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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조 왕대비 왕대비 김씨 | 王大妃 金氏 |
건릉 전경 | |||
출생 | 1753년 12월 25일(음력 12월 13일) | ||
조선 한성부 가회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
사망 | 1821년 3월 29일(음력 3월 9일) (향년 69세) | ||
조선 한성부 창경궁 자경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건릉(健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손빈 | ||
1762년 2월 15일 ~ 1776년 4월 16일 | |||
조선 왕비 | |||
1776년 4월 16일 ~ 1800년 8월 6일 | |||
조선 왕대비 | |||
1800년 8월 6일 ~ 1821년 3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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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청원부원군 김시묵 (淸原府院君 金時默, 1722 ~ 1772) 모친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 (唐城府夫人 南陽 洪氏, ? ~ 1791) | ||
형제자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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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정조 선황제 | ||
자녀 | |||
봉작 | 왕세손빈(王世孫嬪) → 왕비(王妃) → 왕대비(王大妃) | ||
전호 | 효희전(孝禧殿) | ||
존호 | 장휘(莊徽) | ||
휘호 | 예경자수(睿敬慈粹) | ||
시호 | 조선: 효의왕후(孝懿王后) 대한제국: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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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왕비.조선의 역대 왕비 중 유일하게 세손빈으로 입궁해서 중전이 된 왕비이다.
2. 생애
2.1. 출생
1753년(영조 29년, 계유년) 음력 12월 13일, 가회방 사저에서 김시묵과 남양 홍씨의 딸로 태어났다.2.2. 세손빈 간택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는 윤득양의 딸을, 사도세자는 김시묵의 딸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최종적으로는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를 세손빈으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정조의 배필이 된 것은 명성왕후 김씨의 친척이기 때문이다.[1] 한중록에서는 김시묵의 딸을 들이길 바란 사도세자가 동생 화완옹주에게 시묵의 딸이 간택 안 되면 알아서 하라고정작 그 며느리가 시집오던 날 영조는 세자에게 재수 없으니 결혼식에 나타나지도 말라는 통보를
세자가 분명
명성왕후가 현종의 하나뿐인 적장자인 숙종을 낳았듯이, 영조는 할머니 명성왕후의 친척인 효의왕후도 정조의 아내로서 후손을 낳아주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2.3. 세손빈 책봉
10세인 1762년(영조 38년)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어, 2월 2일 1살 연상의 왕세손 이산과 가례(嘉禮)를 치렀다.2.4. 임오화변
그러나 혼인한 지 4개월 만인 윤5월 21일,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임오화변인 윤5월, 영조가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에게 제각기 친정으로 가라고 명하였으나, 효의왕후는 자신의 친정으로 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영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착하게 여기어 혜경궁 홍씨의 친정으로 같이 가라고 허락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때 효의왕후가 어린 아이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차분하게 조신과 처사를 올바르게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영조의 환심을 산 것이다.1766년(영조 42년) 8월 3일, 초9일에 왕세손빈(당시 14세)의 관례를 거행하라는 영조의 명이 있었다.
