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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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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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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 純元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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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 · 철종조 대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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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 전경
출생 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
조선 한성부 양생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북창동 일대)
사망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
(향년 69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양심합 별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문릉(文陵) → 인릉(仁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802년 11월 8일 ~ 1834년 12월 15일
조선 왕대비
1834년 12월 18일 ~ 1834년 12월 19일[1]
조선 대왕대비
1834년 12월 19일 ~ 1857년 9월 21일
조선 대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1차)
1834년 12월 18일 ~ 1841년 1월 17일 (헌종 때)
조선 대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2차)
1849년 7월 28일 ~ 1852년 1월 18일 (철종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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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신 안동 김씨[2]
부모 부친 영안부원군 김조순
(永安府院君 金祖淳, 1765 ~ 1832)
모친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
(靑陽府夫人 靑松 沈氏, 1766 ~ 1828)
형제자매
3남 4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큰오빠 - 김유근(金逌根, 1785 ~ 1840)
작은오빠 - 김원근(金元根, 1786 ~ 1832)
남동생 - 김좌근(金左根, 1797 ~ 1869)
여동생 - 남구순(南久淳)의 처
여동생 - 이겸재(李謙在)의 처
여동생 - 이긍우(李肯愚)의 처
배우자 순조 숙황제
자녀 1남 3녀 (2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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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 ~ 1830)[3]
장녀 -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 ~ 1832)
차녀 -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 ~ 1832)
차남 - 대군(1820 ~ 1820)
3녀 -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 ~ 1844)
전호 효정전(孝定殿)
존호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
(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
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
(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
휘호 예성홍정(睿成弘定)
시호 조선: 순원왕후(純元王后)
대한제국: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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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순조의 즉위2.2. 정순왕후 김씨의 섭정2.3. 순조의 친정2.4. 2번의 수렴청정
3. 평가4. 여담5. 가계도
5.1. 친정(안동 김씨)5.2. 왕가(시댁)(전주 이씨)
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이렇게 망극(亡極)한 일을 당한 속에서도 5백 년 종사(宗社)를 부탁할 사람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소. 주상영종대왕(英宗大王)의 혈손(血孫)으로서 지난날 어려움도 많았고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왔으나, 옛날의 제왕(帝王) 중에도 민간에서 생장(生莊)한 이가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아서 정사(政事)를 하면서 매양 애민(愛民)을 위주로 하여 끝내는 명주(明主)가 되었으니, 지금 주상도 백성들의 일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는 절검(節儉)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비록 한 낱의 밥알이나 한 자의 베(布)도 모두가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인 만큼, 만일 절검치 않는다면 그 피해는 즉각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백성들이 살 수 없으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일념(一念)으로 가다듬어 '애민(愛民)' 두 글자를 잊지 마오.

지난날의 공부가 어떠한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옛일에 어둡고 옛일에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슬프고 경황없는 중일지라도 수시로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성현의 심법(心法)과 제왕의 치모(治謨)를 점차 익힌 연후에라야 처사(處事)가 올바르게 되는 것이오. 위로 종사(宗社)의 막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곤고(困苦)를 보살펴 공경하고 조심하며, 검소하고 근간하여 만백성이 바라고 우러르는 뜻에 부응(副應)토록 하오. 임금이 비록 극히 존귀(尊貴)하다고는 하지만 본래부터 조정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법은 없으니, 대신들을 예(禮)로써 대하고 대신들이 아뢰는 데에는 옳지 않은 말이 없을 터이니, 정성(精誠)을 기울여 잘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오.
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 즉위년(1849) 6월 9일자 3번째 기사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정비로, 김조순과 심건지의 맏딸인 청송 심씨의 딸이다. 고종황제 때 황후로 추존되어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라는 시호를 받아 대한제국 추존황후로서 종묘에 올라갔다.

워낙 아버지 김조순이 순조 대의 권신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순원왕후 자신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비로 자그마치 32년간이나 있었거니와[4] 조선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상 헌종, 철종기 20여 년은 순원왕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정희왕후가 2번 수렴청정을 하긴 했는데 예종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수렴청정을 거뒀으므로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이 시기를 순원왕후 독재 시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2. 생애

2.1. 순조의 즉위

정조는 재위 후기로 갈수록 건강이 나빠진 탓에 왕위에 오래 있을 수 없음과 자신이 25년간 구상해온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정조 시기의 정치는 정조 1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체제였고, 정조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고작 11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세자(순조)가 정국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지는 불투명했다. 게다가 사도세자 추숭(追崇) 문제와 관련하여 노론 벽파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벽파는 버젓이 건재하였다.

