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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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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7대 국왕
효종 | 孝宗
파일:영릉효종능침.jpg
영릉 능침
출생 1619년 7월 3일
(음력 광해군 11년 5월 22일)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능양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부근)[1]
즉위 1649년 6월 22일 (29세)
(음력 인조 27년 5월 13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659년 6월 23일 (향년 39세)
(음력 효종 10년 5월 4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영릉(寧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645년 11월 14일 ~ 1649년 6월 22일
(음력 인조 23년 9월 27일 ~ 인조 27년 5월 13일)
조선 제17대 국왕
1649년 6월 22일 ~ 1659년 6월 23일
(음력 효종 즉위년 5월 13일 ~ 효종 10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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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호(淏)
부모 부왕 인조
모후 인열왕후, 계모 장렬왕후
형제자매 6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인선왕후 (1631년 혼인)
후궁 안빈 이씨, 숙의 김씨, 숙원 정씨
자녀 1남 7녀 (3남 8녀)
종교 유교 (성리학)
정연(靜淵)
죽오(竹梧)
봉호 봉림대군(鳳林大君)
전호 경모전(敬慕殿)
묘호 효종(孝宗)
존호 흠천달도광의홍렬
(欽天達道光毅弘烈)
시호 조선: 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2]
: 충선(忠宣)[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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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1263947987_126346467293457.jpg
효종의 어필(御筆)

1. 개요2. 생애
2.1. 즉위 과정2.2.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2.3. 사망 징조와 죽음2.4. 후일담
3. 평가
3.1. 북벌론3.2. 정통성에 대한 태도
4. 기타5. 가족
5.1. 조상5.2. 배우자/자녀
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17대 국왕.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으로 잘 알려진 군주로서 10년의 치세 동안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임금이기도 하다. 대동법인조대 갖은 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좌충우돌하던 제도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아 시행했으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조선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데 기여했다. 남송효종명나라홍치제가 받았던 효종(孝宗)의 묘호를 받은 것만으로도 당대 효종이 중흥 군주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재위 10년 만에 종기 치료를 하다가 39세의 나이에 허망하게 승하했다.[4] 그리고 효종의 죽음은 곧 그의 정통성 논쟁을 명분으로 한 조선 후기 가장 유명한 당쟁인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5]

2. 생애

2.1. 즉위 과정

1619년(광해군 11) 능양군차남으로 태어났다. 친어머니는 인열왕후 한씨, 새어머니는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 비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 장씨였다.

인조 4년(1626), 8살에 봉림대군(鳳林大君)[6]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인질)로 잡혀 끌려간다. 볼모로 심양에 있는 동안 청나라가 산해관과 서역을 대대적으로 치려고 할 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자신이 형인 세자를 대신하고 자처해 가겠다고 할 정도로 당시 세자 신분이었던 형을 성심성의껏 지키려고 했다.

인조 23년(1645) 5월, 귀국했는데 그로부터 1개월 뒤 소현세자가 죽는 바람에 그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고, 인조 27년(1649)에 아버지 인조가 승하하자 다음날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는 온 조정의 맹렬한 탄핵을 받았다. 효종은 김자점과 이시백 두 사람을 잘 예우하라는 인조의 유언 때문에 김자점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온 조정이 등을 돌린 김자점은 조정에서 신망을 잃고 완전히 실각하고 말았다. 김자점이 병자호란 때 한 짓[7]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물론 김자점이 정말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었다. 이러한 논리는 개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가장 큰 근거를 제공한 《병자록》은 김경징에 대한 잘못된 묘사 등 오류가 있는 기록으로 청나라 측 기록 및《승정원일기》에서는 김자점이 특별히 태업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후의 행적도 김자점의 책임과 조정의 책임이 반반인데 김자점은 군사적 안목과 능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아서 청군 선발대, 그것도 300명 밖에 되지 않는 소부대에만 집중해 본대가 들어오는걸 못 막았으며 그나마 이때는 이겼지만 1,000명의 선발부대와의 전투에서는 졌다.[8] 그러나 토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이겼기에 아주 무능까지는 아니었지만 토산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더는 남한산성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양평에서 농성해야 했다. 조정의 대책은 이후의 김자점의 행동에 악영향을 준 수였는데 서북쪽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온 도원수 김자점 외에 심기원이라는 또다른 인물을 남도 구원군을 지휘하는 도원수로 임명했던 것이다. 김자점도 도원수다 보니 지휘권자가 2명이라는 막장 상황에 이르렀다. 안 그래도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 걸어볼 기대가 남도 구원군의 도착이었는데 이쪽도 김자점처럼 상처뿐인 승리만 거둬서 김자점 못지않게 주변에 주둔하며 농성만 하는 중이었고, 그 남도 구원군의 지휘관도 도원수인데다가 김자점과 심기원이 의견 충돌을 빚어서[9] 시간만 소모했고 겨우 상황을 정리하니 김자점도 신중해졌다.[10] 그러다가 겨우 남한산성으로 진격했으나 30리를 남겨두고 인조가 항복했다.

이에 김자점의 아들들이 격노했고 친청파 무장들과 대신들을 끌어들여 아버지와 함께 역모를 계획하나 소용 조씨의 행패를 자의대비 조씨[11]가 조사하던 중에 발각되어 처형(사지절단형)당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 친청파는 자취를 감추고 반청(反淸), 북벌론의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뒤에 말한 것처럼 실제로 과연 이들이 북벌(北伐)을 정말로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효종도 북벌론을 그리 공공연하게 주창하지 않았다. 천하의 청나라강희제 치하에서 크나큰 위세를 떨치며 버티고 있는데 즉위하자마자 북벌 운동을 공공연히 추진하면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할 지 모를 정도로 효종이 멍청하지 않다. 군대를 재건하고 성을 다시 쌓은 것은 사실이지만 청군의 침공에 대비한 준비였기 때문에 청나라도 대놓고 트집잡지는 못했다.

효종은 대놓고 청나라에 거슬리기보다는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고 서양 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하는 등 망가진 조선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기강과 기초적 군사력을 다듬는 일에 주력했다.[12] 게다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는 소리와는 달리 효종은 청나라의 문물[13]을 매우 고평가해서[14] 신하들에게 오랑캐의 문물을 숭상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혹자는 소현세자가 즉위했다면 조선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데 현실적으로 당시는 산업혁명기 이전이라 소현세자가 즉위했다고 해도 효종과 별반 다른 결과를 빚기 어려웠을 것이다.

