사실 자체는 맞는 것으로 보이나 《삼국지》의 기록과 연대가 맞지 않으므로[4] 3세기 중반에 일어난 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 후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상당히 오랫동안 끊겼다. 그러다가 일본이 다시 중국과 외교를 시작한 것은 5세기의 소위 왜5왕 시대로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의 다섯 왕이 중국 남조에 사신을 파견하고 서한을 보내며 관직을 제수받았다. 특히 《일본서기》의 유랴쿠 덴노로 추정되는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국서는 전근대 중국에서 외교 문서의 모범으로 크게 일컬어졌다. 왜왕 무가 죽은 뒤 왜와 중국 간의 외교 관계는 또 다시 한동안 암흑에 빠졌다.
한국의 사서에 따르면 꾸준히 신라와 국지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석우로의 사망과 관련된 기사에서는 일본 측의 《일본서기》와 교차검증되는 부분도 나타난다.[5] 요약하자면 석우로가 불필요한 도발을 했다가 왜인들에게 죽었고, 부인이 복수를 위해 왜국의 대신을 죽이자 분노한 왜인들이 신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양측 사서의 기년이 정확하지 않은 관계로 시기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4세기 초반의 일로 추정된다.
왜국은 한반도 국가 중 백제나 가야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왜인이 백제나 가야에서 군인으로 일하거나 국제결혼 및 혼혈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두 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여러 번 지원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학계에서 폐기된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사실을 과장되게 표현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곧이곧대로 해석한 결과였다. 그러다가 관산성 전투와 가야 멸망을 계기로 신라의 국력이 탄탄해지는 6세기 후반부터 왜의 침략이 거의 사라졌다.
오히려 527년에는 일본 규슈 북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이와이(磐井)를 신라가 사주해 그가 왜국 조정에 반기를 들어, 1년 후 왜국이 토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측 기록에는 없는 사건이지만 이 것이 사실이라면 법흥왕이 역으로 일본의 정세를 역이용해 한 방 먹인 사례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 때, 쇼토쿠 태자가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묻노니 무양하신가"[6]라는 국서를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를 시켜 보내게 한 그때가 왜가 다시 역사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6년(608년) 6월 조에 따르면 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받아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백제가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 했던 걸로 보인다.
노중국 교수는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7] 변화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또 당시 쇼토쿠 태자의 관위와 헌법(憲法) 시행 및 조례(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이나 607년 수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한다.
즉, 노중국 교수는 백제의 국서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나라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고 말하였다. 반면 일본 국내에서는 그 뒤인 701년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공포될 때 공식적으로 왜에서 일본으로 바꾼 것으로 나온다. 이미 7세기부터 일본이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701년 이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는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면서, 중국 정사의 열전에는 왜전(倭傳)이 사라지고 일본전(日本傳)이 입전된다. 이때 중국에서는 일본과 왜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당서》에서는 "중국의 글 뜻을 제대로 알고 왜라는 이름을 꺼려서 일본으로 바꿨다", "일본은 왜의 속국이었는데 왜가 병합하고 이름을 모방했다(소가 씨 축출?)", "해 뜨는 곳에 가까워 일본이라고 했다"고 하며 "사신이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고로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고 할 정도였다.
5. 영향
고대 한반도의 자질구레한 싸움에서 종종 왜인들이 언급이 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토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대륙계 귀화인들의 일본 영향력보다 못 미치는 정도로, 고대 일본 지방 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약탈을 위한 침범 혹은 용병으로 동원되었던 정도로 생각되고 있다.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삼국 정립 이전이나 이후에나 일본계 정부에 의한 행정권이라고 할 만한 영향력은 없었다.러시아 태생의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삼국시대 초기의 한반도의 남부 지역들에 현대 일본인들의 조상이 되는 고일본어를 사용하던 토착민족들이 세운 나라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었다. 물론 임나일본부 같은 주장인 건 아니고, 그냥 본토의 중앙 정부인 야마토와는 관계없는 부족 국가들에 불과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애초에 고대에 지금처럼 명확한 국경을 긋고 민족이 구역을 딱딱 나누어 살았을 리는 전무하다. 고대 왜인들의 침입은 신라 말기의 신라구가 보인 양상과도 비슷한데, 혼란 시대의 한반도 일부 지방에서나 보일 만한 중구난방 활동을 보면 그만큼 통제가 안 되는 여러 세력들이 집적거리면서 토벌되거나 이주자를 주고받는 식의 교류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이 때문에, 알렉산더 보빈은 고대 일본어에도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어휘가 대거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일본 내에도 한국계 부족국가들이 일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6. 용법
7세기 이후 공식 국호가 왜에서 일본으로 바뀌면서 공식 명칭은 일본(日本)으로 통일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중국과 한국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의 왜(倭)라는 명칭은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었다. "잘하면 일본국, 사고치면 왜국"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인식을 대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임진년에 왜인들이 들어와서 난리를 피운 사건.7. 고유어
見請之倭 與之戰鬪 若不脫冑 國民焉救
請으로 온 예와 싸호샤 투구 아니 밧기시면 나랏 小民을 사ᄅᆞ시리ᅌᅵᆺ가
청을 받고 온 왜적과 싸우사 투구를 아니 벗기시면 나라의 백성을 살리시겠습니까?
