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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2:06:43

순빈 봉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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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자 이향의 폐빈
순빈 봉씨 | 純嬪 奉氏
출생 연대 미상
사망 연대 미상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29년 11월 20일 ~ 1436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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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하음 봉씨
부모 부친 - 봉려(奉礪, 1375 ~ 1436)
모친 - 미상
배우자 문종 (1329년 혼인 / 1436년 이혼)
봉작 순빈(純嬪)
}}}}}}}}} ||
1. 개요2. 생애
2.1. 가계2.2. 세자빈이 되다2.3. 폐위 이유2.4. 이후
3. 유사 사례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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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자 세종의 두 번째 맏며느리. 세종이 밝힌 폐위 이유 중 궁녀와 동침했다는 내용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이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전술한 내용에 묻혀 많이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왕비와 세자빈에게도 후궁처럼 비호(妃號), 빈호(嬪號)를 내려주던 관습[1]에 따라 빈호를 받은 마지막 세자빈이다.[2] 따라서 그 다음 세자빈인 권씨부터는 빈호가 없었다. 왕비와 세자빈에게도 호를 내리던 관습은 그녀가 세자빈이던 시기인 1432년(세종 14년)에 폐지되어 그녀의 공식 작호는 1432년까지만 '순빈'이었고 그 이후에는 그냥 '왕세자빈'이었다.

더불어 문종의 부인들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정실부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세자빈으로 있던 기간은 7년으로, 휘빈 김씨의 2년, 세자빈 권씨의 5년보다 훨씬 길다. 다만 현덕왕후는 세자빈으로 책봉되기 4년 전에 이미 세자의 후궁으로 입궁한 후 아이까지 둘이나 낳은 상태였다.

2. 생애

2.1. 가계

친정은 하음 봉씨로, 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지낸 봉려(奉礪)이고 할아버지는 봉유례(奉由禮)다. 봉유례의 어머니 행주 기씨는 기원(奇轅)의 딸이며 기황후와 고려 말 대표 권문세족이었던 기철의 조카다.

봉려의 조카, 즉 그녀에게는 사촌이 되는 봉여해(奉汝諧)는 사육신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었다.

2.2. 세자빈이 되다

이전 세자빈이던 휘빈 김씨가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상한 술법을 쓴 것이 발각되어 세자빈의 체통을 잃었다는 이유로 폐출된 후 세종 11년 10월 15일에 두 번째 세자빈으로 뽑혀 들어와 순빈(純嬪)으로 봉해졌다.

후보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한 후 용모를 보고 세자빈을 뽑았다.
이제 동궁(東宮)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에는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不可)할 것이다. 나는 부모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揀擇)하고자 하나, 옛 예법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므로, 창덕궁(昌德宮)에 모이게 하고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시녀(侍女)와 효령대군(孝寧大君)과 더불어 뽑게 해야겠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맹사성·변계량·신상·윤회 등은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허조만 유독 "불가하옵니다. 만약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간택한다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德)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곧 그 덕(德)을 알 수 있으리오.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容貌)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예선(豫選)해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 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모두가 "좋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8월 4일

야사 중에는 휘빈이 박색이었기 때문에 세자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보아 순빈을 뽑을 때는 외모를 보고 뽑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반대로 외모만 보고 뽑았기 때문에 휘빈이 박색으로 알려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것은 실록에도 기술되어 있듯 군신을 막론하고 그녀의 외모에 만족하여 간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왕실의 비빈 중 드물게 공식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된 셈이다.

그러나 그녀도 문종과 금슬이 좋지 않았다. 문종은 세종에게 "내가 순빈을 총애한다면 투기하고 사나워져서, 비록 칼날이라도 또한 가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뜻대로 된다면 옛날의 한나라 여후라도 또한 능히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3. 폐위 이유

조선왕조실록에 그녀의 이전 기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내용은 세종이 세자빈을 폐위시키며 이유를 밝힌 두 기사에 들어있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무자 두 번째 기사,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1월 7일 무술 첫 번째 기사.
"아마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능히 자기 몸을 반성하지 못하면서, 다만 털을 불어 헤치고 남의 허물만을 찾아내려고 애써서 폐척(廢斥)을 잘 행한다. ’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란 경상(經常)을 지킬 수도 있고 또한 권도(權道)를 따를 수도 있으니, 어느 한 가지에만 구애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1월 7일

세종이 첫 번째로 알린 순빈의 폐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 것과 벽 틈으로 엿본 따위의 일은 모두 다 자복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일은 모두 경하므로 만약 소쌍의 사건만 아니면 비록 내버려 두어도 좋겠지마는, 뒤에 소쌍의 사건을 듣고난 후로는 내 뜻은 단연코 폐하고자 한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세종은 10여일 뒤 대신들에게 순빈을 폐위한 이유를 부연하여 알렸다. 세종은 순빈이 실덕(失德)한 일이 매우 많은데 전번에는 낱낱이 들어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 후 지금 나머지 일을 다 말하니 대신들에게 함께 알아두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후세에는 소쌍과의 동성애가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이 때문에 폐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10] 그 외에도 조선에서 미덕으로 여기는 얌전하고 자애로운 세자빈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수 차례 한 탓이었다.