2.2.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

북벌의 실행을 위해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北伐)을 추진했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지만, 송시열은 실제로는 북벌(北伐)에 심히 소극적이었으며, 효종이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할 때도 수신(修身)만을 권할 따름이었다. 송시열이 북벌파였다는 이미지는 사관마저 물러가게 하고 효종과 송시열 둘만이 독대한 기해독대[15]의 내용을 송시열이 후일에 진술한 바에 근거한 것이다.[16]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북벌이 조선군의 군사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명분이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본다. 반면에 송시열은 북벌은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즉, 효종은 서인세력의 영수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산당들을 등용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효종이 산당을 중심으로 한 서인 송시열 일파를 아우르면서도 왕권 강화를 시도한 모습은 자주 보인다.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산당(山堂)을 제어할 경우, 자신을 인정하여 정통성을 보장해줄 재야 세력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은 정말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는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의 영향으로 업신여기던 오랑캐 만주족에게 엎드린 인조 조정에서 일하는 것을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고질적인 벼슬 기피 풍조가 퍼졌다. 그러니 재야 세력과 조정에서 일하는 사대부들의 세력 차이는 엄청났고, 조정의 일부 한당과 친청파의 지지 수준으로는 정통성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조정의 국정 운영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오히려 자신의 친위 세력이 될법한 김자점과 친청파는 실각하듯 배제해버리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같은 산당(山堂)을 극진히 예우했다. 하지만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효종은 이를 방지하고자 유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명분, 즉 북벌(北伐)을 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당의 수장 송시열도 왕에게 거의 전권을 이양받다시피 하는 권위를 부여받고도 효종에게 엎드렸던 것이다.

이런 왕권 강화는 효종 본인의 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한 의도 또한 있었다. 효종은 형 소현세자의 자식들(효종의 조카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챈 '찬탈자'로 해석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고, 특히 형수 세자빈 강씨의 옥사에 대한 의문점은 사대부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었다. 따라서 효종은 정통성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강빈을 신원할 것을 요구한 신하들을 여러 이유 들어 전부 죽여대고 강빈을 역강(逆姜)[17]으로 부르며 "역강에 대해 한 마디라도 꺼냈다간 똑같은 역당으로 간주하겠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해가며 입을 옥죄듯 강하게 틀어막았다.

그런데 사실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에는 소현세자 & 강빈 부부와 볼모 생활을 하면서 관계가 매우 좋았다. 게다가 이후 이석견(경선군)을 비롯한 소현세자들의 자손들은 귀양지를 계속 옮겨주다가 결국 귀양을 풀고 한양에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즉, 바꿔 말하면 효종으로선 내심으론 소현세자와 그 가족에게 애정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드러냈다간 당장 본인의 왕위 정통성이 무너질 수 있어서, 평생 형수 민회빈 강씨에 대해서만큼은 필히 반드시 강경하게 대응해야 했다는 것.

효종을 북벌(北伐)에만 매달렸던 맹목적 이상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꽤 많은데, 그도 명나라수도 북경 정복과 청나라의 천도 과정을 소현세자와 함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자. 청나라에 대해 복수심은 있어도, 전면적으로 나서서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군비 확장도 임진왜란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에 걸쳐 누더기가 된 군사 편제를 재정비해야 했으므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대동법의 확대 실시 등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진행한 덕에 효종 치세에서 으로 크게 초토화 된 조선은 그나마 안정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장군인 이완(李浣)[18]을 등용할 때의 야사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효종은 한밤중에 무신들을 긴급 소집하고, 미리 소집한 군졸들에게 촉이 없는 화살을 해를 입히지 않을 정도로 쏘게 하였다.[19] 자다가 무슨 변고가 일어났나 하고 궁으로 들어오던 무신들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다들 허둥지둥대는데, 오직 이완만이 어명을 받들기 위해서 등에 화살이 여러개 꽂힌 채로 그대로 효종의 앞에 나타났다. 또한 당시 그는 임금이 급하게 부르니 어떤 큰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공복(= 관복) 안에 두꺼운 갑옷을 입고 와서 화살을 개의치 않고 떳떳하게 효종의 앞으로 걸어올 수 있었다. 효종은 이 모습을 보고 충성심과 준비성에 크게 감탄하여 이완을 상과 함께 치하하며 북벌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계속하여서 북벌을 위한 군비의 확충을 기하여 군제의 개편, 군사 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청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오히려 청의 강요로 나선정벌[20]을 2회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얻은 성과도 소수 있기는 했지만...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종기의 악화로 인해 어의를 불렀으나, 수전증이 있는 신가귀의 의료사고로 사망하면서 북벌 계획도 흐지부지 일단락으로 끝났다. (음모론적) 야사에 따르면 5월 5일 군대를 출동시키려고 했는데 그 전날 갑작스레 죽었다고.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을 지휘했던 신유 장군은 전리품으로 얻은 플린트락 머스킷 300정 ~ 400정 중 단 1정만 힘들게 빼돌려서 조정에 진상하였고, 시험적으로 양산하였다. 하지만 구조가 복잡해서 생산이 힘들고, 단가는 조총보다 훨씬 비싸면서 성능은 조총보다 약간 앞서는 정도였기에, 효종은 "차라리 같은 값으로 조총 3정 만드는 게 낫겠다." 하여 수백 정만 소수 생산한 후 백지화했다.

한편 신유 장군이 가져온 것 말고도 헨드릭 하멜머스킷을 진상했지만, 마찬가지로 양산은 되지 못했고, 헨드릭 하멜은 이후 조선에 정착하여 조용히 살다가 나중에 몰래 탈출했다.

2.3. 사망 징조와 죽음

특이한 것은 죽음에 대한 징조가 정사야사에 유난히 많이 남았다는 것. 효종이 승하하기 2달 전에 거사를 자처하는 한 노인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엎드려 소리치기를 "5월에 나라에 큰 화가 있을 것이니 경복궁 옛터[21]에 초옥을 짓고 그 곳으로 옮겨 화를 물리치는 굿을 하소서!"라고 외쳤으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미친 늙은이 취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어떤 노인 하나가 스스로 거사(居士)라고 일컬으면서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밖에 와서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금년 5월 국가에 재화가 있게 될 것이니, 경복궁(景福宮)의 옛터에 초옥(草屋)을 짓고 즉시 이어(移御)하여 재화(災禍)를 물리치는 굿을 하소서."
했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요망(妖妄)한 것이라고 하였다.
時有一老人, 自稱居士, 來伏于昌德宮 敦化門外言曰: "國家今年五月, 當有災禍, 請作草屋于景福宮舊基, 趁卽移御, 以禳其災。" 聞者咸以爲妖。
《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1659 3월 26일 병술 3번째기사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22]이 저술한 <공사견문록>에는 왕이 승하하던 해 4월에 세자학질에 걸려 10여 일이 되도록 침과 약의 효력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효종이 이를 듣고 세자징광루(澄光樓) 아래에 있게 하고 세자를 놀라게 하려고 궁녀를 시켜 몰래 질기와를 가지고 누각 위로 올라가서 내던져 깨뜨리게 하고는 "궁녀 아무개가 누각에서 낙사했다."고 일제히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궁중에 난리가 났으며 이를 본 늙은 궁녀 김씨가 아래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것도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떨어지는게 세자 또한 효종이 죽기 직전에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효종 자신도 아픈데 자신보다 세자의 병을 더 신경썼다."는 기록도《숙명신한첩》에 있다.
나는 4 (4代朝政)을 받들었다.[23] 궁중에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킬 것인데 이제 일도 없이 일부러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다.

