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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8:40:18

경혜공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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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문종의 왕녀
경혜공주 | 敬惠公主
파일:경혜공주묘.jpg
경혜공주묘 전경[1]
출생 1435년[2]
조선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474년 1월 17일 (향년 38세)
조선 한성부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묘소 경혜공주묘(敬惠公主墓)[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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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왕 문종
모후 현덕왕후
형제자매 1남 2녀 중 차녀
부군 영양위 정종
(寧陽尉 鄭悰, 1437 ~ 1461)
자녀 슬하 1남 1녀
장남 - 정미수(鄭眉壽, 1456 ~ 1512)
장녀 - 해주 정씨(海州 鄭氏, 1461 또는 1462 ~ ?)
봉호 평창군주(平昌郡主)
경혜공주(敬惠公主)
}}}}}}}}} ||

1. 개요2. 생애
2.1.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든 딸2.2. 사연 많은 혼인2.3. 아버지의 즉위 후2.4. 남동생의 즉위 후2.5. 계유정난
2.5.1. 고립된 상황2.5.2. 남편과 함께 유배를 가다2.5.3. 사육신 사건
2.6. 계속된 불행
2.6.1. 동생남편의 죽음
2.7. 비극적인 삶
2.7.1. 비구니가 되다2.7.2. 야사2.7.3. 원수를 만나다
2.8. 한 맺힌 삶의 끝맺음
3. 가족관계4. 경혜공주의 묘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항목

[clearfix]

1. 개요

문종현덕왕후적장녀. 단종동복 누나로, 남편은 영양위 정종(鄭悰)이며, 아들 정미수와 딸 하나를 두었다.

2. 생애

2.1.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든 딸

세종 시대에 세자 이향의 후궁 양원 권씨의 딸로 태어났다.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양원 권씨승휘 홍씨가 세자빈 후보에 올랐는데, 세종이 "세자는 홍씨를 더 좋아하지만, 권씨는 홍씨보다 나이도 많고 품계도 더 높으며 무엇보다 세자의 딸을 낳았으니[4] 나중에 아들도 낳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해야겠다."고 결정해서,[5] 어머니가 세자빈이 되자 그녀는 세자의 적녀가 되어 '평창군주'[6]에 봉작되었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남동생 단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문종은 재혼하지 않았으며, 경혜공주와 단종 남매는 세자의 단 둘뿐인 적자녀[7]로서 상당히 귀하게 자랐으리라 짐작된다.

2.2. 사연 많은 혼인

세종 32년, 평창군주가 16세 때, 혼사가 결정되어 정종(鄭悰)과 혼인하였고, 이에 정종은 임금의 사위에게 내리는 영양위(寧陽尉)로 책봉되었다.

조선 왕녀의 혼인 적령기는 11세~13세였는데 공주가 혼인하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아버지 문종과 동생을 위해서, 혹은 세종의 건강 때문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혼인 결정 후 2달도 되지 않아 할아버지 세종이 승하하여 출합은 뒤로 미뤄졌다. 혼인할 때 그녀는 아직 공주가 아니라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신분이었기에, 부마 후보들을 궁에 모아놓고 간택하는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세종의 용태가 위중하였으므로 국상을 맞기 전 얼른 적당한 명문가의 아들을 골라 혼인 결정만 해놓은 것이다.

2.3. 아버지의 즉위 후

이후 아버지가 즉위한 후 경혜공주(敬惠公主)에 봉작되었다. 그리고 궁 밖에 공주방을 마련하여 하가하였고, 이때 공주의 살림집을 마련하느라 30여 채의 민가가 헐렸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헐린 게 민가라고 해서 그저그런 초가집 30여 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때 공주의 집은 당연히 궁 근처의 부자 동네에 지어졌고, 실제로 양덕방(陽德坊)의 민가들이 철거되었다고 실록에 나온다. 당시 양덕방은 한성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였다. 양덕방은 오늘날 종로구 계동가회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니… 그렇다. 바로 북촌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평창동이나 성북동의 호화 저택 수십 채가, 대통령 딸이 분가하느라 철거되었다는 의미다. 이때 문종은 "다시 조사해 보니 5채만 허물었다고 하던데? 그리고 어차피 고위 관료들이라서 다른 집에 가서 살 수가 있는데 뭔 상관이냐?"라며 반박했다.

