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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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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3. 원인4. 전개
4.1. 인세이의 시작4.2. 인세이의 절정기,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4.3. 원()과 제()의 대립
4.3.1. 도바 상황의 인세이4.3.2. 호겐의 난과 무사세력의 대두
5. 종말6. 여담

1. 개요

인세이([ruby(院政, ruby=いんせい)], 원정)는 일본 역사에서 천황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치천의 군([ruby(治天の君, ruby=ちてんのきみ)])'으로서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했던 독특한 제도를 의미한다. 상황이 '원()이라 불리는 곳에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았다.'는 뜻에서 '인세이(院政, 원정)'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이후 원(院)은 태상황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나아가 천황을 가리켜서 '○○천황'이 아니라 그냥 '○○원'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천황의 지위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까지 의미가 변화했다.

외척 후지와라 섭관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황위계승 과정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천황 자신이 자신의 계통으로 이을 수 있게끔 하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동시에 군주인 천황의 권위를 떨어뜨렸고, 결과적으로 막부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세이은 쉽게 말해 상왕정치의 일종이고 그렇게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양위한 상황 즉 원(院)이라고 해서 무조건 인세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황이 몇 명이 존재하든 상관없이 잉세이를 행할 자격이 있는 자, 즉 '치천의 군'은 단 한 명만 존재할 수 있었으며, 치천의 군이 아니면 상황이라고 해도 인세이를 할 수 없었다. 치천의 군의 자격 요건은 일단 천황으로 즉위했던 적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고(...)[1] 현재 천황으로 재위 중인 재위의 군(在位の君) 즉 현직 천황에 대해 혈연적으로, 또는 의제적으로 직계존속 관계에 해당하는 사람이어야 했다.[2]

치천의 군은 쉽게 말해 황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집안(황실)의 최고 웃어른이자 당주로 이해할 수 있다. 치천의 군은 자신이 원하는 황자[3]에게 황위를 계승하게 하고, 또 그 이후의 계승에도 관여하여 그 차기 계승자를 결정할 권리[4][5]를 갖는다는 점에서 여느 숱한 상황들과 결을 달리했다. 게다가 일본 각지에서 장원 개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시라카와 인세이 후기 이래로 각지로부터 황실에 대한 장원 기진(寄進)이 몹시 집중되고[6] 황실이 소유하게 된 이 막대한 경제권을 누구에게 증여하고 또 상속할 것이냐를 결정한 권한까지 인세이를 행하는 치천의 군, 일본 황실의 당주에게 생기게 되었다. 즉 누가 '치천의 군'이 되느냐의 문제는 황위 계승에 있어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황실이 소유한 장원에 대한 재산권 및 그 상속권을 누가 가질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보통은 양위한 상황의 위치에서 인세이를 행하는 '치천의 군'과 현재 천황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재위의 군'은 서로 다른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재위 중인 '재위의 군'이 동시에 '치천의 군'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를 친정(親政)이라고 한다.

2. 유래

사실 군주제 국가의 특성상 어린 나이 등으로 통치 능력이 없는 군주는 자주 등장했고, 따라서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통치하는 섭정들은 군주제 국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였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왕실이나 황실의 최고 여자 어른이 군주가 성인이 될 때까지 통치하는 수렴청정이 보통이었다.

또한 선황이 아직 정정한데도 양위하는 사례 자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756년 당현종안사의 난이라는 위급상황에서 황태자에게 양위했고, 조선의 태종도 1418년 아들 세종에게 양위하였다. 태종세종에게 양위한 후 국왕이 가지는 잡다한 업무부담을 털어버린 후 상왕으로서 권력만 챙기는, 좀 더 수월한 통치활동을 보여준 역사가 있다.[7] 왕이었던 적은 없지만 국왕의 아버지실권자로 집권한 사례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본 예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특수 사례로 일반적인 제도로 자리잡은 케이스가 아니다.[8]

하지만 인세이는 특수 케이스가 아닌 일반적인 관례로 자리잡았고 직위의 성질 자체가 변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천황이 후계자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 앉은 뒤에도 천황의 자리에 있었을 때의 실권을 놓지 않고 통치를 행하는 것이 관례적으로 인용되었다는 점이다. 인세이를 요약하자면, 상황이 붕어 뒤 천극(踐極)에서 분란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어린 저군(儲君)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상황으로 물러나 실권을 휘두르는 형태였다.[9] 따라서 인세이 시기 천황은 명목상으로만 천황이지 사실상 후계자 직위로 변질되었으며 황태자에서 직함만 올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를 일본의 은거(隱居) 제도와 유사한 정치형태였다고 설명한다. 일본의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수장이 가독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은거'를 결정한 뒤에도 여전히 가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10] 따라서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上皇)이 그 위치에서 천황과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현직 천황의 권력을 능가하기까지 하는 것도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황실 즉 '천황이라는 지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가문'의 최고 당주가 천황의 지위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현직 천황이 아니다 뿐이지 엄연히 황실의 당주인데 당주로써 그 가문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 뭐 어떻단 거냐."는 인식과 유사하다. 이는 공적 지위보다 가문 내 질서를 더 우선시한 전근대 일본 정치의 특징을 보여준다.

막후는 천황제나 쇼군, 다이묘나 귀족 등의 문화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일본 정치에 존재하는 일본 문화의 한 전형적인 형태 요소다.