역시 정재륜이 저술한 《한거만록》에서는 본인도 어느 정도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는지 사망 1달 전에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래의 를 읊었다고 한다. 효종은 "가을 9월에 단풍이 들면 다시 부르겠다"고 하며 "뒷날 다시 만날 것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로운데 / 雨後晴光萬綠新
한 자리의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一堂長少是君臣
꽃 속의 대(臺)와 버들에 싸인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花臺柳榭渾如畫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누나 / 時有鶯聲喚主人

허망하게도 효종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당시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 수 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갈렸다. 이에 효종이 신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농즙이 나온후 검붉은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 하였으나, 정작 큰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신가귀가 침을 놓은 뒤 검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신가귀를 비롯한 어의들이 필사적으로 지혈을 시도했지만 지혈되지 않았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대목동병원 이비인후과 김한수 교수는 이에 대하여 치료 전 종기가 악화되면서 혈관이 농(膿)으로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침이 세동맥을 손상시켜서 과다출혈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는 세균 감염에 의한 화농성 병변이었고 종기가 난 자리가 하필이면 천측두동맥[24]이 지나가는 자리여서 배농을 위해 놓은 침이 동맥을 뚫어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작은 감염이 1~2주만에 얼굴 전체로 번진 데에는 효종이 수년간 앓던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서울대학교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의 경우 효종의 사망이 신가귀의 과실이 아닌 파종성 혈관내응고로 인한 과다출혈로 인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사인의 추억 실록에 의하면, 침을 놓은 뒤 농즙 한 숟가락 정도의 피가 나왔다는 기록은 천측두동맥 등 동맥의 손상에 의한 출혈에서 나타나는 소견과 거리가 멀다는 것.[25] 효종이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약화되어 작은 종기가 쉽게 낫지 않고 급격하게 악화되었을 것이고,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얼굴 전체에 퍼졌을 정도라면 염증이 혈관을 타고 전신에 퍼져 패혈증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패혈증으로 파종성 혈관내 응고가 생기게 되면 혈액의 응고인자를 모두 소모해서 지혈이 되지 않아 작은 상처만 나도 과다출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가귀는 당초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배려로 대신 교수형에 처해졌다.[26] 마찬가지로 어의였던 유후성은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이후에 현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후 다시 어의로 복귀했다. 단, 유후성의 처벌은 일종의 통과의례에 가까웠으며 원래 왕이 승하하면 어의는 잠깐 유배를 다녀오는게 상례였다. 즉, 유후성은 통과의례를 치른 것이고 신가귀는 의료사고로 의심을 받아 진짜 처벌을 받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신가귀가 침을 놓지 못하는 의원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현종실록》 1권 즉위년(1659) 6월 4일 3번째 기사를 보면 효종은 과거 신가귀가 수전증이 있음에도 침을 잘 놓았다는 평가를 할 정도로 놓는 솜씨는 좋았다. 애초에 조선 사람들이라고 해서 바보도 아니고 진짜로 침놓는 실력이 떨어졌던 사람이라면 옥체라고 불리는 임금의 신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효종은 1658년 경에 낙상으로 인해 엉덩이에 종기가 났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신가귀가 침을 잘 놓아서 엉덩이 종기가 완치되었기에 이번에도 종기가 나자 신가귀를 불러 침을 놓게 했던 것이다. 침 놓는 실력이 떨어지는 의사에게 일반적인 침술도 아닌 일종의 외과 수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배농을 위한 침 시술을 맡긴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예전부터 수전증이 있던 신가귀는 당시 효종을 치료할 때 본인 역시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겹친 것과 효종의 몸 상태가 생각외로 나빠 혈락을 범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술된《현종실록》6년 4일 기사를 보면 "선왕(효종)께서 그가 병이 중하여 (곧)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쌍하고 애석히 여기시는 말씀을 누차 하셨다."는 현종의 증언까지 기록되어 있을 정도라, 말 그대로 효종의 결단으로 환자를 데려와 침을 놓게 했다가 사단이 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점을 감안했기에 신가귀를 참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한 것. 그리고 조선의 법에서 교수형은 시신을 그나마 보존할 수 있으므로, 같은 사형이라도 참형에 비해 온건한 형벌이었다.[27] 참고로 신가귀의 처형은 조선사에서 국왕이 사망한 후 어의가 직접적으로 처벌받은 사실상 유일한 사례이다. 그 외의 어의들은 책임을 통감하고 단순 사직하거나, 의례적으로 스스로 죄를 칭하여서 잠시 귀양을 갔다가 다시 어의로 복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하간 이 사건 덕분에 산당 독살설이 불거지지만, 송시열의 상경까지 완수한 산당이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죽였을까 싶다. 더하여 만일 들통나면 싹 다 대역죄를 입어 능지형 + 친척에게 연좌 + 효수형에 처해져 가문이 씨가 마를 수도 있다. 이런 도박을 하는 쪽은 대개 권력에서 밀려난 쪽이다. 더구나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로운 현종은 산당에 대해 더욱 경계하는 임금이었다.

효종의 무덤은 영릉(寧陵)으로,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10월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므로 한창 추울 때 능이 조성되어 왕릉 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져 다음 해 장마 때 석물에 균열이 온다. 곧바로 석물을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져 이듬해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다. 결국 현종은 사망하기 1년 전인 1673년 아버지(효종)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으로 이장을 한다. 그 당시 천장의 이유로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들어 갈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여주의 영릉 곁으로 옮기기 위해 영릉을 개봉하니 깨끗하여 영릉 대감의 책임자들이 불명예 면직되기도 했다.

