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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세자 이향의 폐빈 순빈 봉씨 | 純嬪 奉氏 | |||
출생 | 연대 미상 | ||
사망 | 연대 미상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빈 | ||
1429년 11월 20일 ~ 1436년 12월 1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하음 봉씨 | |
부모 | 부친 - 봉려(奉礪, 1375 ~ 1436) 모친 - 미상 | ||
배우자 | |||
봉작 | 순빈(純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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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자 세종의 두 번째 맏며느리. 세종이 밝힌 폐위 이유 중 궁녀와 동침했다는 내용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이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전술한 내용에 묻혀 많이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왕비와 세자빈에게도 후궁처럼 비호(妃號), 빈호(嬪號)를 내려주던 관습[1]에 따라 빈호를 받은 마지막 세자빈이다.[2] 따라서 그 다음 세자빈인 권씨부터는 빈호가 없었다. 왕비와 세자빈에게도 호를 내리던 관습은 그녀가 세자빈이던 시기인 1432년(세종 14년)에 폐지되어 그녀의 공식 작호는 1432년까지만 '순빈'이었고 그 이후에는 그냥 '왕세자빈'이었다.
더불어 문종의 부인들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정실부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세자빈으로 있던 기간은 7년으로, 휘빈 김씨의 2년, 세자빈 권씨의 5년보다 훨씬 길다. 다만 현덕왕후는 세자빈으로 책봉되기 4년 전에 이미 세자의 후궁으로 입궁한 후 아이까지 둘이나 낳은 상태였다.
2. 생애
2.1. 가계
친정은 하음 봉씨로, 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지낸 봉려(奉礪)이고 할아버지는 봉유례(奉由禮)다. 봉유례의 어머니 행주 기씨는 기원(奇轅)의 딸이며 기황후와 고려 말 대표 권문세족이었던 기철의 조카다.봉려의 조카, 즉 그녀에게는 사촌이 되는 봉여해(奉汝諧)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었다.
2.2. 세자빈이 되다
이전 세자빈이던 휘빈 김씨가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상한 술법을 쓴 것이 발각되어 세자빈의 체통을 잃었다는 이유로 폐출된 후 세종 11년 10월 15일에 두 번째 세자빈으로 뽑혀 들어와 순빈(純嬪)으로 봉해졌다.후보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한 후 용모를 보고 세자빈을 뽑았다.
이제 동궁(東宮)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에는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不可)할 것이다. 나는 부모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揀擇)하고자 하나, 옛 예법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므로, 창덕궁(昌德宮)에 모이게 하고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시녀(侍女)와 효령대군(孝寧大君)과 더불어 뽑게 해야겠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맹사성·변계량·신상·윤회 등은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허조만 유독 "불가하옵니다. 만약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간택한다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德)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곧 그 덕(德)을 알 수 있으리오.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容貌)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예선(豫選)해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 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모두가 "좋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8월 4일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8월 4일
야사 중에는 휘빈이 박색이었기 때문에 세자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보아 순빈을 뽑을 때는 외모를 보고 뽑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반대로 외모만 보고 뽑았기 때문에 휘빈이 박색으로 알려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것은 실록에도 기술되어 있듯 군신을 막론하고 그녀의 외모에 만족하여 간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왕실의 비빈 중 드물게 공식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된 셈이다.
그러나 그녀도 문종과 금슬이 좋지 않았다. 문종은 세종에게 "내가 순빈을 총애한다면 투기하고 사나워져서, 비록 칼날이라도 또한 가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뜻대로 된다면 옛날의 한나라 여후라도 또한 능히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3. 폐위 이유
조선왕조실록에 그녀의 이전 기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내용은 세종이 세자빈을 폐위시키며 이유를 밝힌 두 기사에 들어있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무자 두 번째 기사,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1월 7일 무술 첫 번째 기사."아마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능히 자기 몸을 반성하지 못하면서, 다만 털을 불어 헤치고 남의 허물만을 찾아내려고 애써서 폐척(廢斥)을 잘 행한다. ’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란 경상(經常)을 지킬 수도 있고 또한 권도(權道)를 따를 수도 있으니, 어느 한 가지에만 구애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1월 7일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1월 7일
세종이 첫 번째로 알린 순빈의 폐위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문종의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한 세종의 명으로 문종이 3명의 승휘(承徽)[3]를 들였는데 순빈은 성질이 시기하고 질투함이 심하여서 사랑을 독차지 못한 일로 오랫동안 원망과 앙심을 품었다.[4] 그러던 중에 자신보다 늦게 입궁한 권승휘가 문종의 첫번째 아이[5]를 임신하자 순빈은 분개하고 원망하여 항상 빈궁 소속 궁인들에게 "권승휘가 아들을 낳으면 우리는 쫓겨나야 할 거야."라고 하였고 때로는 소리내어 울기도 하니 그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렸다. 이에 세종이 순빈을 불러서 "세자가 아들을 낳으면 인지상정으로 기뻐할 일 아니냐"고 타일렀지만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6]
- 궁내의 일을 맡아 보던 늙은 여종이 순빈에게만 이야기하고 세자의 의복, 신, 띠, 속옷, 적삼 등을 부모님 집으로 몰래 보냈다. 세종이 이를 알고 어버이를 위한 것이라 하여 책망하지 않고 "세자의 속옷 따위로 어버이의 옷을 할 수 없다"는 것만 꾸짖었다.