문종이 경혜공주의 저택을 크게 지은 건 어머니 없이 혼인하는 가여운 딸을 위해서, 문종이 딸바보여서도 있겠지만 궁궐에 홀로 남겨진 단종을 위해서 서로 (가까운 곳에 살며) 의지하라는 뜻도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재위기간이 길지 않지만, 이것 외에 문종이 권세를 부린 기사는 없기 때문.

2.4. 남동생의 즉위 후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승하하고, 남동생 단종이 즉위한다. 이때 경혜공주는 18살, 단종은 12살이었다. 단종은 궁을 떠나서 경혜공주의 집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의지할 가족이 1명도 없는 궁궐보다는 그래도 가까운 사이인 친누나의 집이 더욱 편하게 느껴진 모양.[8] 실록에서는 "주상께서 영양위의 집에서 지내시는 것을 편안해 하시니, 당장 수강궁으로 돌아오실 필요는 없다"는 의논도 나온다.# (단종 1년, 7월 10일(을축) 1번째 기사)

2.5. 계유정난

보통 국왕이 궁궐을 떠나서 사저에 장기간 지내면 경호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기 때문에, 신하들도 되도록 빨리 환궁할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도 이런 의논이 나올 정도면, 단종이 누나 경혜공주의 집에서 지내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숙부 수양대군이 이런 점을 노리고 경혜공주의 집을 노렸다는 것이다.

계유정난 당시에도 단종은 경혜공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양대군이 이끈 소수의 무뢰배들만으로도 경혜공주의 집을 장악하여 단종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고, 결국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단종은 세에 밀려 1455년 상왕으로 물러난다.

2.5.1. 고립된 상황

수양대군은 단종을 지지했던 혜빈 양씨[9], 금성대군 등을 귀양보냈고, 이 과정에서 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도 유배당했다. 정종은 처음엔 김포 통진으로 유배당했다.

동생은 억울하게 왕권을 다 뺏기고, 남편은 귀양간 상황에서 경혜공주는 "내가 아파서 중병에 들었다"고 세조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충분히 홧병이 들고도 남을 상황이긴 하지만 왜 굳이 세조에게 전했냐면 "자살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 당장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당장 자살하겠다'고 세조에게 암묵적 경고를 한 것이다. 명목상 양위였을 뿐, 사실상 쿠데타였던 탓에 민심이 안 좋았을 상황에 조카인 경혜공주마저 진짜 자살이라도 한다면 세조는 갖은 비난을 당할 것이 뻔했다. 만약 비관한 경혜공주가 급사하거나 자결이라도 하면, 사람들의 비난뿐만 아니라 세조 자신의 심적 부담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놀란 세조는 당일에 약과 어의를 보내주었고, 정종의 유배지를 강원도 영월군에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으로 옮겨주었다.

경혜공주가 병석에 누웠다는 사실은 단종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단종이 보기에는 못난 자신 때문에 누나가 쓰러진 셈이었다. 혹시라도 누나가 잘못될까 불안했던 단종은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영양위의 공주가 그 병을 내게 고해왔는데 그 뜻은 아마도 정종을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고 함으로써 정종을 석방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단종이 이런 요구를 한 시점은 정종의 유배지가 강원도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진 지 하루 만이었다. 16일의 조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항의였다.

단종의 입장에서는 이런 항의를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양위한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이런 요구를 했다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렇다고 자신이 가만히 있다가 누나가 정말 자결이라도 하면 어쩔 것인지, 이것저것 갈등했을 것이다. 그런 단종이 영양위의 석방을 요구했다는 것은 만약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자신도 누나를 따라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암시가 아니었을까.

