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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4:38:35

전계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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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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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현효대왕 도정궁 사손
 
 
진종 소황제 장조 의황제
 
 
 
 
정조 선황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순조 숙황제 상계군 전계대원군 남연군 풍계군 진안군
 
 
 
 
 
 
 
 
 
 
 
문조
익황제
철종
장황제
익평군 회평군 영평군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헌의대원왕† 완평군 완성군
 
 
 
 
 
 
 
 
 
 
 
 
 
 
헌종
성황제
고종
태황제
덕안군† 경은군 청안군 완림군† 완순군 완영군† 흥친왕 완은군† 인양군† 의양군 예양정 완창군
 
 
 
 
 
 
 
완효헌친왕† 순종
효황제
의친왕 영친왕 풍선군† 영선군 경원군
 
 
청풍군 창산군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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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
전계대원군 영평군 청안군 (풍선군)
제4대 - 제5대
청풍군 (이완주) (이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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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동궁 초대 궁주
<colbgcolor=#6d1b43><colcolor=#ffd400>
조선 장종의 손자
조선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 | 全溪大院君
파일:전계대원군묘.jpg
전계대원군묘 전경
출생 1785년 4월 29일
조선 강화도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사망 1841년 12월 14일 (향년 56세)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능묘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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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d1b43><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광(㼅)
부모 부친 은언군
모친 전산군부인
형제자매 8남 1녀 중 8남
배우자 정실 완양부대부인 전주 최씨
(完陽府大夫人 全州 崔氏, 1804 ~ 1840)
측실 용성부대부인 용담 염씨[1]
(龍城府大夫人 龍潭 廉氏, 1793 ~ 1834)
측실 이씨[2]
자녀
슬하 3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회평군(懷平君, 1827 ~ 1844, 최씨 소생)
차남 - 영평군(永平君, 1828 ~ 1902, 이씨 소생)
3남 - 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 1831 ~ 1864, 염씨 소생)
종교 유교 (성리학)
초명 쾌득(快得)[3] / 해동(海東)
창강(昌康)
봉호 전계군(全溪君)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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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망과 이후3. 후손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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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6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친아버지이다. 휘는 이광(李㼅)이며, 초명은 이쾌득(李快得)과 이해동(李海東), 자는 창강(昌康)이다.

은언군과 그의 첩인 이덕희의 딸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산군부인 소생 첫 아들은 요절했고 둘째 아들이 전계대원군이다.[4] 조선 시대에는 동성동본 간 결혼이 금기시되었는데, 아버지 은언군은 같은 전주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1819년 6월 4일 그의 생모 전산군부인 이씨가 강화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1819년 6월 5일[5]과 6월 7일[6]에 쾌득 생모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서 쾌득이 전계대원군의 30대 중반까지 쓰던 이름이란 게 밝혀진 셈. 이쯤되면 초명이라 보기도 힘들다.

1799년 아버지 은언군과 큰형 상계군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강화 교동도로 귀양갈 때 이광도 같이 유배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왕족으로 기본적인 품위는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1801년 정조 사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30년 넘게 강화도에서 빈농(貧農)으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있는 동안 본처 외에 첩을 2명이나 두고 차남 이욱을 둘 정도였으면 그렇게 빈곤한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1827년 초부터 경제적 상황이 급격하게 좋아진다. 그의 장남이 1827년 9월생, 차남이 1828년 7월생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어 다급해진 사촌동생 순조에 의해 방면되어 두 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과 함께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다시 정착해서 1831년에는 3남 이원범을 얻고, 자식들을 키우다 1841년 사망했다. 사후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문을 조두순이 지었다.

2. 사망과 이후

사후에는 1844년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장남 이원경이 휘말려서 죽고 나머지 아들 이욱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3남 이원범이 철종이 되자, 아들인 철종이 생부를 전계군(全溪君)으로 봉한 뒤에[7] 왕의 친부가 받는 '대원군'으로 격상시켜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덧붙여 철종을 포함한 철종의 형제들도 철종이 즉위한 후에 봉군되었다.[8]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선단초등학교와 성당 근처에 묘가 있다. 전계대원군은 일단 은언군의 묘가 있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자락[9]에 처음 본부인과 함께 합장되었고, 뒤에 철종 즉위 후 포천으로 이장된 것이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홍제동에 있던 염씨 묘소는 전계대원군과 본처 최씨 묘소 아래에 있다. 근처에 아들 회평군 이명(이원경), 영평군 이경응(이욱), 양증손자 풍선군 이한용 등의 묘소가 전계대원군의 묘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3. 후손

후손 중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그 후손을 적지 않고 본인까지만 적었다.

4. 기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에는 이쾌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이성득은 후에 잊혀졌고 《선원보략》에도 누락됐다가, 1970년대에 사서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철종, 고종 때 미처 인멸하지 못한 자료가 있어서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이쾌득과 함께 등장하는 이철득이 이성득의 친동생인지, 김포시 통진면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문, 김문근이 쓴 비문 내용에 등장하는 전산군부인 이씨가 낳은 일찍 죽은 첫 아들인지는 불분명하다.

[1] 철종의 생모로, 정실부인이 아닌 측실이었다. 철종 즉위 후 임금의 생모라서 부대부인 작호를 받은 것 뿐이다.[2] 영평군(1828)의 생모.[3]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에는 쾌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단 철득은 풍계군과 동일인으로 추정되었으나 생년이 철득은 쾌득보다 5년 연상이고, 풍계군은 선원보략에 1783년생이라 하여 서로 다르다.[4] 경기도 통진군 양촌면 마송리 산 13-48(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산 13-48)에 있는 전산군부인 묘비문에 나타나 있다.[5] #[6] #[7] 봉호는 어머니 이씨의 본관 '주(州)'에 들 봉호의 돌림자인 '계(溪)'를 따서 지었다.[8] 역모에 몰려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懷平君)', 이욱은 '영평군(永平君)'으로 봉해졌다.[9] 현 은평메디텍고등학교 뒷산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