3. 원인

정치적인 환경을 고려해보자면 인세이는 황위 계승이 장자 상속으로 고착화되지 않은 채 외가의 권세에 좌우되던 일본 황실의 특성과, 강력한 외척과 천황들의 유착 및 갈등 상황과 연관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 황실의 분열은 천황들의 계승권이 복잡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복잡한 후계 문제를 야기했다. 따라서 생전 천황이 살아있을 때 계승 문제를 확실하게 하고자 인세이라는 제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죽은 권력은 말이 없기 때문에 천황이 죽고 난 이후 누굴 천황으로 올릴지는 분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실권이 없었더라도 명목상 장기간 재위한 인물을 끌어내리고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행동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세습 경영을 추구하는 재벌 그룹들이 후계 준비의 일환으로 후계자로 확실히 내정된 인물을 그룹 내 주력 기업의 사장 자리에 앉히면서 실권을 맡은 사람은 '회장' 직함으로 올라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11] 바꿔 말하면 인세이는 현직 천황이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을 단순히 황태자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천황이라는 '군주'의 자리에 명목상이나마 앉힘으로써 후계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신의 사후 발생할 계승 문제를 원천 차단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라라면 아들을 태자로 정하는 것만으로 세습이 공고히 되지만 당시 일본은 장자 계승이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예 생전 증여로 천황 자리를 줬다는 것.

장자 계승 제도가 정착하지 못한 것은 일본의 당대 통치 이념에 유교적 색채가 많이 옅었던 것에 기인한다. 중국한국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교적 통치 이념이 자리를 잡았다. 장자 계승이니, 적장자니 하는 개념도 다 유교에서 적법한 왕위계승원칙을 세우면서 확고해진 개념이다. 한국사를 보면 후기 신라의 혼란기에는 귀족 간의 권력다툼이 잦아지고 그 다툼의 승자가 왕위를 차지해가는 양상이 나타나지만 이후 후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고려-조선으로 가면 유교의 종법 개념에 따라 왕위 승계가 이루어진다. 물론 중국이든 한국이든 유교를 기반으로 한 승계 원칙이 세워지고 나서도 소위 '찬탈'이라고 불리는, 승계 원칙에서 벗어난 집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빈도는 크게 줄었으며 최소한 찬탈자들도 명목상으로는 유교적 승계 원칙을 따랐다는 프로파간다를 유지했다.[12][13]

반면 일본은 이 시기까지도 유교에 따른 승계 원칙이 확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불완전한 후계 구도를 보완하기 위해 생겨난 변칙적인 제도가 인세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세이는 여러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분열과 혼란기가 이어졌고 결국 천황이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실 권력 계층의 분열은 대표적인 국가 멸망 원인 중 하나로 다른 유교 문화권 국가 같았으면 진작 역성혁명으로 새 나라가 세워졌겠지만 섬나라라는 일본의 특수성과 천황제는 건드리지 말자는 일종의 암묵적 합의 덕분에 제도 자체는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후 세워진 막부는 사실상 또 다른 국가나 다름없었고 에도 막부쯤 가면 일본에도 '유교적 종법 제도'가 확실하게 정착하게 된다.[14][15]

더불어 천황들이 종교적 권위로 인한 여러 행동상의 제약들과 의례 수행에 따른 번잡함, 관례화된 후지와라 가문의 정치 관여 등을 피하면서도 권력은 누리려는 성향도 인세이의 지속 원인이었다.

인세이는 천황의 후계 문제 자체는 나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군림해야 할 '천황'이 실권이 없다는 점과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물론 정책과 제도의 시행, 권력 구도 측면에 있어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위치'이긴 했으나 어쨌건 '천황'의 자리에 오른 마당에 상황과의 권력 분열은 천황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국가 최고 결정권자가 1명이 아닌 현실에서 정치 상황이 문란해지는 것과 함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어 국가 운영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세이 제도가 생겨난 이후 천황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고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무사들이 권력 지위를 넘보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이 다툼에서 '천황파'가 패하고 '무사계급'이 승리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전통적인 천황제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유명무실해지고 무사 정권이 등장하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4. 전개

4.1. 인세이의 시작

일본 역사에서도 생전 양위한 천황은 심심찮게 있었다. 고교쿠 천황이 남동생인 코토쿠 천황에게 양위했던 것이 첫 사례이고, 헤이안 시대에도 몇 명의 천황들이 생전 양위한 기록이 존재한다. 섭관정치 이전인 헤이안 초기, 8세기사가 천황(嵯峨天皇)에게 양위했던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이 상황으로 있었는데 그 복위가 시도되어 '구스코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사가 천황 본인도 양위 후 상황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율령 체제하에선 양위한 상황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는 게 원칙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상황은 천황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규정 때문에 상황들은 정사에 관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세이가 이미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나타났다는 해석이 많지만, 흔히 인세이의 전형이라 불리는 시라카와 법황[16]의 예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이 시대에는 천황 세습이 명백하게 규정된 것이 아닌 데다가, 헤이안 말기로 갈수록 천황들이 단명하는 사례가 많아 강력한 권력을 가진 상황이 나타날 여건이 아니었다. 이리 되니 자연스럽게 황가는 약해진 반면, 전대 천황의 부인황후의 집안이 천황의 외조부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우다 천황부터 이렇게 권력을 휘두른 집안이 바로 후지와라 가문으로, 무려 170년 동안 천황에게 자신들의 을 황후로 들이게 하고, 천황이 젊어서 요절하면 나이 어린 외손자를 등극시킨 뒤에 '섭정(摂政)'으로, 천황이 성인이 되면 '관백(関白)'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오랜 세월 권세를 누리면서 신하들을 복속시키고, 지방의 관리들과 토호들을 회유했으며, 막대한 장원을 기진받아 천황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자 자연히 천황의 권력은 크게 제한되었다.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행하고, 천황이 장성한 후로도 권세를 누리는 판이었기에 상황들의 정치 참여는 거의 제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지와라 참조. 헤이안 중기는 이런 섭관정치 시기였다.