단종의 전갈을 받은 세조는 "내가 명을 듣고 황공하여 드디어 의금부에 전지하여 정종을 놓아 보내게 하라"고 했다. 병석에 누워 벌인 경혜공주의 시위가 적중한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종이 유배지는 강원도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으로 바뀌었고, 양근으로 바뀐 다음날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2.5.2. 남편과 함께 유배를 가다

정종이 한양으로 돌아오자 경혜공주는 병석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정종은 공식적으로 죄를 사면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주가 아프다고 해서 임시로 한양에 왔을 뿐이었으므로, 공주의 병이 치료되었으니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삼사에서 이렇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곧 정종수원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세조는 경혜공주가 정종과 함께 수원으로 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정종에 대한 처벌은 처벌대로 하고 경혜공주에 대한 부담은 부담대로 떨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자 삼사에서는 정종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세조는 정종의 유배지를 수원에서 조금 먼 김포 지역의 통진으로 바꾸었다.

그때 당시 21살이던 경혜공주는 자청하여 유배된 남편을 따라서 통진까지 가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공주 신분이었고, 남편은 유배중이었지만 경혜공주 본인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도 종을 부리는 등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한 듯하다.

이처럼 유배지이기는 했으나 경혜공주는 남편과 함께 편안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2.5.3. 사육신 사건

세조가 즉위한 지 약 1년 후인 동왕 2년(1456) 6월 1일에 이른바 사육신 사건이 터진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삼문은 "상왕 단종도 거사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단종과 영양위 정종에게 몹시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의심하던 세조와 측근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그 싹을 자르고자 하였다.

유배 중이던 정종를 시종하던 종들은 모두 지방의 관노로 쫓겨났다. 그 뿐만 아니라 정종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혹시라도 정종과 상왕 단종 사이에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인맥과 자금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또한 정종의 유배지가 경기도 통진에서 전라도 광주로 바뀌었다. 정종을 상왕 단종이 머무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뜨려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세조는 "경혜공주가 원한다면 정종을 따라 광주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경혜공주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이렇게 해서 경혜공주는 남편을 따라 수원, 통진에 이어 전라도 광주까지 가게 되었다.

경혜공주는 아버지할아버지의 초상과 단종의 강제 양위 등 연이은 불행으로 인해 계속 각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없었는데, 경혜공주가 23살에 광주로 유배 후, 이후 25살이 되던 해에 혼인 9년 만에 유배지에서 첫 임신 후 장남 정미수를 출산했다.

광주에서는 통진에 비해 감시가 훨씬 심했다. 집 주변으로 담장과 난간이 높직하게 둘러처져 있었으며 감시병들도 많아졌다. 게다가 남종은 부릴 수 없었고 여종 3명만 부릴 수 있었다. 남종들을 시켜 무슨 음모를 꾸밀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군으로 유배당했고 세조 3년(1457년) 10월 그곳에서 죽는다. 단종 사후 정종에 대한 감시는 더더욱 강화되었다.

2.6. 계속된 불행

2.6.1. 동생남편의 죽음

정종의 유배지가 전라도 광주로 옮겨진 이듬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죽자, 정종은 공공연히 세조에게 반감을 품은 발언을 하고 다녔다. 결국 세조 7년(1461)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거열형을 당한다. 이렇게 도, 남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경혜공주는 당시 26살이었고, 남편이 사형당할 때 둘째(딸)를 임신 중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노비로 끌려간 경혜공주는 "나는 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 "나는 왕의 딸이다"라는 말은 세조에게 들으라는 말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야사연려실기술이나 순암집에서는 순천이나 장흥의 관비가 되었다는 식으로 나오나, 실제로는 공주의 신분을 끝까지 유지했다. 당장 실록에도 정종이 죽은 후 반년 만인 1462년 5월에 세조가 경혜공주에게 노비를 내려줄 것을 지시한 기록이 있고, 2012년에 발견된 경혜공주 사망 3일 전에 작성된 재산 상속에 관한 기록인 경혜공주 분재기(分財記)에서 그러한 야사가 허구라는 게 확실히 입증되었다. 관련기사