2.5. 왕비 시절
1776년 남편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왕세손빈에서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자신의 도리를 잘 해내 칭송을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후사를 낳지 못해서[2] 정조가 문효세자와 순조를 효의왕후에게 입적했다.2.6. 대비 시절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순조의 배려를 받으며 지내다 1821년(순조 21년) 3월 9일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했다. 향년 67세. 1821년(순조 21년) 3월 17일, 빈청에서 시호를 효의(孝懿)로 휘호를 예경자수(睿敬慈粹), 전호를 효희(孝禧), 능호를 정릉(靜陵)으로 정했다. 이후 건릉(健陵)에 합장되어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하고 있다. 1899년(고종 36년) 12월 17일,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정조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면서 같은 날 효의왕후 역시 선황후(宣皇后)로 추존했다."효의왕후는 중궁(中宮)의 자리에 24년을 계시고 동조(東朝)의 자리에 21년 동안 계시었으나 내전(內殿)의 말이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효의왕후의 행장)
(효의왕후의 행장)
3. 정조와의 관계
1761년 겨울에 세손빈 간택을 하니...(중략)...세손빈(효의왕후)이 재간택 후에 즉시 천연두를 앓으시고, 뒤이어 세손(정조)이 앓으시니라. 증세가 극히 순하긴 하나, 삼간택이 가까운데 세손 부부가 연하여 큰 병환을 지내시니...(중략)... 세손의 천연두는 1761년 11월 그믐에 시작하여 12월 10일 즈음 나으니, 이 일이 보통 집이라도 기쁘리니 이는 나라의 경사가 아니냐...(중략)...하늘과 조상이 몰래 도우셔 세손과 세손빈이 차례로 천연두를 보내니, 또한 드문 일이오, 나라에 전에 없던 경사라. 12월에 삼간택을 하고 1762년 2월 초2일에 가례를 행하니, 막대한 경사 가운데 일마나 조심하고 마음 쓰던 일이야 어찌 다 기록하리오낮으로 빌고 비시니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궁궐에 들어와 세손을 뵐 때면 "그리 마소서" 간절히 간언하시고, 다른 형제들도 근심과 탄식이 측량할 수 없더라.
- 《한중록 '정조의 결혼'》
우선 둘의 결혼 시기에 대해 대개 효의왕후가 천연두를 앓아 가례가 일년이나 미뤄졌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다. 정조와 효의왕후가 재간택 후 11월에 둘 다 천연두를 극히 순하게 앓았고 (치사율이 굉장히 높은 병이라) 주변의 걱정 중에 다행히 빨리 쾌차하여 12월에 최종 삼간택하고 이듬해 2월에 가례를 올렸다. 만약 둘 중에 하나라도 삼간택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면 양가의 가례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중록 '정조의 결혼'》
세손이 본디 성품이 담담하여 빈궁과 금실이 친밀치 못하신데다가, 정처가 손에 화와 복을 쥐고 앉아 죽음을 마다않고 세손의 부부 사이를 말리니, 설사 화락하고자 하신들 어찌 감히 하실 수 있으리오. 이리 하여서는 후사를 볼 가망이 없으니, 아버지께서는 세손 부부가 금실이 좋아져 쉬 원자 생산하시기를 밤낮으로 빌고 비시니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궁궐에 들어와 세손을 뵐 때면 "그리 마소서" 간절히 간언하시고, 다른 형제들도 근심과 탄식이 측량할 수 없더라.
정처는 두 분 사이를 그토록 금하면서도 행여 빈궁이 아들을 낳으실까 겁을 냈고, 귀주네(화완옹주)는 또 밖으로 말을 지어놓기를 "세손께서 아들 못 낳을 병환이 계시다" 하여 더욱 인심을 요란케 하니, 그 심술은 이제 생각해도 흉악하도다.
- 《한중록》
왕세손 시절 상기 등의 이유로 지밀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중록에 따르면 저 상황에서는 그 어떤 부부라도 지밀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화완옹주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사도세자의 동복여동생이자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는 조카 정조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여 정조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당시 세손빈이었던 효의왕후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고 정조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했다고 한다.정처는 두 분 사이를 그토록 금하면서도 행여 빈궁이 아들을 낳으실까 겁을 냈고, 귀주네(화완옹주)는 또 밖으로 말을 지어놓기를 "세손께서 아들 못 낳을 병환이 계시다" 하여 더욱 인심을 요란케 하니, 그 심술은 이제 생각해도 흉악하도다.
- 《한중록》
... (정조 왕위 재임 이후 시기를 거친 후) 중전과 관계를 회복하시어 부부 화락하시며....
— 《한중록》 '정조의 효우' 편
이후 (세손 시절부터 본인들과 부부관계를 위협하던 주변 요소들이 사라지면서) 부부관계가 점차적으로 회복된 것을 알 수 있다.— 《한중록》 '정조의 효우' 편
대신(臺臣) 박재원(朴在源)이 양의(良醫)를 구하여 중전의 병환을 치료하고자 하자 홍국영이 크게 노하여 공석(公席)에서 박재원을 욕하였다. 홍빈의 세력이 이와 같이 심하게 펼쳐졌으나 효의 왕후가 못 들은 체하고 여유 있게 대처해 나가므로, 정조는 효의 왕후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었다. 그 후 홍국영이 패하자 특별히 박재원에게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절을 포상하였다.