1068년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섭관가의 권세가 약화된다. 170여 년 동안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와 엄청난 장원을 소유하여 막대한 재력과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을 휘두르던 섭관(摂関) 후지와라 가문에 반발했던[17] 고산조 천황은 170년 만에 후지와라 가문 여인의 소생이 아닌 천황이 되었고 후지와라 가문의 섭관정치를 약화시켰다. 당시 후지와라 섭관가(摂関家)는 내분으로 인해 천황의 견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고산조 천황은 외척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이라 칭송받는 정치를 펼쳐 장원을 축소시키고,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면서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고산조 천황은 맏아들인 사다히토 친왕(貞仁親王)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행하려다[18]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다만 고산조 천황이 인세이를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양위 후에 후지와라 가문의 재등장을 막으려는 차원이었다는 분석도 있긴 하다. 이후 섭관가는 규정 외의 장원이 정리되는 등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져서 잠시 국가 상황이 호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지와라 섭관가 밑에서 숨을 죽이던 후지와라 방계 및 타성바지의 귀족들이 이후 점차 임용되기도 한다.[19]

4.2. 인세이의 절정기,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

사실상 인세이의 전형은 시라카와 천황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시라카와 천황은 1087년에 불과 8살밖에 안 된 아들 타루히토 친왕(善仁親王)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면서 인세이는 시작했다. 이렇게 즉위한 호리카와 천황(掘河天皇)이 죽고, 5살밖에 안 된 호리카와 천황의 아들이 즉위하여 도바 천황(鳥羽天皇)이 되면서 시라카와 상황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아예 모든 정사는 시라카와 상황이 좌지우지하고 천황은 말만 천황일 뿐 사실상 황태자[20]나 다름없는 기묘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인세이가 본격화되고 나면 아예 태자 책봉도 안 하게 된다.

시라카와 천황이 처음부터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들에게 양위한 건 아니었다. 원래 양위한 이유는 강력한 차기 황위계승권자인 동생들을 우려해 동생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호리카와 천황 관백인 후지와라노 모로미치(藤原師通)와 상의하며 정사를 봐서 시라카와 상황이 멍때리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는 고산조 천황이 섭관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는 했으나 아직은 조정에서 섭관정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탓에 시라카와 상황에게는 셋칸케에만 쏠리는 국정 운영에 필요한 정보력과 영향력 및 상황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마땅한 조직과 기반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1099년 때마침 관백 후지와라노 모로미치가 사망하여[21] 시라카와 상황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모로미치의 아들 후지와라노 타다자네(藤原忠實)는 당시 나이가 어렸고, 아버지만큼의 정치력은 없었기에 모로미치에게 상의해서 정치를 하던 호리카와 천황은 이제 아버지에게 물어서 정치를 해야 했다. 게다가 1107년 호리카와 천황이 갑자기 사망하고, 5세이던 황태자 무네히토 친왕(宗仁親王)이 즉위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시라카와 상황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다. 더불어 후지와라의 섭관을 임명하던 후지와라 출신의 황태후가 부재하였던 상황은 황실 최고 어른의 자리를 상황이 온전히 차지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이후 황태후를 대신해 상황이 셋칸의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황실 어른으로서 천황의 계승까지 결정하게 되었다.[22]

이후 시라카와 상황은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원어소(院御所)인 교토 동북부 시라카와 호쿠덴(白河北殿)에 자리잡은 그는 권력의 수족으로 외척이나 대귀족들 대신 중하류 귀족들과 지방 국사(國司) 출신들 및 무가 세력을 기용해 그들 중심으로 측근정치를 행하였다. 이들은 인에 설치된 원청에서 근신(近臣)으로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인은 조정에도 근신들을 보냈고, '인젠(院宣)'이나 '인쵸쿠다시부미(院廳下文)' 같은 문서를 통해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조정을 압박했다. 또한 경호 및 직권 무력으로서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호쿠멘노부시)'를 설치하여 측근들과 각지의 겐지, 헤이시와 같은 여러 무사 씨족들을 기용하였다. 이들은 인의 경호 및 직접적인 무력으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유칸(融観)'이란 법명을 받은 시라카와 법황은 불교계와 유착을 강화했고, 젊은 섭정을 직접 임명하며, 도중 그 직권을 2번이나 정지시키면서 기를 꺾는 등 후지와라 섭관가를 견제하였다. 또한 방계 황족들을 출가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후지와라 가문이 황위 계승에 간섭하지 못하게 해 자신의 자손들이 외척의 도움 없이 황통을 이어가게끔 조치하였다. 이런 권세 덕에 법황은 '치천의 군(治天の君)'이라 불리며 위세를 떨쳤다. 이때 시라카와인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 가지, 즉 '천하삼불여의(天下三不如意)'에 대해 말했다고 하는데, 교토 인근 카모가와(賀茂川)의 물, 쌍륙의 주사위(의 눈금), 승병의 문제[23]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는 것이다.[출전] 이는 뒤집어 말하면 자연과 운, 당시 강성하여 강소(强訴)를 일삼던 승병들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이 전제(專制)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승병은 무사들을 동원해 억제하였기에 상황으로서 지난날 섭관의 권력 이상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시라카와 법황은 섭관가를 비롯한 귀족들의 장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섭관가의 전횡을 억제하기도 했지만, 점차 인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조정이 무력화되고, 정치가 자의적으로 행해져 조정의 권위가 떨어지는 폐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에 심취했던 인이 사원들에 장원을 기진하거나 새로운 사원을 세우면서 재정 지출이 증가하고, 장원 개혁이 약화되는 폐해를 생겨났다. 더불어 후지와라 섭관가와 밀접했던 무사씨족 '카와치 겐지[河内源氏]'를 경계하여, 겐지와 경쟁하던 무사씨족이었던 '이세 헤이시[伊勢平氏]'를 중용했는데, 그 비호 아래 타이라 가문이 인의 무장세력으로서 복무하면서 지방의 문제나 승병들의 강소 등을 막고, 상업과 장원에서 쌓은 부를 인에 바치면서 성장하여 무가정권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27]

당시까지는 반석과 같던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였으나 위와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후대에 분란의 여지를 남겼으며, 여기에다 사적으로 호색했던 면이[28] 추문을 불러일으켜 이후 황가의 내분, 즉 '호겐의 난'을 초래하게 된다.