그리하여 정조세자에게 후견인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해 온 세도정치에 손을 대게 되었다. 시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노론 명가 안동 김씨 가문에게 손을 내밀어 사돈을 맺고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 자신의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는지 세자빈 간택도 전통대로 삼간택이 아닌 민가처럼 중매로 하는 게 어떻냐고 신하들에게 말을 흘릴 정도였다. 물론 신하들은 반대했다. 나중에야 삼간택이 열렸지만 정황이 이랬으니 정조가 죽은 뒤에도 정순왕후나 신하들도 대놓고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정조 24년(1800) 2월 26일간택되었고 같은 해 윤 4월 9일 재간택되어 순조의 정비로 내정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순조김조순의 집에 갔다가, 1살 연상인 순원왕후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서 '김조순의 딸이 아니면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정조에게 조르자, 정조가 그걸 받아들였다고도 한다.

2.2. 정순왕후 김씨의 섭정

그러나 정조순조와 순원왕후가 혼인 전 6월 28일에 승하했다.
순조 1년 권유가 확정되지 않은 순원왕후와 순조의 혼인에 대해 상소를 올렸지만, 선왕 정조가 확정한 결혼을 적극적으로 비난할 수 없었다. 당시 정순왕후는 김조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대혼(大婚, 왕실의 혼례)이 완전히 결정되었으니 종사(宗社)의 억만년 경사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오. 경사스럽고 다행스럽소. 경신년 재간택 때 선왕이 기뻐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니 감회를 진정시킬 수 없소."

김조순을 사실상 국구(國舅)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30대 중반인 김조순이 장용영 대장,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벽파는 반대 의견을 표현할 수 없었다. 결국 1802년 10월 순원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었다.
자세한 정황은 정조, 정순왕후, 김조순 항목 참조.

생 시조모가 되는 혜경궁 홍씨와 관련된 폐백례 논란은 왕실 서열상 혜경궁이 공식적인 신분은 왕세자빈이기 때문에 받지 않는것이 정답이다. 이에 대해 정순왕후 김씨가 훼방을 놓았다는 것은 오해이다.
[5]

2.3. 순조의 친정

그런데 일이 다 끝난 이후 정순왕후가 순조 3년 12월에 수렴을 거두자 바로 문제가 터졌다.
권유가 순조 재위 1년에 순원왕후와 순조의 국혼에 반대 의견을 상소한 게 쟁점화되어, 대간들이 권유를 탄핵하고 국문이 열리게 됐다.
권유는 역적 토벌에 대한 소를 올리면서 말미에 곡돌사신이란 용어를 인용하며 "안동 김씨 가문은 자신이 역적인 줄도 모르는 자들"이라면서 극딜을 했는데, 대혼이 확정되고 정순왕후가 물러난 이후 제대로 한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에는 심환지가 '안동 김씨가 충성스러운 명문가인 걸 누가 모르나요? 저놈이 무식해서 믿을 줄 몰라서 그런가 봄.'이라고 대충 넘어갔으나 이미 그의 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

심환지도 죽고 정순왕후도 물러나자 시파는 권유를 타겟으로 삼았다.
권유는 국문을 받고 상소를 올리기 전에 좋아한 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고변하게 되고 그 발언도 소상히 실토하게 된다. 시파는 "대혼을 저지하여 선왕의 뜻을 거스른 역적을 처벌하라"면서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불쾌해진 정순왕후는 수렴을 거둔지 6개월만에 다시 수렴을 치고 해명에 나서려 했으나, 이시수에게 유교 법도상 제지당해 도리어 사과하고 물러나야 했으며, 삼간택과 가례 택일에 관련하여 자신에 관한 의혹을 해명하는 글을 내려 "내가 대혼을 저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대혼 저지 기도를 막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몇달 후 죽었다.
그렇게 순원왕후의 지위는 매우 굳건해졌다. 순조가 병이 들자 효명세자와 정사를 논의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2.4. 2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가 다시 역사에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은 1834년 11월 순조가 죽고 고작 8살인 세손 헌종이 즉위해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였다. 세손의 친모인 신정왕후 조씨도 있었지만 왕실의 큰어른이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이고 신정왕후는 이 당시엔 명목상 왕비가 아닌 '세자빈'이었으므로 당연히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맡았다. 순원왕후는 친정 안동 김씨 가문의 오라비들을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정국 운영에 나섰다.