2.4. 후일담

승하한 후 장례 절차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효종의 시신을 넣기 위해 관을 준비해 왔는데, 어깨가 너무 넓어 관이 맞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왕의 관을 미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승하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을 덧칠해서 보관하는 절차를 따랐는데, 효종은 재위 기간인 10년 동안 어깨가 더 굵고 넓어졌기 때문이다.[28]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이 부패하면서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송시열은 사관에게 대차게 까였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널빤지를 잇대어서 왕의 관을 늘리는 초유의 일이 생겼으며, 옻칠을 더하여 널빤지를 이은 자국을 감추도록 했다. 왕의 몸에 맞는 관을 만들 널판이 없어 덧댄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기 힘든 일이지만, 왕이 즉위하자마자 미리 관을 만드는 당시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효종이 죽은 뒤에는 조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사상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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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효종 영릉
능은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구 능서면)에 있는 영릉(寧陵).[29]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英陵)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처음 장지로 예정된 곳은 수원[30]이었지만, 공력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에 묻혔다. 그런데 왕릉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현종 14년인 1673년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인선왕후 장씨도 효종 능 앞편에 묻혔다. 효종의 능이 될 뻔했던 수원의 예정지에 들어선 능이 바로 사도세자정조의 능인 융/건릉이다. 참 재밌는 것은, 민간에서도 피하는 파묘(破墓)[31] 자리가 영조원릉이 되었다는 것. 사도세자와 정조의 묫자리는 효종의 장지로 물망되었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능의 구조가 좀 특이하다. 능이 앞뒤로 있는데, 이런 구조를 동원상하릉이라고 부르며, 경종의 릉도 이런 구조로 만들어진다. 두 왕릉 모두 왕비 쪽의 곡장이 없으며 왕 쪽에만 곡장이 있다. 차이점은 효종의 릉은 쌍릉의 위치가 대각선이지만, 경종은 말 그대로 완벽한 앞뒤다.

3. 평가

3.1. 북벌론

북벌론을 내세우며 정예 조총병 양성, 조총 개선 및 홍이포 등 대포 개량 등등 국방력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기도 했고, 호서대동법과 양척동일법 등의 여러가지 개혁입법과 시헌력과 같은 새로운 국제표준의 도입으로 전란 이후의 민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가지로 의욕이 강했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효종을 문약에 빠진 조선을 무(武)의 기치를 내세워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개혁 군주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2]

효종은 북벌이 개시되어 청나라가 다시 침공해올 때를 대비해 서울 근처의 방어 기지인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강했으며, 만일을 대비해 내부 방어 체계를 재정비했다. 다른 국방력 강화도 쌍령 전투 등으로 드러난 조선군의 약해진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군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훈련 강화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일단 조선이란 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비해 군사력 증강을 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왕조인데 이런 조선에서 조선군을 잠깐이나마 강소국 수준의 군대로 발전시킨 효종을 높게 보는 이들도 일부 있다. 실제로 해외의 역사학자들도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왕으로 세종정조 다음으로 효종을 뽑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물론 북벌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국력에서 비교도 안되는 청나라를 때려잡겠다고 말하는 이상주의자로 보일 수 있겠지만, 효종은 왕위에 올라있던 10년간 단 한 번도 청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부왕 인조처럼 청나라에게 불쾌한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고, 강요 끝에 이뤄진 것이긴 하나 나선정벌에 파병까지 보냈다. 즉, 연이은 전쟁으로 박살나있던 조선의 군사력을 회복시키고 아니꼬와도 청나라에게 협조하는 스탠스를 취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즉, 북벌이란 험악한 이름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효종은 아버지와 다르게 현실적이고 상식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만약 효종이 정말 "청은 우리의 원쑤! 무조건 쳐야 한다."라고 앞뒤 구분 못하는 이상주의자였다면 청나라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종은 당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닌 조선의 국력을 정확히 평가하고 있었고[33], 그런 상황에서 군사를 내는 비현실적인 정책은 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명나라를 이은 중국의 왕조라고 인식하지만, 청나라가 한족화되면서 이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중화제국의 틀을 마련하고 단순히 만주족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다민족들로 구성된 중국의 왕조가 되었던 시기는 효종이 죽고 난 18세기의 일이며, 효종 재위기의 청나라는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대명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나라에 불과했다. 더구나 과거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한족들의 나라를 위협하거나 아예 무너뜨린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100년 좀 넘는 시간만 버티다 무너졌고 항상 중원은 한족들의 왕조로 되돌아갔다. 당시로서는 청나라 역시 이런 루트를 탈 것이라고 보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34] 북벌은 문자 그대로 "북의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의미보다는 "군사력을 보강하여 가능할 때 북의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효종이 북벌이라는 현실감 없는 목표(= 허울)에 사로잡힌 맹목적 이상주의자라고 보는 시선은 북벌론조선과 강대국인 청나라의 전면전이며 효종이 전면전을 위해 군대를 키웠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밖으로 내세운 명분이나 효종의 속마음이 어쨌든간에 효종이 10년간 보인 행보를 보면 애초부터 청나라가 아직 강할 때 그런 전면전을 할 생각이었거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없다. 물론 효종이 더 살았다면 진짜 전면전을 했을지 안했을지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위 기간 중에 그가 한 것은 전면전 준비가 아닌 군사력 보강과 왜란 - 호란으로 인한 전후 복구 뿐이었고 그가 실제로 청나라와 조선의 전면전을 준비했다고 볼만한 행보는 없다. 일각에서는 당시 삼번의 난이 벌어지고 대만에서 정경이 활약한 점을 들어, 삼번의 반란군이 청을 공격하고 바다에서는 정성공 정경의 협조를 받은 상황에서 강습하면 가능했을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번은 스스로도 명분이 없는 막장 집단인 데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정경도 세력상 한계는 명백했기에 효종으로서는 왜란 - 호란 시기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북벌이 기득권 세력(= 서인 노론)의 세력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까웠었다는 의견도 있다. 병자호란에 대한 국정 운영 실패를 무조건적인 청 비판으로 몰고 가 효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송시열신권 강화를 위해 써먹었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효종은 애초에 전면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10년간 보여준 행보로 평가하면 북벌을 논할 때 그의 의도가 강력한 청나라조선이 단독으로 정벌하는 것을 의미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효종이 재위에 있었을 때는 중국을 점령한 청나라의 국력이 융성하던 황금기였다.심지어 당대의 청은 과거 명을 정복하는 데 최후의 걸림돌이었던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갖고 있었으며 화약 무기 지식을 흡수한 상황이었다. 조선군이 아무리 강력해졌다 해도 조총병을 잘 이용해 야전이나 만주 일대에서 청군과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지, 청나라 자체를 정벌하는 건 인적 자원과 자금면에서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효종이 사망하자 북벌 계획이 다음 후계자에게 승계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암 박지원허생전 등을 통해서 이완을 찌질이로 만드는 등 북벌 계획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3.2. 정통성에 대한 태도