남편은 역모죄로 죽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연좌제로 경혜공주와 두 자녀는 노비가 되어야 했지만, 공주와 두 자녀는 모두 왕족의 신분이라 노비로 전락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옹주가 반역에 관련되었어도 직위만 박탈했을 뿐 노비로 전락시킨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로 실록에도 "경혜공주의 자식을 죄인의 자식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기록만 나오는 걸 봐서는, 처음부터 연좌되지 않았다고 보는게 맞다.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7일 을축 7번째 기사 / 의금부에 정종의 처가 내려갈 때에는 교자를 사용하게 하도록 명하다."라는 기록부터 정종의 처로 호칭이 바뀐 부분이 있어서 저 시점에 공주 작위를 박탈당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록의 같은 항목의 뒷부분에 '정종의 처'는 경혜공주를 이른다고 기록돼 있는 걸 보면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공주나 옹주를 누구 누구의 처라는 호칭으로 기록된 게 몇 차례 나오는 걸 보면 더 그렇다. 더구나 야사에서도 정종이 죽은 후 경혜공주가 관비로 전락했다고 나오지 정종이 살아서 귀양을 갈 시점에는 반역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귀양을 가는 상황이어서 경혜공주가 남편을 따라 귀양길을 따라가는 저 시기에 그녀의 공주 작위를 박탈할 명분도 없었다.

2.7. 비극적인 삶

2.7.1. 비구니가 되다

실록에서는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10] 당시 몹시 가난하여 세조가 노비를 돌려주고 내수사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게 했다는 기록이 사관에 의해 작성되었다.

세조와 정희왕후도 죽은 단종과 노비가 된 경혜공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 해에 바로 서울로 불러들였으며, 정희왕후가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궁궐로 데려와 길렀고, 경혜공주는 딸을 출산한 이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경혜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친동생 단종이 왕권을 뺏긴 것만으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동생은 폐서인된 것도 모자라 숙부에게 살해당하고, 남편은 역시 죄인으로서 역모죄로 거열형을 당했으니 삶의 미련은 커녕 아예 살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세조의 도움으로 살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시 3살, 1살 된 자신의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다. 어머니로서 어린 자녀들을 두고 죽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세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경혜공주는 아이들을 위해 원수인 세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같이 궁궐에 가서 차마 원수인 세조를 만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에, 경혜공주로서는 아이들만 궁궐에 보내고 혼자 비구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수의 소굴이나 다름없던 궁궐에 자식들을 맡긴 것은, 어머니 현덕왕후의 친정노비이며 경혜공주의 유모였던 백어리니의 도움이 컸다. 백어리니는 당시에 자을산군유모였는데 정희왕후 윤씨와 함께 "자식들을 위해 왕을 용서해야 한다" 라고 설득했을 거라고 추측된다.

딸을 출산한 후, 경혜공주는 27살의 나이에 정업원에 출가했다.

2.7.2. 야사

정종의 집안인 해주 정씨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종 처형 당시 경혜공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조는 "아이가 아들이면 목졸라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했는데,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정희왕후가 손을 써서 여장을 시키고 궁에서 키운다. 아이가 자라면서 남자애 티가 나자 세조가 이상하게 여겼고, 그제서야 정희왕후는 사실을 고백했다.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남자아이로 기르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기록에 보면 당시 정미수는 3살이었고 경혜공주가 임신하고 있던 아이는 딸이었다. 아마도 그런 소문이 돌만큼 민간 여론이 흉흉했고 "세조가 저 아들도 죽이고 뱃속의 아이도 죽일거다"라는 소문과 사실이 합쳐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어쨌든 정미수는 백어리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과 같이 자랐다.

