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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손자 하원군 | 河原君 | |||
학서당에 소장된 초상화 | |||
출생 | 1545년 2월 4일[1] | ||
조선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2] | |||
사망 | 1597년 11월 9일 / 11월 14일[3] | ||
조선 황해도 수안군 (現 황해북도 수안군) |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기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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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정(鋥) | ||
부모 | 부친 덕흥대원군 모친 하동부대부인 |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장남 | ||
배우자 |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 신안군부인 신안 이씨 | ||
자녀 |
| ||
자 | 백강(伯剛) | ||
군호 | 하원정(河原正) → 하원군(河原君)[4] | ||
시호 | 의헌공(懿獻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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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덕흥대원군의 적장남이자 선조의 큰형이다.2. 생애
1545년(인종 1년) 2월 4일[5]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에서 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부인 하동 정씨[6]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 14살 때인 1558년(명종 13년)에 하원정(河原正) 작호를 받았고[7], 1559년(명종 14년)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잃고 3년 상을 치른 직후 하원군(河原君)으로 봉해졌다.1567년(선조 즉위년) 둘째 남동생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고 2년 뒤인 1569년(선조 2년)에 친부모인 덕흥군 부부를 대원군과 부대부인으로 추증했다. 이에 하원군 역시 작위 1품에 올랐고, 덕흥군 사저 내에 사당인 '덕흥궁(德興宮)'을 세워 덕흥대원군 내외의 제사를 모셨다. 이후 이따금씩 선조가 도정궁에 직접 찾아와 제향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문소전, 연은전, 종부사옹, 시원 등의 총책 직을 맡았으며 1591년(선조 24년)에는 왕실 족보의 오류를 바로 잡은 종계변무의 성사로 광국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8]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선조를 호위하며 의주로 함께 피난갔다. 1597년(선조 30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려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에 가담했다.
3. 사망과 이후
1597년(선조 30년) 가을에 왕실이 황해도 수안군으로 잠시 피신할 때에 사옹원 제조로서 같이 따라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향년 53세.전쟁이 끝난 1599년(선조 32년) 12월 29일에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기슭의 아버지 덕흥대원군묘 근처에 묻혔다. 묘역과 신도비는 덕흥대원군묘와 함께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받았다.
<colbgcolor=#94153E> 하원군 묘 |
4. 여담
- 생애 초반에는 주색에 빠지고 주변에 세상 모르는 망나니처럼 횡포를 부리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하지만 저런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보신에는 이롭다. 총명하고 겸허하게 행동하면 자칫 역모 사건에 휘말릴 수 있으니 적당히 사고치면서 평판을 나쁘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하원군은 국왕의 큰형인만큼, 만약 역모 사건이 일어난다면 추대받을 확률이 높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저럴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하원군의 성품을 나타내는 기록.간원이 하원군의 난행을 지적하여 파직을 청하다.간원이 아뢰기를,"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은 스스로 ‘왕실의 지친인데 나에게 어쩌겠는가.’라고 하여 방종하고 패망(悖妄)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헌관(獻官)>은 싫다고 피할 일이 아니고 궐정(闕庭)은 사람을 포착(捕捉)하는 곳이 아닌데 헌관에 임명된 것을 분히 여겨 색리에게 화를 내어 붙잡아다가 마구> 구타하여 자기의 분풀이를 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법으로 조치하면 죄가 파직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닌데 상께서 도>리어 공론을 거절하여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시니 어떻게 그의 기탄없는 마음을 징계하며 흉악한 습성을 근절하겠습니까. 형벌은 가까운 사람이>라도 굽히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도입니다. 국가의 기강이 밝다면 이정은 의당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속히 파직시키소서."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종친 대표로 선조를 옆에서 모시고 왜군과 맞서는 군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아 전란 이후에는 성격이 좀 누그러진 듯 하다.