헌종이 이후 친정을 할 때 친위군을 강화하고 안동 김씨를 내치자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며 헌종과 갈등 관계가 심했다. 순원왕후 언문 어찰에서는 그가 헌종이 죽기 며칠 전엔 손자를 폐위하기를(!) 바랐고, 그가 죽자 '거리 낄 것이 없어서 속 시원하다'(!!)고 여겼다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 실록에서만 해도 죽은 헌종에 대해 '남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처음엔 헌종을 아꼈지만, 이후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어린 손자로밖에 생각하지 못한 모양. 이 정도면 정조정순왕후보다도 더 심한 정도인데, 헌종 독살설이 불거지는 이유이다.[6]

그러나 같은 어찰에서 안동 김씨 김흥근이 유배당했을 때, 순원왕후가 감싸주지 않았다며 그녀를 질타하는 여론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성록에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순원왕후는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뜻을 표명한다. 또한 철종의 왕비를 선택할 때도 안동 김씨에서는 단자를 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는데, 이는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 일원이기 전에 왕실의 큰어른으로 선은 지켰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위인 부마에게 "변은 잘 누었냐?"며 확인을 할 정도로 언문 편지에 기탄없이 (왕을 비롯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언급했고, 손자 헌종이 죽은 후에도 "성군이 되실 자격이 충분했는데", "이처럼 일찍 사망하니 그림으로 그린 떡과 같이 아깝고 원통하며 불쌍하다."고 애통해하고 있다. 손자의 파격적인 행보에 보수적으로 반응했을지언정, 순원왕후 본인이 안동 김씨 수장으로 독살을 주도했으리라 보는 것이 옳을까 의문. 안동 김씨를 '우리 가문', 왕가를 '내 가문'으로 표현한 것이 순원왕후 어찰의 특징이다. 자세한 내용은 헌종 항목 참조.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헌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그녀는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순조의 아들, 즉 양자로 삼았다. 그녀는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고, 수렴청정을 끝내고 몆년뒤인 1857년 68세 나이에 담체(현대의 심근경색질환)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왕통을 이을 때 며느리인 신정왕후 조씨와의 암투에서 이겨서 일부러 일자무식 농민인 이원범을 지목해서 친정인 안동 김씨 가문의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하려 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오해이다. 철종은 헌종과 가장 가까운 친척 세 사람 중 하나였다. 게다가 조선 시대의 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상대로 뭘 어쩌려 했다는 것부터가 허무맹랑한 일이다.

3. 평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확립시킨 장본인이지만, 본인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민생을 걱정하며 친정의 지나친 권세를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상, 친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 수렴청정이라는 자체가 여성은 발을 드리워 모습도 제대로 드러내지 않도록 하는 게 유교가 생각한 여성의 정치참여형태이다. 신하들의 주청에 가부를 결정하는 정도가 당대 사대부들이 생각한 바람직한 수렴청정의 방향이었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간 문정왕후같은 악평과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그런 강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대의 정권을 사실상 장악한 세도 정치의 주역이 바로 그녀의 친정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될 수 없었다. 예컨대 철종의 왕비를 간택할 때도 그녀는 친정에 '노론소론을 가리지 말고 간택을 하면 어떨까' 하고 편지를 보냈고 "우리 가문에서 이번엔 왕비를 내지 말자"는 의견을 냈지만 김좌근에게 의견을 굽혀야 했고 결국 왕비로 간택된 것은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였다.

지속적으로 탐관오리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염려하고 지속적으로 '너희들 부패하면 안 된다. 내가 다 보고 있다!'라고 경고하면서 나라의 기강을 잡으려고 노력은 열심히 했는데 효과는 미미했고 '이상하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효과가 없지?' 하고 어리둥절하거나 '내가 그렇게 탐관오리 잡으랬는데 수렴을 3년이나 해도 수령이나 감사를 논핵했다는 소리가 왜 없냐?' 라고 문제 삼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 탐관오리들이 누구에게 줄을 대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쓴웃음밖에 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여러 차례 민생을 걱정하는 표현을 하고 있으나 실제 행동은 이와 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조 치세와 헌종 치세는 자연재해와 기상이변으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였으며 각지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아사자가 속출하고 폭동이 끊이질 않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순조효명세자 통치 기간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왕실의 수입과 지출은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이 깨알 같이. 챙겼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공주에게 법으로 허락된 궁방전의 상한선이 250결인데 순조와 순원왕후의 강변으로 결국 850결이라는 어마어마한 궁방전을 하사하고 모든 왕실의 지출을 이와 같이 했다. 이는 순조의 어명일 뿐, 순원왕후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나 순조 승하 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이와 같은 지출은 더욱 극심했으며 순원왕후가 직접 호조에 명하여 20만량을 추가로 가져가 왕실의 의례와 잔치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왕실의 사치는 당대에도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고 한다. 이를 볼때 순원왕후는 기본적으로 명분은 민생을 위한다고 하되 실제 행동과 정책 의지는 이에 미치지 못했단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모로 한 나라의 (임시이긴 해도) 국가 원수로서의 명분상이든 실제로든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여인이었으나 일가 친척들의 싸바싸바에 넘어가는 모습 등을 보면 너무 순진했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서 조선을 그르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친정 가문을 위해서라면 친손자이자 임금인 헌종까지도 경계했던 모습은 왕가의 웃어른이기도 한 사람에겐 아쉬운 모습이었다.