4.3. 원()과 제()의 대립

4.3.1. 도바 상황의 인세이

인세이는 천황을 공기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인세이의 가장 큰 문제는, 제도적으로 양립된 권력 배분이 아닌 암묵적인 합의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세이 시기 상황의 통치는 명문화된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의 권력은 어디까지이며 천황의 권력은 어디까지인지, 천황의 나이가 일정 이상이 되면 상황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지에 대한 규정이 있을리 없었다.

따라서 인세이를 하는 상황이 권력을 휘두르는 과정은 순전히 '상황이 내키는 대로'에 지나지 않았으며 천황의 역할은 상황이 중요한 안건들을 다 처리하면 남는 허드렛일에 불과했다. 자연히 권력에서 소외된 천황에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게 되고, 천황이 상황에게 맞서서 권력을 쟁탈하려 하게 되면 결국 내전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129년 시라카와 법황의 사후에 일어났다. 1123년 시라카와 법황은 직접 키운 손자 도바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도바 천황의 장남 스토쿠 천황을 세우고 난 뒤에 죽게 되었다. 문제는 도바 천황이 스토쿠 천황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도바 천황이 처음부터 장남을 싫어했던 건 아니고, 강제로 양위하게 된 것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이 사정에 대해선 스토쿠 천황 문서 참고.

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난 뒤, 도바 상황은 선대를 따라 인세이를 행하여 율령을 벗어난 자의적 정치가 이어졌다. 특히 도바 상황은 장원의 국령지 회수보다 자신의 장원 확보에 열을 올리면서 원(院)이 막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도바 시기 장원으로 인한 분란과 소요가 끊이질 않게 되었다. 상황이 사적으로 장원을 늘리는 행위는 황실의 신망을 떨어뜨렸으며, 국고를 감소시켰다. 이런 경향이 확대되어 타이라 같은 무사 가문이나 귀족 가문들, 지방의 권세가들까지 토지를 겸병하게 되었고, 이들 세력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국고가 악화되고, 민심이 흔들렸다.[29]

도바 상황은 긁어모은 막대한 영지의 대다수를 총애하던 후지와라노 도쿠시(藤原得子, 비후쿠몬인)에게 물려주었고, 이것이 도바 상황과 도쿠시의 딸이자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 모치히토 왕(以仁王)[30]의 양모였던 하치조인 쇼코 내친왕(八条院 暲子 内親王)에게 상속되어 훗날 모치히토 왕의 거병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 등 황실의 내분과 황권 약화를 부추겼다. 이어 계속되는 실정은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이미 고레이제이 천황 이전까지 거슬러가는 지방의 분열과 불복종은 심화되었다.

중앙 정부의 분열은 자연스레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동북방의 오슈(奥州)에서는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방 관직과 관위를 세습하면서 사설 장원 및 북방과의 교역 및 사금 채취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으로 교토와 맞먹는 규모의 히라이즈미를 건설, 반독립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고[31] 장원들은 소유 무사들에 의해 봉건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이 이들 토지 소유 무사 간의 토지 분쟁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하면서 이를 중재하는 무사 세력의 힘이 성장하였다.[32] '세이와 겐지'와 '간무 헤이시'를 비롯한 지방의 여러 무사들의 대두는 이를 바탕으로 지방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 관계를 형성한 것을 그 기반으로 하였다.

한편 도바 상황은 총애하던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황자를 낳자 이 아들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려고 스토쿠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결국 1142년 스토쿠 천황은 아버지의 강요로 2살짜리 동생인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을 양자로 들여서 양위를 하게 되었고, 코노에 천황이 즉위하였다. '신원(新院)'으로 불리게 된 스토쿠 상황은 원래대로였다면 도바 상황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서 인세이를 할 수 있었으나, 인세이는 천황의 아버지인 상황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우에게 양위하였던 스토쿠 상황은 인세이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도바 법황의 세력이 강력했고, 스토쿠 천황의 아들은 황후인 섭관 가문의 딸 후지와라씨의 자식이 아닌 후궁의 자식이었으며, 나리히토 친왕이 스토쿠 천황의 황후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스토쿠 천황의 장인이었던 섭정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가 도바 법황과 손을 잡아버렸던 탓이었다. 결정타로 양위식 때 양위문에는 황태자가 아닌 '황태제'에게 양위한다고 쓰여, 스토쿠 천황이 아우에게 양위하는 형식이 되었기에 스토쿠 상황의 인세이가 불가능하게끔 되었다. 이에 스토쿠 상황도 가만 있지는 않아서 동생인 코노에 천황의 유사시를 대비해 자신의 맏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을 도쿠시에게 양자로 들이게 했다. 이렇게 되면 시게히토 친왕이 천황이 될 경우 천황의 친아버지라는 명분으로 인세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스토쿠 상황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1155년 병약한 코노에 천황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도쿠시 등은 스토쿠 상황이 인세이를 하는 걸 막으려고 도쿠시의 또다른 양자이자 도쿠시 소생 황녀와 결혼하게 되는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을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리히토 친왕은 당시 너무 어렸기에 장성하여 천황이 될 때까지의 징검다리로 모리히토의 친아버지인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 도바 상황과 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의 4남)을 태자 책봉도 안 하고 천황으로 덜컥 즉위시켜 버렸다. 장유유서의 문제도 있었고, 도바 상황의 측근이자 마사히토 친왕의 유부(乳父)였던 신제이(信西)가 마사히토 친왕의 옹립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로[33] 그가 바로 고시라카와 천황이다. 실제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 그 아들이었기에 고시라카와 천황의 즉위 이후 곧장 모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도 이루어졌다.