5. 가족 관계
17세인 1561년(명종 17년)에 영의정 홍섬의 딸인 남양군부인 홍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자녀 3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25살에 사별하고 이후 증 이조판서 이의로의 딸인 신안군부인 이씨와 재혼했다. 이씨 부인 사이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고, 소실 4명에서 6남 5녀를 두어 적, 서자녀 합쳐 총 9남 6녀를 낳았다..- 정부인 :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郡夫人 南陽 洪氏, 1544 ~ 1569) - 강녕군 홍섬(江寧君 洪暹)의 딸.
- 적장남 : 당은군 이인령(唐恩正 李引齡, 1562 ~ 1615)
- 적차남 : 익성군 이향령(益城正 李享齡, 1566 ~ 1614)
- 며느리 : 진주군부인 진주 어씨(晋州郡夫人 晉州 蘓氏, 1566 ~ 1648) - 군수 어수(郡守 蘓遂)의 딸
- 손자 : 진산군 이순경(晋山君 李順慶)
- 손자 : 진천군 이희경(晋川君 李喜慶\)
- 손자 : 진릉군 이태경(晋陵君 李泰慶)
- 손자 : 진평부정 이승경(晋平副正 李承慶)
- 손자 : 진계부정 이윤경(晋溪副正 李潤慶)
- 손녀 : 이영순(李英順)
- 손녀 : 이축순(李丑順)
- 손녀 : 이정순(李貞順)
- 손녀 : 이무순(李戊順)
- 며느리(첩) : 응례(應禮)
- 손자 : 양평수 이득경(楊平守 李得慶)
- 손자 : 양산수 이인경(楊山守 李仁慶)
- 손자 : 양릉수 이의경(楊陵守 李義慶)
- 적3남 :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 1568 ~ 1623) - 동생 하릉군(河陵君)에게 양자로 출계
- 적장녀 : 이희령(李稀齡, 1563 ~ ?)
- 사위 : 덕평부원군 기자헌(德平府院君 奇自獻)
- 계부인 : 신안군부인 신안 이씨(新安郡夫人 新安 李氏, 1556 ~ 1616) - 이의로(李義老)의 딸.
- 첩부인 : 풍천 임씨(豐川 任氏) - 군자감 첨정 임중신(軍資監 僉正 任重臣)의 딸.
- 서차녀 : 이계령(李繼齡, 1572 ~ ?)
- 사위 : 사과 김극가(金克家)
- 서장남 : 성해부정 이종령(成海副正 李宗齡, 1573 ~ ?)
- 첩부인 : 장월당 수원 백씨(長月堂 水原 白氏) - 백관(白琯)의 딸
- 서장녀 : 이경령(李慶齡, 1571 ~ ?),
- 사위 : 현감 강극유(姜克裕)
- 서3녀 : 이숙령(李淑齡, 1572 ~ ?)
- 사위 : 김정립(金廷立)
- 서4녀 : 이영령(李永齡, 1574 ~ ?)
- 사위 : 유철(兪轍)
- 서차남 : 장림도정 이덕령(長臨都正 李德齡, 1575 ~ 1638)
- 며느리 : 신부인 충주 어씨(愼夫人 忠州 魚氏, 1578 ~ 1632) - 생원 어복원(生員 魚復元)의 딸
- 손자 : 충양수 이흥길(忠陽守 李興吉)
- 손자 : 충성령 이중길(忠城令 李重吉)
- 손자 : 충흥령 이득길(忠興令 李得吉)
- 손자 : 충릉령 이명길(忠陵令 李命吉)
- 손녀 : 이예영(李禮英)
- 손녀 : 이예신(李禮信)
- 손녀 : 이사예(李四禮)
- 며느리(첩) : 인수(仁壽).