(효의왕후 행장)
정조와의 관계는 세손 당시 주변 권력의 역학관계 등의 배경을 보더라도 지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관계였으나, 이후 왕과 왕비를 세손 시절부터 방해하고 위협했던 정적들을 제거하는 정조 초기를 거치면서 (홍국영 등의 모함을 받을 때) 왕비의 의연함을 시작으로 서로 신뢰하고 지키며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 실록, 효의왕후 행장, 효의왕후 천릉지문, 효의 왕후 시책문 참고.)(효의왕후 행장)
"효의왕후가 어떤 징후가 있어 아이를 가진 것 같자 정조가 매우 기뻐서 서둘러 산실(産室)을 마련하였으나, 1년이 지나자 결국 혈육을 두지 못하였다. 그후 경술년에 경사가 있자 정조께서 그날 교지를 내려 ‘수빈(綏嬪)이 낳은 아들을 중전의 아들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원자(元子)의 호(號)를 올리어 큰 윤기가 정하여졌으니, 돌보는 은정과 옳은 방도를 가르친 훈계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고, 우리 전하도 지극한 사랑을 기울이셨으므로 자애와 효성이 모두 그 도(道)를 얻어 궁중에 화기가 넘쳐 10년 동안 경사가 연달았다.
(효의왕후 행장, 여기서 '우리 전하'는 순조)
정조 10년 문효세자, 의빈 성씨 사망 후,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로 정조 11년 수빈 박씨가 후궁으로 들어오고 그해 왕비의 산실청을 설치한 것을 보면 정조가 회임하지 못하는 30대 중후반인 왕비의 처소를 꾸준히 찾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왕비의 임신에 정조가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에 상상임신이었음을 알고 산실청은 정조 12년에 철수된다. 당시 궁내 분위기 또한 이후로 달리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가짜 소동은 아니었고 그만큼 후손을 절실히 원했던 것을 알 수있다. 그리고 정조 13년 수빈 박씨의 아들을 중전의 아들로 입적한다.(효의왕후 행장, 여기서 '우리 전하'는 순조)
임신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존호(尊號)를 올리자고 청하니, 효의 왕후가 굳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않은 것은 지극한 애통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미망인이 혼자 존호를 받는다면 선왕의 의리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감복하여 다시 청하지 않았다. ( 효의왕후 행장)
효의왕후는 정조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4. 평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정치적 부분이 있으나 대체로), 시아버지(사도세자가 무척 아낀 며느리로 한중록에 자주 등장), 시어머니, 시누이, 궁관 등 주변인들의 기록이 거의 대부분 좋은 보기 드문 왕비로, 효를 정치에까지 이용한 정조와의 사이는 왕과 왕비의 지엄한 자리로서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사이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친 아들 입장일 수 밖에 없는)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기록이 가장 눈여겨 볼 만 하다. 한중록을 비롯한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기타 기록들에서는 효의왕후를 호의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전부다. 효의왕후는 경신년(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했다고 전해진다.[4]조선시대 왕비의 가장 큰 책무는 내명부 수장으로서 임무를 다 하고 왕자를 생산하는 것, 만약 생산치 못한다면 후궁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길러야 한다는 덕목이었다. 남편 정조와의 관계에서 자식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와 관련해서 궁내에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후궁(수빈)의 자식(순조)을 친자식 못지 않게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순조가 효의왕후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정조가 매우 흡족해 했다는 기록(순조실록 부록편 '명경왕비가 내린 행록')이 있다.
한마디로 정조와의 관계는 초반에는 정치적 지형 등으로 인해 가깝지 못했으나 점차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서로 신뢰하며 존중하는 사이, 남녀관계나 부부보다는 일종의 동맹 관계로 볼 수 있다.
약방 문안 인사 문제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산실청 철수 후 다시 원래대로 복구한 것이다. (위키 효의왕후 참고.)