2.4. 이후

세종은 순빈을 폐서인하고 궁 밖으로 내친 후 세자의 딸을 낳은 권승휘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친정으로 돌아간 순빈을 아버지 봉여가 자결하게 하고 본인도 자결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며 봉여는 딸이 폐위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야사가 거의 정사처럼 널리 퍼져 있다. 비슷하게 궁녀 소쌍과 단지도 사형당했단 얘기가 야사로 떠돌지만 레즈비언 항목에 서술되어 있듯 정식 처벌은 궁녀복을 벗는 정도로 끝났다. 아마 이들도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실록에는 순빈 봉씨에 대한 이야기만 실려 있고 두 궁녀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는 서술되어 있지 않기에 추측일 뿐이다.

3. 유사 사례

왕위 후계자의 부인이 여성과 불륜한 또 다른 케이스로 지구 반대편 신성 로마 제국 요제프 2세의 황태자 시절 첫 부인인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가 있는데 이쪽은 그 상대가 남편의 여동생, 즉 시누이마리아 크리스티나여서 충격이 2배였다.

차이가 있다면 이사벨라는 남편 요제프에게 한결같이 사랑받았고 21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모범 황태자비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전말은 그녀가 죽은 뒤 한사코 재혼을 거부하던 요제프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이사벨라에게 받은 연서를 보여주며 알려졌다.

4. 매체에서

파일:/listimglink/6/2008090810190964473_4.jpg
* KBS 사극 대왕 세종: 배우는 여민주. 세자와의 첫 만남부터 씨익 웃어 보이는 등 당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쌍과 같이 있는 모습을 세자에게 들켰으나 세자는 묻으려고 했다. 하지만 비밀이 새어나가면서 세자가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사실을 밝히고 출궁한다.

[1] 왕에 한해 일부다처제였던 고려 왕실의 관습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2] 다만 그 이후의 세자빈들도 남편인 세자가 즉위 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빈호를 받았다.(예: 수빈 한씨, 덕빈 윤씨, 혜빈 홍씨 등)[3] 세자의 후궁[4] 칠거지악 참조[5] 딸이었으며 아기 때 요절하여 작호를 받지 못하였다. 경혜공주는 그 뒤에 출생했다.[6] 이때 세종대왕소헌왕후 내외는 세자(문종)에게도 "후궁에게서 자식을 본들, 정궁에게 본 자식만 하겠느냐? 순빈을 가까이 해서 어서 적자녀를 낳아라."라고 공평하게 타일렀다고 한다.[7] 일부러 관심을 받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설도 있고 너무 임신을 하고 싶어하다 상상임신을 겪은 거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실제로 임신을 했던 게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했지만.[8] 護膝, 조선 시대에 남자들이 무릎에 두르던 보호대. 테두리를 다른 색으로 장식한 천에 수를 놓았으며, 무릎에 대고 두른 다음 끈으로 묶었다.[9] 현대적 기준으로는 여성이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이 별 일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관념상 양반가의 여성이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음란한 행위였다.[10] 그러나 남편인 세자에게도 집착하는 기색을 보인 것을 보면 순빈 본인은 이성애 성향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소쌍과의 관계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그를 통해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고 저지르는 경우도 많아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 및 지향과는 상관없이 발생할 수 있다. 소쌍이 순빈의 부름을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최소한 소쌍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11] 무지개 깃발은 동성애자들의 상징 중 하나다.[12] 세종이 내린 열녀전 집어던지기, 몰래 간식 먹기, 늘 술마시기, 질투심으로 궁녀들을 폭행하기. 문종이 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에게 "와이프한테 밟힌 궁녀만 연병장 한바퀴 입니다. 저랑 스치기만 해도 직접 팬대요. 그것도 누구 시키지도 않고 자기가 직접 팬대요. 뭡니까? 궁궐 일진짱이에요?'라고 하소연할 정도.[13] 문종 왈 "제가 백성이었으면 그냥 받아주고 살 수 있어요. 근데 쟤 세자빈이잖아요. 저 왕되면 쟤가 왕비잖아요. 지금도 저러는데 권력까지 쥐면 대체 얼마나 칼부림을 할 지. 싫습니다. 안돼요." 어떻게든 장남과 맏며느리의 사이를 개선시키려던 세종도 이걸 듣고 "내 죄다. 너랑 내 죄야...."라고 한탄하며 결국 후사를 잇기 위해 문종에게 측실 세 명을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