- 세종이 항상 문종에게 "정실인 순빈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 것만큼 귀한 일이 없다. 순빈을 멀리하지 말라."고 하여 문종이 한동안 순빈과 동침하였다. 순빈이 임신했다고 하여 온 궁중이 기뻐했는데 1달 뒤 유산했다고 하였다. 순빈은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했는데 여종에게 가서 이것을 보게 하니 이불 속에 아무 것도 없었고 임신은 거짓말이었다.[7]
- 시녀들의 변소에 있는 틈으로 외간 사람(外人)을 엿보았다. 인터넷에 순빈이 시녀들의 용변 보는 모습을 엿보았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데 오역이 무분별하게 퍼진 것이다.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궁으로 들어온 후 답답해서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그랬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셈이다.
- 바느질을 좋아해 환관들의 호슬[8], 주머니, 자루 같은 것을 본인이 직접 만들었는데 문제는 재료를 다 써버린 바람에 세자의 생일에 바칠 물건을 만들 수 없게 되었고 그러자 작년에 바친 물건을 새 것처럼 속여서 바쳤다.
- 궁중의 물건이나 음식을 덜어서 부모님 댁으로 보내고 싶다고 하니 세자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자기가 먹다 남은 음식을 친정으로 보내자 그렇게 못하게 했는데 이후에는 세자 몰래 친정으로 보냈다.
-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을 사랑하여 항상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궁인들이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함께 한다'고 수근거렸다. 어느 날 소쌍이 궁궐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갑자기 "네가 정말 빈과 함께 자느냐?"라고 묻자 소쌍이 깜짝 놀라서 "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소쌍은 다른 사람에게 "지금 상황이 매우 무섭다"고 이야기하였다. 소쌍과 여종 단지가 서로 좋아하였는데 순빈은 소쌍이 단지를 만나지 못하도록 종을 시켜 감시하였다. 궁중이 떠들썩해지자 세종이 소쌍을 불러서 물으니 소쌍은 순빈과 같이 잔 일을 다 이야기하였다. 세종이 순빈을 불러 물으니 부정하였지만 정황이 너무 명확했다.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 것과 벽 틈으로 엿본 따위의 일은 모두 다 자복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일은 모두 경하므로 만약 소쌍의 사건만 아니면 비록 내버려 두어도 좋겠지마는, 뒤에 소쌍의 사건을 듣고난 후로는 내 뜻은 단연코 폐하고자 한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세종은 10여일 뒤 대신들에게 순빈을 폐위한 이유를 부연하여 알렸다. 세종은 순빈이 실덕(失德)한 일이 매우 많은데 전번에는 낱낱이 들어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 후 지금 나머지 일을 다 말하니 대신들에게 함께 알아두라고 하였다.
- 휘빈을 폐위시킨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여자 스승으로 하여금 순빈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는데 순빈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며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 하고 학업 받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열녀전을 가르치게 한 것은 나의 명령인데도 감히 이같이 무례한 짓을 하니, 어찌 며느리의 도리에 합당하겠는가. 또 생각하기를, 부인이 글을 배워서 정사에 간여하는 길을 열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 하여 다시 순빈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다.
- 늙은 여종 고미에게 밤마다 '할미는 어찌 내 뜻을 알지 못하오.'라고 하였는데, 세자를 불러오라는 뜻이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떳떳한 정리이지마는······ 매일 밤마다 세자를 보고자 하니, 어찌 부인의 도리에 적합하겠는가.