5. 후궁들과의 관계
정조의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는 삼간택을 거쳐 입궁한 후 빈호와 궁호를 받았다.[5] 그 이유인즉슨 다른 왕들이야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거나 궁녀에게 승은을 내려 후사를 이었지만, 정조는 왕비 효의왕후에게서 자식이 없는데다 궁녀들을 가까이 하는 왕도 아니었기 때문. 이 때문에 정조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이 다 되어 가도록 자식이 없었고, 할머니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명문가 규수 중에서 후궁을 간택하게 된 것.첫 번째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와의 사이는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애초에 좋을 수가 없었다.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은 고작 13세 정도의 어린 아이였고, 삼간택에 응해 있을 당시 박재원이 이에 반발하여 효의왕후의 난임을 치료하자고 건의하니 홍국영은 공석에서 박재원에게 욕을 한 일이 있었고, 이 일 때문에 효의왕후가 원빈 홍씨를 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다는 기록이 실록에 많다. 엄연히 정궁인 왕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궁하여 '으뜸 원' 자를 빈호로 받았다. 원빈을 맞아들이는 예도 명나라 황귀비의 예에 준하는 성대한 예식이었다고 한다.
홍국영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는 원빈 홍씨의 입궐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빈이 입궐하여 효의왕후를 만나려 하자, 효의왕후는 유월의 더위를 핑계로 회피한다. 대비 정순왕후는 효의왕후에 대한 원빈 홍씨의 인사가 늦어지자 입궐한 돈녕부인(홍낙춘의 처)을 설득한다. 왕(정조)은 첩을 들이는 심정과 같고, 효의왕후는 역시 인사 받기를 미루다가 마지못해 납폐례를 받고, 대비전과 혜경궁에게 예를 드린 후 입궐 의식이 끝난다. 혜경궁은 며느리 효의왕후의 편인 듯한 인상을 준다.# 어쩐지 남편과 시어머니의 묵인으로 왕비가 신입 후궁을 길들이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원빈 홍씨가 입궁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자 2번째로 간택한 간택 후궁 화빈 윤씨와의 사이는 기록된 바 없지만, 이재난고의 내용을 보아 자신을 심하게 질투하는 후궁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정조의 세번째 후궁이자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승은후궁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고 한다.[6] 효의왕후와 의빈 성씨는 1753년(계유년) 동갑내기인데다, 입궁 시기도 10살 때인 1762년(임오년)으로 같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처음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가 아직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7] 또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앞으로는 효의왕후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어제의빈묘표에 따르면 의빈이 죽은 날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인 수빈 박씨 역시 효의왕후 등 윗전을 공경하였다고 한다.
1821년 심한 복통으로 전혀 식사를 못하고 심하게 앓다가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아마 맹장염으로 추정된다.
효의왕후, 화빈 윤씨, 수빈 박씨 이 세 여인은 정조 사후에도 약 20년을 더 살았고, 약 60세 정도에 1년 ~ 2년 간격으로 효의왕후, 수빈, 화빈 순으로 졸하였다.
6. 여담
- 1775년(영조 51년), 정후겸, 홍인한, 화완옹주는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극렬히 반대했다. 1776년(영조 52년) 2월 28일 왕세손(정조)은 왕세손빈(효의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시묵에 대해, "김시묵은 반드시 화완에게 청하여 홍인한을 정승이 되게 하려고 하였고, 홍인한은 또 정후겸에게 비밀히 부탁하여 김시묵을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게 하려고 하였다. 김시묵이 또 일찍이 나에게, 홍인한이 그 형보다 나으니 정승을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 1792년(정조16년) 2월 17일, 정조는 승지를 보내어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1792년(정조 16년) 9월 11일, 정조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제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청원부원군 및 의춘 부부인과 당성부부인은 바로 내전(內殿)의 고비(考妣)이다. 봉역(封域)이 눈에 들어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 내일 치제하게 하고, 제문은 지제교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 1793년(정조 17년) 12월 27일, 정조는 예관을 보내서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사당에 내일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제22권에 당성부부인 치제문이 있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대왕 천릉 지문이나 효의왕후의 행장에도 효의왕후의 상상임신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87년, 중년에 효의왕후가 갑자기 임신한 것 같자 정조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산실청을 설치하였으나 1년이 지나도록 혈육을 두지 못하였다.