《용비어천가(1447)》 52장 中
조선 초중기만 하더라도 왜인 이외에 예라는 순우리말 표현 역시 일본인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한글 문헌에서의 최초 문증 사례는 상술한 15세기 《용비어천가》의 본문이며, 《삼강행실도언해(1481)》에도 용례가 나타난다. 이후 16세기에도 옥편인 《훈몽자회(1527)》에서는 한자 倭를 두고 "예 와"라고 훈과 음을 달아두었고, 〈선조국문유서(1593)〉에서도 '예나라'를 일본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기도 했다.請으로 온 예와 싸호샤 투구 아니 밧기시면 나랏 小民을 사ᄅᆞ시리ᅌᅵᆺ가
청을 받고 온 왜적과 싸우사 투구를 아니 벗기시면 나라의 백성을 살리시겠습니까?
《용비어천가(1447)》 52장 中
임진왜란 이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서는 '예', '예왕', '예나라' 등의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1668년 집필된 《하멜 표류기》에서도 "조선인들은 일본을 '예나라(Ieenare)'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18세기 후반의 실학자 유득공 역시 그의 저서 《고운당필기》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倭)를 '예'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수록했다.[8]
신라 시대의 향가인 〈혜성가〉에서는 倭理라는 표기로 등장하는데, 이 표기를 바탕으로 김완진과 알렉산더 보빈 등의 학자들은 해당 어휘가 신라 시대에는 '여리'라고 읽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 어중의 ㄹ 음소가 생략되면서 상성이 되는 경우는 '내(←나리)', '뉘(←누리)' 등의 사례가 존재한다. 노리부, 아리나례(아리수) 등 삼국시대 인명·지명 표기와 동동 등의 고려가요에서 각각 '나리', '누리'라는 옛 어형이 확인되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를 볼 때 어중의 ㄹ발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탈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어휘는 19세기 경에 이미 '왜'라는 한자 표현으로 대체되어 사어가 되었으나, 제주어의 일부 지명에는 아직까지 흔적이 약간 남아있으며, 오구라 신페이에 따르면 20세기 초까지 서남 방언에서도 속담에 포함된 형태로 한동안 살아남아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해당 표기가 '더러울 예'(穢)에서 비롯되었다는 민간어원이 널리 퍼졌던 듯하나, 학술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이다.
8. 기타
"귀국의 문집을 보다보면 일본에 대하여 반드시 왜적이라거나 야만이라고 하는데 참을 수 없다. 도쿠가와 장군도 가끔 조선의 문헌을 보고 군신들에게 조선은 이 정도로 우리를 미워하는가 하고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공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떤가!"
라고 호슈는 심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노기를 띠면서 말했다.
"그 뜻은 쉽게 알 수 있으나 바라건대 귀국이야말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당신이 본 우리나라의 문헌이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된 글일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의 철천지원수이고 종묘사직의 훼손, 영혼의 원한, 실로 만세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민은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위로는 지존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욕하고 적으로 말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문장에 반영되어도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임금은 백성을 사랑하여 부산에 왜관을 개설하여 교역하고 더구나 일본의 산하에는 히데요시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로 사절을 파견하여 화목을 도모하고 국서를 교환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지나간 원한을 다시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그의 반응을 보는 동안에 오사카에 도착하였다.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목격하고 머리가 쭈뼛해짐을 느꼈다.
호슈 왈,
"그것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지금도 일행의 종자들조차 일본 사람을 부를 때 왜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지금부터는 일본사람으로 불러주기를 바란다."
"그럼 귀국의 사람은 우리를 부를 때 당인(唐人)으로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신유한의 《해유록》 중에서
조선시대에 이 왜(倭)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21세기에 이른 지금도 왜놈이란 말은 엄연히 멸칭으로 사용되어서 논란이 많았듯이 조선통신사들이 왕래하던 18세기에도 조선 사람이 일본인을 '왜인'으로 부르는 것에 일본인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호슈는 심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노기를 띠면서 말했다.
