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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8:40:07

부원군


황실왕실의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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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의 부원군
2.1. 건국 초기2.2. 종실제군2.3. 이성제군
3. 조선의 부원군
3.1. 공신3.2. 국구3.3. 기타
4. 가상인물5. 관련 문서


府院君

1. 개요

고려 왕조와 조선 왕조에서 사용한 군(君) 작호(爵號)의 일종으로, 고려 초기에 일부 왕자들이 '원군(院君)'으로 불린 것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서 오등작을 폐지하고 제후국의 격에 맞는 군작을 시행했는데, 이때 부원대군·부원군·군·원윤(元尹)·정윤(正尹)이 제정되었다. 부원군은 원래 종실만 봉해지도록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이성(異姓) 신하에게도 주어졌는데, 1362년부터 이성 신하는 정1품일 때 부원군으로 봉해질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일부 신하들이 백(伯)으로 책봉되었기에, 부원군으로 봉해진 경우는 보통 정1품 산직(散職)이 주어진 원로나 외척들에 해당되었다. 1401년에 오등작 기반 작위가 폐지되면서 기존에 백으로 책봉된 신하들 가운데 생존 중인 사람들은 대체로 부원군으로 고쳐졌는데, 이때도 정1품이 아닌 경우 일반 군으로 고쳐졌다.

일부 방계 종친과 부마는 세종 초기까지 부원군으로 승격되었는데, 종친부 관제가 마련되고 산계와 그에 따른 신분예우 원칙이 확립되면서 더이상 부원군으로 진봉(進封)하지 않게 되었다. 봉군된 관료가 치사(致仕)하면 부원군으로 봉작을 높여주면서 정1품으로 예우하던 관례도 산계를 가자(加資)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므로, 그 이후로 봉군된 신하는 정1품에 해당되어야 부원군으로 격상되었다.

물론 이성 신하가 부원군이라고 하여 특별히 정1품 종친군보다 높은 서열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었으나,[1] 세조는 이성 신하에게만 특별한 칭호가 붙는 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이후 부원군이 대외적으로 생소한 칭호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부원군 폐지를 시도했는데, 결국 1466년에 부원군 칭호를 폐지하여 군으로 통합했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1469년에 예종이 신하들의 건의로 부원군 부활을 승인했고, 이는 이듬해인 1470년부터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1485년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정1품 군(君) 가운데 친공신(親功臣)[2]인 자와 왕비의 아버지[3]는 특별히 '부원(府院)' 두 글자를 덧붙인다고 명시되었는데, 세조가 부원군을 폐지하기 전까진 친공신이 아닌 경우에도 정1품에 해당되면 부원군으로 격상된 사례가 있었으나, 성종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원군이 부활되면서 이와 같은 제한이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성종 이전의 국구(國舅) 중엔 이미 고인이라 봉군되지 않았거나 봉군되었어도 정1품에 해당되지 않아서 부원군이 아니었던 사례들이 있었으나, 모두 정1품 영돈녕부사와 함께 소급되어 추증되었다.[4]

조선에서는 외척 자격으로 얻은 작호는 세습되지 않았으며, 공신의 자손은 적장증손까지 군(君)을 승습할 수 있었으나, 공신의 자손이 선대의 작호를 승습(承襲)할 때에는 그 자신이 친공신에 해당되지는 않기에 설사 정1품 관직을 역임했다 할지라도 부원군을 그대로 승습하지는 못하고 일반 군으로 그 격이 낮춰졌다. 반면 왕비나 공신의 3대 선조가 군으로 추봉될 경우에, 특별히 일부는 정1품 관직과 함께 부원군으로 격상된 사례가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이성 신하의 봉호는 보통 본관의 지명을 사용했는데, 예를 들어 받는 사람의 본관이 남양인 경우 '남양부원군'으로 칭하는 식. 일부는 기존 본관과 다른 곳을 명목상의 봉토로 설정하여, 이를 계기로 본관이 갈라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에 쓰인 고을의 지명이나 그 옛 지명을 사용하는데, 아예 공식적으로 각 고을마다 그 별명인 '별호(別號)'를 제정하기도 했으며, 이런 이름들을 통칭하여 '읍호(邑號)'라고 한다. 지방의 명칭이 주(州)로 끝나거나 같은 본관에서 봉군된 사람이 여럿 나오면 해당 고을의 여러 읍호 중 하나를 고르거나 그 중 한 글자를 변형하여 구분했다. 예를 들어 받는 사람의 본관이 경주인 경우 경주의 별호인 오성(鰲城)[5]·오흥(鰲興) 등으로 칭하고, 안동의 경우 옛 지명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흥부원군·영안부원군·영풍부원군 등으로 칭했다.

2. 고려의 부원군

건국 초기에는 왕족의 궁호로써 정식 칭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6] 부원군이 정식 작호로 도입된 것은 봉군제 시행 이후이다.

2.1. 건국 초기

2.2. 종실제군

2.3. 이성제군

3. 조선의 부원군

친공신 및 정1품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를 '공신' 문단에 우선 기재하며, 국구로 영돈녕부사를 역임하거나 정1품으로 추증된 경우에는 '국구' 문단으로 기재함. 한명회·한확·한백륜·조문명 4명은 국구 신분이기는 하지만 국구가 되기 전에 이미 공신 조건을 만족하여 부원군이 된 사례이므로 '공신' 문단에 기재한다.