-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가 완성된 다음 날 효의왕후가 묘에 임하고 환궁했다. 1789년(정조 13년) 4월 26일, "진시(辰時)에 내전(內殿)이 묘에 임하였다. 예를 마치고 환궁(還宮)하였다."
- 천성이 덕스럽고 인자했으며 검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적에는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는 것을 말릴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전해진다. 효심도 깊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시누이인 청연군주, 청선군주[8]와도 우애가 대단했다. 심지어 남편의 후궁이자 세자까지 낳은 의빈 성씨와도 친자매럼 잘 지내다 의빈 성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극히 슬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조카 집착증이 있던 시고모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이간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9] 꿋꿋이 버텼으며 화완옹주에게 예를 갖췄다고 한다. 사실 품계로만 따지자면 왕세손빈 시절부터 이미 옹주보다 높았음에도[10] 남편의 고모를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혜경궁 홍씨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약 시중과 반찬의 맛 보는 일을 했다고 한다. 검소하고 공과 사의 구별이 분명하여 수진궁과 어의궁에서 남은 음식이 있더라도 "궁중의 재물은 공물이니 사가의 어버이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다. 효의왕후는 성품으로 트집잡힐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 시대 이상적인 여성상에 맞추어 보통은 남편 정조를 조용히 내조하였으나 정치적으로 나선 일이 1번 있었는데 정조가 총애한 신하인 홍국영과 대립한 일이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바로 원빈 홍씨였다. 홍국영은 여동생이 왕자를 낳아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11] 그녀가 얼마 못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효의왕후를 모함했고 함부로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국왕의 허가 없이 중궁전의 궁녀를 문초하는 사실상 하극상을 저지른 것. 이에 정조가 효의왕후의 편을 들어주면서 정조가 총애하던 당대 실권자 홍국영은 그렇게 정계를 은퇴하고 만다.
- 임신하여 1787년(정조 11년) 9월 18일 산실청을 설치했다.# 정조는 6년 전에 후궁 화빈 윤씨가 임신하자마자 미리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30여 개월을 출산에 이르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해산 달에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고 결국 1788년(정조 12년) 12월 30일 산실청을 철수했다.# 산실청이 1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어디에도 출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임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상임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효의왕후의 상상임신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정조대왕 천릉 지문이나 효의왕후의 행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결국 화빈 윤씨처럼 효의왕후도 상상임신이었는데 화빈 윤씨와 다른 점은 화빈 윤씨의 경우는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데 반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임신이었고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 엄연히 법적 아들인 순조가 21년동안 재위할때까지 왕대비로서도 꽤 오래 있었지만 정작 대중적으로 왕대비로서의 존재감이 적고, 순조 시대 사극에서도 순조 재위 5년만에 승하한 정순왕후와 달리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파란만장한 정조의 인생과 달리 순조는 드라마, 영화에 잘 나오지않기때문에 순조가 등장하지않으니 자연히 왕대비인 효의왕후까지 등장할 일이 없기때문이다.
7. 가계
7.1. 본가 (청풍 김씨)
- 아버지 : 청원부원군 김시묵(1722년 ~ 1772년 7월 29일)
- 어머니 : 증 의춘부부인 의령 남씨 - 감역(종9품)을 지낸 남직관의 딸.
- 이복 오빠 : 김기대
- 조카 : 김종선
- 친어머니 :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 ~ 1791년) - 증 찬성(종1품)에 증직된 홍상언의 딸.
- 친오빠 : 김기종
7.2. 왕가 (전주 이씨)
- 남편 : 정조(1752년 ~ 1800년)
- 자녀 없음
- 위에서도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정조는 현종의 현손인데 현종의 왕비가 다름아닌 효의왕후와 같은 집안인 청풍 김씨의 명성왕후이다.
현종의 장인이자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인 김우명에게는 7남 2녀가 있었는데, 이중 장남인 김만주(명성왕후 김씨의 오빠이자 현종의 처남, 숙종의 외삼촌)의 증손녀가 효의왕후 김씨이므로 정조와 효의왕후는 촌수로 따지면 9촌, 삼종간이다.