소현세자의 일로 정통성을 공격받은 효종은 정통성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 몸서리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군비를 확충하고 신인 무반들을 새롭게 발탁하면서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는 강단을 보이면서도 개인적인 면모는 성직자와 유사하다는 후대의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정갈하고 모범생이던 효종. 그런 효종이 민회빈 강씨와 조카들은 물론 이들을 추숭하자는 신하들에게 지나치게 단호한 모습을 보인 것은 취약한 정통성 때문이다. 그렇게 강빈은 정통성 문제로 효종의 치세에는 대놓고 역적으로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효종이 형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악감정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는데 소현세자와 효종이 왕자이던 인조 치세에는 전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즉위한 후 강빈을 역적으로 몰면서도 조카들은 보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조카딸 중 한 명이 청나라에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될 처지에 놓이자 바로 막아서 보호하였고 경안군의 유배를 풀어서 궁궐에 복귀하도록 도와준다. 효종이 강빈의 억울함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모양이 되므로 억지를 부려서라도 강빈을 비하하고 강빈을 옹호하는 신하에게도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 하지만 효종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에도 비판이 강하였다. 강빈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모든 신하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효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불안정하고 효종이 항상 정통성을 역린으로 여긴 사실을 알려준다. 정치에서 정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효종의 정통성 문제는 사후에도 이어져 현종의 치세에 예송논쟁으로 발전하여 일이 더욱 커진다.

10년에 불과한 효종의 치세에는 정통성과 관련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데 영의정을 지낸 윤방이 1640년에 사망하자 윤방의 아들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중종 시대의 권신이행의 후손인 이식에게 요청하여 시호를 청하는 글인 시장을 받는다. 그런데 심기원의 옥사와 소현세자의 사망을 비롯한 대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시장을 올릴 시기를 놓치고 그 사이에 이식은 사망한다. 어느 정도 시국이 안정을 찾고 다시 시장을 올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문장이 좋아도 시장을 고인의 이름으로 올릴 수 없어서 대신 조익에게 요청한다. 조익은 이식의 문장이 워낙 좋으니 고칠 내용이 없다며 일부 구절만 고쳐서 지었는데 하필이면 역강이라 표현할 부분을 강빈이라 표현한다. 효종의 분노를 산 조익은 1651년에 삭탈관직당한다. 그 해에 김자점의 옥사가 발생한 후 저주 행위로 무당인 앵무가 처형되고 사헌부에서 "같은 죄를 저지른 신생이라는 자는 왜 살아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효종은 "왜 신생을 가지고 이 난리인가?"라고 반응하였다. 사헌부에서 신생을 언급한 이유는 신생은 강빈의 옥사 당시 강빈을 배반한 인물이기 때문인데 신생은 강빈이 사망하고 1년 후에 강빈이 묻은 저주물을 수색하는 도중 저주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유배되고 효종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생을 처벌한다는 것은 효종이 왕이 될 명분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후로 효종은 얼마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역강을 옹호하는 자는 역적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빈을 신원한 왕은 효종의 손자인 숙종인데 인조나 효종을 탓하지 않고 소용 조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식으로 일을 정리하였다.

그럼에도 정통성 문제는 가라앉지 않았다. 1654년에 효종은 재이론에 기반하여 재변이 일어나는 경우 신하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비판을 듣는 구언의 명을 내린다. 왕이 비판을 들을 줄 알아야 재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언의 명을 통해서 나온 상소는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있어도 비판하는 상소를 이유로 처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구언의 명의 특성을 감안하여 황해감사 김홍욱이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다. 강빈이 묻은 저주물의 발굴 위치와 시점이 맞지 않고 강빈이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후원에 단단히 감금된 강빈이 저지를 수 없는 일이며 소현세자의 자녀들의 사망에도 의혹이 많다는 것이 근거. 결론은 강빈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벌어진 재변이니 강빈을 신원하자는 것인데 왕이 구언의 명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효종이 강빈을 옹호하는 자는 역적이라고 강조한 이상 강빈을 언급한 것은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린 행위가 맞다. 김홍욱의 상소에 분노한 효종이 김홍욱을 국문하게 되는데 김홍욱은 국문을 당하면서 강빈을 언급한 부분은 자신의 실수라고 인정하고 효종이 강빈의 옹호를 금지하는 명을 내릴 당시 외지에 나가서 왕의 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신하들도 김홍욱이 죄를 지었지만 고의로 효종을 능멸하려고 올린 상소는 아니니 적당하게 처벌하고 방면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효종이 국문을 멈추지 않자 김홍욱은 구언의 명에 응하여 상소를 올린 것인데 자신을 국문하자 심기가 나빠진다. 김홍욱은 효종과 같이 국문에 참석한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왜 말을 하지 않는가?"라고 타박하고 대사헌에게는 "언로를 막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를 들어본 적 있는가?"라고 소리친다. 체념한 김홍욱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뽑아 도성 문에 걸어두어라.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겠노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김홍욱이 효종의 국문에 의해 사망하자 신하들은 대놓고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김홍욱의 사망은 효종의 가장 큰 실책으로 기록된다. 신하들의 반발도 더욱 잦아졌는데 원로 대신인 정두령이 "김홍욱이 죽은 이후 모두들 두려워하며 크게 의혹하여 언로가 끊기려 하니 이는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 아니옵니까."라는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다음 해부터는 김홍욱의 후손들도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명령한 것은 가혹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시간이 더 흐르고도 "김홍욱을 역적으로 벌한 건 온 나라 사람들이 지나치다고 하옵니다. 전하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인심을 잃은 적이 없는데 김홍욱의 일만은 모두가 원통하다고 하옵니다."라는 상소와 간언이 끊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김홍욱도 허물이 있으니 적당히 국문하고 귀양을 보내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면 논란도 없었을 터인데 효종이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 효종의 감정적인 행동은 소문이 무성하게 퍼진 계기가 되었고 스스로도 승하하기 전까지 김홍욱이 원통한 죽음을 당한 것이라는 상소에 시달린다. <효종실록>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김홍욱의 원통한 죽음은 효종이 승하한 1659년이다. 효종의 스승이자 신하인 송시열은 효종에게 "전하께서 한 때의 분노로 대뜸 김홍욱을 때려 죽임으로서 인심을 크게 잃었사옵니다."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송시열의 상소를 받은 효종은 김홍욱을 국문한 일을 실수라고 인정하면서 송시열의 뜻에 따라서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김홍욱의 후손들에게 내린 금고령을 해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나 정통성에 민감한 효종이지만 승하한 후에도 효종의 정통성을 두고 첨예한 대립이 발생한다. 왕조 시대에 아버지인 인조가 장자 국유론을 내세워서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받은 효종이므로 그에게 정통성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4. 기타