4. 여담

한글 서예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연구 자료를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바로 친정과 교류할 때 부쳤던 서간 때문으로, 본래 태워지거나 궁중으로 돌려보내져야 하는 서간들이 사가에 보전되어 있다가 발굴된 케이스. 궁체 흘림, 진흘림을 뛰어나게 구사하여 미적으로도 유려하다는 평을 많이 받고 있다. 현재는 원본 복사 출판되어 한글 서예 교본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남편은 순조(純祖)고 아내는 순원왕후(純元王后)로 발음도 비슷하고 한자도 똑같다.[7]

5. 가계도

5.1. 친정(안동 김씨)

5.2. 왕가(시댁)(전주 이씨)


순조와 순원왕후는 서로 8촌간이다. 순원왕후의 증조모인 한산이씨(김달행의 처)는 정조의 외조모인 한산부부인 이씨(혜경궁의 어머니)의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즉, 정조와 김조순은 외가로 서로 6촌간이다.

순조와 금슬이 좋았는지 순원왕후는 효명세자, 요절한 왕자 1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를 낳았다.[9] 현종 이후 왕실에 대군과 공주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10] 당시로서는 큰 경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11] 그리고 그 후로 왕의 적녀는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도 공주로 봉해지기 전에 사망해, 결국 그녀가 낳은 딸들이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되었다.

헌종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효명세자(익종, 後 문조익황제)를 추존했고, 이 때문에 순원왕후는 대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왕대비가 되었다. 참고로 정순왕후도 상황이 비슷했으나 대왕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정조가 양부 효장세자(진종, 진종 소황제)를 추존했을 때 효장세자의 아내는 고인이었기에 당시 왕궁에 있는 대비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1명뿐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궁 안에 있긴 했지만 그건 고작 정조의 친어머니로서의 예우 차원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조정에서 정순왕후를 대왕대비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정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순원왕후의 어머니 청양부부인 심씨의 오빠 심능적은 저명한 배우 심재설의 5대조이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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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대비로 있었던 기간은 음력 11월 18일에서 19일로, 상징적인 기간인 단 이틀에 불과하다.[2] 23세손 '근(根)' 항렬이다.[3] 추존 문조(文祖)・익종(翼宗).[4] 정성왕후에 이어 2위[5] 순원왕후가 폐백례 대신 혜경궁과 별도로 나누는 인사 자리를 마련할 것을 정순왕후가 제시해 생시조모와 손주며느리가 첫 인사를 나누었다[6] 순원왕후가 살아 생전에 남편 순조가 안동 김씨와 손을 잡고 경주 김씨 일가를 박살낸 과정을 두 눈으로 보았다는 점을 생각하자.[7] 심지어 한자까지 같다. 이런 케이스는 후에 추숭된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 재위가 짧았던 인종과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 손자 뻘인 철종과 철인왕후(哲仁王后) 등도 있다. 황후로는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존재. 그 가운데 유일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므로 외우기 좋은 편이다. 심지어 순원왕후는 대한제국 시대의 추숭도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받았다.[8] 법적 시어머니는 효의왕후 김씨.[9] 효명세자가 태어나기 전 1807년1808년에 회임(懷姙, 임신)을 했으나 유산했다.[10] 숙종의 첫 정비 인경왕후가 딸을 둘 낳기는 했으나 모두 공주로 봉해지기도 전에 죽었다. 고종황제의 정비 명성황후도 딸을 하나 낳았으나, 첫 돌도 되기 전에 죽었다.[11] 이 중 막내인 덕온공주를 빼면 남편인 순조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12] 효명세자의 생모라는 점은 중전 윤씨(서정연) 캐릭터, 김씨라는 점은 중전 김씨(한수연) 캐릭터가 순원왕후와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