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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정식 봉호를 은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영친왕은 이은의 황태자 책봉과 더불어 폐기된 작호로, 황태자 자격으로 받은 '의민황태자'라는 시호가 있으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은 사시(私諡)이므로 표기하지 않음 |
청풍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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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 ||
누동궁 4대 궁주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조선 장종의 6대손 | ||
대한제국 장조의 6대손 청풍군 | 淸豊君 | ||
| ||
이름 | 이인봉(李麟鳳) → 이해봉(李海鳳) → 이해승(李海昇) | |
호 | 송석(松石) | |
출생 | 1890년 6월 22일 | |
사망 | 미상[1] |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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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대한제국 장조[2]의 6대손이며,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증손자, 청안군 이재순의 양손자, 풍선군 이한용의 양자이다. 또한 전계대원군의 종가(宗家)인 누동궁의 4대 종주로 누동궁의 마지막 주인이다.[3]
2. 가계
이해승은 본래 월산대군의 후손이었으며, 그의 직계에서는 이미 300년 전에 종친(왕족) 대우가 끝났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이재숙이 덕흥대원군 후손인 이현의 양자로 입적되었고,[4] 그의 친아버지 이건용 또한, 덕흥대원군 후손인 이재범[5]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세조 이유 → 덕종 이장 → 월산대군 이정 → 덕풍군 이이 → 파림군 이주 → 양천도정 이혜 → 이호인 → 이희맹 → 이석번 → 이강 → 이하석 → 이사흥 → 이상근 → 이희순 → 이영규 → 이석현 → 이재숙(덕흥대원군 이초 후손 이현에게 출계) → 이건용(덕흥대원군 이초의 다른 후손 이재범에게 출계)[6] → 청풍군 이해승 |
또한, 누동궁의 봉사손이 된 이해승은 철종의 큰집 장손으로서 중요한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3. 생애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colbgcolor=#29176e> 양할아버지 [[청안군(1851)|{{{#ffd800 청안군 이재순}}}]]과 함께 촬영한 사진. |
1897년(광무 원년), 영평군의 건의로 풍선군의 양자가 되었고,# 1902년(광무 6년) 2월에는 철종의 능인 예릉의 참봉 직을 맡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904년(광무 8년), 헌종의 비 효정왕후가 훙서[8]하자, 국상 기간 동안 종친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로 임명되었고#, 1906년(광무 10년)에는 탁지부 재랑을 역임했다. 1907년(광무 11년) 3월에는 시강원 시종관 주임관 4등이 되었으며, 6월에는 수학원에 입학했다.
1908년(융희 2년), 순종 즉위 후 정 3품 통정대부로 승진하며 돈녕부도정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대원군 적장손 세습제'에 따라, '청풍도정(淸豐都正)'에 봉해졌다. 1909년(융희 3년), 수학원을 졸업한 후, 가선대부를 거쳐 정 2품 자헌대부에 올랐고, 1910년(융희 4년) 6월에는 청풍군(淸豊君)으로 승격했으며, 이후 영종정원경(領宗正院卿)에 올랐다. 같은 해 8월에는 훈 1등 태극장과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별다른 행적 없이 평탄한 삶을 살던 젊은 황족일 뿐이었다.
3.2. 일제강점기의 행적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한일 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황실과 양반 등 기존 기득권층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그 일환으로, 황족이었던 이해승에게 후작 작위와 16만 2,000원[9]을 지급했다. 이후 이해승은 본격적으로 친일 행보를 걷게 된다.같은 해, 조선귀족 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조선귀족을 대표해 메이지 덴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를 참배했다. 1912년에는 '한일 병합 이전 한·일 관계에서 공을 세운 자'로 인정받아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이해승은 채무보증을 잘못 서면서 큰 빚을 졌으나, 일제의 지원을 받아 재산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하는 조건으로 채무를 변제했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주식에 투자하여 배당금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토지를 대부받거나, 금·은광의 광업권을 취득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10]
친일 활동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이해승은 상당히 화려하게 살았던 듯 하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당시 이해승의 저택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머니와 가끔 '큰 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었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주인이었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어요. 출입문 양쪽에는 커다란 도자기들이 나열되어 있어, 마치 중국의 성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또한, 이해승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해동은행#의 대주주로서 감사를 맡았고, 1937년부터 1942년까지 5년간 일선산금 주식회사의 이사를 역임했다.# 1925년부터는 조선귀족회에서 활동하며, 1945년까지 이사를 지냈고, 1942년에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940~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 최대의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이후에는 일제 육·해군에 각각 1만 원씩의 국방 헌금을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에게 전달했다#.