4.3.2. 호겐의 난과 무사세력의 대두

태자 책봉도 된 적이 없는 일개 황자가 '징검다리 승계' 개념으로 천황으로 즉위한다는 것은 분명 전례가 없는 파행적인 일이었으나 스토쿠 상황으로선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도바 상황이 죽은 후인 1156년, 고시라카와 천황과 스토쿠 상황은 무력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호겐의 난(保元の乱)'이다. 호겐의 난은 인세이 체제의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되어 버렸다. 스토쿠 상황은 후지와라 섭관가의 씨장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형 타다미치에게 밀려나 있던 좌대신(左大臣)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와 손잡고, 무사 세력을 규합했다. 이 때문에 헤이시와 겐지 역시 분열되었으나 결국 상황측이 패배하여 스토쿠 상황은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은 출가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1158년 고시라카와 천황이 퇴위하여 상황으로 물러나고, 원래 도바 상황에 의해 차기 천황으로 지명되어 있던 모리히토 친왕이 니죠 천황(二条天皇)으로 즉위했다. 니조 덴노는 도바 상황이 직접 후계 계승자로 지명한 '정통' 군주로 막대한 장원을 가졌던 도쿠시와 섭관가 및 헤이시 일문의 보좌를 받고 있었고 니조 천황 본인도 정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고시라카와 상황은 권력을 잃은 채 한가로이 지내었다. 상황 소유의 장원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에게서 몰수한 장원 정도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위축되어 있었다. 이듬해(1159)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등이 일으킨 헤이지의 난(平治の亂)으로 신제이(信西)를 비롯한 상황의 측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 무렵에조차 쟁점은 아들인 니조 덴노의 신변으로[34] 고시라카와 상황은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난의 와중에서 신제이가 살해되고, 주모자로서 다른 측근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살해되는 등 상황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35]

그 후 남아 있던 상황의 측근들은 정쟁에서 패해 파직당하고, 귀족들도 상황을 그저 '징검다리'로 보아 상황에 협조하지 않았다. 정치에서 소외된 고시라카와 상황은 불교, 특히 관음 신앙에 심취하여 쿠마노(熊野)를 여러 차례 참배하였으며, 타이라 가문의 조력을 얻어 관음상 1천 좌를 안치한 관음당(觀音堂)[36]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관음당 완공 후 기뻐하던 상황이 아들인 니조 천황에게 왕림을 청했으나 황위 계승과 인세이 문제로 사이가 멀어졌던 천황은 끝내 왕림하지 않았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거절된 당시나 천황 사후에 이를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165년 니조 천황이 요절하면서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상황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협조를 받아 본격적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앞서 고시라카와 상황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처제인 타이라노 시게코(平滋子, 겐슌몬인)와 결혼하여 유착을 강화하였는데, 정략적인 면이 강한 혼인이었으나 시게코는 상황의 총비가 되어 수차례 쿠마노 참배를 비롯한 상황의 여러 여행길에 항상 동행하였다. 선대 도바 상황에 이어 기요모리와 그 일족인 헤이케(平家)을 등용하고 여러 요직으로 승진시키면서 그 재화와 무력을 얻어 고시라카와인은 권력을 누렸다.

그는 손자로쿠조 천황(六条天皇)을 퇴위시키고, 황후 타이라노 시게코가 낳은 7남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을 키요모리의 지원을 받아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로 즉위시켜 천황의 직계 존속으로써 인세이의 명분을 굳혔으며, 로쿠조 천황의 황후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딸 토쿠코 또한 양녀로 삼아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섭관가는 호겐의 난 이후 권력이 약화되었던 데다, 섭관가의 방대한 영지의 대부분이 고시라카와 상황의 묵인 아래 키요모리의 딸이자 죽은 후지와라노 모토자네(藤原基実)의 아내였던 모리코(盛子)의 휘하에 들어가 헤이케가 관리하게 되면서 상황은 섭관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헤이케를 이용해 반항적인 사원들의 강소를 억누르며 임의적인 정치를 행하던 고시라카와인은 황후 시게코 사후 헤이케과의 틈이 벌어져 결국 헤이케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미 시게코 생전부터 헤이케의 권력이 너무 강력해져 섭관가의 영지마저 관할하고, 수도치안 및 군사권을 거의 장악하여 키요모리의 승인 없이는 강소 저지의 인젠(院宣)조차 무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엔랴쿠지(延暦寺)가 엔랴쿠지의 말사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후지와라노 모로타카(藤原師高)[37]유배를 요구하는 강소를 벌였는데, 키요모리는 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진압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로 인해 측근의 아들들을 유배시켜야 했던 고시라카와 상황과 키요모리와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상황은 헤이케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이것이 1173년 '시시가타니 사건'이었다.[38] 이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누설되어 나리치카나 승려 사이코를 비롯한 상황의 측근들이 제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이코는 처형되었고, 키요모리의 장남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처남이던 나리치카마저 유배 후 아사하였다. 고시라카와 상황 역시 도바 이궁에 유폐되었으며, 조정은 천황과 친 헤이케 귀족들 및 헤이케 일문의 공경들로 채워져 정사가 행해졌다.

고시라카와 상황은 유폐된 가운데에도 은밀하게 지방에서 반 헤이케의 기치를 내건 겐지 일족과 연락했으며, 다카쿠라 천황과 키요모리의 사후 정치적 공백을 틈타 인세이를 재개하였다. 그는 모략을 써 가며 1185년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을 폐위하고, 다른 손자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을 옹립하였으며 헤이케 토멸의 선지를 내리는 등의 행동으로 타이라 가문의 멸망을 이루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장악하였다. 이에 상황은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이자 용맹으로 이름 높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부추겨 형제간의 내분을 획책하였으나 요리토모의 전격적인 진압으로 인해 실패했으며, 반발하는 요리토모를 달래고자 결국 그의 동국 지배권을 인정해야 했다. 요리토모는 동국에서 기존 국가의 지방 통치 체제를 대신하는 자신의 봉건적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본격적인 무가정권이 시작되었다.