- 세자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궁궐에 돌아와 뜰을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는데, 빈의 궁에 가까이 이르니, 순빈이 지게문으로 바라보고 말하기를, ‘저 분이 왜 안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 걷고 있을까.’ 하면서, 자기 있는 곳에 들어오기를 바랐으니, 이것도 또한 상스러운 일이다.
-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며,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친정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며, 또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하니, 이것이 어찌 빈이 마땅히 할 짓이겠는가.
- 내가 중궁과 함께 항상 세자를 가르쳐서 마땅히 빈궁을 접대하도록 했는데, 세자가 며칠 동안 왕래하였다가 그 후에 드물게 가매, 순빈이 노래를 지어 궁궐의 여종으로 하여금 이를 부르게 하니, 그 대개는 세자를 사랑하는 내용이었다.[9]
-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술을 어머니 집에 보내므로 세자가 알고 이를 금지시키니, 술을 모두 안으로 들여오게 하고 말하기를, "이 술은 내 몫인데 이것을 집에 보내지 못할 것이면 내가 스스로 마셔야 되겠다." 하면서, 상이 1백 일을 지나지 않았는데도 평상시와 같이 술을 마셨다.
- 순빈은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하여, 혹 어떤 때에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니, 어진 부인이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 세자가 항상 말하기를, "내가 순빈을 총애한다면 투기하고 사나워져서, 비록 칼날이라도 또한 가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뜻대로 된다면 옛날의 한나라 여후라도 또한 능히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후세에는 소쌍과의 동성애가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이 때문에 폐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10] 그 외에도 조선에서 미덕으로 여기는 얌전하고 자애로운 세자빈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수 차례 한 탓이었다.
2.4. 이후
세종은 순빈을 폐서인하고 궁 밖으로 내친 후 세자의 딸을 낳은 권승휘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야사에 따르면 친정으로 돌아간 순빈을 아버지 봉여가 자결하게 하고 본인도 자결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며 봉여는 딸이 폐위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야사가 거의 정사처럼 널리 퍼져 있다. 비슷하게 궁녀 소쌍과 단지도 사형당했단 얘기가 야사로 떠돌지만 레즈비언 항목에 서술되어 있듯 정식 처벌은 궁녀복을 벗는 정도로 끝났다. 아마 이들도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실록에는 순빈 봉씨에 대한 이야기만 실려 있고 두 궁녀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는 서술되어 있지 않기에 추측일 뿐이다.
3. 유사 사례
왕위 후계자의 부인이 여성과 불륜한 또 다른 케이스로 지구 반대편 신성 로마 제국 요제프 2세의 황태자 시절 첫 부인인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가 있는데 이쪽은 그 상대가 남편의 여동생, 즉 시누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여서 충격이 2배였다.차이가 있다면 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에게 한결같이 사랑받았고 21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모범 황태자비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전말은 그녀가 죽은 뒤 한사코 재혼을 거부하던 요제프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이사벨라에게 받은 연서를 보여주며 알려졌다.
4. 매체에서
* KBS 사극 대왕 세종: 배우는 여민주. 세자와의 첫 만남부터 씨익 웃어 보이는 등 당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쌍과 같이 있는 모습을 세자에게 들켰으나 세자는 묻으려고 했다.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가면서 세자가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사실을 밝히고 출궁한다.
- 고우영 수레바퀴: 여기선 친정아버지 봉여가 순빈에게 "이 애비는 알아서 하겠는데, 그래, 따님은 어찌하겠는가?" 라는 말을 하여 순순히 자결을 권유하고 자신도 목을 매는 것으로 그려냈다. 정사인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봉여는 딸보다 먼저 병사하였지만 야사의 명예살인 설을 적당히 어레인지했다.
- 연극 <마리화나>: 비교적 밝은 분위기에 은근히 개그씬도 많지만 관객에게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끔도 하는 작품이다.
- 소설 <채홍>: 2011년작. 미실의 작가로 유명한 소설가 김별아가 쓴 소설이다. 참고로 '채홍'은 무지개라는 뜻이다.[11] 봉씨의 이름을 '봉난'으로 설정했다. 2013년에 이 소설의 판권이 소나무 픽쳐스에 팔려서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엎어졌는지 통 소식이 없다.# 순빈을 소재로 한 창작물 중 대표작이다. 순빈의 동성애 사건 뒤에 있는 단지, 소쌍, 상궁들과 나인들, 내시들, 남편인 세자 이향, 순빈의 친정 가족들의 사연과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주인공인 만큼 매우 동정적으로 묘사한다.