2.7.3. 원수를 만나다

세조 11(1465년) 4월 1일, 경혜공주가 출가한지 4년 후, 아들 정미수가 10살이 되던 해에 경혜공주는 정미수와 함께 세조를 알현한다.

왕실의 법도대로라면 왕과 왕세자가 아닌 남자는 10살이 되면 궁에서 나가야 했고, 당시 세조는 피부병이 가장 악화될 시점이었다. 아마 정희왕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지금 왕을 찾아가면 자식들을 면천을 시켜줄거다"라고 말했으리라 추측한다. 경혜공주로서는 자식들을 위해 철천지원수 같은 세조를 찾아가 담판을 짓기로 결심한다.

예종실록에서는 "경혜공주가 정종의 아들을 데리고 왕을 알현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예종)로 하여금 다시 죄를 되풀이 되지않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 내용은 모두 실록이 아니라 야사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정미수가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경혜공주가 세조를 찾아간 것은 사실로 추측된다.

2.8. 한 맺힌 삶의 끝맺음

결국 경혜공주는 세조에게 지원받은 집과 노비를 사용하면서, 속마음이야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세조의 세상을 인정하고, 아들과 함께 세조를 문안한다.

경혜공주가 35살이 되던 해, 예종이 갑작스럽게 죽고 예종의 조카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다. 훗날의 성종이다.

성종 즉위 후 정미수가 15살이 되던 해, 돈녕부 벼슬을 하게 된다. 이때 정미수죄인 정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맹렬한 반대 상소가 올라오지만, 성종은 세조의 뜻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정미수를 파직시키지 않았다. 경혜공주를 동정하고 세조의 피맺힌 업보를 씻고 싶어하던 정희왕후 역시 정미수를 지원했다.

어린 아들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며 생활이 궤도에 오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던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인지, 정미수가 돈녕부 벼슬을 시작한 지 약 7개월쯤 후 경혜공주는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친다. 경혜공주가 죽은 다음 날 성종은 호조에 명해 이런저런 물자를 내려주라는 명을 내린다.[11]

3. 가족관계

4. 경혜공주의 묘

경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하고 있다. 공주의 묘 옆에 작은 봉분이 하나 있는데 이건 남편 정종의 단(가묘)이다. 그런데 이 묘는 문화재나 도 기념물 등으로 지정되지 않아서 찾기가 매우 어렵다. 가보면 보통 유명인사 묘역 주변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나 안내석도 하나 없을 정도고, 가 보면 관리 상태도 상당히 엉망이다. 그래서 묘 입구에 있는 공주 내외의 사당인 충민사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아무래도 드라마 공주의 남자 이전에는 대중적으로 관심 밖이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인 듯. 공주의 묘 바로 아래에 성종의 서자인 이성군의 묘가 있는데, 이성군묘로 가는 이정표는 있어도 경혜공주묘로 가는 표시는 없다.

이들의 묘가 있는 산 주변에는 조선 왕족들의 묘가 많다. 세종의 남동생인 성녕대군소현세자의 막내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묘가 공주의 묘 건너편에 있다. 덧붙여 이석견의 묘와 성녕대군의 묘 사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엽의 명장인 최영의 묘가 있다. 사실 이 주변 묘역은 다른 왕족들 묘역보다 최영 장군 묘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경혜공주의 묘를 찾아가 보고 싶다면 최영 묘를 먼저 찾으면 된다. 이성군 묘역과 경혜공주 묘역이 최영 묘역 맞은편 야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5. 기타