효종께서는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아직도 저승전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정조실록》28권에 서술된 사도세자의 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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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효종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월도와 철퇴.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弼夫)의 일신(一身)을 망치는 것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臨)한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禍)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효종실록의 효종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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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숙명신한첩》에 수록된 효종의 편지

이 편지는 숙명공주가 친정(왕실)의 어른들과 주고받은 서찰을 모은 《숙명신한첩》(보물 제1629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숙명공주가 입궁 시기 때 에 못 온 적이 있었는데 효종은 숙명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못 왔느냐? 네 언니와 여동생들이 좋은거 다 들고 가서 네 것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게 진작에 오지. 부를 때 못 온 건 아무리 봐도 네 남편 때문이니까 남편이랑 열심히 싸우고 남편 신나게 갈궈라."라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여기에는 공주의 부모인 효종 내외 뿐만 아니라 남동생인 현종명성왕후 김씨 내외, 양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당대 왕족 등의 고위층 생활상과 왕실 가족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거니와 한글 서예 쪽에서도 조선 초의 판본체에서 조선 후기의 궁체로 변해가는 과도기의 자료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효종의 왕비이자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도 편지를 보냈는데 인선왕후는 "네 여동생은 벌써 임신해서 아기 베개에 수 놓는다고 수선 떨고 있는데 너는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식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편지들이나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효종의 가족들은 왕실 가족답지 않게 인간적이고 훈훈한 가족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게 특징이다.

5. 가족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효종
(孝宗)
<colbgcolor=#fff3e4,#331c00> 인조
(仁祖)
<colbgcolor=#ffffe4,#323300> 원종
(元宗)
선조
(宣祖)
경혜인빈 김씨
(敬惠仁嬪 金氏)
인헌왕후
(仁獻王后)
능안부원군
구사맹
(綾安府院君 具思孟)
평산부부인
신지향
(平山府夫人 申芝香)
인열왕후
(仁烈王后)
서평부원군
한준겸[58][59]
(西平府院君 韓浚謙)
한효윤
(韓孝胤)
신금희[60][61]
(申金姫)
회산부부인
황씨[62][63]
(檜山府夫人 黃氏)
황성[64][65]
(黃珹)
우봉 이씨
(牛峰 李氏)

5.2. 배우자/자녀

효종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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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순번 작호 생몰기간 모후 비고
<colcolor=#ffd400> 1남 <colcolor=#b82647,#d94767><colbgcolor=#fff> 왕세자
王世子
<colbgcolor=#fff><colcolor=#000> 연
<colbgcolor=#fff><colcolor=#000> 1641년 ~ 1674년 <colbgcolor=#fff><colcolor=#000> 인선왕후 18대 국왕 }}}}}}}}}

6. 대중매체

전란으로 혼란스러워진 조선의 국방을 강화하고 안정시킨 명군임에도 생각보다 사극에서 그리 많이 다뤄지는 왕은 아니다.[67] 심지어는 아버지 인조처럼 청에 대한 증오심에 눈이 멀어 북벌을 추진한 비이성적인 강경론자로 곡해되기도 한다.[68] 비중있게 나올 경우 주로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는 김자점과 소용 조씨에게 벌을 내리는 심판자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6.1. 드라마

파일:153F780D4BA3336750.jpg* 2010년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아래 참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봉림대군(추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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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영화