5. 종말

고시라카와 사후 요리토모를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하는 안이 관철되어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조정의 동국 지배권이 상실된 이후 조정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1221년 '조큐의 난'으로 고토바 상황이 호조 가문에 의해 유폐되고, 황가와 귀족들이 장원의 상당수를 잃게 되면서 확실해졌다. 고토바 상황이 설치했던 '서면의 무사(西面の武士)'는 철폐되었고,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도 크게 축소되어 소수의 경호집단 수준으로 전락하였다가 무로마치 시대전국시대를 지나며 천황의 권력 자체가 없는 수준이 되자 사문화되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인세이는 섭관직과 더불어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막부 시대의 상황들은 시라카와-도바와 같은 치천의 군의 권력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조정의 약화와 함께 인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어 지난날의 삼불여의와 같은 위세는 갖지 못하게 되고, 가마쿠라 막부가 교토에 설치한 로쿠하라 탄다이(六波羅探題)를 통한 집권 호조 씨의 정치 개입 속에서 인세이는 황족 내 황위 다툼과 연계되어 행해지거나, 막부가 의도적으로 상황과 천황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양자간 대립을 부추기는[39] 경우도 늘어났다.

13세기 중반 이후 황통이 지묘인통다이카쿠지통으로 분열되었고, 막부는 두 황통의 교차 세습을 권유하여 두 황통이 번갈아가며 황위를 잇게 되었으며, 상황이 황위의 계승을 제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333년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타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에게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부추겨 막부를 타도한 뒤 천황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겐무 신정을 시행하면서 인세이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겐무 신정이 실패하고 남북조동란이 시작, 다시금 다이카쿠지통이 아니라 막부의 비호를 받는 지묘인 통이 천황 계승전에 복귀하게 되면서 부활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인 에이쿄(永享) 5년(1433년)에 고코마쓰 상황이 붕어하면서 인세이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고, 동시에 치천의 군이라는 존재도 자연 소멸하게 된다. 고코마쓰 상황 다음으로 상황의 자리에 고하나조노 상황이 등장하지만, 고하나조노 상황이 양위하고 얼마 안 가서 오닌의 난이라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쟁란이 발발하는 바람에 인세이를 해 볼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재정상의 이유 등으로[40] 양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진다.

17세기에도 막부 시대에도 고미즈노오 상황레이겐 상황이 각각 양위하고 인세이를 행하였으며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에도 말기에 간인노미야(閑院宮) 출신의 고카쿠 천황(光格天皇)이 아들 닌코 천황(仁孝天皇)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행한 것이, 기록상 일본 역사에서의 마지막 인세이이다.
天皇崩スルトキハ皇嗣即チ践祚シ祖宗ノ神器ヲ承ク.
천황이 붕어할 시에 황사(皇嗣)가 곧바로 즉위하여 조종의 신기를 이어받는다.
구 황실전범(皇室典範) 제10조

1889년(메이지 22년)에 제정된 구 황실전범은 천황의 생전 양위에 대한 규정을 두지 않고, 오로지 사망에 의해서만 계승이 이루어지도록 명문화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이들은 외척과 쇼군과 인세이를 만기친람(萬機親覽)을 어지럽힌 적폐로 찍어서 섭정황실전범에서 황태자황태손으로 제한하고 관백쇼군 직위를 폐지하고 양위를 다루는 규정을 넣지 않아서 다시는 만기친람을 어지럽히는 저런 짓이 나올 수 없게 하였다. 이로써 인세이의 전제가 될 상황의 존재는 부정되었고, 이전까지의 일본인들의 천황관도 바뀌어 '천황의 자리에 있어야만 천황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양위하고 은퇴한 천황은 그 지위도 권한도 사라진다'는 쪽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인세이에 대한 인식이나 학계의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패전 뒤인 1947년에 법률로서 제정된 현행 황실전범도 제2조에서 황위 계승의 순서, 제3조에서 그 순서의 변경에 대한 규정을 통해 천황이 자신의 의사로 계승자를 지명할 수 없도록 했을 뿐 아니라, 제4조에서 "천황이 붕어했을 때는 황태자가 즉시 즉위한다"고 하여 천황이 종신제이고 그 계승은 오직 사망에 의해서만 행해지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황실전범이 명시적으로 생전 양위를 막지는 않으므로, 2019년 아키히토는 특별법을 통해 생전 양위로 퇴위하여 상황[41]이 될 수 있었다.

6. 여담

인세이 제도 자체는 사라졌지만, 이와 비슷한 제도가 등장하게 된다. 후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인세이 제도와 비슷한 '은거 제도'를 만들어 나간다. 또한, 쇼군 통치시기에도 이와 유사한 '오고쇼(大御所, 대어소)' 제도가 나타난다. 앞서 설명했듯이 일본의 '재벌 기업' 경영에서 흔히 보이는 후계자 위임 과정도 인세이 제도와 유사한 면이 있다.
自夏禹傳子之後 父崩子繼 兄歿弟承 永爲常法. 陳氏家法 乃異於是 子旣長 卽使承正位 而父退居聖慈宮 以上皇稱 同聽政 其實但傳大器 以定後事 備倉卒爾 事 皆取決於上皇 嗣主 無異於皇太子也.
하나라우임금아들에게 세습한 뒤부터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잇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음이 늘 지켜온 법이다. 진씨는 집안 법이 이것과 다르니 아들이 이미 어른이고 곧 정통성이 있게 제위(帝位)를 세습해도 아비가 성자궁으로[42] 물러나 머무르면서 상황으로 일컫고 (금상과) 같이 정사(政事)를 들으니[43] 그 실상은 다만 제위를 전해서 후사를 정하고 갑작스러움을 대비할 뿐이라서[44] 일은 모두 상황이 맡아서 처리하고 금상은 황태자와 다를 바가 없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Vol 5.』, 「진기(陳紀)」, 오사련(吳士連)