세간에 경혜공주의 미모가 조선 왕녀들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평판을 얻었다는 것과 미모가 아름다워 장안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등 이처럼 빼어난 미모였다는 얘기가 퍼져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에 대한 얘기는 실록이나 각종 야사, 설화집 또는 묘지명에서도 일절 기록되지 않았고, 또한 경혜공주의 외모에 관한 얘기는 어떠한 기록에서도 언급되는 바 없어 실제로 경혜공주의 외모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경혜공주가 미인이었다는 설이 나돌았던 이유는 아버지인 문종이 당대 뛰어난 미남으로 유명하여 그의 딸인 경혜공주도 아버지 문종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상당한 미인이었을거라고 추측되기 때문에 그러한 얘기들이 나돌았을 수도 있다. 확률적으로 장녀의 외모는 부친의 외모를 닮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어쩌면 경혜공주도 상당한 미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6. 대중매체

단종과 관련된 사극들에서 남편 영양위 정종과 함께 조연으로 등장한다. 다만, 단종을 지키려 노력하나 실패하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적 서사가 혜빈 양씨, 정순왕후 송씨 등의 단종을 지키려 노력하는 불쌍한 여인들과 겹친다는 점이 문제. 특히 혜빈의 배역에 수양대군과 비슷한 나이의 중년 여배우가 캐스팅되면 단종은 물론 누나 경혜공주까지도 많아야 20대 초반 이하의 어린 배우를 섭외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을 잃고 어린 동생을 잃는 비극적 서사를 몰입감 있게 구축하는데에 한계가 있고 혜빈과의 비중 조절도 어렵기 때문에 주연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적다.

1980년 파천무에서 지미옥이 연기했다. 아버지가 흉서하자 신하들과 함께 남동생에게 어서 왕이 될 것을 간청하고 단종은 눈물을 흘리며 누나에게 "누님... 제가 꼭 왕이 되어야 하나요?"라고 한다.

1990년 파천무에서 김민희가 연기했다.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전소희가 연기했다.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김미주가 연기했다.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홍수현이 연기했다.[12] 여기서는 주연급으로 등장하는데, 뛰어난 연기력과 실제 경혜공주의 비극적인 운명 때문에 메인 여주인공보다 감정이입이 더 잘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남편 영양위[13]와의 애절한 사랑[14]과 세조의 횡포로 몰락해 가면서도 공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혜공주가 최초로 부각된 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시청률은 평균 20%대. 조연주연을 발라버린 케이스

7. 관련 항목


[1] 옆에 있는 큰 비석은 남편 영양위 정종의 가묘이다.[2] 《경혜공주묘지명》에서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공주를 을묘년(1435)에 낳았다고 적혀있다.[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29[4] 세종이 언급한 세자의 딸은 권씨의 차녀 경혜공주로, 권씨의 장녀는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사망하였다. 그리고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처첩들 중 유일하게 권씨만 자식을 낳았었다.[5]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2월 28일 기축 1번째 기사 참고[6] 강원도 평창군의 그 평창이 맞다. 조선 초기까지는 군주 등을 봉작할 때 지역 이름을 붙였다.[7] 문종의 소생으로는 사칙 양씨(司則楊氏)의 딸로 강자순에게 하가한 경숙옹주가 있지만 후궁 소생이므로 적자는 아니다.[8] 당시는 정순왕후가 책봉되기 전이었다.[9] 세종후궁. 일찍 어머니를 잃은 단종의 유모역할을 했지만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은 할 수 없었다.[10] 성종 5년 1월 1일 4번째 기사[11] 아들 정미수의 효행도 나오니 찾아보자.[12] 경혜공주를 연기했던 홍수현은 공주의 남자 종영 이후에 곧바로 샐러리맨 초한지 촬영을 시작했는데 빠르게 복귀했던 이유는 너무 슬프고 비극적인 배역이라 감정 소모가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3] 이민우가 연기했으며 정말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줬다.[14] 실제 경혜공주와 영양위의 비극적인 운명과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의 조화 덕분에 메인 커플보다 감정이입이 더 잘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정종이 거열형을 당하기 직전 서로 눈을 맞추며 애써 웃음 짓는 모습이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