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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09:54:27

진안군(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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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 제11대 궁주
조선 중종의 11대손
진안군 | 晉安君
직위 돈녕도정(敦寧都正)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봉호 진안군(晉安君)[1]
본관 전주 이씨
이름 언식(彦植)
원방(元邦)
생부 이풍
생모 정경부인 진주 강씨(晉州 姜氏)
부인 덕수군부인 덕수 장씨(德水 張氏)
창원군부인 창원 황씨(昌原 黃氏)
거창군부인 거창 신씨(居昌 愼氏)
자녀 2남 2녀[2]
생몰
기간
음력 1752년 8월 13일 ~ 1819년 8월 9일
양력 1752년 9월 20일 ~ 1819년 9월 27일
1. 개요2. 생애3. 죽음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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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문신. 도정궁의 제10대 사손(嗣孫)[3]이자 제11대 주인이다.

2. 생애

1752년(영조 28년)[4] 8월 13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덕흥대원군의 9대 사손인 판돈녕부사[5] 이풍(이례)과 통덕랑 강주직의 딸 정경부인 진주 강씨적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살이던 1782년(정조 6년)에 음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6] 참봉(永祐園 參奉)을 거쳐 1783년(정조 7년) 동부(東部)의 도사(都事)[7]와 봉사(奉事)[8]를 역임했다.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증산현령과 합천군수직을 맡은 뒤 남원, 황주부사전주 판관 직을 수행했다.

1795년(정조 1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도정궁 사손이 되었다. 3년 뒤 덕흥대원군 사손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통정대부 '돈녕도정'(通政大夫 敦寧都正)에 제수받았으며 1799년(정조 23년)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이후에도 사옹원 부제조 및 오위도총부 부총관[9]으로 임명받았으며, 원래 정조의 건릉 공사를 책임지는 수릉관(守陵官) 직을 맡던 안춘군을 대신하여 수릉관 대행을 맡다 곧 정식으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맡았다.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그를 '진안군(晉安君)'으로 봉했다. 이언식의 직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중종이었기에 중종의 4대손인 이언식의 8대조 응천군 이돈까지는 왕족으로 대우받고 그 이후로는 일반 양반이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언식은 군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순조가 그에게 군 작위를 수여한 것은 왕실 후손이 점점 사라져가는 상황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효종의 남계 후손들은, 순조 직계를 제외하면 은언군의 자손들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아들없이 죽었거나 역모에 엮였기 때문에 저대로 냅뒀다가는 왕실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 그래서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대원군가 적장손에 한해 군 작위를 수여하여 대대로 왕족 지위를 세습시켜주려고 한 것이었다.
대원군 봉사손에게 봉작하는 것에 대하여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종성(宗姓) 가운데 오직 판돈녕(判敦寧) 이언식(李彦植)이 대원군(大院君)[10] 의 제사를 받들고 있어 다른 종성인(宗姓人)과 체통이 다르므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의의(擬議)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서는 봉작이 아니면 종실로 대우하지 않는데, 이것이 과연 어떠한가? 대원군의 사손(祀孫)이 도정(都正)을 세습하는 것은 바로 선묘(宣廟)의 성교이다. 지금 만약 판돈녕을 위시하여 제사를 맡은 사람이 2품의 품계에 오르는 경우 공신의 적장례(嫡長例)에 의하여 곧 봉작을 내리면 성조(聖祖)의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역시 오래도록 돈목(敦睦)을 펴는 뜻도 되며 목전의 대례(大禮)에도 의식이 갖추어질 수 있다. 그 가부를 다시 앞서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하나를 지적하여 헌의(獻議)하게 하라."

하였다.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 1월 26일 기미 1번째기사#
그래서 신하들 중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시수 등이 대원군 봉사손에게 봉작하는 문제를 헌의하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판부사 김재찬(金載瓚)·한용귀(韓用龜),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홍문관 제학 김이교(金履喬) 등이 대원군 봉사손에게 봉작하는 문제에 관하여 헌의(獻議)하기를,

"현재의 사세는 이를 버리고는 달리 변통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였고,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 참판 윤익렬(尹益烈), 참의 한기유(韓耆裕)는 말하기를,

"종친의 4대 뒤에 단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만을 인습하게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제가 있고, 공신의 적장(嫡長)으로서 2품에 오른 뒤에 봉작을 이음도 또한 타당치 않습니다.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11] 의 황태자 관례시에 종정경(宗正卿)이 주인(主人)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왕조의 《오례의(五禮儀)》는 실로 개원례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이언식(李彦植)을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로 삼아 종정경의 일을 행하게 한다면, 역시 한때의 임시 변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규장각 직제학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돈녕부 도정을 대대로 이음은 《속대전(續大典)》에 있는 바가 또한 매우 명백합니다. 현재 이를 변통하는 것을 갑자기 논의하기란 아마도 어려운 듯싶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의논들이 비록 들쭉날쭉하나 또한 모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봉작은 비록 불가할 것이 없으나 공신 적장의 예는 인용할 수 없으니, 세습의 타당 여부를 역시 반드시 의논하여 정해야 할 것이다. 예조 당상의 의논 가운데 종정경 문제는 봉작하는 일과 어느 것이 편의한가? 다시 논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 2월 6일 무진 2번째기사#
그럼에도 순조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성사시켰다. 이 때부터 한일합방 때 까지 도정궁의 사손은 군 작위를 받으며 왕실의 주요 종친으로 활동했다.

종친이 된 그 해 효명세자결혼 때 주 관리자로 활약했고 도총관에 임명되어 봉직했다.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종묘의 향제 헌관으로 여러 번 차출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3. 죽음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1819년(순조 19년) 8월 9일 도정궁에서 별세했다. 향년 68세.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수락산 덕릉마을 내 덕흥대원군묘 권역에 있다.

4. 가족 관계




[1] 봉호는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3]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4] 영조는 진안군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즉, 이언식은 순조와 같은 항렬이다.[5] 判敦寧府事.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돈녕부에 둔 종1품 판사(判事)다.[6] 1789년(정조 1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으로 개칭.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숭된 이후 융릉으로 재개칭.[7]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처음에는 사무 위주였으나 뒤에는 관리의 감찰 규탄을 주로 맡아보았다.[8] 조선시대 종8품의 문관직.[9] 五衛都摠府副摠管. 조선시대 오위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기관.[10] 덕흥대원군.[11] 당나라 현종 때에 정한 예문.[12] 박준원(朴凖源)의 아들, 수빈 박씨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