"그 뜻은 쉽게 알 수 있으나 바라건대 귀국이야말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당신이 본 우리나라의 문헌이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된 글일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의 철천지원수이고 종묘사직의 훼손, 영혼의 원한, 실로 만세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민은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위로는 지존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욕하고 적으로 말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문장에 반영되어도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임금은 백성을 사랑하여 부산에 왜관을 개설하여 교역하고 더구나 일본의 산하에는 히데요시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로 사절을 파견하여 화목을 도모하고 국서를 교환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지나간 원한을 다시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그의 반응을 보는 동안에 오사카에 도착하였다.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목격하고 머리가 쭈뼛해짐을 느꼈다.
호슈 왈,
"그것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지금도 일행의 종자들조차 일본 사람을 부를 때 왜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지금부터는 일본사람으로 불러주기를 바란다."
"그럼 귀국의 사람은 우리를 부를 때 당인(唐人)으로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신유한의 《해유록》 중에서
이에 대해 당대 일본 유학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가 불만을 제기하자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었던 신유한은 왜 일본인은 조선 사람을 보고 '당나라 사람'[9]이라 부르느냐?! 라고 맞수를 놓았다(이에 호슈는 "조선이 중국에 못지 않게 문화가 뛰어나서 그러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자기들 편의에 따른 것이라 정당한 반박은 아니지만 18세기에도 이러한 호칭의 사용을 통해 조선과 일본이 서로의 인식에 대해 상당한 간극이 있었고, 조선통신사 활동이 이런 오해를 푸는데 어느정도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일본엔 어느 나라든 흔히 그렇듯 국까들도 있는데, 특이하게도 일본의 국까들은 사대주의자거나 중세 잽 랜드같이 자조하는 의미에서 국까를 자처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마구 들춰내는 식으로 자국 혐오에 이른 사람들도 상당하다. 이는 일본이 과거 추축국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일본의 전쟁범죄와 같은 자국사의 추악한 진실을 깨닫거나 자국의 우경화에 환멸을 느끼는 진보 성향 일본인들이, 이런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쉬쉬하고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이렇게 된 경우가 있다.[10] 이들은 고대 일본이 대외적으로 왜국(倭國)으로 불렸다는 점을 단골 소재로 써먹는 편이다. 여기에다 다른 나라들 평균 신장까지 같이 첨부해서 일본이랑 비교하면서 까는 변형도 있다.
9. 같이보기
[1] 시기적으로 보면 야마토 정권이 열도를 점점 통일하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새로운 국명을 채택했을 여지도 있다.[2] 실물 사진[3] 《삼국지》에 따르면 종녀라는 표현이 나온다. 손녀인지, 조카인지 알 수 없다.[4]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기록에서는 180년을 전후로 왜국에서 대란이 있었으며, 나라 사람들이 히미코를 왕으로 추대하여 혼란이 수습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이보다 이전인 173년에 히미코가 여왕의 지위에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5] 《삼국사기》에서는 "석우로가 왜군에게 가서 말실수를 해명하자 왜인이 그를 붙잡아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고, 이후 석우로의 처 명원부인이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국의 대신을 태워 죽이자 분노한 왜인들이 신라 금성을 공격했다"고 한 반면, 《일본서기》에서는 "우류(宇流) 조부리지간(助富利智干)이 일본에 항복하자 일본인들이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벤 다음 돌아갔고, 이후 우류의 처가 일본인 재상을 속여 남편의 주검을 찾아낸 뒤 재상을 죽이자 분노한 천황이 군함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다"고 하였다.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인 전개가 유사하므로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6] 서문에 으레 사용하는 문구라는 설이 유력하다. 정황상 도발이라고 볼 수 없다.[7]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8] "우리나라 사람이 왜(倭)를 예(濊)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왜(倭) 또한 동이이기 때문에 섞어서 일컫는 것인가?(我人呼倭爲濊, 則未知何據. 倭亦東夷, 故混稱之歟?)"[9] 훈독으로는 두 나라 모두 '가라'라고 읽었다. 사실 이 말은 가야에서 온 말인데, 고대 일본이 중국 문물을 전래받은 중간 통로가 바로 가야였기 때문이다.[10] 같은 예로 독일은 나치스 시절의 과오 때문에, 자국 내 정치권을 중심으로 반민족주의 성향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그래서 역시나 안티파 진영을 중심으로 자국 혐오 여론도 크게 퍼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