3.3. 말년과 최후
상술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8.15 광복 이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기소되었지만,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석방되었다.석방 1년 뒤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해승은 환갑의 나이에 북한군에게 납북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11] 1958년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12]
그래서 현재 (적어도 남한 지역에) 그의 실제 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에 그의 가묘가 남아 있다. 부인인 청송 심씨의 묘를, 명목상 합장 형식으로 조성한 것. 묘비의 글은 권태희가 짓고, 이석은이 글씨를 새겼으며, 4면 모두에 글이 새겨져 있다.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자헌대부 영종정원경 청풍군 완산 이공 휘 해승 지묘 배 정경부인 청송 심씨 부좌(資憲大夫領宗正院卿淸豊君 完山李公諱海昇之墓 配貞敬夫人靑松沈氏祔左)"#
4. 여담
- 성격이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관련 일화가 하나 있다.
충청북도 괴산에서 작가 홍명희[13]와 함께 3·1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이재성(1887 ~ 1925)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항렬로는 이해승의 할아버지 뻘 먼 친척으로,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었는데, 징역 1년 반을 살다 나온 후 집세낼 돈이 없어 손자 뻘인 이해승이 소유한 누동궁의 10여 호 별채 중 한 채를 빌려 들어가 살았다. 당시 이재성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이해승의 집에서는 직계가 아니면 궁에서 아이를 낳거나 죽을 수 없다며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재성의 부인은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동대문 부인 병원에서 출산했으나, 불행히도 아기는 죽었다. 쇠약해진 이재성의 부인은 누동궁으로 돌아갔지만, 이해승에게 쫓겨났고, 이틀만에 죽었다. 이재성 역시 폐결핵이 심해져 드러누웠으나, 이해승은 집에서 죽을까봐 두려워 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는 그 날 바로 내쫓았다. 이재성은 쫓겨날 때 한겨울 찬바람을 쏘인 탓에 병세가 나빠져 부인과 마찬가지로 쫓겨난 지 이틀 만에 객사했다.
이재성이 죽은 후에도, 이해승을 포함하여 집안 사람 어느 누구도 조문을 가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재성의 친구와 지인들이 이해승에게 따지러 갔다. 그러나, 이해승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끝내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는 1925년 2월 8일 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으로,## 이해승의 인물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비록 먼 친척이라해도,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죽어가는 사람을 내쫓을 정도의 비열함을 보인 것이다.#
- 2020년〈정용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한 이원 황사손에게[14] 대표적인 친일 황족으로 언급되었다.
5. 가족과 후손
전계대원군의 서장남이자 누동궁 1대 사손 영평군 이경응과 청풍군 이해승 사이의 3대는 모두 입양으로 대를 이었으나, 이해승 이후부터는 친자녀들로 가계가 이어졌다.이해승은 아들 네 명을 두었다. 원래 장남 이완주(李完柱, 1908~1943)가 가계를 이을 예정이었으나, 1941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15] 둘째 아들 이헌주(李憲柱, ?~1943) 역시 1943년에 사망했으며,# 셋째 아들 이택주(李宅柱)는 은언군의 종손 이완용[16]의 양손자로 입양되었으나,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북한군에게 살해당했다.
막내 아들 이영주(李寧柱)만이 오래 살아남아, 1987년경 낙선재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17]
이완주의 장남 이우영(李愚英, 1939년생)과 그의 장남 이윤기(李允基, 1967년생)는 스위스그랜드호텔[18]의 전·현직 오너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1[19] #2[20]
이우영의 동생 이우진(李愚振)은 서강대학교 동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중앙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해승의 친누이 이해영(李海映)은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혼인했으나, 두 집안 간의 경제적 격차로 인해 1921년에 이혼했다.
6. 재산 환수 논란
이우영은 1957년부터 구 황실재산총국에 소송을 제기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되어 있던 재산을 찾아가기 시작해 1990년대 말까지 신탁 재산의 75%인 890만㎡를 되찾았고 이 중 절반 가량인 435만㎡를 매각하였다. 1988년 이우영은 반환 받은 토지 중 전계대원군의 처 용성부대부인의 묘가 있었던 서울 홍은동 땅에 스위스 그랜드 호텔을 지었고, 이후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로 바뀌었다.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2007년 친일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결정을 내리자 이우영은 2008년부터 소송을 시작하였다. 대형 법무 법인 변호사들을 고용해 그가 진행한 소송은 모두 5건이었다. 이우영은 1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국가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작위 수여만으로는 한일 병합의 공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한일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를 재산 귀속 대상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우영 측은 이를 이용해 ‘한일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므로 재산 귀속 대상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2심 재판관은 훗날 대법관이 되고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관련인물로 알려진 박병대 법관이다.