- 손녀 : 이예옥(李禮玉)
- 손녀 : 이예향(李禮香)
- 첩부인 : 안산 안씨(安山 安氏)
- 서3남 : 연성수 이복령(蓮城守 李福齡, 1578 ~ 1613)
- 며느리 : 신인 안동 권씨(愼人 安東 權氏, 1575 ~ 1657) - 권응성(權應星)의 딸
- 손자 : 영가군 이효길(永嘉君 李孝吉)
- 손자 : 영원수 이원길(永原守 李元吉)
- 손녀 : 이원예(李元禮)
- 며느리(첩) : 수연대(守蓮代)
- 손자 : 계양령 이예길(桂陽令 李禮吉)
- 손자 : 수양령 이충길(樹陽令 李忠吉)
- 며느리(첩) : 광주 이씨(廣州 李氏) - 이건(李建)의 딸.
- 손자 : 광평부령 이지길(廣平副令 李智吉)
- 손자 : 광성군 이제길(廣城君 李悌吉)
- 손자 : 광천부령 이신길(廣川副令 李信吉)
- 며느리(첩) : 연생(蓮生)
- 손자 : 안산부령 이득길(安山副令 李得吉)
- 첩부인 : 진산 이씨(珍山 李氏) - 참판 이영의 딸
- 서4남 : 진산군 이유령(珍山君 李有齡, 1584 ~ 1643)
- 며느리 : 현부인 고령 신씨(縣夫人 高靈 申氏, 1583 ~ 1606) - 참의 신응주(參議 申應澍)의 딸
- 손자 : 영안군 이수(靈安君 李洙)
- 며느리 : 현부인 나주 나씨(縣夫人 羅州 羅氏, 1586 ~ 1644) - 참의 나회길(參議 羅晦吉)의 딸
- 서5남 : 진성군 이해령(珍城君 李海齡, 1595 ~ 1655)
- 며느리 : 현부인 당성 김씨(縣夫人 唐城 金氏) - 사과 김세응(司果 金世應)의 딸
- 며느리(첩) : 장효덕(張孝德)
- 손자 : 이인영(李麟英)
- 손자 : 동평수 이황(東平守 李潢)
- 손자 : 한평수 이연(漢平守 李演)
- 손자 : 완평군 이홍(完平君 李洪)
- 며느리(첩) : 금춘(今春)
- 손자 : 금평군 이제(錦平君 李濟)
- 손녀 : 이정경(李貞敬)
- 서6남 : 진양군 이담령(珍陽君 李聃齡, 1598 ~ 1662)
- 며느리 : 현부인 평산 신씨(縣夫人 平山 申氏, 1598 ~ 1666) - 신업(申砐)의 딸
- 손자 : 안평수 이언(安平守 李漹)
- 손자 : 영평군 이사(寧平君 李泗)
- 손녀 : 원세현(元世鉉)의 처
- 며느리(첩) : 예현(禮賢)
- 손자 : 승평도정 이윤(昇平都正 李潤)
- 손자 : 흥평부수 이영(興平副守 李瀛)
- 손자 : 창평수 이준(昌平守 李浚)
- 손자 : 성평군 이혼(成平君 李渾)
- 손자 : 익평부수 이철(益平副守 李澈)
- 손녀 : 정세명(鄭世鳴)의 처
- 손녀 : 류형(柳珩)의 처
- 손녀 : 강성빙(姜聖聘)의 처
- 손녀 : 류재신(柳再新)의 처
- 서5녀 : 이옥령(李玉齡, 1583 ~ ?)
- 사위 : 남영립(南英立)
5.1. 후손
다른 후손으로는 서3남 연성수의 12대손으로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서5남 진성군의 13대손인 마라토너 이봉주가 있다.#[1] 여담으로 이순신과 나이가 같다.[2]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덕흥군 사저)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내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3] 《선조실록》에는 음력 10월 6일(양력 11월 14일)로, 《선조수정실록》에는 10월 1일(양력 11월 9일)로 적혀 있다.[4] 봉호는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5] 음력 1월 23일[6] 세종 ~ 세조 대의 재상 정인지의 증손녀이자 문신 정세호의 딸이다.[7] 작호는 외가의 본관인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따왔다.[8] 종계변무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 내린 공신명.[9] 정인지의 손자이자, 정상조(鄭尙祖)의 아들, 정의공주의 외증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