6.3. 기타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진승총(震乘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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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장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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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고종 태황제
제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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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1]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은 2개가 있는데, 인조가 즉위 전에 살던 '상어의궁(上於義宮)'과 왕자(대군) 시절 효종이 살던 '하어의궁(下於義宮)'이다. 효종이 태어난 곳은 상어의궁. 하어의궁 터는 오늘날 혜화동 쪽에 표석이 남아 있다.[2] 굵은 글씨는 영조가 추가로 올린 시호.[3] 원나라고려 충선왕에게 내린 시호한자가 동일하다. 효종이라는 묘호는 청과의 외교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인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조선의 왕은 모두 이와 같은 외교 방식을 취했다. 이는 이전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점이다.[4] 40세 생일을 10일 앞두고 승하했다.[5] 효종이 승하하고 아들 현종이 즉위할 때까지도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는 살아 있었다. 이 때문에 효종의 왕위 정통성을 두고서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지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고, 효종의 승하가 조선 후기에 들어 큰 정치적 소용돌이로 빠지게 된 계기가 된다.[6] 봉호는 황해도 봉산군에서 유래했다. '효종'이란 묘호도 물론이지만 봉호인 '봉림대군'이란 칭호 또한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7] 당시 인조가 발 빠른 청군 기동대에 쫓겨 남한산성에서 힘겹게 항거하고 있는 동안, 도원수 김자점은 인조의 명령("평안도에서 침입하는 청군을 막으라")대로 평안도에 틀어박혀 막으려 했지만 의외로 청군이 여러 평안도 성들을 지나쳐 압록강을 건넌지 10일도 안돼 한성부 부근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자 패닉 상태에 빠져 지원군을 보내기는커녕 청군을 피해 숨어서 술잔치에 여자를 끼고 놀았다고 한다.[8] 그러고 한동안 인조가 근왕을 지시할 때까지는 정방산성에 머물렀는데 사실 한국 역사에서 산성에 짱박혀 농성하는 것은 북방에서 내려오는 대규모 외적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기에 김자점의 책임은 아니다.[9] 김자점은 즉시 남한산성으로 가서 구원할 것을, 심기원은 신중론을 펼쳤다.[10] 김자점이 쥔 군대는 조선이 통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군대나 다름없었다.[11] 인조의 계비, 효종의 새어머니. 훗날 장렬왕후 조씨.[12] 이 《시헌력》이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음력이다.[13]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유산을 청나라가 계승한 것에 가깝다. 물론 중원 입관 전에도 청나라의 만주족은 마냥 야만족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웠다. 애초에 금나라가 급하게 세워진 나라인 것과 달리 청나라는 충분한 준비를 거쳐 기틀을 다진 나라다.[14] 사실 효종에게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없었고를 떠나서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청나라 문물(특히 군사 제도)에 대한 관심(및 선호)은 애초부터 결코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감으로써 싫은 건 싫은 거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지극히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 구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면서 청나라 문물은 잘도 받아 들이네? 되게 이중적이네?"라는 반응이야말로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고 방식의 발로다. 복수도 어쨌든 힘이 있어야 하고 복수할 상대가 어떻게 강한지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꾸리고 운영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어 써먹을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15] 효종이 사망하는 효종 10년(1659) 3월 11일.[16] 이 독대의 내용을 공개한 시점은 숙종 1년으로, 예송을 잘못 이끈 죄로 유배된 데다 남인에게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송시열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독대 내용을 공개했지만 내용을 보면 반대로 유교적인 수신책만을 얘기하고 있다.[17] 반역자 강씨라는 뜻의 비칭.[18] 생몰년도: 1602년 ~ 1674년, 이순신의 조카 이완과는 다른 인물이다.[19] 활을 제대로 쏘면 아무리 촉이 없더라도 자상(= 뾰족한 물건 등에 찔리는 상처)을 입을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죽을 정도의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20] 일본에게 당했던 조총으로 조총 부대를 편성해 물리치는데 효과적인 승전보를 울릴 수 있었다.[21] 당시 경복궁임진왜란 때 불타 흥선대원군이 재건축할 때까지 황무지 폐허가 되어 있었다.[22]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 아버지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23] 효종 때를 기준으로 하면 선조 때 입궐했다는 의미이고, 인조반정이나 병자호란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임진왜란까지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을 인물이다.[24] 관자놀이를 지나는 혈관이 바로 이것.[25] 동맥의 손상에 의한 출혈의 경우, 피가 분수처럼 솓구쳐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26] 현대 일반인의 시각으로 보면 죽는 건 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계급적 명예와 위신이 있는 사회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형의 방법"이 명예로운가 아닌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2차대전전범재판에서도 군인 신분의 전범을 군인으로서 군복을 입혀 총살형으로 집행할 지 민간인으로서 군복을 벗겨 교수형으로 집행할 지가 주요한 논제 중 하나였다. 당시 조선유교사회로 신체가 훼손되지 않는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신체가 훼손되지 않는 교수형이 신체가 훼손되는 참형보다 온건하고 명예로운 처형이었다. 즉 사고였다는 점을 정상참작 해준 셈이다.[27] 서구에서는 반대로 참형이 교수형에 비해 온건한 형벌이라 여겨졌다. 정확히는 교수형을 더욱 비천하게 여긴 것이었다. 참형은 무기에 의해 죽는 것이므로 기사가 전장에서 죽는 것과 같다고 여겨 비교적 명예로운 처형이었고(그렇다 보니 같은 참수형이라도 로 참하는 것이 도끼 등으로 참하는 것보다 높이 여겨졌다.) 교수형은 짐승 취급에 가깝게 천하고 모욕적인 죽음으로 간주됐다.[28] 효종은 재위 도중에도 언월도와 철퇴 등을 가지고 무예를 연마하는 것을 좋아했던 왕이기 때문에 근육이 붙어서 어깨가 넓어지고 몸이 굵어졌을 수 있다. 근데 조선식 언월도는 상당히 무겁고 다루기 어려운 무기이다보니 요구되는 피지컬과 숙련도가 매우 높은 축에 속해서 제대로 훈련받은 조선 무관들도 제대로 못 다루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걸 효종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정도로 힘이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효종은 즉위했을 대 만 30세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어깨가 다부지고 더 넓어질 여지가 있었다. 사실 조선의 왕들은 무골로 유명한 이성계의 후손들이라 그런지 유독 덩치가 좋은 왕들이 많다. '곰처럼 강건했다'고 전해지며 무장으로 활약한 태조의 아들인 정종부터 해서 문종이나 성종, 그 아들인 연산군이나 중종 등 체격이 좋다는 묘사가 많다. 심지어 훈남 이미지로 유명한 정조 역시 골격이 우람했다는 묘사가 있다. 요새로 따지면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헬스까지 즐기니 엄청난 떡대가 된 셈이다.[29] 1990년대에는 세종대왕영릉과 구별하기 위해 '녕릉'이라고 표기했었다. 오늘날에는 어법대로 '영릉'이라고 써 놓고 한자를 함께 달아 놓았다.[30] 오늘날에는 화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31] 무덤의 원래 주인의 관을 옮겨 생긴 빈 묫자리. 기존에 썼던 묫자리를 다시 쓰는 건 당시 조선 유교사회에서 매우 기피했는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낸 건지 영조의 "정성왕후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할아버지를 파묘 자리에 묻어버렸다.[32] 그리고 작품을 보면 효종 미남설을 반영한 것인지 외형도 제법 준수하게 묘사되었다.