- 웹툰 신석기녀: 주인공 강숙희가 소쌍으로 나오는데 모시는 세자빈이 이 인물이다. 여기선 세자빈이 병에 걸리자 남의 병을 고치는 치유의 키스를 하는데 그걸 세자가 목격하여 소쌍인 숙희는 참형당하고 세자빈은 쫓겨나는 것까지는 같다. 다만 이 작품에선 세자빈이 동성애 성행위를 했다는 묘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성격도 순진하게 나오고 야사의 내용을 채택해 아버지 봉여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 웹툰 조선왕조실톡: 11~ 12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0화에서 휘빈 김씨의 폐출로 트라우마가 생긴 시아버지 세종이 이번 세자빈 간택에는 얼굴보고 뽑으라고 말하고 허조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예쁘기라도 하면 세자가 눈길이라도 더 줄지 모른다는 세종의 말 때문에 결국 외모만 보고 순빈 봉씨가 간택된다. 그만큼 엄청난 미형으로 나오지만 외모와 달리 온갖 만행을 저질러[12] 남편인 문종을 이전의 휘빈 때보다도 더 질리게 한다. 게다가 문종은 자신이 일반 백성이였다면 봉씨의 만행을 참고 받아주겠지만 차기 왕비인 세자빈이 저 따위로 굴고있으니 장차 국모가 되면 더 심해질 거라며 강력하게 봉씨를 거부한다.[13] 결국 문종의 후궁 중 하나인 승휘 권씨가 임신하자 질투하고 궁녀인 소쌍에게 집착하다가 역사대로 소쌍과의 동성애가 발각당해 폐위된다.
[1] 왕에 한해 일부다처제였던 고려 왕실의 관습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2] 다만 그 이후의 세자빈들도 남편인 세자가 즉위 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빈호를 받았다.(예: 수빈 한씨, 덕빈 윤씨, 혜빈 홍씨 등)[3] 세자의 후궁[4] 칠거지악 참조[5] 딸이었으며 아기 때 요절하여 작호를 받지 못하였다. 경혜공주는 그 뒤에 출생했다.[6] 이때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내외는 세자(문종)에게도 "후궁에게서 자식을 본들, 정궁에게 본 자식만 하겠느냐? 순빈을 가까이 해서 어서 적자녀를 낳아라."라고 공평하게 타일렀다고 한다.[7] 일부러 관심을 받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설도 있고 너무 임신을 하고 싶어하다 상상임신을 겪은 거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실제로 임신을 했던 게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했지만.[8] 護膝, 조선 시대에 남자들이 무릎에 두르던 보호대. 테두리를 다른 색으로 장식한 천에 수를 놓았으며, 무릎에 대고 두른 다음 끈으로 묶었다.[9] 현대적 기준으로는 여성이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이 별 일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관념상 양반가의 여성이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음란한 행위였다.[10] 그러나 남편인 세자에게도 집착하는 기색을 보인 것을 보면 순빈 본인은 이성애 성향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소쌍과의 관계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그를 통해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고 저지르는 경우도 많아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 및 지향과는 상관없이 발생할 수 있다. 소쌍이 순빈의 부름을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최소한 소쌍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11] 무지개 깃발은 동성애자들의 상징 중 하나다.[12] 세종이 내린 열녀전 집어던지기, 몰래 간식 먹기, 늘 술마시기, 질투심으로 궁녀들을 폭행하기. 문종이 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에게 "와이프한테 밟힌 궁녀만 연병장 한바퀴 입니다. 저랑 스치기만 해도 직접 팬대요. 그것도 누구 시키지도 않고 자기가 직접 팬대요. 뭡니까? 궁궐 일진짱이에요?'라고 하소연할 정도.[13] 문종 왈 "제가 백성이었으면 그냥 받아주고 살 수 있어요. 근데 쟤 세자빈이잖아요. 저 왕되면 쟤가 왕비잖아요. 지금도 저러는데 권력까지 쥐면 대체 얼마나 칼부림을 할 지. 싫습니다. 안돼요." 어떻게든 장남과 맏며느리의 사이를 개선시키려던 세종도 이걸 듣고 "내 죄다. 너랑 내 죄야...."라고 한탄하며 결국 후사를 잇기 위해 문종에게 측실 세 명을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