8. 대중매체에서
정조의 정실부인이므로, 영조, 정조 시대를 다룬 사극에 비중이 작더라도 자주 나온다.- 2007년 ~ 2008년 MBC 드라마 《이산》[14] - 박은혜
극중에서 효의왕후는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입고 문효세자를 낳았는데 전혀 시샘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극 후반에 의빈이 중병에 걸려 죽어갈 때 쾌유를 기원하는 불공을 직접 올릴 정도였다.[15] 이 밖에도 늘 정조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걱정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임으로 고통받는 모습도 간간이 나왔으며 홍국영, 원빈 홍씨와 대립하는 부분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은혜가 이병훈 PD와 2번째로 만난 작품이다. 극 중 효의왕후는 사서에 묘사된 대로 어질고 현명하며 인내심 강한 여성상으로 그려졌으며, 박은혜는 이를 잘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다. 주로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견미리)와 함께 나오는 장면이 많았다.[16]
- 대체역사소설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에서도 등장한다. 다만 이름은 김설애로 나오는데 이는 창작으로 효의왕후 김씨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아 작가인 코락스가 당대 조선후기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던 이름인 설애를 가져왔다고 한다. 주인공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1] 명성왕후는 김육의 차남인 김우명의 딸, 효의왕후는 김우명의 5대손이고 그의 아버지인 청원부원군 김시묵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제사를 받드는 종가집의 맏아들로 입양된다.[2] 왕세손빈 시절부터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 1787년에 상상임신을 해서 산실청까지 세워진 적도 있다 하니, 불임으로 인한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3] 여담으로 이때 아들이 누구인지 확인이 필요하나, 만약 은언군의 장남 이담이라면 이후 이담이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의 사후 양자가 되기에 묘하긴 하다.[4] 순조실록 순조 21년 8월 7일 갑신 3번째기사 효의왕후 행장, 至六月, 正宗賓天, 后哭擗踰禮, 夙夜不解衣, 以終三年。[5] 임신했을 때도 후궁이 임신했을 때 설치하는 관청인 호산청이 아니라, 왕비나 왕세자빈이 임신했을 때 설치하는 관청인 산실청이 설치된다.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나 헌종의 후궁인 숙의 김씨가 옹주를 낳은 뒤에도 후궁 첩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첩지를 받은 것과 비교해보면, 다른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6] 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표과 어제의빈묘지명에 의하면, 의빈 성씨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한 효의왕후를 많이 배려해 준 것으로 인해 사이가 각별해진 것으로 보인다.[7]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 정조 어제의빈묘지명[8] 왕세자의 적녀를 군주, 서녀를 현주라고 한다. 아버지인 왕세자가 즉위하면 공주 / 옹주로 승격된다.[9] 이 때문에 정조와 한동안 서먹한 관계를 보내기도 했다.[10] 옹주는 외명부의 무품계이고 왕세손빈은 내명부의 무품계이다. 내명부가 외명부보다 위에 있으니 왕세자빈과 왕세손빈이 옹주보다 존귀한 신분이다.[11] 홍국영은 정조랑 친하게 지내며 당시 정조랑 효의왕후 사이가 그닥 좋지 않다는걸 알고 있었을테니 이를 이용해 원빈 홍씨를 잘만하면 중전급으로 올릴 수 있겠다는('으뜸 원'부터가 후궁이 쓸 칭호가 아니다) 생각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12] 드라마 《이산》에서는 의빈 성씨의 상궁으로 등장.[13] 드라마 《홍국영》에서는 원빈 홍씨로 등장.[14]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는 한지민이 연기했는데, 극중에서 성송연이라는 이름으로 정조의 첫사랑으로 나왔다.[15] 본문 내용에도 나와있지만 실제로 효의왕후는 의빈 성씨와 사이가 좋았다.[16] 혜경궁 홍씨가 뭐라 뭐라 대사를 하면 효의왕후가 놀라 '어마마마'하는 식이여서 박은혜는 이산 스폐셜에서 '전하'와 더불어 '어마마마'가 가장 자신있는 대사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