결국 이우영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첫 소송에서 2010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해 320억원 상당의 땅을 지켜냈다. 이씨가 물려받은 땅의 절반이 넘는 규모였다. 이해승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친일 재산 국가 환수는 불가능하다는 대법원 판단에 공분이 일었다. #
그러자 국회는 2011년 대법원 판단의 근거가 됐던 ‘일제 강점 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내용 중 ‘한일 병합의 공으로’라는 문구를 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우영은 개정된 특별법이 너무 과도하고 특정인을 노린 것이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며 소송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2013년에 이를 기각하였다. #
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우영이 개정된 특별법 발효 이후 친일 재산을 제3자에게 매각해 얻은 부당 이득 220억여 원을 반환하라는 1심에서 승소하였다.(2011가단207337) 그러나 2014년 1월 2심에서 정부가 패소했다가(2011나14939) 2016년 12월 대법원에서 뒤집어져 최종적으로 정부가 승소하였다.(2014다22789, 2014두3228, 법률신문, 한겨레) 반면 이우영이 국가를 상대로 낸 친일 재산 확인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은 2016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하였다.(연합뉴스)
2019년 6월 26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13부는 국가가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등기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한 1심을 뒤집고, 일부 원고 승소 판결하였다. 1심은 '확정판결에 따라 개인에게 귀속된 땅은 법 적용을 배제한다'는 조항을 들어 원고 패소 판결하였지만, 2심에서 뒤집어진 것이다.(2018나2025746, 법률신문)
하지만 2심에서 국가에 환수하게 된 토지 1필지는 소송 대상이 됐던 땅 가운데 극히 일부로서 충청북도 괴산군에 있는 수로 4㎡ 만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고, 나머지 토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원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기에 그야말로 국가의 일부 승소 또는 사실상 패소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국가에 귀속을 명한 4㎡ 토지는 2007년 당시 국가귀속 결정 대상이 아니어서 기존 대법원 확정 판결과 무관하기 때문에 국가에 귀속하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
이전 2010년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2015년에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2013년의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1년이라는 소송 기간을 넘겨 심리할 수 없다는 취지로 대법원에서 2016년에 각하되고 말았다. #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1992년 이완용의 후손들이 소유권 다툼에서 국가를 상대로 승소한 후 일어난 친일 후손의 국가 상대로의 승소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해승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가 상당히 많았던 모양인지 2020년에도 환수를 추진하겠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하지만 2021년 1심, 2022년 2심 모두 국가가 패소하였다.(2021가합31965 및 2021나2050841, 둘 다 유료) 해당 토지는 1966년에 경매로 은행에 넘어갔다가 1967년에 이우영 회장이 다시 매입했는데, 이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선의취득으로 본 것이다. 결국 2023년 10월 6일 환수를 추진한 정부가 최종 패소했다.(2022다258774, 법률신문)
[1] 하단 참조.[2] 조선 장종.[3] 누동궁의 가계 자체는 현재까지 내려온다. 자세한 것은 후술.[4]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의 7남인 진산군의 9대손. 본래는 월산대군의 후손으로, 이해승과 생가 혈통 기준으로는 13촌 증조부-증손 간이다.[5] 덕흥대원군의 8대 사손 이형종의 현손으로, 이형종의 3남 이굉의 증손이다.[6] 《덕흥대원군파보》 기준으로, 이건용의 생부 이재숙과 양부 이재범은 22촌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30촌.[7] 덕흥대원군과 그의 아들 선조, 그리고 손자 인조의 후손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8] 군주, 왕족, 귀족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9] 2010년대~2020년대 가치로 환산하면 백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10]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해승이 보유했던 토지와 임야는 총 197만 ㎡(시가 322억여 원 상당)로, 환수 대상자 중 최고 액수를 기록했다.[11] 실질적으로 오래 생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 그의 나이는 많았으며, 공산당 입장에서 그는 타도 대상인 왕족이자 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이다.[12] 대한민국 민법에 따르면, 부재자의 생사가 5년간 확인되지 않을 경우, 법원은 이해 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따라 실종 선고를 내릴 수 있다. 이해승은 1950년 실종되었으나, 당시에는 6.25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준으로 5년을 계산해 1958년에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13] 소설 《임꺽정》을 썼다.[14] 의친왕의 손자이며,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장남. 2005년 이후,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명목상 양자가 되어 구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을 이은 인물이다. 항렬로는 이해승의 조카 뻘이 된다.[15] 1943년 사망설도 있다.[16] 매국노 이완용과 동명이인이지만, 이 사람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17] 다만, 낙선재 비서실장으로 유명한 인물은 이공재(李公宰)로, 왜 이영주가 해당 직책으로 언급되었는지는 불명이다.[18] 과거 '그랜드힐튼 서울'로 변경된 적이 있다.스위스그랜드호텔 공식 사이트 2023년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해당 부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김성재 의문사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19] 이우영의 인터뷰 기사다. 그는 이 인터뷰 외에는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호텔 행사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 호텔 직원들조차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할 정도로 은둔적인 성향을 보이며, 공개된 사진도 전혀 없다.[2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이우영의 집 사진이 등장하는데, 이는 윤서인 독립운동가 비하 논란에서 언급된 바로 그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