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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21:15:41

하릉군

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금원군파의 역대 종주
1대 금원군 이령 2대 하릉군 이린 3대 영제군 이석령
조선 중종의 손자
하릉군
河陵君
봉호 하릉군(河陵君)[1]
시호 효정(孝貞)
본관 전주(全州)
이름 린(鏻)
양부 금원군
양모 파징군부인 해주 정씨(海州 鄭氏)
생부 덕흥대원군
생모 하동부대부인 하동 정씨(河東 鄭氏)
부인 평산군부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자녀 2남 1녀
서장남 - 이선(李善) 측실 억금(億今) 소생
서장녀 - 이팔옥(李八玉) 측실 순화(順花) 소생
서차남 - 이현(李賢) 측실 억금(億今) 소생
양자 -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
생몰
기간
음력 1546년 5월 9일 ~ 1592년 6월 17일
양력 1546년 6월 16일 ~ 1592년 7월 25일
1. 개요2. 생애3. 사망과 이후4. 가족 관계5. 후손

[clearfix]

1. 개요

조선왕족. 덕흥대원군의 적차남이자 선조의 둘째형이며 금원군양자이다.

2. 생애

1546년(명종 1년) 6월 6일[2]한성부 서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에서 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부인 하동 정씨[3] 사이에서 적차자로 태어났다.

이복 큰아버지 금원군양자가 되었고 하릉정(河陵正)을 거쳐 하릉군(河陵君) 작위를 받았으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567년(선조 즉위년) 남동생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했고 10년 뒤인 1577년(선조 10년)에 친할머니 소용 안씨를 정1품 ‘창빈(昌嬪)’으로 추증하면서 하릉군 역시 정 1품에 올랐다. 1591년(선조 24년)에는 광국 원종 공신(光國原從功臣) 중 한 명이 되었다.#

3. 사망과 이후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금강산을 거쳐 통천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함경도의 토적들이 왜군을 인도하여 산을 수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다가 그해 7월 25일[4]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 향년 46세. 설상가상으로 그의 유해는 유실되었다가 훗날 통천 군수 정구가 찾아내어 염습했다.#

선조는 하릉군이 죽은 지 9달이 지나도록 소식을 전해듣지 못했던 것 같다. 1593년(선조 26년) 4월[5]에 선조는 하릉군의 소식을 알아보라는 명을 내렸고# 하릉군의 죽음을 전해들은 선조는 매우 애통해하며 하릉군의 장례를 넉넉하게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하릉군의 시신을 찾은 정구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이외 장례에 공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형제를 생각하는 전하의 마음은 알겠는데, 사적인 일로 공적인 상을 남발하면 안되지 않아요? 명을 거두시죠."하면서 반대했으나, 선조는 "평상시라면 내가 그러겠냐? 난리 통에 쟤들이 최선을 다한 게 너무 고마워서 그랬다."하면서 사헌부의 반발을 무마시켰다.#

경기도 양주시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이 곳은 훗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갈현동[6]으로 편입되었는데, 1970년에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후손들이 묘를 이장했다.

4. 가족 관계

5. 후손

하릉군은 평산 신씨 신여종의 딸 평산군부인 신씨(平山郡夫人 申氏)와 혼인했다. 그러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고 첩 3명 중 2명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

서자들은 모두 억금(億今)의 소생이다. 서장남은 교성도정 이선(交城都正 李善)이며 서차남은 이현(李賢)이다.# 다만,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선원속보》에는 이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아마 요절했던 듯 하다. 딸은 순화(順花)의 소생으로 이름은 이팔옥(李八玉)이며 청주 한씨 한교(韓嶠)와 혼인했다.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릉군의 친형 하원군의 적3남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이 양자로 들어왔다. 영제군은 2남을 두었고 이들의 자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전주 이씨 금원군파를 이루고 있다.

[1] 봉호는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2] 음력 5월 9일[3] 세종 ~ 세조 대의 재상 정인지의 증손녀이자 문신 정세호의 딸이다.[4] 음력 6월 17일.[5] 음력 3월.[6]은평구.[7] 경혜공주의 증손녀, 경혜공주정미수 → 정승휴 → 파징군부인[8] 청주 경씨(淸州 慶氏)[9] 세번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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