베트남 쩐 왕조 역사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아예 대놓고 '임금은 황태자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1]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조큐의 난 이후에 가마쿠라 막부가 세운 고다카쿠라원은 즉위한 적도 없이 덜컥 친왕에서 상황으로 격상되어 인세이를 행하게 되었다.[2] 후술할 도바 상황이 스토쿠 천황의 황위를 자신의 다른 아들(법적으로는 스토쿠 덴노의 중궁인 세이시의 양자였다) 고노에 천황에게 양위하도록 하면서 고노에 천황을 스토쿠 천황의 '태자(아들)'가 아니라 '태제(동생)'로 명기한 게 이것 때문이다. 직계존속 아니면 인세이를 못하니까... 물론 이것도 예외가 없는 건 아니어서 남북조시대에 고묘 천황(光明天皇)의 직계존속도 아닌 고곤 상황(光厳上皇)이 치천이 되기도 했다.[3] 치천 자신의 직계이거나 또는 직계라는 의제관계를 맺은 경우도 포함된다.[4] 예를 들어서 상황이 아들에게 황위를 한 번 물려줬다고 해서 아들의 아들(즉 손자)에게 그대로 황위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보기에 천황인 아들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아들을 지명해 "너(천황) 다음은 네 아들이 아니라 얘가 될 거다"로 못박아버리는 식이다. 이게 나중에 가서 문제가 제대로 거하게 터진 게 남북조시대의 원인이 되는 지묘인통 - 다이카쿠지통 사이의 충돌이다. 치천의 군이었던 고사가 천황이 아들 고후카쿠사 천황에게 양위하여 상황으로 물러나 놓고, 나중에 가서 다른 후궁에게서 본 늦둥이 아들 가메야마 천황을 총애하게 되어 고후카쿠사 천황을 양위시키고 가메야마 천황을 즉위하게 했다. 그래놓고 자기 사후에 '치천의 군'의 자격이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중에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고사가 천황은 붕어했다. 당연히 고후카쿠사 상황과 가메야마 천황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고, 막부는 이걸 정리한답시고 "두 황통이 10년 주기로 돌아가면서 해먹으라"고 퉁쳐버렸으며, 이에 대한 반발과 불만이 가마쿠라 막부 멸망으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5] 경우는 꽤 다르지만, 조선조 인조 역시 소현세자 사후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배제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바 있다. 물론 이 경우, 소현세자가 왕위에 즉위하기도 전에 죽자 인조가 현직 군주로서 후계 구도를 방계로 바꾸었다는 차이가 있다.[6] 지방관(국사)들이 장원에 부과하는 세금을 피하려고 개발영주들은 중앙의 섭관이나 지사, 나아가 황실에다 자신들이 개척, 보유한 장원을 기진하고 자신들은 그 장원의 '예소(일종의 마름)'로서 현지에 머무르며 장원을 실효지배했다. 일종의 위장전입인데, 한국사로 비유하면 각지의 자영농들이 내수사에 자신들의 땅을 갖다 바쳐 내수사 소유로 명의를 달아 놓고 자신들은 '내수사 소속 소작농' 지위를 얻음으로써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나 요역을 피하려 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이 '자영농'들이 단순한 평민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신분상 지위가 있었고 동시에 무력을 보유한 존재였다는 게 차이였지만.[7] 태종의 양위는 이 문서에서 말하는 잉세이 제도와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폐세자 양녕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난 이후에 승계가 이루어지면 불안한 지위 탓에 자칫 왕위 분쟁이 일어날 요소가 있어 태종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후계 문제를 말끔하게 정리하고자 아예 양위까지 해서 세종을 '폐세자가 살아있는 불안한 지위의 왕세자'에서 '조선의 국왕'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돕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인세이와 달리 태종-세종의 관계는 조선 건국 초기의 특수 사례로 태종 집권시에 상왕(정종), 태상왕(태조)이 있었고, 세종 집권시에도 상왕(태종), 노상왕(정종)이 있던 복잡한 상황이지만 태종과 달리 태조와 정종은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다툼이 발생하지 않았고 세종 이후로는 대리청정제를 쓸지언정 장자 상속이 정착되면서 상왕 제도가 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태종은 상왕이 된 후에 세종의 통치에 간섭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딱 하나, 병권을 쥐고 국방 문제에만 참견했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상 아직 어린 세종이 이를 다루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었다.[8]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도 흥선대원군이 최초였다.[9] 인세이라는 제도가 존재했다기보다는 천황이 자기 태자에게 천황 자리를 물려주고 상황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것이 고착화되면서 인세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보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10]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쇼군의 자리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넘겨준 뒤에도 여전히 오고쇼(大御所, 대어소)라는 이름으로 슨푸에 머무르면서 막후의 권력자로써 정치에 개입해 아들과 막부의 권력 확립에 기여했다.[11]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은 근현대 일본 재벌들에게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시대 다이묘가 그랬고 일본사의 쇼군이 그랬듯 유사한 제도가 등장한 것. 그리고 일본의 경영 시스템을 많이 본뜬 한국의 재벌 경영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다. 이를테면 롯데 창업주 신격호의 경우, 2011년에 신동빈을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시켰으면서도 자신은 '명예회장' 대신 '총괄회장'이라는 직함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현역 의지를 내비쳤다. '명예'에 담긴 바지사장스러운(…) 어감을 못 견딘 것. #[12] 사실 찬탈로 계승하면 그만큼 왕권은 크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세조든 중종이든 인조든 왕권이 크게 떨어져 고생을 했고 인조 때는 아예 외침까지 겹쳐서 난국을 맞이하기도 하였다.[13] 반면 태종같은 경우는 사대부들에게서 찬탈로 여겨지지 않았는데, 사실 태종의 경우 왕세자였던 이방석보다도 왕위계승서열이 높았기 때문이었다.[14] 이 시기 임진왜란으로 노획한 활자와 책이 일본에 유입되고, 포로로 잡혀온 강항 같은 선비들이 일본의 성리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일본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15] 다만 성리학 자체는 이미 송학(宋學)이라는 이름으로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들어와 있기는 했으며, 이를 적극 도입하고 수용한 것이 군주인 고다이고 천황이였다. 