[33] 봉림대군과 소현세자송산 전투에서 청나라군으로 참전하여 명나라의 병부상서 홍승주가 항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 즉, 청나라군이 단순히 운좋게 만주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34] 1654년 시점 기준으로 청나라는 불과 건국 40여 년 밖에 안 된 신생 강국이였다.[35]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파견되는 임시 비정규 사절 또는 사신을 말한다.#[36]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 문서.[37] 건청곤이, 하늘은 맑고 땅은 골라졌다.[38] 문제의 핵심인 夷가 "평평하다."란 뜻과 "오랑캐"라는 뜻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동이의 이도 이 글자니 특히나 청나라는 이민족 출신이라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39] 정작 청나라는 그럼 건청곤녕()이라고 해야 했다며 다시 따졌고 이에 조선 측은 우연이라 했다가 나중엔 결국 잘못 썼다고 말했다.[40]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스토리가 그려졌다.[41] 과거에는 현대와는 달리 수염이 길고, 후덕하고 육중한 체구를 부와 미 또는 건강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특히 남자라면 건장한 체구 자체가 하나의 미덕으로 칭송받는 경향이 있었다. 효종은 무예 연마에 힘썼던 왕이었으니 활력이나 근육도 발달했을터. 지금으로 분류하자면 짐승남 같은 터프가이형 미남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외모를 떠나 조상인 태조 이성계부터 거의 먼치킨 무인인데다가 아들인 정종도 (사극에서 이미지는 유약하지만) 체구가 건장한 무골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문종 역시 체구가 크고 수염이 길었으며 세조도 초상화를 보다시피 후덕하고 듬직한 외모이다. 이를 볼 때 대부분의 조선 왕가의 남자들은 왕실 대대로 기골이 장대했던 것일 수도 있다. 예외로 연산군은 사냥을 즐긴 무골기질이 있었으나 좀 호리호리한 외모였다고 한다.[42] 후에 무과에 급제.[43] 효종 재위 10년 중 대부분을 별군직 행수로 일했다.[44] 효종 2년 칠원 현감에 제수되었다.[45] 나중에 덕천 군수를 지낸 김여로 등이 포함되기도 하는 등 전승하는 인원을 모두 합치면 이미 여덟 명이 넘는다. 초기 별군직이었던 인물들이 뒤섞여 전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46] 효종은 즉위 후 별군직을 신설해 자신의 가까이에 뒀고 주로 왕의 가벼운 행차나 습사 등에 동행했으며 평시에는 왕의 침소를 은밀 경호했다. 다만 이들이 봉록으로 받는 결수가 같은 급의 다른 관리들보다 높아 당대에도 여러 번 논의가 이뤄졌었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별군직청을 신설코자 했으나 대신들의 견제가 있어 효종 7년에야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별군직청 자체는 이후 시대에도 유지되다가 고종 시절에 폐지됐다.[47] 정확한 출처는 《청장관전서》 제57권 〈양엽기〉 4의 '팔장사'편.[48] 얼마나 아꼈는지 당시 세자는 허리를 숙여서 땅바닥에 책을 놓고 수업을 받았다(스승은 존경하라는 의미). 그런데 효종은 세자 허리 나갈까 봐 꼼수까지 써가며(핑계인즉슨 "세자의 수업에 쓰이는 교재는 《논어》로 공자님 말씀을 적어놓은 책인데 어찌하여 바닥에 두고 하는가?"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수업하려 했다가 실패했다.[49] "너 시집 갔으면 시가에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품고 있으면 어쩌니?"라는 의미다. 여담으로 효종의 손자이자 숙명공주의 조카인 숙종도 애묘가였다.[50] 당장 효종 사후 왕위에 오른 현종도 아들이 숙종말고는 없었다.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이후의 세대에서는 대군이 전혀 없다. 적자손이 있어도 다들 그냥 원자손이나 세자 또는 세손 테크를 타지 대군에 봉해지기도 전에 요절해버린다. 효종이 조선 국왕들 중 마지막으로 대군 출신으로 즉위한 왕이다. 앞선 사례는 정안대군(태종)-충녕대군(세종)-수양대군(세조)-해양대군(예종)-자을산군(성종)-진성대군(중종)-경원대군(명종)이고 봉림대군(효종)이 마지막이다. 태종은 왕자시절에는 '대군'이라는 명칭이 본인 재위기간에 제정된 탓에 그냥 '정안군'으로 불렸지만, 태조의 적자이므로 대군 출신 왕이라는 정의에 부합한다.[51] 정조와 순조는 아들이 1명 더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다.[52] 실제로는 익평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익평군은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정작 풍계군의 대가 끊기게 되었고(...), 이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 완평군이 입적하여 잇게 된다.[53] 철종의 자식들도 대부분 작호를 받기 전에 죽었다.[54]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이런 이유로 죽는 것만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아들들 중에서 은전군은 목숨을 건졌을 것이고, 보험(?) 하나는 생겼을 것이다. 아니면 이원경이 살아서 이원경이 먼저 왕이 되었을 수도 있고. 어느쪽이든 효종의 가계가 끊어지는 일은 없거나 최소한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55] 족보상으로 고종은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의 후손(정확히는 연령군의 양손자로 입적된 은신군의 아들로 입적)이었다가 효명세자의 아들로 옮겨졌다. 그래도 고종의 경우는 할아버지 남연군 대부터 연령군 후손이기는 했다.[56] 철종은 생물학적으로 효종의 후손이지만 고종은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후손이다.[57] 철종의 승하 후 바로 인평대군파 출신 고종이 즉위하였으므로, 효종의 남계후손이 단절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다. 철종의 승하 이후에도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과 익평군의 서자 경은군 이재성 이렇게 2명이 생존해 있었다. 이들이 철종의 뒤를 잇지 못한 이유는, 영평군은 철종의 '형'이었고, 경은군은 만 3세에다 서출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영평군은 실제 후손을 남기지 못해 혈통 단절, 경은군이 1남을 낳고 경은군의 아들이 4남 2녀를 낳아 1943년까지 생존하였다는 기록이 최근 발견 되어서 지금도 남계후손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그 후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긴 하다. 다만 숙안공주숙명공주 등 여계 후손들은 존재한다.[58] 효령대군의 6대손이다.[59] 효령대군 → 낙안군 이녕 → 이씨 부인 → 신우호 → 신건 → 신금희→ 한준겸[60] 효령대군의 5대손이다.[61] 효령대군 → 낙안군 이녕 → 이씨 부인 → 신우호 → 신건 → 신금희[62] 효령대군의 6대손이다.[63] 효령대군 → 서원군 이친 → 고림군 이훈 → 이씨 부인 → 황탕경 → 황성 → 회산부부인 황씨[64] 효령대군의 5대손이다.[65] 효령대군 → 서원군 이친 → 고림군 이훈 → 이씨 부인 → 황탕경 → 황성[66] 효종이 즉위하고 7년만에야 숙원으로 봉작, 현종 때 숙용, 숙의, 귀인을 거쳐 숙종 때 빈이 되었다.[67] 아무래도 형인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때문에 소현세자가 더 자주 비중있게 등장하곤 한다.[68] 아무래도 소현세자에 대한 동정론 때문에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이 더 빠르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만큼, 그런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통해 즉위한 효종이 평가절하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효종의 실제 행적을 보면 오히려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보여 신하들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으며, 시헌력을 도입하기까지 했다.[69] 198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수양대군을 연기해 백윤식이 연기한 문종의 동생이자 윤유선이 연기한 단종의 숙부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백윤식이 소현세자, 윤유선이 인평대군의 아내 '복천부부인'으로 나와서 문종, 세조, 단종이 환생해서 다시 가족이 된다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70] 43화에서는 소용 조씨가 "송충이보다 징그러운 봉림대군..."이라고 하며 치를 떨 정도.[71] 사실 이 시점에서는 조씨도 끝판왕 포스를 내뿜던 시절이라 봉림대군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은 계산하고 있었다.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없는 사이 인조 구하려고? 그게 잘 될 것 같냐?"라고 일갈한게 증거. 실제로 조씨는 인조를 꽁꽁 숨겨놓은 것으로 모자라 인조 주변에 무장 병력을 왕창 깔아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자기를 배신할 것과 내관 김인이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인간흉기라는 것은 계산하지 못했고 그것이 조씨의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72] 여성 캐릭터들의 개성이 강해 상대적으로 남성 캐릭터가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았던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남성 캐릭터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