3.1. 공신

3.2. 국구

3.3. 기타

4. 가상인물

드라마 인물 연기자
황후의 품격 오금모 윤다훈
황후의 품격 변백호 김명수

5. 관련 문서


[1] 동아시아에서 종실(종친)과 이성 신하는 애초에 다른 신분으로 다루어졌는데, 일례로 고려 때 제정된 봉군제 하에서도 종2품 정윤인 종실은 정1품 정승보다도 의전상 서열이 높았다. 이렇게 종친을 실제 품계보다 높여 예우하는 원칙은 조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왕족을 특별한 신분 계층으로 높인 것은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2] 본인이 직접 공을 세워서 공신으로 책봉된 인물을 뜻한다.[3] 흔히 국구(國舅)로 불렀다. 성종 이후로 정1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는 국구가 맡게 되었으므로, 국구는 무조건 정1품인 신분이 되었다.[4] 왕비의 어머니의 경우는 외명부 정1품 부부인으로 봉했다. 대군(왕의 적자)의 부인도 부부인이라고 한다.[5] 경주 이씨인 이항복의 호로 알려진 '오성'이 바로 이것이다. 참고로 이항복의 호는 '오성'이 아니라 '백사(白沙)'이다. 이항복이 받은 작위인 '오성부원군'의 오성이다.[6] 사실 고려 초기에 원(院)은 후궁의 궁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건물에 거주하는 후궁 본관의 지명을 그대로 따와 '○○院'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궁(宮)이나 전(殿)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원군' 계통의 칭호들은 정식 칭호로 쓰였다기 보다는 궁군(宮君)·전군(殿君) 부류의 궁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광주원군의 경우 외조부인 왕규의 위상을 감안하면 태자에 책봉되었을 확률이 높으나 왕규와 함께 숙청되면서 태자 칭호가 실전된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이후에 등장하는 경춘원군·홍덕원군 등은 지명이라기보다는 건물 이름으로 보인다. 대량원군 또한 고려에서 왕족이 정식으로 봉작되는 10세 이전에 불린 칭호이기에 궁호로 보인다.[7]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으로 기록되기도 함.[8] 무릉부원군(茂陵府院君)으로 기록되기도 함.[9] 1455년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서 개봉[10]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번암집, 속잡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박영서가 이괄에게 너는 부원군으로서 부원수를 겸하였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반역할 생각을 했냐며 꾸짖었다라는 걸 보면 이괄이 부원군에 봉해진것은 확실하다. 실록의 기록에서는 이괄의 봉군명을 찾아 볼 수 없는데, 계해정사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이괄이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고 하므로 이괄의 봉군명은 철성부원군으로 추정된다. 이괄의 난으로 삭훈되었다.[A] 본관 경주.[B] 본관 광산.[C] 본관 반남. 금성은 반남이 속해있는 나주의 별칭이다.[D] 본관 능주.[E] 본관 대구. 달성은 대구의 옛 별칭이다. 오늘날 달성군에 이름의 흔적이 남아있다.[F] 본관 문화.[C] [H] 본관 곡산. 상산은 곡산의 별칭이다.[G] 본관 청주. 서평은 청주의 다른 이름로, 현재 지명 서평사거리·서평1길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I] 본관 덕수. 신풍은 덕수가 속해있는 풍덕군(현재 개풍군 남부 지역)에서 따왔다.[J] 본관 안변.[K] 본관 여산. 현재 익산시 여산면.[23] 본래 여량군(礪良君)이었으나 1456년 추탈, 1681년에 추증.[L] 본관 여흥.[L] [L] [L] [M] 본관 연안.[N] 본관 안동. '영'자는 안동의 옛 지명 영가에서 따왔다. 화산은 안동 하회마을 부근의 산이다.[O] 본관 파평. 영원은 파평의 다른 이름이다.[N] [P] 본관 풍산.[N] [A] 본관 경주. 오흥·월성은 경주의 다른 이름이다.[Q] 본관 거창.[36]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사사, 딸 단경왕후 폐출과 함께 작호를 받지 못하다가 1739년(영조 15)에 추증됨.[R] 본관 남양.[S] 본관 청송.[T] 본관 청풍.[S] [S] [T] [O] [O] [O] [U] 본관 풍양.[V] 본관 양주. 한원은 양주의 다른 이름이다.[W] 본관 함안. 현재는 파평 윤씨와 합본 되었다.[49] 1476년 숙의 윤씨가 중전으로 승격하여 함안군(咸安君) 추봉 후 영의정 추증(함안부원군)→1479년 윤씨의 폐출로 추탈→1495년 윤씨가 제헌왕후로 추존되면서 복권→1506년 추탈.[X] 본관 함종.[Y] 본관 김해. 해녕은 김해의 다른 이름이다.[52] 광해군 즉위 후 1610년 공빈 김씨가 공성왕후로 추존되어 추증→1623년 추탈.[Z] 본관 해평.[F] [55] 본명 이저(李佇). 1401년 상당군(上黨君) 개봉→1404년 삭탈(아버지 이거이와 함께 숙청)→1410년 복권(보국숭록대부 가자) 및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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