남북조정윤론 역시 성리학의 영향으로 어느 쪽이 '정통'이냐의 문제를 따지며 천황의 통치를 정당화한 것이다. 단지 한반도에서는 발에 차이는 이들이 유학자들이었던 데에 비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겪던 일본에는 성리학을 해석할 만한 학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개인이 연구하는 일은 있었으나 체계적인 발전은 이루지 못했던 상황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온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비로소 학문으로써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16] 불교에 귀의한 상황은 '법황(法皇)'이라 불렸다. 상황들은 승병들을 거느린 채 막대한 장원을 보유해 강성했던 사원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승려가 되고는 했는데, 어느 사원에 귀의하느냐에 따라 종파나 사원 간 알력에 휘말리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17] 생모가 산조 천황의 황녀로 후지와라 가문의 외손이 아니었다. 물론 170여 년간의 혼인관계를 생각하면 사실상 한집안이나 다름없긴 하지만...[18] 인세이를 행하려 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들에게 황통을 잇게 하기 위해 양위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이는 시라카와 천황의 양위에서도 그러하다.[19] 물론 가문의 격에 따른 품계가 사실상 정해져 있어서 이는 제한되었다.[20] 실제로는 황태손이다.[21] 모로미치의 급서에 대해서 <헤이케모노가타리>는 당시 지샤(절과 신사) 세력의 강소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했던 모로미치가 신불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설을 싣고 있다.[22] 특히 천황 계승 문제는 장자 계승이 확립되지 않은 채 주로 외가의 권세에 따라 계승이 결정되어 불안정했던 황통 계승 문제를 염려하던 천황들이 후대로도 인세이를 행하는 주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가마쿠라 시기 황통의 분화에도 영향을 미쳐 남북조 시대를 여는 계기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23]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의 승병이 특히 골칫거리였다.[출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河内源氏] 세이와 천황(淸和天皇)으로부터 사성(賜姓)된 방계 자손이었던 '세이와 겐지'(淸和源氏)'의 일가로 카와치 국(河内國)을 근거로 했었음.[伊勢平氏] 간무 천황(桓武天皇)으로부터 사성(賜姓)된 방계 자손인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의 일가로 이세 국(伊勢國)를 근거로 했었음.[27]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일족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조부 타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 때부터 북면의 무사로서 시라카와인을 섬기면서 법황의 총애를 얻고, 그를 통해 여러 이권과 지위를 얻으면서 성장하였다. 마사모리의 아들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는 시라카와-도바 법황을 섬기면서 장원을 늘리고, 송과의 교역을 확대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충, 이를 기반으로 사병 및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을 늘리면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런 세력을 가지고 인을 뒷받침하여 그 공로로 조정에 출사하기에 이르렀으며, 아들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권력을 휘두를 물적, 인적 기반을 마련해 놓는다.[28] 하술되는 손자며느리와의 풍문부터, 측근이나 북면의 무사 중 몇몇이 남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9] 이러한 장원의 남설은 고시라카와 천황 즉위 이후 '호겐신제(保元新制)'의 반포와 시행을 통해 천황의 장원 지정권 확립 및 장원 정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30] 이 사람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권유로 전국의 겐지들에게 헤이케 타도를 명령하는 영지(令旨)를 내렸고, 이것이 반헤이케 거병과 나아가 겐페이 합전의 불씨가 된다.[31] 물론 황실과 대귀족들의 장원 및 공령(국유지) 역시 상당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 지방 통치 형식은 중앙이 조세와 장원의 공물만 징수하고, 지방 권력은 국사(国司)와 지방 세력에게 위임하는 형식이었는데 오슈 후지와라는 유독 강성하여 오슈의 지방 세력을 규합, 통제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2] 10세기 관동에서 발생했던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도 그 발단은 친족간 토지 분쟁이었다.[33] 하급 귀족 출신이던 승려 신제이는 그 덕에 이후 천황의 후견인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권세와 개혁으로 인한 귀족들의 반발을 사 헤이지의 난에서 살해되기에 이른다.[34]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가장 먼저 겐지의 눈을 피해 대궐에서 빼돌린 게 니조 천황이였다.[35] 원래 도바 상황의 측근이던 신제이나 그 외 친정파를 몰아내고 인세이를 행하고자 고시라카와 상황이 이를 사주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36] 다른 이름으로 렌게오인(蓮華王院)이라고도 불리는, 지금의 교토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이다.[37] 인의 근신 사이코(西光)의 아들[38] 이에 대해서는 음모라는 설도 있기는 하다.[39] 에도 시대 레이겐인은 아버지 고미즈노오인 사후 정무를 맡아 친막부파 공경을 배제하고 막부와 거리를 두는 정책을 폈는데, 양위한 뒤 아들 히가시야마 천황이 아버지의 인세이에 대한 불만으로 막부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서 레이겐 상황과 틈이 생겼고, 막부는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히가시야마 천황의 편을 들어 그를 지원했다.[40] 즉위식은 고사하고 선황의 장례 치를 돈도 없는 판이었다.[41] '태상천황(상황)'이라는 말 자체에 인세이의 막후 실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보니 아키히토 본인은 막후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원황(元皇)'으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퇴위 관련 특별법에 의해 전례대로 '상황'으로 불리게 되었다.[42] 성자는 임금이 베푸는 은혜# 또는 임금이나 후비(后妃)의 어짊을 강조하려고 높여 부르는 말#인데 성자궁은 맥락상 선동어소다.[43] 대리청정이니 수렴청정이니 하는 말에서 알겠지만 옛날에 정치에 쓰던 동사는 하다()가 아니라 듣다()였다.[44] 그러니까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만으로 후계 구도가 불안해서 아예 양위해서 굳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